4.14 <차이와 반복>셈나 후기

세션
2022-04-1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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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차이와 반복 셈나는 그야말로 분투중입니다. 아님 저만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날 아렘샘과 여울아샘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시지 못했고 다른분들은 모두 오셔서 셈나에 참여해주셨습니다. 이날 공부한 범위는 2절의 <종적차이와 유적차이> 챕터의 복습부터 <영원회귀-존재의 일의성>전까지, 3절을 거의 마쳤습니다. 2절 5챕터는 아리스토텔레스 차이의 철학, 3절 5챕터는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2절에 비해 3절은 내용이 그다지 복잡한 편이 아니어서 이날 역시 질문은 2절의 후반부 3챕터에 집중되었습니다. 이날의 질문과 논의들 중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 간단히 정리했습니다.

  1. 우선 하이라이트는 그전 셈나에서도 그랬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적차이와 유적차이의 의미를 다시 탐구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존재’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가마솥샘께서 질문하셨고요, 이 대목에서 ‘왜 존재이야기가 등장했는지’라는 핵심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우리 셈나는 아리스(편의상 아리스토텔레스를 이렇게)의 차이의 철학에 대한 비판과 함께 아깝게 놓쳐버린 진정한 ‘차이’ 포착의 기회에 대한 아쉬움을 <종적차이->와 그 다음 챕터에서 읽었었는데요, 들뢰즈는 아리스가 그 기회를 놓친 가장 큰 이유가 여전히 남아있던 공통의 개념으로서의 ‘존재’개념때문이라고 합니다. (들뢰즈의 2절 스토리상 ‘존재’가 스르륵 등장한 이유죠. 요요샘께서 정확히 짚어주셨었습니다) 존재 개념은 결코 공통의 범주적 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통적 개념으로 계속 존속하죠. 그런데 그것이 가능했던 핵심적인 이유는 유비라는 방식에 있습니다. 아리스의 존재는 다의적인데 존재의 분배와 위계화 방식 역시 공통감과 일차감각에 기반을 둔 판단의 유비 방식입니다. 판단의 유비는 또한 개념의 동일성과 다시 유비를 이루므로 결국 아리스의 차이는 삐덕였던 종차와 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차이 개념으로 나아가지 못한채 다시 체계안으로 통합됩니다. (요요샘) 이것이 아마도 '존재의 다의성'이 존재의 일의성, 개체화하는 차이, 한발 더 나아가 차이 그 자체로 나아가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겠죠. (튜터샘)
  2. 그 밖에 <유기적 재현>에서 파국의 의미는 연속성의 파열과 함께 벗어남(인디언샘)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존재의 일의성>에서는 토용샘의 휘브리스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는 <역량의 최대치의 봉인, 다시 넘어섬>의 상징 같은 것이라는 튜터샘과 요요샘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스코투스와 스피노자의 차이점에서 중립성에 대한 요요샘의 질문이 있었고 이에 대한 호수샘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이는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에서 기인하며, 보편자는 개별자에 분명 선행하지만 결코 단독으로 실존할 수는 없다는 의미에서의 무차별과 중립으로 이해된다는 호수샘의 정리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아리스의 차이 철학, 존재의 일의성, 그리고 차이 그 자체로의 변환 지점이 잘 정리되고 헤겔 라이프니츠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눈부신 봄날 모두의 건투를 빕니다.

 

댓글 9
  • 2022-04-18 09:52

    제가 질문했던 존재개념의 공통성과 다의적으로 말해진다는 존재 개념의 연관관계는 다의적으로 말해짐에도 불구하고 성립한다는 존재 개념의 공통성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이었는데요, 아리스의 형이상학을 찾아보니 그것은 첫번째 있음인 실체, 혹은 실체와의 관계를 통해 공통적이고 통일적인 아리스의 존재 개념이 성립한다고 정확히 나와있네요. 그렇니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은 실체(튜터샘이 말씀하신 형상이나 본질이겠죠) 나  실체와의 관계 이고 그 실체와의 관계 방식이 어떤건지를  묻는다면 그것이 유비이겠죠. 하지만 들뢰즈는 유비에만 집중해 설명하고 있죠. 물론 이야기의 흐름상 존재의 일의성으로 가는 과정이니 그렇긴 한데 제가 발제 했던 부분에서 제가 의문을 말씀드렸던곳에서는 유비가 형상과 질료와 관련해 언급됐었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또 미궁에 빠지는 듯하여 걍 포기하는 걸로  했습니다^^ 이러다 늘 다음 챕터를 거의 못읽고 가게되는 끝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어서요.

  • 2022-04-19 09:37

    분투하고 있습니다. 댓글을 달려고 마음 먹는 것조차 왜 이리 버거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세션 세션의 세션 효과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꼭 밝히고 싶었기 때문에 아무튼 댓글을 답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세션샘의 후기에는 <차이와 반복>도, 지난 세미나도 줄거리로 정리되어 있네요. 지금까지 정리하신 생각을 이렇게 나눠주셔서 넘 감사해요. 특히 삼십분이나 지각한 동안 중요한 이야기들이 오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종적 차이와 유적 차이> 앞부분을 읽으면서 모두가 여기 갑자기 쉬워졌다며 즐거워하다 갑자기 <종적 차이와 유적 차이>에서 다시 맨붕에 빠졌었는데, 그 이유를 가마솥샘께서 날카롭게 짚어주셨네요. 거기서 존재가 갑자기 중요하게 튀어나왔다는 것을 저도 새삼 주목하게 됐어요. 어느 정도 글의 흐름이 설계되어 있었다는 짐작도 드네요. 역시 추리소설다운..ㅎㅎ

     

    저는 이번 세미나 전까지 아리스(라고 하니 순정만화 주인공 같기도 하고 뭔가 아련해서 좋은데요?) 부분을 다시 보면서 문득 술어로 존재의 근거를 추적한 것이 참으로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이걸로 무려 논리학이라는 것도 만들 수 있었던 거구나 싶고요). 그런데 정군샘이 힘이 빠진다고 했던 그 문장에서(107. "존재는 차이를 통해 언명된다는 점에서 차이 그 자체이다.") 저는 이게 받아들여지지가 않고 영 이상했거든요. '차이를 통해 언명된다는 점'이 어떻게 '차이 그 자체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 하고요. 저를 호수라고 부르면 제가 호수 그 자체가 된다, 라는 말과 같아지는? 아리스한테 내내 뭐라 하더니 못지않게? 허술?한 느낌이랄까요. 아리스의 해석을 들뢰즈가 발판삼아 상승 내지 하강을 시도함으로써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매번 그런 식이고, 원래 그런 식이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고 있어요. 

     

    둔스 스코투스를 단 하나의 존재론이라고 말하는 제 부분에서 제가 여기는 서론격이고 선언적인 부분이다라는 말로 너무 간단히 지나가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형상'이라는 것을 나중에라도 같이 더 얘기해보고 싶어요. 둔스 스코투스가 '이성'과 '의지'가 실은 하나(영혼)의 두 측면이라는 것도 형상적 구분을 설명하면서 나온 것이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형상이 아주 또렷한 개념으로 이해되는데 이후 다른 철학자들에게서는 매번 혼란스러워요. 들뢰즈가 그런 변천 자체를 개념의 한 중요한 특성으로 보고 어떤 효과를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활용한다는 느낌도 들지만요. 

     

    • 2022-04-19 16:12

      한 7,8년전쯤 언젠가  차이와 반복을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꿈때문에 서양 철학사 기초편을 신청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호수샘이 말씀하시는 형상이나 실체 존재 본질 실재성등  형이상학의 개념들이 아리스 스콜라를 거쳐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에 이르기까지 몇천년을 그토록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에 굉장이 감동받았던 기억이 나요. 철학이나 관련 학문을 공부하신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같이 철학에 대해서 1도 모르는 무지한 독자에게는  형이상학의 세계가 너무나 깊고 신비로워 보여서 무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었죠.  들뢰즈가 다소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재현의 철학자들인 아리스 데카르트 칸트 등도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사유가 어찌나 기막히고 절묘하고 멋진지 마구 감탄하며 강의를 듣곤 했었어요. (다만 함정은 감탄만 하고 복습은 안한데다가 너무 오래전이라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난다는 ㅋ)  언제 기회가 있으면 쌤들과 차분히 공부해도 좋을 것 같아요.차이와 반복은 너무 어려운 책인데다가 제가 집중력도 독해력도  그닥 좋은 편이 아니라서  유일한 목표는 엉성하게라도 스토리를 따라 가는 건데 그게 정말 쉽지 않네요. 빈곳이 너무 많아서 그곳을 메우려다 보니 무한히 헤매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잘 이해하시는 분들이 보기에는 내용을 너무 이해 못해서 하는, 다소 무의미하고 시간 아까운 질문들이 있을수도 있어서 좀 죄송하곤 해요. 그래도 가끔 그런 질문들이 이미 다 알고계신 분들에게도 새로운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간혹' ㅋ 있으니 봐주시길^^

      • 2022-04-19 23:27

        아, 재현의 철학자들 저도 읽고 싶어요. 좋습니다. 어쩌면 그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이 함정에 더 깊게 빠질지도요.. ㅋ 추리소설이잖아요 ㅎㅎ

  • 2022-04-19 19:34

    '세션현상'이 아니라 '세션효과'가 더 적합한 말인 듯 합니다. ㅎㅎ '그래, 그래, 그래'하고 넘어가다가 '그런가?'하는 효과를 일으키니까요! 

    이번 주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라이프니츠 『모나드』를 읽고 있는데요. 읽다보니 주석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species, 즉 형상은 스콜라 철학의 인식론에서 사용된 용어로 감각적 형상과 가지적 형상으로 구별된다. 스콜라 철학의 인식론에 의하면 우리는 감각적 형상을 통하여 대상의 개별적인 측면을 파악하고, 가지적 형상을 통하여 보편적 측면을 파악한다." 오, 그러니까 스콜라 철학자들(의 아리스, 또는 아리스적 스콜라 철학자들)은 '종' 안의 두가지 '형상'성을 이미 깔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세션샘 요약 부분에서 들뢰즈가 "존재가 일의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체제를 지닌다면, 다시 유비라는 형이하학적 체제를 거느리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한 게 이해가 갑니다.(나머지 부분들도 한결 읽기가 낫군요) 이때 아리스토-스콜라들은 개체를 '주어진 것'으로 취급하며 이미 주어진 그것들로부터 그들의 '원리'를 '유비적'으로 추론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있음(존재)'은 '있는 것들로부터 유비된 것'으로 밖에 사유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 같습니다. 이런 구도로부터, 스콜라 철학자들의 구미에 딱 맞는 결론 '이 세계의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존재자들은 최고의 있음인 '존재'의 재현이다'가 나오게 됩니다.(물론 들뢰즈는 스콜라철학 이야기를 따로 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어쨌거나 이와 같은 '유기적 재현'의 존재론이 하나의 아이콘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리스토를 표적 삼은 것은 납득이 가기는 합니다. 게다가 헤겔에 뒤이어서 언급되는 라이프니츠는 스콜라-데카르트와 직접 대결합니다. 아리스토-스콜라, 그걸 넘어서는 라이프니츠, 그걸 넘어서는 들뢰즈!)

    그렇담 들뢰즈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재현' 이전에 이미 있는 '개체화의 선행성'인데 이때 '개체화'의 원리가 아마 '반복'일테고, 그때마다 나타나는 건 '차이'일 겁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있음'이란, '차이'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 '차이 그 자체'가 될테고요. 이건 '주어진 있음'으로부터 '최고의 있음'을 추론한 후에, '주어진 것들'을 '재현'으로 간주하는 것보다 훨씬 원리적이라는 '느낌'(아직까지는)을 줍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 '어떤 증명을 요구하는 것'에 답하는 걸 지금부터 하겠다는 것이죠.

    네 뭐 이건 제가 후기를 읽고, 다시 그부분을 보다가 생각한 것인데... 딱 '이거다' 하는 확신의 정도가 평소 같지가 않습니다. ㅎㅎㅎ

     

    매주 꼭 한 절씩 캄캄해지는 것들이 있네요. ㅎㅎㅎ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앞뒤로, 안팍으로 왔다갔다 하다보니 의미들이 점증해간다는 느낌은 확실히 있습니다! 

  • 2022-04-19 22:47

    네! 세션효과 맞습니다. 아주 좋은 효과에요.^^

    지난 주 세미나를 복기할 틈도 없이 메모를 올려야 하는지라, 제가 맡은 부분을 일독한 뒤에 미분, 적분, 극한, 급수, 으윽.. 대체 뭔 말이야?

    이 부분은 가마솥님이 맡았어야 하는데.. 혼자서 툴툴거리다가 일산 오면서 가방에 넣어 온 <들뢰즈 차이와반복, 입문>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참고서를 참고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거지요.ㅎ

    그러다 둔스 스코투스의 중립성에 대한 각주를 발견했어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  세미나에서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다루었다고 하며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라이프니츠보다 둔스 스코투스! 일단 둔스 스코투스의 중립성을 좀 더 잘 이해하고 넘어가야겠다 싶어서 눈을 부릅뜨고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기에 공유합니다.^^

     

     "그럼 어떻게 된다는 말이죠? 신을 물질로 취급하라는 말인가요? 개와 사람이 동일한 의미로 존재한다는 말인가요? 꽤 미묘한 문제지요. 또한 그럼에도 중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유가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지요. 그가 바로 둔스 스코투스입니다. 둔스 스코투스의 일의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꽤 나쁜 결말을 맺게 되지만, 그는 기쁘게 예방조치를 취했지요. 즉 그는 이 질문들에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꽤 주의를 기울였답니다. 즉 존재는 일의적인데, 그것이 존재인 한에서 그렇다고 했지요. 즉 존재는 형이상학적으로 일의적이라고 말입니다. 그에 따르면 물론 존재는 유비적인데, 다시 말해 존재는 물리적으로 다양한 의미들로 말해집니다. 제가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그는 이단의 경계에 서 있었는데요. 만약 형이상학적으로 일의적이고 물리적으로 유비적이라는 것을 명기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위험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둔스스코투스보다 신중하지 못했던 그의 제자들에게 이는 나쁜 결말을 초래했지요. 존재가 일의적이라고 제가 말할 때, 이는 '존재'라는 단어의 가정된 의미들 간에는 어떠한 범주적 차이도 없으며, 존재는 오직 그것에 대해 말해지는 모든 양상들에 대해 단 하나의 동일한 의미로만 언명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면에서도 이는 문제는 신이라는 것을 뜻하는데요. 즉 범주상의 차이도, 실체의 차이도, 형식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로 이는 정신 나간 사유가 되죠."(1974년 1월 14일 앙띠 오디푸스 세미나)

     

    이 세미나에서의 들뢰즈의 발언에 따르면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의 일의성을 형이상학적으로 일의적인 것으로, 즉 '일의적 존재를 사유하기만' 함으로써 존재를 중립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이네요. 이와 달리 스피노자는 한 발 더 나감으로써, 즉 실체와 양태를 하나의 평면위에 놓는 철학을 함으로써 들뢰즈의 표현에 의하면 훨씬 더 급진적으로 정신나간 사유를 감행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미분 적분, dy/dx에 대해서는 아무 해결책이 없네요. 그들 철학자들에겐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나 봅니다. 구글링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며 읽는 수밖에 없네요.ㅠㅠ

    • 2022-04-19 23:24

      아하, 그래서 들뢰즈가 "추상의 대가를 무릅쓰고"라는 단서를 달았군요. 보편자와 개별자로 설명하는 것은 스피노자와 큰 차이가 없어 보여서 찜찜했는데 형이상학적으로만 다루었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었네요. 미적분은.... 나중에 샘들의 설명이라도 이해할 수 있음 좋겠다.. 뭐 그러고 있습니다.

      • 2022-04-21 17:59

        그렇다면  들뢰즈는  거듭제곱으로 정신나간 사유를 하는 사람일지도...

        우리가 책을 읽으며 자꾸 '돌아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봅니다.ㅎㅎ

  • 2022-05-09 16:36

    세션샘께서 써주신 후기를 치밀하게 읽지 못하여서... 마음이 내내 불편하여 오늘 (휴가내고?????) 각잡고 읽었습니다. 

    제가 마지막 마무리 질문 시간에 정리하지 못한 부분을 여기에 덧붙여둘게요.  

    *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적 차이'를 통해 차이를 말하고자 했지만 이는 "사물이 범주들 밖에서 진화해온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각각 다른 존재 방식'이란 언제나 규정되고 고정시키며 위계를 나누고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의 존재방식이라고 말하게 되면 이런 구분을 허물게 된다.  서로 다른 존재방식이라는 기준(개는 ~해야한다, !해야 개이다) 이 무너지고, 각각의 개별자들은 스스로의 생성만으로 존재하게 된다. (내가 '애완견'이라고 부르는 저 개는 과연 나에게 사랑받으려고 하는 걸까? 혹시 호시탐탐 나를 물어뜯을 기회를 엿보고 있을 수 있으며 나를 물었을 때 그 개는 '투기견'이 된다.)    

    (+아래부터 여러 샘들의 설명 듣고 보충)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적 차이는 ‘균열’을 가지게 된다.  즉 종차 안엔 늘 ‘동일화’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다. 이걸 들뢰즈는 ‘종차의 이상한 능력’(93쪽)이라고 불렀다.(정군) 이렇게 되면 종차는 동일성 안에서 개념적 차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서 새로운 차이 개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체계 안으로 통합되면서 (세션),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개체화하는 차이로 나아가지 못했다.  (<--- 바로 요 부분이 핵심이었죠! 세션샘^^)  

    정리하자면 들뢰즈는 존재는 일의적적이라고 한다. 즉 존재 방식은 하나다. 그렇다면 각각의 종들은 왜 차이를 보이는가? 그건 개체로서 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건 각각의 개체들을 ‘다의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구판 109쪽) 그러므로 설명해야할 것은 ‘일의적 존재와 다양한 객체들의 양립가능성’(아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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