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2주차 <차이와반복>읽기 1 요약-메모 모음

정군
2022-03-0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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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본격적으로 <차이와반복>을 읽습니다!

각자 맡은 부분에 대한 요약-메모는 여기에 올려주세요. 

 

30쪽 '칸트가 스스로 제작했다는 놀라운 양말대님'이랍니다. 가터벨트의 기원이 되었다는군요. 

이러한 발명에 이르게 된 이유는 그 유명한 '칸트의 산책'과 관련이 있답니다. 줄로 다리는 묶어서 양말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는 게 '순환'에 안 좋을거라 생각해서, 말 안장에 쓰던 벨트를 잘라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허허...

가급적, 각자 맡은 분량상 쓰신 메모의 길이도 짧을 것으로 예상되오니...

첨부하지 마시고, 걍 댓글에 올려주시면 정리하는 데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댓글 28
  • 2022-03-08 23:49

    18~20 요약입니다. 

    철학책은 일종의 추리소설이자 공상과학소설이 되어야 한다. 특정한 행동반경과 영향력을 지난 단서(개념)들을 모아 사건을 해결(?)한다는 의미에서 추리소설이고, 그 해결이 곧 새로운 국면을 낳는다는 의미에서 공상과학소설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개념이란 말에 주의하자. 개념들은 특정한 행동반경을 지니고 영향권을 거느리면서 잔혹성을 통해 힘을 행사한다. 개념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개념이 어떤지를 말한다. (동일자에 기반한, 명석판명한, 그 자체로 자명한 이런 거 없다.)  이것이 들뢰즈의 경험론의 비밀이다. 그의 경험론은 개념(추리소설에서의 단서)을 어떤 마주침의 대상으로 지금들-여기들로 다룬다. 개념은 물자체와 ‘인류학적 술어’들을 넘어서 있는 자유롭게 야생적인 상태의 사물들 자체다. 그래서 들뢰즈는 개념들을 만들고 주조하고 부순다. 움직이고 있는 지평에서, 탈중심화되고 있는 어떤 중심으로부터, 개념들을 반복하고 분화시키면서 언제나 위치를 바꾸는 어떤 주변으로부터 그렇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에레혼은 ‘부재의 장소(에레혼)’이자  위치를 바꾸고 위장하여 양상을 달리하고 언제나 새롭게 재창조되는 ‘지금-여기’가 된다. 그 에레혼이 가리키는 것은  경험적 특수자도 추상적 보편자도 아닌 어떤 분열된 자아를 위한 코기토다. 이런 경험론 아래, 개체화들이 비인격적이고 독특성들이 전-개체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공상과학 소설이 된다. 하지만 명색이 철학책이다. 개념이 명석판명하지는 않아도 정합성은 지녀야 한다. 하지만 정합성도 어떤 근접의 정합성이다. 신에서 온것도 아니고 세계나 우리 인간의 일관성에서 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 2022-03-09 01:59

    2절 끝에 짜투리가 남아 있어서 마저 요약해 버렸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주에 나가야겠...군요.... 어쩐지 2절까지 내용들은 한 게시물에 모아놔야할 것 같다는... 제 성격적 결함 때문입니다.

    요약은 했지만, 결함이 좀 있습니다. 들뢰즈 스스로 이야기 했듯이 '아직 우리는 이 문제들 중 어느 하나도 해결할 처지'가 아니어서요. ㅎㅎ

    가령, 들뢰즈가 '사태를 본질로서 재현하는 개념'이라는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게 '개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요. 이건 '이데idee'와 관련이 있습니다만, 뚜렷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아직은 어렵습니다. 기계적으로 나눠보면 '이데-미분적 차이-잠재성'이고, '개념-강도적 차이-현행성'인 것 같은 데, 이 부분은 '차이'를 다루는 부분까지 나가봐야 좀 더 뚜렷해 질 듯 합니다. 

     

    더불어 니체에 관해 말할 때는 니체의 어떤 점을 두고 말하는지 알겠는데, 키에르케고르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개는 <신앙의 기사와 무한한 체념의 기사>라는 한국어판 선집에 실린 짧은 글에 나오는 내용을 말하는 것 같은데, 한국어판을 읽어봐도 '그...그런가...?' 싶네요. ㅎㅎ

     


    39-45쪽 요약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스타일' - ‘재현’을 넘는 ‘반복’

     

    '머리말'에서 들뢰즈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방식으로 철학 책을 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질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20쪽)고 말한다. '서론' 2절의 맨 마지막 관(subsection)에서 다루는 문제('스타일')는 그와 관련되어 있다. 가령 들뢰즈는 니체-디오니소스와 키에르케고르-신이 그렇게나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목표와 반복의 주제에서의 일치'는 어디서 유래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니까 들뢰즈가 보기에 두 사람은 모두 '철학의 극복'에 대해 말한다. 어떤 철학의 극복인가? '재현적 철학'의 극복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매개 없는 사유'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예를들어 니체가 '힘'을 도입할 때, 키에르케고르가 '주관적 진리'와 '도약'을 말할 때 그것들은 사유를 '비재현-무매개적 지대'로 이동시킨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유'를 전달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창출해야할 필요성이다. '재현의 철학'은 세계-존재의 원리를 잘 '재현'하는 형식을 고민한다, 반면에 '직접성의 철학'은 '사유'를 생산하는 '스타일'을 고민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니체와 키에르케고르는 '직접성의 철학'이 가져야만 하는 '스타일'을 고민하고, 그 '스타일' 속에서 사유의 형식 자체를 생산한 철학자들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갑작스럽게도 '연극'에 관해 이야기 한다.  도대체 이 '연극'은 어떤 것인가? 

     

    "순수한 시-공간적 역동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들의 이데들을 현실화하며 육화하기 때문에 개념들을 드라마화 하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라는 논의 방향 속에 담겨져 있을 것이다."(들만철, [드라마화의 방법], 499쪽)

     

    “드라마, 드라마화, 극화 등의 기초개념들은 강도적인 것이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으로 생성, 분화되는 과정을 지칭한다.”(차이와반복, 서론 주석53)

     

    여기서 '이데idee'는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개념'이고, '자기의 차이를 낳기 전에 충분히 미분화되어 있는 것'(들만철489쪽)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화'를 다시 살펴보면 그것은 '차이화 이전의 잠재적인 개념들(로서 이데idee)들을 현실화하며 육화'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어째서 갑자기 ‘연극’이야기를 꺼내는가?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모두 ‘무매개적인 사유’로써 ‘철학의 극복’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드라마화’는 ‘개념’을 매개로 현실을 사유하는 ‘재현의 방법’에 대항해 ‘개념’의 직접적인 ‘운동’, ‘절대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니체와 바그너가 갈라지는 지점’(41쪽)에서 들뢰즈가 ‘텍스트, 플롯, 조음, 음악, 빛, 노래, 춤, 무대 장치 각각이 떠맡는 역할과 관련된 문제’라고 할 때 그 문제는, 그것들이 (독일 민족 신화의)‘재현’의 역할을 맡는가, 아니면 이미 있었고, 있어왔던 어떤 것에 ‘춤’(42쪽)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가의 문제다. 연극이 ‘실재적 운동’이고, ‘모든 기법들을 통해’ 그것을 획득해 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반복일 뿐이다’.(42쪽) 

     

    그렇다면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새로운 스타일’이란 ‘재현’에 대항해 ‘반복’을 맞세우는 것이다. '재현'이 아니라 '창조'가 문제다. 이 대목에서 ‘퓌지스와 프시케*의’ ‘운동 안에 매개를 도입하기 위해 무매개적인 것을 배반하고 훼손한’ 헤겔에 대한 비판이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들뢰즈에 따르면 헤겔이 무규정적 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세계 전체를 변증법적 운동의 결과로 추상해 낼 때, ‘반복’은 ‘드라마화’의 역량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논리의 운동'이 된다. 이때 ‘역사’는 이성의 자기전개-회귀의 운동이나, 맑스와 같은 유물론적 운동이 아니다. ‘역사’는 기호와 가면들은 있으나 비어있는, ‘반복’을 기다리는 무대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이 조건 아래서 배우 또는 주인공들은 실질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생산한다’(43쪽). ‘반복’은 ‘개념과 결부된 ‘운동’을 거부한다. 

     

    물론 니체와 키에르케고르는 구분된다. 다만 그것은 둘이 나가려는 방향의 차이일 뿐이다. 이를테면 키에르케고르가 최선의 것으로 ‘종교적인 것’을 놓았을 때, 그는 ‘사변’과 ‘신앙’을 대립시킨다. 게다가 그는 ‘반복’조차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반복’ 속에 머물고 있다. 반면 니체는 ‘불신앙의 연극’, ‘운동의 연극’을,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그 극한까지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것은 ‘잔혹극’이다. 그렇게 ‘영원회귀’는 ‘반복’의 현기증 나는 운동이 된다.

     

    *여기서 들뢰즈가 말하는 ‘퓌지스와 프시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에서 ‘퓌지스’를 ‘사물의 운동이나 변화의 원천’으로 사용하는 것, ‘프시케’를 생식, 감각, 사고, 이성과 같은 신진대사와 정신의 역량으로 사용하는 것.

    • 2022-03-09 10:00

      헉! 깜놀. 정군님! 저는 아직 읽지도 않은 부분이군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이거슨 절도인가, 증여인가?ㅋㅋ

       

      • 2022-03-09 10:35

        '절도적 증여'라고 하고 싶지만 어쩐지 '증여적 절도'임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입니다 ㅎㅎㅎ

        • 2022-03-09 14:06

          위반이고 침략인가요?

  • 2022-03-09 09:55

    [37~38쪽] 키에르케고르, 니체, 페기의 반복에 대한 일치를 보여주는 네 번째 명제: 반복을 습관의 일반성들뿐 아니라 기억의 특수성들에 대립시키기

     

    습관은 특수한 경우들의 반복의 응시에서 새로운 어떤 것, 일반적인 것을 훔쳐낸 것이다. 특수한 경우들의 반복으로부터 일반성을 추출해내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응시하는 작은 자아(*)들이다. 또한 기억은 일반성으로부터 특수성을 재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반복에서는 습관과 기억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운동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운동들은 반복 앞에서 배척되고 사라진다. 습관이 현재의 반복이고, 기억이 과거의 반복이라면,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반복은 미래의 사상이다. 반복은 고전적 범주인 상기(플라톤)와도 근대적 범주인 하비투스(흄?)와도 대립하는 위치에 있다.

    반복 안에서, 반복을 통해, 상기와 비교해 결핍이었던 망각은 실증적 역량이 되고, 의식과의 관계에서 열등한 위치에 있었던 무의식은 실증적이고 월등한 역량이 된다. 모든 것은 역량 안에서 하나로 집약된다. 키에르케고르가 반복을 이차적 역량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번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 역량보다 더 탁월한 무한자, 영원, 무의식, ‘n승’의 역량을 의미했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힘의 의지에 대한 무매개적 표현으로 제시했을 때, 영원회귀는 역량의 우월한 형식을 끌어내는 반복의 독특성(특수성과는 다른 특이성)을 의미했다.(**)

     

    * 역주에 의하면 들뢰즈적 의미의 작은 자아는 언제나 응시하는 자아, 순간들의 반복에서 차이(살아있는 생생한 현재)를 훔쳐내는 정신이다. 본문에서도 들뢰즈는 ‘우리는 우리 속에 어떤 응시하는 자아가 있다는 조건에서만 습관 안에서 행동한다’고 말하고 있다. 반복의 결과 습관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응시하는 자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수동적 종합이 습관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 역자는 주10에서 이 부분은 2장에서 전개될 세 종류의 시간의 종합, 즉 습관의 반복, 순수 과거의 반복, 죽음본능의 반복을 전제하고 있고, 들뢰즈는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의 반복이 자신의 세 번째 반복의 사례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전제와 암시를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

     

  • 2022-03-09 10:38

    2절. 반복철학의 프로그램-키에르케고르,니체,페기

    2)반복을 자연법칙에 대립시키기

    -키에르케고르의 경우

    -키에르케고르에게 반복이 아닌 것- 자연안의 반복, 순환주기, 계절, 교환, 동등성 등의 자연법칙

    키에르케고르는 자연법칙적 반복을 따르는 것을 미학적 반복이라 하는데 이는 키에르케고르 실존 3단계중 가장 낮은 단계인 미학적 실존 단계에 해당한다. 이는 인간의 자연적 성향을 그대로 따르는 현실 안주 단계로 키에르케고르가 생각하는 반복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반복은 의지의 가장 내면적인 것, 그리고 의지 주위에서의 변화다.

    -니체의 경우

    피지스의 반복- 법칙들의 지배, 표면의 법칙, 순환주기, 법률적 형식, 동등함, 유사함, 일반적인 고대로부터의 자연관
    니체의 반복-법칙위의 월등한 사태,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어떤 의지, 역량, 대지의 내면, 영원회귀의 반복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 중, 단순, 후렴 등을 교정한다.

    후렴→ 주기, 순환, 유사, 동등은 자연발생적, 자연 자체의 감성적 법칙으로서 이는 반복이 아니다.

     

  • 2022-03-09 10:43

    대님 궁금했어요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요약이 아니고 아마도 본문보다도 더 길게 썼네요. 일단 죄송하고 이후 방향은 생각해볼게요;;


    (23쪽~24쪽 중간) 서론: 반복과 차이/ 1절. 반복과 일반성: 첫 번째 구별(행동의 관점에서)

    들뢰즈의 글은 마치 추리소설 같다. 적어도 초반에는 늘 의심하며 읽어야 하고, 기댈 수 있는 부분과 의심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부분을 구분하며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개념들을 들뢰즈가 그대로 사용할지 아닐지 알 수 없다. 거의 모든 개념을 의심하며 만나야 한다. 하지만 어떤 기준점은 필요하다. 목차를 볼 때 서론에서 계속 대비되는 일반성과 반복 중에 일반성에 기대어보기로 한다. 초반의 전개만으로 볼 때 들뢰즈가 사용하는 일반성의 개념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개념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반복이라는 개념은 그가 새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나는 반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단서를 정리해나가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잡고 접근해본다.

    “두 사물이 두 물방울처럼 닮았다.”는 어떤 닮은 두 사물을 말하는 상투적인 표현일 것이다. 들뢰즈는 물방울이라는 일반적 관념과 특수한 개체로서 어떤 물방울의 관념을 동일시하여 두 물방울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에 곤혹스러워하는 듯하다. “일반적인 것에 대해서만 과학이 성립한다.”와 “반복하는 것에 대해서만 과학이 성립한다.”는 동일한 명제인가? “과학이 성립한다”를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둘 다 옳은 명제이되 엄밀한 의미는 다르다. 나는 이 말을 과학적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실험을 통한 검증이다라는 점에 비추어 이해했다. 먼저 일반적인 것에 관련해, 실험은 어느 하나의 법칙을 증명하려면 다른 변수는 통제되어야 한다(예: 진공 상태가 아닌 장소에서의 자유 낙하 실험). 반복은 동일한 실험을 반복했을 때 동일한 결과를 얻어야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자, 일반성과 반복은 확실히 다른 것이다. 원래 다르다. 사실 들뢰즈는 반복이 무엇이다를 말하기 위해, 일반성이 무엇이고 이러한 일반성과 반복이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한다. 반복은 아직 그 자체로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일반성과의 대조를 통해 조금씩 드러나(야 하는데 드러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주워서 잘 관찰해보려고 애를 쓰고는 있는...네 그렇습니다)고 있다.

    들뢰즈는 일반성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일반성에는 두 가지 질서가 있는데 1) 유사성들이라는 질적 질서와 2) 등가성들이라는 양적 질서다. 이후 설명되듯 유사성들을 상징하는 것은 순환 주기이고 등가성들을 상징하는 것은 동등성들이다. 이 설명은 나중에 다시 나오고 여기서는 일반성의 다른 특징, 즉 항들이 교환⸱대체 가능하다는 점을 다룬다. 물방울의 예에서 보면 모든 특수한 물방울들은 ‘물방울’이라는 일반성으로 명명될 때 모두 동일한 항이 된다. 그러나 이 일반적 ‘물방울’은 그 어떤 특수한 물방울과도 같지 않다. 그래서 경험론자들은 일반적 관념을 그 자체로 특수한 관념으로 놓았다. 일반성의 이 특징과 대비해 반복의 한 가지 특징이 설명된다. 반복은 그렇지 않다. 반복은 교환과 대체가 불가능한 독특성과 관계한다. 쌍둥이가 서로를 대체할 수 없듯이 특수한 개체들은 서로를 대체할 수 없다. 들뢰즈는 여기서 일반성의 기준이 교환이라면, 반복의 기준은 “절도와 증여”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전체가 아닌 일부가 겹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즉 교환과 대체 가능한 동일한 것은 아니되 닮은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 2022-03-09 10:49

    머리말 20~21쪽 요약

     

    기존의 방식으로 철학책을 쓸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니체는 새로운 철학적 표현 수단을 탐색했고, 오늘날 그런 탐색은 연극이나 영화같이 새로운 면모를 갖춘 예술들의 기법에 부응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철학사는 회화에서 콜라주가 맡은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 철학사는 철학 자체의 재생산이다. 철학사에서 해설은 해설되는 철학의 분신이어야 하며, 이 분신은 최대치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과거의 철학책이 마치 상상의 책, 위조된 책인 것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르헤스는 『돈키호테』를 다루면서 그것이 상상적 저자인 피에르 메나르에 의해 재기록된 어떤 상상의 책인 것처럼 말하고, 상상적 저자를 실재의 저자인 양 마주한다. 그래서 가장 정확하고 가장 엄밀한 반복은 극대치의 차이를 상관항으로 한다.

    철학사의 해설은 텍스트가 보여주는 일종의 느림, 응결, 정지 등의 모습을 재현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해설은 어떤 이중적 실존성을 띠어야 하고, 과거의 텍스트와 현행의 텍스트가 상대방 안에서 서로를 순수하게 반복한다는 어떤 이중적 이상을 지녀야 한다.

     

  • 2022-03-09 10:53

    16~17p요약글(여울아)

     

    앞 단락에서 들뢰즈는 차이 그 자체와 차이가 만들어내는 관계를 사유하자고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삶이란 반복의 연속이다. 반복은 천편일률적인 기계적 반복과 차이를 낳는 반복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런데 현대적 삶의 특징은 이런 기계적 반복에서 차이를 추출해낸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동차라는 동일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그 브랜드마다 생산라인마다 이형, 변양된 차이나는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 반대로 차이나는 반복, 숨어있는 반복에서는 기계적인 천편일률적인 반복을 다시 낳는다.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지만, 매일 매일이 똑같다고 느낀다. 그는 이것을 허상이라 말하며, 반복은 이런 허상 속에서 이미 일어난 반복 위에 있고, 차이는 이미 성립한 차이들 위에 있다고 표현한다. 반복은 스스로 반복하는 것이며, 분화소는 스스로 차이를 만들어낸다. 삶의 과제는 차이와 반복의 공존에 있다.

     

    이 책은 부정 없는 차이와 반복의 개념을 탐구한다. 부정 없는 차이는 반헤겔적인 관점에서 동일자에 종속되지 않음으로써 대립과 모순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반복은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반복(같음의 반복)이 숨어 있는 반복(의 심층구조)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여기 숨어 있는 반복에서 ‘변별적(연속적 미분적) 차이소’는 스스로 위장하고 자리를 바꾼다. 이런 차이와 반복은 서로 자연스럽게 얽히게 된다. 왜냐하면 순수한 차이(부정없는차이)와 복합적 반복은 모든 경우에 다시 통합되고 뒤섞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차이의 끊임없는 탈중심화와 발산은 반복함으로써 자리를 바꾸고 위장하는 것과 서로 밀접한 상응관계를 갖는다.

  • 2022-03-09 10:54

    철학 책은 추리소설이자 공상과학소설이 되어야 한다는 글의 마지막 단락(20쪽)을 맡았습니다. 추리소설이 경험론과 공상과학소설이 에레흔과 맞닿으며 진행되는 들뢰즈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맡은 부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도로 디테일하게 읽으려다가 “알지 못하거나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쓰는 경우와는 다르게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서 ‘알지 못하거나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쓰는 경우’란 것이 무엇인가, (이때 윤석열을 생각했다고 쓰면 안되겠지요?)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과학에 대해 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방식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에서는 어떠한 특정한 방식으로 과학에 대해 말해왔기에 그 방식이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제 나름의 꼴라주를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글쓰기는 앎과 무지를 가르고 또한 앎과 무지가 서로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는 그 극단의 지점에서만 시작된다“는 문장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안다고 생각해서 그것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하지만, 곧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는, 그래서 다시 그 깨달은 무지를 채우기 위해서 다시 공부하는 그 과정을 (지금과 같은 상황) 이야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렇게 헤매며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를 잠시 고민하던 저에게 요요쌤의 1주차 후기 중 “들뢰즈의 철학을 기존의 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나로 변형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가 떠올라서 잠시 또 힘을 내어봅니다. 다음주에는 조금 더 차이를 만들어보겠습니다.

  • 2022-03-09 10:59

    머리말 15~16

    이 책의 의도를 먼저 알려 주겠다. 왜냐하면 파악하기 어려우니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이 시대에 널리 공유되어 있고 이를 알려주는 조짐들은 많다. 하이데거(시간), 구조주의(차이), 현대 소설(프루스트)에서 발견되는 차이와 반복, 반복의 고유한 역량, 이는 무의식, 언어, 예술의 힘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조짐들은 반-헤겔주의(관념론/이성, 진보에 반대한다)로 집약될 수 있다.

    즉 차이와 반복이 동일자와 부정적인 것, 동일성과 모순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차이는 동일자에 종속되는 한에서만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고, 마침내 모순에 이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우위가 재현의 세계를 정의하나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다. 현대는 시뮬라크르, 곧 허상들의 세계(환영)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신보다 오래 살지 알고 주체의 동일성은 실체의 동일성보다 오래 존속하지 않는다. 모든 동일성은 흉내 낸 것에 불과하고 차이와 반복의 광학적 효과에 불과하다. 우리는 즉자적 차이를 사유하고 차이소들의 상호관계를 사유하고자 한다. 이는 차이나는 것을 같음으로 환원하고 부정적인 것들로 만들어버리는 재현이 형식들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다.

  • 2022-03-09 11:32

    2022 철학학교 시즌1 <차이와 반복> 강독 / 24~25쪽 / 20220310 인디언

     

      반복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 어떤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것(교환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과 관계하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외적 행위로서의 반복은 더욱 비밀스러운 어떤 떨림, 심층적이고 내면적인 어떤 반복의 반향이다. 축제에는 바로 그런 역설, 즉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반복한다는 명백한 역설이 놓여 있다. 첫 번째 것에 두 번째, 세 번째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첫 번째 것을 'n승'의 역량으로 고양시키는 것.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이전에 시작된 것의 독특한 조건을 다시 한 번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의 교환 불가능한 조건을 향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라기보다는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샤를 페기의 말처럼, 국가가 정한 7월 14일 축제는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이 축제이며 그 뒤에 이어지는 다른 축제일들을 앞서 반복한다.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은 보편적 축제를 반복하는 첫 번째 독특한 것이다.

    모네의 첫 번째 수련도 그 뒤에 이어지는 다른 모든 수련들을 반복한다. 반복은 계속해서 붓을 드는 모네의 첫 번째 수련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모네를 매혹시키는 어떤 떨림이 이미 모네 안에 무한한 반복을 함축하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예술작품은 개념 없는 독특성의 자격에서 반복된다. 모네가 그린 수련이나 루앙성당이 어떤 개념적인 특수한 대상이 아니라, 모네가 그것을 그리는 그 매순간에 드러나는 차이 그 자체로서의 수련, 루앙성당이 독특한 것으로 반복될 뿐이라는 것. 오직 독특한 것만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은 항상 어떤 극단적 유사성이나 완벽한 등가성으로 ‘재현’될 수 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수량적으로? 진화적으로? 표면적으로?) 한 사태에서 다른 한 사태로 이행할 수 있다고 해서 두 사태 간의 본성상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사성이 지극히 큰 경우라 해도, 등가성이 완벽하다고 해도, 반복과 유사성 또는 반복과 등가성 사이에는 본성상의 차이가 있다. 즉 반복은 일반성이 아니다.

     

  • 2022-03-09 11:46

    (p.35~37) 반복을 도덕 법칙에 대립시키기,
    반복을 도덕 법칙에 대립시키기, 반복을 윤리의 지연과 보류로, 선악을 넘어선 사유로 만들기, 반복은 고독한 자, 단독자의 로고스로 나타나며, ‘사적인 사유자’의 로고스로 나타난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사적인 사유자, 혜성 같은 사유자, 반복의 담당자를 공적인 교수, 전문적인 법률가와 대비시킨다. (간접적 형태를 띤 이들의 담론은 매개를 통해 진행되고, 개념들의 일반성 안에서 도덕적 사유의 원천을 취한다)
    우선 키에르케고르의 반복은 심리적 의도들로서의 항의와 체념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초월적 상관항’이다. 그리고 니체의 영원회귀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형식은 무매개성의 난폭한 형식이며 보편성과 특수성을 하나로 엮는 형식이다. 이 형식을 통해 모든 일반적인 법칙은 특권적 지위를 빼앗기고 매개들은 용해되며 법칙에 예속된 특수성들은 사라지게 된다. (내가 정리했지만 그 의미를 가늠하기 어렵다..^^:)

  • 2022-03-09 11:49

    31-32

    만일 반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도덕법칙을 전복시키면서 가능하다.

    도덕법칙을 전복시키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원리로 향하는 상승의 길

      1. 도덕법칙의 질서를

      -이차적이고 파생적이며 빌려온, ‘일반적' 질서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원래의 힘을 우회시키고 빼앗는 이차적/간접적? 원리와 연루되어있다고 비판

      1. 방법: 반어

      -원리들의, 원리를 향해 상승해가고, 원리를 전복시키는 기술로서의 반어

    2. 귀결로 향하는 하강의 길

      1. 디테일까지 지나치게 완벽을 기울여 신경쓰면서 결과에 복종

      2. 방법: 유머/익살

      -귀결과 하강의, 계류(중지 suspensions)와 추락(낙하 falls)의 기술

      반복은 유머와 반어 모두에 속한다.

      반복은 천성적으로 위반 또는 예외이다. 항상 특이성(a singularity)과 보편자(a universal)를 드러내면서.

    • 2022-03-10 22:59

      제가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 한국어 영어 불어 버전 올립니다.

      ------

      p32

      “반복이 이런 상승 못지않게 계류에서 솟아난다면, 이는 마치 실존이 더이상 법칙들에 의해 구속되지 않게 되자마자 그 자체로 다시 시작되고 ‘되풀이되는' 것인 양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Must we understand that repetition appears in both this suspense and this ascent, as though existence recommenced and ‘reiterated’ itself once it is no longer constrained by laws?”

      "Faut-il comprendre que la répétition surgit dans ce suspens comme dans cette remontée, comme si l’existence se reprenait et se « réitérait » en elle-même, dès qu’elle n’est plus contrainte par les lois?"

      • 2022-03-11 01:46

        감사합니다! 이 부분은 되풀이해서 읽어봐도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아마 '법칙에 구속되지 않은 실존이 그 자체로 다시 시작되고 되풀이되는 것인양', 이라고 하는 부분이 어떤 걸 말하는지 알 수 없어서 그런 듯 합니다. 그런데, 전후 맥락과 주석을 보면 이게 5절 헐벗은반복과 옷입은반복 쯤에서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읽은 부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들뢰즈가 미리 떡밥을 슬쩍슬쩍 뿌려놓은 식으로 이야기를 해 나가기 때문에, 이 부분도 그런 부분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잘 가지고 있다가 서론5절 쯤에서 다시 확인해 보면 좋겠습니다.

        혹시 잘 설명해 주실 분이 있다면, 설명 좀 해주세요 ㅠ

      • 2022-03-11 10:33

        저도 아침밥 먹으면서 펼쳐놓고 보기는 했어요 ㅋㅋ

        저는 그 뒷문장들에 단서가 있다고 느끼긴 했지만, 또다른 의문점들이 마구 따라나오는 통에 미결 또는 계류의 상태로 놓아두긴 했어요. 

        일단 지금 제가 보는 의견을 보태자면, 법칙과 반복의 대립 구조 속에서 우리가 법칙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싶어요. 반복은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에 '반하여' 성립한다는 말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이렇게 보면 거기서 따라나오는 의문들이 있지만 그건 그냥 일단 주머니에 넣어두고...

        문제의 질문에서는 '실존이 더 이상 법칙들에 의해 구속되지 않은' 상태를 가정하고 있잖아요. '법칙으로부터 풀려나도 존재가 다시 시작되고 저절로 되풀이할 것인가?' 라고요. 그렇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 이유는 반복은 익살과 반어에 속하는 사태이기 때문에. 반복은 본성상 위반이고 예외이다. 언제나 법칙에 종속된 특수자들에 반하여 어떤 독특성을 드러내고, 법칙을 만드는 일반성들에 반하여 항상 어떤 보편자를 드러낸다. 

        전도된 법칙은 또다시 법칙으로 기능하고 여기에 반하는 반복이 또 일어나고... 그런 구조일까..? 그렇게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 2022-03-11 12:29

          오! 일단 이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맞는 듯 합니다!

          • 2022-03-12 17:47

            이게 어제 마지막에 이야기 하던 부분이군요. 어제 제가 의문문을 긍정으로 봤는데, 올려주신 영문본이랑 한국어 번역본을 들여다보니 부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수샘 의견에 한표… 

  • 2022-03-09 11:52

    차이와반복(p25-27)

     

    일반성은 법칙(자연법칙, 도덕법칙 등)들의 질서에 속한다. 법칙은 반복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반복’이 아니다. 법칙은 차이의 공허한 형식, 변이(變異)의 불변적 형식이다. 주체들이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유한 변화를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 물론 법칙에는 변항도 있지만 불변항도 있다. 자연에는 유동적인 흐름과 변이들만큼이나 영속적이고 집요하게 남는 것들이 있다. 집요하게 남는다는 것은 반복과 전혀 무관하다. 한 법칙의 불변항들은 더욱 (커다란) 일반적인 법칙에서 보면 변항이 된다. 반복은 불가능하다. 변화는 고정된 항들에 대한 관계안에서 파악된다.

    생프뢰는 왜 반복할 수 없다고 깨달은 것일까? 그것은 단지 자신과 쥘리의 변화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연의 위대한 항구성들(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선하다. 루소) 때문이다. 그 위대한 항구성들은 어떤 상징적 가치를 획득하며, 그런 만큼 그는 참된 반복에서 멀어진다. 반복은 법칙에 반한다. 법칙의 유사한 형식과 등가적 내용에 반하는 것이다.

     

    반복

    repetition

    (필연적)

    교환,

    대체 불가능

    독특한 것

    singularity

    보편성

    universality

    특이한 것

    remarkable

    순간성

    영원성

    (永遠性)

    eternity

    위반

    일반성

    generality

    (등가성,

    유사성)

    교환,

    대체 가능

    특수한 것

    particularity

    일반성

    generality

    평범,범상

    ordinary

    변이

    (變異)

    항구성

    (恒久性)

    permanency

    법칙

     

    < 참고 >

    《신 엘로이스》, 1761. 루소의 서간체 장편소설. 내용  정리

  • 2022-03-09 12:22

    (구판 34-36 요약) 

    들뢰즈는 키에르게고르의 니체 사이에 흐르는 공통의 힘으로서 반복을 말한다. 그들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반복을 언어와 사유의 고유한 역량, 파토스, 고등 병리학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들의 반복은 모든 형식의 일반성에 대립하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취하며 문체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그들이 어떤 연극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들뢰즈가 말하는 연극이라는 개념은 ‘재현하지 않고 어떻게 창조하느냐의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다.’ (<제임스 윌리엄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116쪽) 

    반복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첫번째로 반복 자체를 새로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반복 자체를 새로운 사태로 만드는 것이고, 어떤 자유로 만들고 자유의 임무로 만드는 것이다. 니체의 경우는 반복을 의지의 대상 자체로 만들어버리면서 모든 속박으로부터 의지를 해방하는데 있다. 반복은 속박일 수 있지만 반복을 치유하는 것 역시 반복이다. 반복 안에는 타락과 구원의 신비한 유희, 죽음과 삶의 연극적 유희, 질병과 건강의 긍정적 유희가 존재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영원 회귀 안의 반복 역량)  

     

    *참고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에서 욥/아브라함 

    -아브라함은 25년만인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으나, 하나님은 이삭이 청소년이 되었을 때 제불로 바치라고 함. 모리아 산에서 칼을 들어 이삭의 목을 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수풀의 양을 대신 제물로 바치게 됨.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자 모든 믿는자의 조상이 됨.  신앙의 영웅이 됨. / 반면 욥은 이유 없이 열 자녀와 많은 재물, 건강을 다 잃게 되는데 신앙을 버리지 않고 지킴.

    ( 55 “아브라함이 한 일은 윤리적으로 표현한다면 이삭을 죽이려고 한 것이고,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이삭을 바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모순 속에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불안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안이 없으면 아브라함은 저 아브라함이 아닐 것이다. 혹은 또 아브라함은 거기에 언급되어 있는 그런 일을 하나도 한 적이 없고, 이 이야기가 당시의 정세로 미루어 보아서 전혀 다른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일 따위는 잊어버리기로 하자. 왜냐하면 현재의 것이 될 수 없는 그런 과거의 일 따위를 회상해 보았자 아무런 보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설교자는 아마 어떤 윤리적인 망각이라고나 할 수 있는 것, 즉 이삭이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공포와 전율>) 

     

  • 2022-03-09 12:43
    30~31 쪽
     
    반복, 자연법칙, 도덕법칙
     
    들뢰즈는 반복과 일반성을 구별하면서 첫번째로 행동의 관점에서 설명하였고, 두번째로 법칙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즉 '반복'이 어떻게 자연법칙이나 도덕법칙과 다른가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반복은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에 반하여 성립한다는 것이다. 양심의 애매성, 도덕법칙을 통해 우리는 일반성(습관)에 매몰되어 버린다. 먼저 양심은 오로지 자연법칙에 외면적이고 자연법칙보다 우월하며 자연법칙에 무관심한 도덕법칙을 정립할 때에만 생각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것, 선의 형상을 띠는 것은 습관의 형식이다. 습관이나 습관적 일반성에는 유사성이나 등가성의 질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 2022-03-09 13:49

    17~18쪽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대립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우리가 꽤 자주 쓰는 말이다. 이것이야 말로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표상'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순수한 차이를 모르거나 부정한 결과 우리는 이렇게 낭만적인 태도를 가진다. 아름다운 영혼은 어느 새 동일성으로 수렴된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문제와 물음뿐이다."  우리는 문제와 질문 앞에서 비로소 사유한다. 그러나 그 문제와 문제틀은 각각의 고유한 실증성의 등급에서만 공격과 선별의 역량을 낳는다. 문제틀과  차이가 규정하는 어떤 투쟁과 파괴들이야 말로 부정적인 것의 투쟁과 파괴들, 또한 아름다운 영혼들의 경건함과 비교되는 힘을 가진다.  규정되지 않는 허상은 모상이 아니며, 허상은 원형들을 전복하고 모상들을 파괴한다. "모든 사유는 침략이 된다."

  • 2022-03-09 15:15

    반복과 일반성: 두 번째 구별(법칙의 관점에서) 29-30p.

     

    이 절에서 들뢰즈는 스토아주의와 칸트 등 자연 혹은 도덕이 ‘법칙’을 강조하는 것에 물음을 던지고, 그러한 법칙들조차 역설적으로 혹은 모순적으로 ‘반복’과 관계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반복이란 위반’이며, ‘반복은 법칙에 물음을 던진다.’ 따라서 자연‘법칙’에 따라 덕 있는 자가 된다는 스토아주의의 전제는 오류를 내포한다.

    도덕법칙의 영역에서도 되풀이, 매일의 일상에서의 어떤 반복들은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다. 들뢰즈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면, 도덕법칙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있다. 도덕주의자들은 때때로 우리를 악으로 향하도록 하는 쾌락, 과거, 정념 등을 자연적 본성에 위치시키고, 거꾸로 선은 그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어떤 반복의 가능성임을 주장한다. 이런 도덕법칙은 은근히 자연법칙에 대항하는 입법적 주체를 상정하고, 이 입법적 주체는 어떤 반복과 관계할 수밖에 없다.

    ‘반드시 준칙에 따라 행동하라, 네 의지로 인해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는 칸트의 보편적 법칙의 공신은 달리 독특한 역량에 의존하는 반복을 커다란 법칙의 일부로 복무하도록 하는 모순적 방식이다.

  • 2022-03-09 15:44

    일반성의 두 질서: 유사성과 동등성

     

     우리가 보기에 과학적인 실험은 반복과 법칙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는 과학적 실험을 '반복'함으로서 보편적인 법칙이 있음을 보이고 발전시킨다. 즉, 동일한 상황이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통해 과학은 증명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자연현상 속에서 서로가 유사성을 띠는 것과는 다르게, 실험은 몇가지 선택된 요인들만이(다른 요인들은 배제하고) 양적인 방식으로만 이해되어 '수학적인 좌표체계'를 이룬다고 말한다. "이런 조건들 아래에서 현상은 선택된 요인들의 일정한 양적 결합관계와 "동등"한 것으로 나타난다"(30p)

    따라서 실험에서는 유사성의 질서를 동등성의 질서로 대체하며, 이 과정에서 유사성을 허물려 시도한다. 또한 반복은 이러한 일반성의 질서(유사성)에서 다른 일반성의 질서(등가성)로 향하는 사이에서 드러난다. 이때 일반성은 가설적 반복('만약'  '똑같은' 조건(~한 요인들을 가짐)이 주어진다면 A가 일어난다)을 통해 유사한 총체들 내에서 동일성을 띤 요인들만을 취하며, 이로인해 동등-함을 '재현'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반복을 가져오는 것을 놓쳐버린다". 왜냐하면 "본질상 반복은 어떤 독특한 역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역량은 일반성과 다른 것이다".

  • 2022-03-09 16:00

    늦으신 분들 것까지 추가된 최종판입니다.

  • 2022-03-09 20:44

    정군님이 정리한 최종본에서 제가 정리한 부정하여 다시 최종 취합본을 올립니다..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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