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겨울번개 들만철] <12. 유목적 사유> 세미나 후기

한스
2022-02-16 14:21
470

    처음 와서도 느낀 거지만 여기 우리 멤버들은 열정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3시간을 강도 높게 토론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하다가 무얼 깨달으면 서로 굉장히 기뻐한다는 겁니다. 사실 덩달아 저도 기쁘고요. 새로 뭔가를 알게 되면 아하!’하는 쾌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앎, 깨달음에 대한 즐거움과 기쁨은 우리의 본능, 본성일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저는 더 이상 본성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본성’이란 말은 금기어입니다. 우선 ‘본성’이란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그거 본성이야라고 퉁 쳐버리면 더 이상 탐구하고 뭐고 할 게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면 읽기에 관하여

   어제 토론한 것 중에 저는 이면 읽기들뢰즈의 여러 언어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여러 분들이 들뢰즈의 이면 읽기’는 니체의 신체와 깊이 관련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니체가 '신체'를 발명했다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새삼스럽게 신체를 발명했다니. 평생 두통과 위장병 등 건강상의 문제로 고통을 받았을 니체는 신체를 더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자연히 신체에 관해 많은 사유를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매우 다릅니다. 사실 제가 하는 일이 병원에서 진료를 통해 사람들의 신체를 다루는 일인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사람들은 모두 참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질병에 걸리는 것뿐 아니라, 외부의 사건을 받아들임도 아주 다릅니다. 그것은 신체이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사건은 신체라는 문을 통해 감각되고 매번 다르게 느낍니다. 신체이기 때문에 다르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느낌의 재생산. 외부 텍스트를 각각의 시각으로 보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이면 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신체 만큼 유동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매일 몸 컨디션이 다릅니다. 기분이 다릅니다. 하루 중에도 변화무쌍합니다. 유동적입니다. 정신을 생각하면 고정되어 있으나, 신체를 생각하면 유동적입니다. 유동적 지성은 신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니체가 그걸 발명했다는 말일까요? 아무튼 들뢰즈는 ‘니체’를 말하면서 유동적 지성을 말합니다.

   이 이면 읽기에는 원본이 필요 없다는 정군샘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원래 텍스트가 어땠는지에 묶여버리면 사유는 제한될 것입니다. 이면 읽기를 통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로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입니다.

 

들뢰즈의 언어들; 탈코드화, 재코드화, 기계, 전쟁기계, 탈주 등

   어제 토론한 것 중에 많은 시간은 들뢰즈의 언어에 관해서 였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사고하도록 세팅된 우리는 어떤 개념이나 사물을 단어나 문장속에 담아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언어는 그 개념을 다 담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념을 단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게 아닌데 돼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유는 흐름인데, ‘단어나 문장’으로 써 놓으면 이미 다른 것이 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요요샘이 어떤 언어를 볼 때 해석이 아니라 백터로 봐야 한단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어제 가마솥샘을 비롯해서 몇몇 분이 기계라는 단어에 관해 이해가 어렵고 왠지 불편하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기계뿐 아니라 ’전쟁 기계‘란 말은 더 불편합니다. 기계라고 한다면 우린 언뜻 기계 소리, 비인간적, 딱딱함. 알아서 돌아감 등등 이걸 생각하도록 세팅되었습니다. 사실 그 단어(기계)는 우리 머리 속에 그걸 생각하도록 코드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들뢰즈가 사용한 기계라는 개념어는 ’끊임없이 생산한다는, 비인간적 주체, 작동한다는, 자기의 은밀한 규칙을 가진..‘ 등등의 많은 개념을 담아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단어사용 자체가 탈코드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반딧불샘이 기표와 기의는 텍스트의 내성을 회복하는 방식이라고 하면서, 기표까지 떠난 방식의 글쓰기는 어떨까라고 말했습니다. 탈코드화를 공부하다보니 생각이 아주 창의적입니다. 그러면서 다음주 요약문을 써 보겠다고. 모두들 새로운 글쓰기인가?하고 환영하면서, 아렘샘, ___샘도 합류하기로. 기승전결로 세팅된 글, 코드화된 방식의 글쓰기에서 탈주하는 유목적 글쓰기를 기대해 봅니다.

 

댓글 13
  • 2022-02-17 10:32

    네 번째 번개에 이르러 드디어 전면에 등장하신 한스샘 말씀을 많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얼핏 보기에 퇴근 시간과 겹쳐 택시에서 혹은 허겁지겁 외투를 벗는 것과 동시에 줌에 등장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름대로 아 세미나가 재미있으신가 보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서로간에 공명을 하는 것 같다 뭐 이런 세미나 내용과는 상관없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호불호를 따질 문제는 아니지만, 아무튼 들뢰즈처럼 니체가 읽히지 않았던 경험과 겹쳐서 그냥 좀 마뜩찮은 장이었습니다. 개인적인 편견은 참 내려놓기 어렵습니다. 샘 말씀처럼 일리있는 해석들이 오가고,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들뢰즈를 살렸다 죽였다 하는 그 세미나때 나눈 이야기들이  참 다이나믹 했습니다.  다분히 논쟁적인 '오독의 권리(이면읽기의 권리)' 게다가 샘 말씀처럼 제게도 영 마뜩찮은 전쟁기계니 하는 개념어들이 나올때 마다 끄덕끄덕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 흄, 스피노자, 칸트 그리고 니체에 이르러 그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고 딴지를 좀 놓았는데, 정군샘은 다음 시간 베르그손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베르그손을 접한게 거의 없어서 구분하려는 시도가, 그러니까 어디가 베르그손에 가깝고 어디는 들뢰즈의 해석에 가깝고를 구별해 보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요약을 맡았으니 주말에는 좀 차분히 들여다 볼 생각입니다. 

     

    참 기승전결이 없는 글쓰기는 반딧불 샘의 바램이고 저는 그런 글을 읽는 것을 좋아라 하는 사람입니다. ㅎ

  • 2022-02-17 12:54

    저는 한스샘의 후기에서  '신체를 발명했다'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인상적인 것의 인상적임 ㅋㅋㅋ) 이게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사고의 단위, 행동의 단위가 '나'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건 사실 어떤 침입(들숨, 먹기, 감각)과 초과(날숨, 배설, 사유)가 일어나는, 어떤 회로 속의 축전기 같은 것일 뿐이니까요. 그러니까 글에서도 '유동적'이라고 표현해 주신 것처럼 늘 어떤 흐름 속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흐름이 사라지면 그것도 사라지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더는 흐름을 유지시킬 수 없는 상태, 기계적 운동의 해체가 되겠군요. 이점은 17세기 기계론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듯 합니다. 

    이번 세미나는 일단 제가 니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가 없어서 저 개인적으로는 약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 다시한번!' 하며 읽겠다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 그걸 성과 삼아 읽어가봐야겠습니다.

  • 2022-02-17 14:33

    어제 유목적 사유를 소리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어요 ㅎ 애초 발표문이었어서 그런지 단숨에 읽혔어요. 글은 끝으로 갈수록 고조되는 느낌이 있고 마지막에 전쟁 기계가 자주 언급되다, '투쟁의 단위를 발견하는 일', '유목의 단위를 발견하는 일'을 거쳐 마지막으로 '우리는... 물어야 한다'로 끝납니다. 분명히 듣는이에게 무언가를 일으키려고 쓴 글이다, 라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세미나 전에 이 글을 읽을 때 이것이 발표문이라는 것이나 시기적으로 68혁명의 자장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는데, 세미나에서 다른 분들께서 이 부분을 지적해주셔서 이 글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어쩐지 조금 더 이해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사실 제가 이따금씩 아니 아마도 자주 하는 질문 같은데, 철학에서 '무엇무엇 해야 한다'가 등장할 때 그리로 가는 연결점이 무엇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게 돼요. 그리고 (아마도 어쩔 수 없이) 항상 큰 간극을 발견하게 되고요. 그런데 들뢰즈의 이번 글을 세미나 전에 읽을 때 그 간극이 너무나 크게 느껴져서 좀 많이 당황했어요. 심하게 말하면 저는 처음에는 사실 이 글 자체가 하나의 농담처럼 보였어요. 특히 해석 문제는, 니체와 관련해서는 언젠가 한 번 그랬던 것처럼, 제 입에서 시니컬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을까 저어되어 제 자신의 판단을 일단 유보하고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듣기만 했어요. 르꾸샘께서 질문하신 대로 정당한 읽기라면 무엇이든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저는 벗어나기 어려웠어요(저는 원칙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니체를 천재 또는 영웅으로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게다가 듣는이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도그마로 만드는 전형적인 수사(부당한 오독과 정당한 오독)를 말하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니체가 아닌 들뢰즈의 글에 웃게 될 지경이었어요..

    하지만 세미나를 거치고 소리내어 한 번 더 읽은 지금, 그저 계속 함께 더 읽고 싶다고 느낍니다. ㅎㅎ 그리고 더 자세히 읽고 듣고 싶어요.
    한스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게 익숙한 해석에 기대지 않고 끈기 있게 나갈 때 열리는 것들이 기대되어서요.

  • 2022-02-18 23:07

    이 재밌고도 심오한 들뢰즈  세미나는 저같은 철알못이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오기와 같은 마음으로 이전에 없던 강도?를  신체에 새기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스샘 후기를 보니 환자를 진료하시는 과정에서 몸과 느낌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얼마나 유동적일지에 대해 많은 성찰을 가지신 거 같네요.   니체-들뢰즈는 사유는 몸의 불쾌 또는 쾌감을 동반한다는 것 그리고 종종 이것에 의도적으로 부딪히는 과정에서 자유로움이 탄생된다고 하였는데 치료 행위와 사유 행위에 무언가 공통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것도 다 오독의 힘, 또는 이면 읽기로 보아 주시길요. ㅎㅎ 

    니체와 같은 반철학자를 별 이유없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고도의 사유 훈련을 거치면 좋았겠지만 저는 그런 기초도 없이  이것저것 갖다 붙이는 어깃장으로 책을 봅니다.  그러다 들뢰즈가 전하는 니체를 보니 위안도 되고 외부성이나 웃음이 주는 자유를 조금 누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말이야 방구야 나는 이렇게 노는구나. 철학이 주는 무거움이 이렇게라도 덜어내는구나 그런 생각도 드네요. 예전에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란 책을 읽었는데 이것이 어쩌면  독자가 가진 권리요 새로운 창조 행위라는 것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번 베르그손은 정말 어렵게 느껴지네요. 몇 구절 읽다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딴 짓하고 있습니다. 몇 일 안에  어떤 오독 또는 창조행위를 할지 모르겠네요. 나름의 강도를 지니기엔 문장안에 너무나 촘촘한 개념들이 박혀 있어서 숨이라도 잘 쉴 수 있을까요.  하지만 노벨 문학상까지 받으셨다고 하니 혹시 성은이 내릴까 하여 꾹 참고 갈 때까지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 2022-02-18 23:37

      소설 책 보듯이 휘리락 읽은 적이 있어서 뭐 어떻게 되겠지 하고 있는데 어려운가요? 하 큰일이네요. 저도 베르그손 앞부분 요약해야 하는데…니체는 제게 그냥 꼴통이었는데, 말이야 방구야 하면서 웃으며 니체를 읽을 수도 있겠네요…들뢰즈가 말한 웃음은 아니겠지만…말이야 방구야를 기억하겠습니다. 다시는 안보려고 안보이는 곳에 처박아둔 니체 전집을 꺼내 놓았습니다. 뭐 인연이 될 때 다시 함 보지 뭐 이런 가벼운 마음을 먹어보기로 했습니다. 

  • 2022-02-19 15:31

    하하.. 이제 아렘샘이 니체전집 버릴 때가 되었는데.. 아렘샘이 니체 전집을 언제 버릴까? 그러면 내가 주워와야지~

    은근 기대하고 있었는데 제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군요.ㅎㅎㅎ

     

    저는 이번 글에서 들뢰즈가 니체를 얼마나 애정하는지, 꿀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때 맑스를 애정했던 저로서는..(아니, 지금도 막연히 애정하고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첫정이 무섭거든요^^)

    그래서 맑스, 프로이트와 니체는 레벨이 다르다는 들뢰즈의 단언에 잠시 삐칠 뻔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이면읽기 말인데요.. 오독이라고 해야하는지, 이면읽기라고 해야하는지 지금도 헷갈리지만.. 

    내성이 아니라 외성, 외부와의 연결을 중시하는 이면읽기로 니체의 경구를 읽어야 한다는 들뢰즈의 조언에는 귀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니체를 읽을 때만이 아니라 누구를 읽든 그런 읽기의 습관, 태도, 역량이 제게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해 와서 그런가봐요.

    제 식으로 말하자면 내성적 읽기는 발산의 방향보다는 수렴의 방향으로 독해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요.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포스트 모던적(^^) '오독의 권리'를 주장하는 건 좀 유치다고 생각하지만요.

    아무튼 저자의 속마음까지 넘겨짚으려는, 단 하나의 진리에 가 닿으려는 이면읽기가 아니라

    텍스트 외부와 접속하는 이면읽기라는 방향은 앞으로도 어떤 텍스트든 텍스트와의 만남에서 종종 만트라처럼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 2022-02-20 09:06

    전 칸트도 니체도 익숙지않지만, 지난 시간의 칸트보다는 이번의 니체가 좀 더 수월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세미나를 하고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기도 하고 오락가락입니다.ㅋ 여튼 넘어야 할 원본 텍스트들만 차곡차곡 쌓여 가네요, 엄두가 안 남에도 말이에요:)

     들뢰즈의 '니체 읽기'에 대해 상반된 의견을 '피력'하시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정리하는 것도 제게는 큰 배움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장에서 들뢰즈의 정치적 지향을  좀 더 분명하게 '감지'했다고나 할까요? 계속 읽으면서 '헐, 이거 엄청 혁명적인데...' 이러면서요.  그러면서 동시에 '아, 이거 가능한가?...'라는  의구심도 스멀스멀했습니다...
    신체를 '발명'하는 일, 모든 코드를 '휘젓는 일', 텍스트를 '기계화'하는 일 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체험'하여 저의 언어 속에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기를 또 기대해봅니다^^       

  • 2022-02-20 23:31

    매 번 참여할 때마다 '나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재미있다'는 마음이 드는건 왜일까요? 

    지난 주 르꾸샘의 질문에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멜라니 클라인에 관해 짧게 정리한 글과 참고자료 올립니다. ^^

     

     

    • 2022-02-21 08:51

      아이고 고맙습니다. 

    • 2022-02-21 09:58

      슨생님~ 완전 감사드려요!! 저의 뜬금없는 질문이 쌤께 ‘토스’되는 순간 ‘아 이거 이상한 방향으로 ‘발산’하는구나’ 생각했는데…아니었군요ㅎ그래도 담부터는 안 그러는걸로!!^^

      • 2022-02-21 10:29

        오! 감사합니다!!

        넙죽 잘 받겠습니다.^^

    • 2022-02-21 11:56

      아... 친절하게 하일라이트까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2-02-21 18:26

      자료 감사해요... 저도  '이게 뭐야'와 '좀 땡기네'를 왔다 갔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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