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적 실재론의 첫인상

요요
2021-06-08 12:56
691

일본의 젊은 철학자 이와우치 쇼타로가 쓴 <새로운 철학교과서>에서 퀑탱 메이야수와 그레이멈 하먼 부분을 읽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 그리고 처음 듣는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개념.

 

사변적 실재론이란 무엇인가?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은 현대철학의 무대에 등장한 새로운 철학운동으로 2007년 런던대학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시작된다. 그 워크숍에는 퀑탱 메이야수, 그레이엄 하먼, 레이 브래시어, 이언 해밀턴 그랜트가 참가하며, 그들이 사변적 실재론의 부팅멤버가 되었다.(45쪽)"

 

"논문집 <사변적 전회> 편자들의 선언에 따르면 사변적 실재론을 구성하는 철학은 '사유로부터 독립한,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인간으로부터 독립한 방식으로 실재성의 본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사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서양철학사>1,2권을 읽으면서 우리는 철학사에 중요한 전회들이 있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전회들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정초하는 질문이자 미완의 답을 내놓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중 우리와 가장 가깝고, 가장 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칸트가 성취한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이다. 칸트는 '존재'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사유와 존재의 상관관계를 탐구하는 것을 철학의 영역으로 한계지웠다. 

 

퀑탱 메이야수는 칸트 이후의 철학을 '상관주의'라고 이름붙인다. 퀑탱 메이야수에 따르면 헤겔도, 니체도, 하이데거도, 비트겐슈타인도, 들뢰즈도 상관주의의 바구니 안에 다 쓸어담을 수 있다. 아무튼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상관주의는 존재자들에게는 존재이유가 있다는 생각(충족이유율)을 뿌리까지 없애버렸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에는 어떤 근거도 이유도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남게 되었다.  세계의 비이유에 직면한 인간은, 이성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 결과가 니힐과 멜랑콜리이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상관주의가 도달한 세계의 비이유야말로 이성의 유한성의 표식이 아니라 우리의 앎이 시작하는 곳이며, 새로운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유없음, 근거없음, 즉 '오직 우연성만이 필연적'이라는 '우연성의 필연성'이 우리가 철학을 새롭게 세워야 할 절대적 지식이고 절대자(하이퍼 카오스)다. 이성은 여기에서 출발하여 철학에서 지워버린 물자체를 재규정해야 한다. 실험도 관찰도 아닌 사변적 추론에 의해서만 그것은 가능하다. 이렇게 메이야수가 사변적 이성의 추론에 의해 도달한 물자체에 대한 철학, 존재론이 바로 사변적 실재론이다.

 

한마디로 사변적 실재론의 첫 인상은 '충격'이었다. 사변적 이성을 복권시키려는 메이야수의 사변적 추론은 따라가기 벅찼다. 스트레이트로 한 방 먹은 느낌? 이럴 때면 사사키 아타루의 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오른다. '읽을 수 없는 것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뭐 그런 약간 허세스럽게 멋있어 보이는 말들 말이다.ㅋㅋ 그런데 그런 말도 책을 실제로 독해하는데는 약발을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메이야수를 읽는 동안은 '메이야수적 주체'가 되는 효과는 있는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는 사이에 잘 모르는 가운데에서라도 메이야수처럼 생각해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니 말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철학사 세미나에서는 한 철학자에게 올인하는 그런 경험의 지속기간이 너무(!) 짧다는 점.ㅋㅋ 이 효과는 1주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나는 곧 메이야수를 버리고 또 다른 철학자를 읽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또 철학 세미나의 묘미이니..(하하 후기에서 아렘샘 따라하기^^)

 

그외 각자의 마음에 흔적을 남긴 이야기들은 다른 분들의 댓글을 기대하며 저는 이만 총총~

 

 

 

댓글 5
  • 2021-06-08 15:56

    정리 감사합니다. 읽는데 뭔가 아름답다는 기분이 드네요... 진심으로.

    그런데 이번 시간에는 요요샘 덕분에 많이 웃었어요. 요요샘은 이해가 안 되면 원한에 사로잡힐 수 있으시구나.. 요요샘의 놀라운 공부의 동인은 약간은.. 거기서? ㅎㅎ 1장 2,3절이 너무 어려워서 결국엔 '괜찮아. 요요샘이 이 부분 맡으셨으니까. 종종 보이시는 예의 그 인자한 표정으로 '여기가 까다롭지만 이렇게 이해해볼 수 있어요'하고 자라락~~설명해주시겠지? 했는데 진짜 그렇게 해주셨어요. (하이퍼카오스 이외의 필연성을 왜 찾아야 했는지도 설명해주셨는데 그 부분은 아직도 잘 이해가...) 다만 표정이 달랐어요. "나 망령이야~~!" ㅋㅋㅋ

    신은 아직 도래하기 전이지만 샘 스스로 원한을 조금은 풀어내신 듯한데...... 아무튼 세미나 직전에 요요샘의 질문의 답을 고민해보느라 메이야수를 좀 더 꼼꼼히 볼 수 있었습니다. 메이야수가 사변적 이성의 힘을 어디까지 가져갔는지는 세미나에서 더 깨달았지만요. 신을 요청하되 그 방법이 이성적이라는 것. 그런데 이 이성이 이를테면 계몽주의적 이성을 초월하는, 더 근본적이고 넓은 이성, 우리가 익히 사용해온 사변적 이성이고, 그러한 이성이 신을 정당히 요청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 제1원인 아닌 우연성 즉 비-이유율에서 시작되는 논증.. 정군샘 말씀대로 클래식한 철학을 동시대에 맛본 기분이 좀 짜릿(!)했습니다.

    하먼은.... 제가 자주 그렇지만 특히 오해가 많았어요. ㅎ 질문을 올리다가 미리부터 대놓고 헛다리를 짚지 않았다면 다른 분들 장단 맞추다 내가 알고 있다고 착각할 뻔.... 상관주의와 대결하는 하먼을 그냥 이유도 없이 상관주의자라고 ㅎㅎ 다음에는 더 잘 읽어가겠습니다. 밤이면 덮고 잘 이불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가끔은 걷어찰 수도 있는 고마운 이불...

    철학자들을 정리할 때 그가 대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파악하면 기본 전제를 잡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렇게 일단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파악해서 정리하고 그것과 대조해가면서 문장을 보면 좀 더 정확히 읽을 수 있다, 라는 공부 요령을 우리 세미나에서 배운 것 같아요. 공부가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입니다. 하다보니 이것으로 저는 이번 에세이를 다 쓴 것 같군요. ㅎ

  • 2021-06-08 23:47

     열시 전에 집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못하는 술 때문에 얻은 취기 때문에 참석을 엄히 금한 어제였습니다. 

     

    저작권이 없는 '철학'란 말이니 가져다 쓰셔도 무방합니다. 메이야수의 하이퍼카오스, 신, 사변적 이성이 논의되는 지평은 어찌보면 관념론적 지평인데, 이걸 실재론의 영역으로 끌어내는 메이야수의 독특함을 어찌들 읽으셨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일단 떨어지는 공감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읽어갔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몇몇 질문들은 시비거는 질문 밖에 안되는데 왜 그런 질문들을 하셨는지는.... 뭐 불참자로서 유구무언입니다. (어떤 질문이 그랬는지는 질문하신 샘들에 대한 공격으로 비칠 수 있으니 비밀입니다. ㅋㅋㅋ) 

    분명히 뭔가가 걸려서 그런 질문이 나왔을텐데...

     

    그런데 요요샘... 하먼은 어디가고 메이야수만 남았습니다. 하먼을 살려주세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하먼에서 인상 깊었던 질문 구절 올립니다. 

    메이야수나 하먼이나 둘 다 초월성의 실재성을 찾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객체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하먼은 이리 말합니다. "대상의 실재를 통째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인식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관계 일반의 본질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 2021-06-09 07:21

      '사변적 실재론'이 관념론에서 나온 실재론과 어떻게 다른가를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세미나에서는 약한 상관주의와 강한 상관주의에 대해 얘기하며 그 점을 우회적으로 다루지 않았나 싶습니다.
      칸트는 물자체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했는데 다만 물자체에는 그것만의 질서가 있는지 어떠한지 논의를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것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으니 요요샘 말씀대로 칸트에게 중요해진 건 인간의 인식 방식 내지 구조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다만 인식은 못해도 사고할 수 있다며 물자체의 실재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했기에 메이야수는 칸트를 약한 상관주의자라 이름붙였습니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게임 그 자체만을 알 수 있다고 했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느냐가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라는 말로 세계가 실제한다는 확신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한 상관주의자로 분류됐고요.
      그런데 메이야수는 모든 것이 우연적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라는 비이유율로부터 내 앞에 보이는 사과의 존재함부터 죽은 자를 부활시킬 가능성까지 모든 것을 실재성의 자리에 갖다 놓습니다. 현재 신이 부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언젠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기에 도래할 신은 실재성을 얻게 되고요 네, 샘 말씀대로 메이야수가 이렇게 초월성에 실재성을 부여합니다. 높이가 중요한 쇼타로는 이 점에 특히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1원인으로서 신이 주어져 있고 거기서 실재성이 근거지어지기 때문에 사과가 존재하는 게 아닌 게 된 것 그 자체도 놀라운 성과라고 생각이 들어요. 사실 그거 되게 우스운 얘기 같기도 하잖아요.. 내 앞에 있는 사과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를 사변적 이성으로 제거한 것이 사변적 실재론자로서 메이야수가 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 2021-06-09 10:04

    와우. 댓글란이 레이크시티가 되었군요 ㅎㅎㅎ.

     

    저는 이번 세미나에서 본 메이야쑤와 하먼 두 사람에게, 뭐랄까요... 어렴풋하게 양가감정이 생겼습니다. '높이'와 '넓이'를 다시 구축하려는 동기와, 노력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당연하게도 그런 형태의 답안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메이야수가 '사변'을 이용해서 '우연성의 필연성'을 도출하고, '하이퍼카오스'를 '절대자'로 구축하는 것과 동시에 그조차도 '절대 필연성'이라는 점에서 '무언가의 조건'에 따른다는 것을 근거로 그마저도 '탈-절대화' 하는 부분은 소름이 쫘악 돋을 정도로 대단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먼의 '관계 일반의 본질' 안에 '근본적인 은폐'(하이데거가 생각납니다)가 있고, 따라서 '인간 인식'과 무관한 객체 간의 '관계가 주제화' 된다는 발상도 '발상' 차원에서는 유의미하다는 생각이 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의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야수의 경우에는 20세기 철학이 애써 지양한 그런 식의 '사변적 사유'를 다시 불러와도 괜찮은걸까 하는 찜찜함이 있고요. 하먼의 경우에는 세미나 때도 말씀드렸지만, 그의 주장이 정치한 논증이 아니라 사실상의 '효과'를 노리는 주장이라면(저희 책에서는 거의 그런 맥락으로 나오니까요), 단지 '객체와 객체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식의 선언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찜찜함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원전'을 보면 달라질 생각일 수는 있겠지만... '새철교'만 보기에는 이 사유들의 '다음'이 잘 그려지질 않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높이'와 '넓이'가 사라진 세계에서, 이전에 그것들이 가졌던 부작용들을 제거하고 귀환시키다는 기획의 발상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꼭 그런 식의 길만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아마 제가 여전히 '상관주의자'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저는 '높이'와 '넓이' 없는 (밝고ㅋㅋ)'윤리적 삶'이 가능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 2021-06-09 15:48

    레이크시티...ㅎㅎ

     

    오는 19일 토요일에 그레이엄 하먼이 인터넷 화상 강연회를 한다고 합니다. 궁금해서 한번 신청해봤습니다:)

    http://daziwon.com/?mod=document&uid=7540&page_id=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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