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1장-후기.. 저는 죽음을 향한 존재로 미리 달려가보았습니다.

여울아
2021-10-28 23:23
368

 

저는 골치 아픈 것 싫어합니다. 단무지.. 단순무식 나쁘지 않습니다.

복잡하게 돌려 말해봤자, 결론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철학... 공부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머리 아프지 않고도 잘 살면 되잖아요...

그래서 문탁샘이 우린 모두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혼자 중얼거릴 때, 아... 또 시작이야.

속으로 짜증이 났습니다. 저는 문탁에서의 공부가 딱히 목적이 있던 것이 아니기에 즐겁게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공부, 특히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고 하는 일들이 제겐 그 자체로 평소 나답지 않은 일이었기에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삶의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의 실직. 딸의 사춘기. 마냥 평온하게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겁니다.

이 시간 집에 있지 않고, 돈벌이에 나서지 않고 문탁에 있을 이유에 대해 스스로 답해야 했습니다.

열여덟 살 이후 중단된 존재 물음이 시작된 겁니다.

그리고 어떤 의식의 전개 때문인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부, 즉 철학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삶에 작은 철학자가 되어야겠다고 말이죠. 철학은 거창한 게 아니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10년 전 문탁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논어”라는 세인들의 빈말처럼

동양고전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우연한 선택(?)도 지금까지 40년 인생과 전혀 다른 기투였기에

아직까지 버석거리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내년엔 과학세미나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이 죽음을 향한 존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하는 공부라면

과학은 존재의 시작, 존재함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불안에서 시작됐습니다. 만약 내가 더 이상 문탁에서 공부할 수 없다면??

이런 불안이 닥쳐오니까 문탁 생활의 종말 앞으로 달려가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내게 무한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순간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론적 가능성이 드러나 보였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놀랍게도 기존에 하지 못했거나 안했던 문탁의 공부들이 짜증과 협박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맞아들이고 싶은 의미 있는 변화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가마솥님 질문으로 끝을 맺고 싶습니다.

앞에 달려가봄 혹은 죽음으로의 선구가 항상 본래적인 존재로서의 삶으로 인도하느냐?

아닌 것 같다고 하셨지요? 제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너무 찔려서요.

왜냐하면 제가 10년 전 “죽기 전에 읽어야 할 논어”라는 세인들의 말처럼 공부를 시작했듯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게 철학과 과학 공부를 삶의 방편으로 선택했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일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나의 존재물음 앞에 서고자 하는 선택이었는데 말이죠. 적어도 그 당시 그 순간에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미리 달려가봄이 환상적 추측과 어떻게 다른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다음 장에서.

*** 오늘 배운 내용으로 스토리텔링한 것이니 너무 심각해지지 않기...(되돌아섬??)

댓글 5
  • 2021-10-29 00:01

    ㅋㅋㅋㅋ쉽게 들어오는 비유네요.

    저는 '공부할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제게도 어떤 이유에서든 공부의 끝이 올 가능성은 있으니까요... 종말로 달려가본다면 하이데거를 더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될지도요(그치만 생각만으론 여전히 위기감은 안느껴집니다..)

  • 2021-10-29 08:40

    미리 달려가본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ㅎㅎ 

  • 2021-10-29 15:10

    전 요즘 뭐랄까. 늘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제 인생에서 비교적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 지역에서 4년째 살고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일까요?
    불안이 hide & seek를 잘 하고 있고...라기 보다 제가 지금의 비본래적인 삶에 안주하고 싶어서... 하이데거의 사상을 자꾸 멀리하게 되나 봅니다. 시작은 했는데, '뭐 그렇게까지' 라며 계속 딴지를 걸고 싶어지거든요. 하이데거에 '빠져 있음'이 안되네요 ㅎㅎ
    좋지 않은 컨디션이 이어져 하루 연가를 내니 후기에 댓글도 답니다 ㅎㅎ 여울아샘의 신속 후기 잘 읽었습니다. 마솥샘 말씀대로 정말 에세이의 썸네일을 본듯하네요 ㅎㅎ

    • 2021-10-29 15:20

      어제는 무사샘의 다른 목소리 톤이 무지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가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난달까? ㅎㅎ 중독적인 목소리십니다~

      쾌차해서 많이많이 들려주세요~~

  • 2021-10-31 10:03

    저기... 제 입장엔 변함이 없습니다.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신게 아닐거여요!! 그리고 '스토리텔링' 넘 재미있군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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