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1회차 메모와 발제

토토로
2023-10-12 23:12
186

메모 올려요. 갈수록 메모 수준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 마구 찔리고 있어요.

일단 오늘은 이렇게 올리고 내일을 위해 자야겠네요.

댓글 8
  • 2023-10-13 00:06

    올려요

  • 2023-10-13 01:13

    대리석이 알 수 없는 논리: 타자를 흡수하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변화하라.

    투피과라니 족의 종교는 인간적인 것과 신성한 것 사이의 분리가 넘어설 수 없는 존재론적 장벽이 아니라 극복되어야하는 어떤 것이라는 관념에 기반한다. 인간과 신은 같은 몸체를 가지고 있고 같은 조건을 공유했다. 인간성이란 하나의 조건이지 본성이 아니다. … 투피 사람들은 선택받은 자들의 오만함 혹은 타자를 자기 이미지로 환원하려는 충동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즉, 유럽인들이 인디오를 쓸모있는 동물이나 잠재적인 유럽인 및 기독교 신자로 보아서 그들을 원했다고 한다면, 투피 사람들은 유럽인들을 완전한 타자성으로서 원했다. 유럽인들은 투피 사람들에게 자기 변화의 기회, 즉 문화의 기원에서부터 산산히 흩어진 것들이 재결합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고 그에 따라 투피 사람들은 인간의 조건을 확장하거나 혹은 나아가 그것을 넘어설 수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야말로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잘못된/엇갈린 만남에서 ‘낙원의 비전’을 보았던 것이다. 인디오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에게 부여하려는 광적인 욕망을 가지지도 않았고 자신의 민족적 우월성을 이유로 타자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타자와의 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변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야생의 혼이 가진 변덕스러움은 그 열림의 순간에서, “확증해야 하는 근본적인 가치가 정체성이 아니라 교환”인 곳의 존재방식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실체적 동일성이 아닌 관계적 친연성이 확증해야 할 가치였다. 47p.

    확증해야 하는 것이 정체성이 아니라 ‘교환’인 집단의 관점에서 접촉, 저항, 동화의 이야기들은 어떻게 나타날까? 오늘날에도 다원화된 개인들이 유사성이 아닌 다양성을 기꺼이 나누는 곳, 정체성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가 가능할까? 어쩌면 퀴어문화축제가 그런 사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성소수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 그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 경찰과 같은 정부 행위자들까지 축제의 과정에 참여시킨다. 성소수자들이 정체성을 드러낼 기회를 갖는 동시에 그들의 현존을 노출함으로써 같은 시민들이 그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물론 말이 쉽지, 그러한 열림의 순간에 정체성들 간의 만남이 적대와 혐오로 귀결되지 않고 서로 흡수하고 그 과정에서 변화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누군가를 완전한 타자성으로서 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럼에도 낙원 앞에 서서 낙원을 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라 믿어본다. 은매화는 감히 대리석 조각이 알 수 없는 논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 2023-10-13 02:35

    발제입니다
    뚜버기쌤 감사드려용

  • 2023-10-13 03:15

    올립니다.

  • 2023-10-13 07:07

    달팽이샘 메모
    문화접촉과 문화변동의 이야기는 타자에 의한 흡수 혹은 타자에 대한 저항이라는 만연한 이분법에 의해 구조화 되어왔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것을 유지해야할 경계가 아니라 주체를 적극적으로 엮어내는 관계들과 상호작용들의 연쇄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때 이 상호작용의 이야기나 이야기들은 더 복합적이면서도 덜 직선적이고 덜 신학적일 것이다. ‘역사’의 주체가 더 이상 서구적이지 않다면 무엇이 바뀔까? 확증해야하는 근본적인 가치가 정체성이 아니라 교환인 집단의 관점에서 접촉, 저항, 동화의 이야기들은 어떻게 나타날까?(Clifford) 31쪽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이 수천명씩 죽는데도 미국은 이스라엘을 적극 지지하는 이런 세계에서 살다보니 이런 이야기가 더 눈에 쏙 들어온다. 인디오들로부터 “사회의 기반(혹은 기반의 부재)가 자기와의 일치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있는 사회”에 대해 잘 배웠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금이라도 배울 수 있을까?

  • 2023-10-13 07:57

    견고한 대리석보다 타자에게 열려있는 은매화가 좋다
    이번에 책을 읽다보니 계속해서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1973)이 계속 생각나서 비교해서 읽어보았다.
    카스트루는 “문화에 대한 이해는 믿음과 개종이라는 관념에서 유래하는 패러다임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근대인으로서의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신학적인 양식으로서, 말하자면 개개인이 종교적인 방식으로 고수하는 ‘믿음의 체계’로서 상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성의 인류학적 환원은 우리 학문 분야의 구성에서 매우 결정적인 과업이었다. 이 과업은 문화 개념을 그 개념이 담고자 하는 가치들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인류학은 태생적으로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들을 가치로서 문화가 추구해야 할 개념으로 위치지었기 때문이다. 클리포드 기어츠는 ‘문화체계로서의 종교’를 말했지만 카스트루는 거꾸로 ‘종교체계로서의 문화’라는 관념이 전제된다고 주장한다.
    (자민족중심주의에서 벗어난) 근대인인 인류학자들은 인디오들이 종교는 없고 미신에 빠져있는 미개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악습은 ‘종교적’이라 불릴 수 있는 일련의 믿음에 충실한 결과라고 말한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논의에도 그런 결이 있어 보인다. 클라스트르는 테베, 노브레가, 안치에타조차 “악마적 미신이 종교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수준으로 고양되어 있다는 것을 대경실색하며 확인”했음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클라스트르는 백인의 식민지배에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부족적 정체성을 유지해온 투피과라니의 한 부족인 음비아족의 종교관을 분석한다. 투피과라니족은 브라질 남쪽 파라과이 강 유역에 거주한 부족이다. 현재의 인간들은 악으로 가득한 대지에 살고 있으며 원래 살아야 할 곳의 입구에 다다라 잠시 멈춰있다. “신체와 영혼의 볼완전함은 그들로 하여금 악의 대지를 버리지 못하고 경계의 이쪽편에 머물러 있게 한다. …… 신을 기쁘게 하는 것, 영원한 땅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는 말, 미래의 삶의 규범을 가르쳐주는 이야기를 칭송하는 것, 이것이 음비아족의 소망이다. …… 최후로 남은 자들은 대지를 떠나기를 열망한다.”(<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204-205) 예전에도 느꼈지만 클라스트르가 해석하는 이들 종교의 심오함과 거기에 담긴 비극적 감각은 지나치게 서구 종교에 꿰어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클라스트르의 분석이 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불완전한 땅에 거주하는 현생을 넘어 “불멸의 땅, 어떤 조그만 것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땅을 약속받은 사람들”(<국가에 대항하는 사회>,209)이라는 표현이 너무 상투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클라스트르 역시 근대 인류학자의 한계 안에 있기 때문인 걸까? 카스트루는 이렇게 지적한다. “이제 우리는 투피남바족이 투피과라니족과 마찬가지로 ‘악이 없는 땅’이라는 테마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류학적∙신학적∙우주론적인 ‘믿음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안다”(27)라고 말이다. 하지만 카스트루는 “결국 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문제를 어렵게 만든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클라스트르를 단순히 시대적 한계 아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클라스트르는 불완전함의 뿌리는 “모든 사물은 전체 속의 하나”라는 사실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불완전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사물은 하나이기 때문에 불행은 그 불완전함으로부터 생긴다고 과라니족은 생각한다. 과라니족에게 하나는 악 그 자체이다. 통일성을 향하는 것은 불행의 근원이며 세계를 불완전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과라니족은 “하나의 절대적 지배”를 거부하며 저항한다. “만물의 통일성을 지정하고 만물을 그 통일성에 따라 명명하는 것은 만물에 한계와 유한성 그리고 불완전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클, 215)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은 동일성의 원리(A = A) 바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동일성의 원리는 이것은 이것, 사람은 사람이라는 논리이다. 따라서 이는 배중률() 을 자명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저것이 아니며,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과 다른게 당연하다.
    클라스트르가 보기에 과라니족이 동일성과 배중률의 원리 아래 존재를 규정짓고 세계를 한정함으로써 진정한 힘과 완전한 세계를 침묵 속에 감추어 버린 비극이라고 여긴다. 완전한 세계에서 이것은 이것임과 동시에 저것이 되고 과라니 족은 인간임과 동시에 신이 될 수 있지만 그 깨달음은 인간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언어의 한계에 갇혀 버렸음의 발견이기에 비극인 것이다. 과라니의 신 투판은 이렇게 인간들에게 조언한다. “나는 먼 곳으로, 더욱 먼 곳으로 가고 있어 너희들은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여러 가지 이름을 잊지 말거라.”(클, 218) 클라스트르의 분석은 인디오들의 “타자에게 열려 있다”는 특징의 근원 중의 하나를 들려주는 것 같다. 카스트루가 말하는 “타자란 단순히 사고하기에 좋은 대상이 아니라, 사고하기 위해 필수적인 존재”(30)이며 신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강력한 ‘일의 종교’인 기독교의 전통 아래에서 자라난 서양의 문화가 대리석이라면 ‘일’의 지배를 악이자 불완전이라는 종교적 전통 아래서 자란 인디오의 문화는 은매화인 것이다. 지금은 베르니니의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보다 은매화의 아름다움으 더 필요한 시절임은 분명하다.

  • 2023-10-13 08:00

    p66 강압의 행사에 기반하지 않은 정치권력을 상상할 수 있을까? 믿음이라는 규범적인 경험에 기초하지 않은 종교 형태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은 완전히 같은 문제일 수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크라스트르의 대답은 ‘원시사회’의 발명, 다시 말해 강압적이지 않은 정치권력의 초월적 주체의 발명이었다. 그에 반해 두 번째 질문의 대답은 이 주체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는 것, 다시 말해 주체의 근본적인 탈초월화를 함의할 수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종교적인 것’이 문화의 궁극적인 본질에 가닿는 왕도라는 관념에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가정의 배후에 뒤르켐 학파의 우상인 총체성을 발견한다. 요컨대 부족의 고유한 믿음은 부족의 존재에 대한 믿음, 즉 전체를 상상하고 구성하려는 충동이다. 그것은 부족의 존재이자 존재의 보존이다. 야만인이 그러한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외부 배제라는 근본적인 행위로써 제도화하는 재귀적이면서도 동일성에 의해 견지되는 총체성으로서의 사회라는 관념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심을 포스트모던하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결단코!) 전쟁과 족외식인 복합체에 근거한 투피남바의 종교는 우리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 구성하는 형식, 다시 말해 타자를 포섭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떠나는 것이 요구되는 방식의 형식을 투사했다. 외부는 내부화의 과정과 부단히 얽혀있었고, 내부는 밖을 향하는 운동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타자란 거울이 아니라 목적지였다.
    이 부정(不正)의 인류학을 주장하기 위해 내가 문화적인 질서나 투피남바 사회, 혹은 종교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적하는 것은 오직 이 종교가 믿음이라는 범주의 관점에서 틀지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 문화적 질서가 다른 질서들을 자동적으로 배제하는 것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것, 이 사회가 타자성을 내재화하는 관계 너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바는 투피남바 철학이 본질적인 존재론적 불완전함을 확증한다는 것이다. 사회성의 불완전함, 일반적으로는 인간성의 불완전함 말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부성과 동일성이 외부성과 차이에 위계적으로 종속된, 생성과 관계가 존재와 실체보다 우위에 있는 질서였다. 이러한 유형의 우주론에서 타자는 문제(유럽의 침략자들은 타자를 문제로 삼았지만) 이전에 해답이다. 은매화는 대리석이 알 수 없는 논리들을 가지고 있다.

    “인디오에 관한 것만이 아닌 ‘변덕스러움’이라는 주제의 설정은 자신과 닮지도 않았고 동화시킬 수도 없었던 16세기 유럽인을 논의 속에 필연적으로 호출한다... 그리고 이 인물을 통해 사고하는 것은 인디오에 관해 말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산출하게 된다... 이렇게 설정함으로써 이 책의 행간에 감춰진 동시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사막여우

    저자는 인디오의 변덕스러움을 복종의 부재에서 찾는다. “그들을 강제로 복종하게 만드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p62). 유럽인들이 인디오들을 자신들의 쓸모를 위해 교화시키려 했다면, 투피 사람들은 유럽인들을 완전한 타자성으로서 보고 있었다. 그들은 타자와의 관계, 가상의 양식 속에서 항상 존재하는 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변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야생의 혼이 가진 변덕스러움은 그 열림의 순간에서, “확증해야 하는 근본적인 가치가 정체성이 아니라 교환”이라는 그들의 존재 방식의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실체적 동일성이 아닌 관계적 친연성이 그들로서는 확증해야 할 가치였다. “인류학의 역할은 타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다원적으로 만드는 것이다”(Viveiros de Castro 2014). ‘타자가 거울이 아니라 목적지’라는 저자의 말은 인간과 비인간의 사이의 경계를 무궁무진하게 확장하면서 기후위기와 생태 파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준다. 망가지고 상처 입은 지구, 그리고 지구의 모든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과 맺는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 2023-10-13 08:58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첫번째 메모_참

    *인디오의 명예, 인디오의 세계 그 자체(p48)

    -내가 보기에 여기서 명예란 투피남바 문화의 원초적인 가치를 표지한다. 혼인의 부채라는 원형적 장치를 통해 우리 외부에 있는 타자성을 포획하고 그것을 ‘내부의' 사회적 논리에 복속시키는 것은 사회의 주요한 동력이자 모티프로서 원심적 충동(centrifugal impulse)에 의한 응답이다. 적의 섬멸을 위한 전쟁과 유럽인들에 대한 열광적 환대, 식인으로 일어나는 보복과 이데올로기적 탐식은 모두 동일한 성향과 욕망을 표현한다. 타자를 흡수하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변화하라!신들과 적들, 그리고 유럽인들은 잠재적 친연성(potential afinity)의 형상이자 매혹적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매혹되어야 할 타자성의 다양한 변형이였고, 그러한 타자성이 없다면 세계는 무관심과 무감각의 나락으로 떨어질 터였다.-
    -타자를 흡수하고 스스로 변화하라!!!!
    ‘타자성의 다양한 변형’은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일관성의 중요한 포인트인 듯. 그리고 타자는 대상화의 존재가 아닌 적대적 존재이자 잠재적인 친연적 관계.
    적을 흡수하고 혼인관계를 통한 친족을 만드는 것이 인디오의 존재방식. 그래서 ‘식인’이라는 형식을 통해 타자성을 흡수하는 것. 식인‘은 참아도 복수‘는 못 참는다는 것은 식인이 복수를 위한 형식이기 때문.
    식인의례를 통해 (타자의) 관점을 포식하는 것은
    롤모델이 되는 작가의 작업을 지독하게 모작함으로써 , 결국 스스로의 몸을 통과한 변형된 작업 스타일이 나오는 과정과 비슷한 듯.

    *형이상학들, 왜 또다시 형이상학인가?(p162, 169)

    -인류학은 수많은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인류학자가 무엇을 연구하는지에 따라서 그것은 비교 경제학, 비교 정치학, 비교 식물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인류학이 다른 민족집단들의 형이상학이 무엇인지를 연구한다면 형이상학도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전문적인 철학자가 아닌 다른 민족집단도 형이상학적 사변을 파헤칠 수 있다는 겁니다. 형이상학은 서양의 혹은 학술적 전통의 혹은 철학자들의 사유재산이 아닙니다!!!형이상학은 모든 인간 존재의 필수적인 활동입니다. 또 비인간 존재들도 그러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형이상학은 느슨한 의미에서 보편적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다원보편적 (pluriversal)이거나
    횡단적(transversal) 입니다. 메릴린 스트래선 (Marilyn Strathern)은 아름답고 정교한 문체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문화의 좋은 점은 모두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이 말에 공명하자면, 나는 형이상학의 좋은 점은 모두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스트래선이 문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모두가 그것을 다르게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문화, 수많은 퍼스펙티브가 존재하는것.
    우리 사상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사고가 있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것은 그만큼 자기 중심(서구 중심)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겠지.
    카스트로는 서구라는 자기를 중심에 놓고 거울을 바라보며 사고하는 일련의 사상들을 끝없이 비판.
    -166. 인류학은 민주적 의회의 현장에서 제외된 이들로 부터 정치철학과 형이상학적 사상을 배우고자 합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954
세계 끝의 버섯 2회차 (5)
자누리 | 2023.11.10 | 조회 300
자누리 2023.11.10 300
953
루쉰원정대3-셋째 날 (6)
새봄 | 2023.11.08 | 조회 329
새봄 2023.11.08 329
952
<세계 끝의 버섯> 첫번째 후기
곰곰 | 2023.11.08 | 조회 258
곰곰 2023.11.08 258
951
루쉰원정대3 ㅡ 둘쨋날 (4)
봉옥이 | 2023.11.07 | 조회 386
봉옥이 2023.11.07 386
950
루쉰원정대3 ㅡ 첫쨋날 (5)
노라 | 2023.11.06 | 조회 277
노라 2023.11.06 277
949
<시즌3> '루쉰, 혁명의 문학’ 에세이 발표 후기 (3)
블랙커피 | 2023.11.03 | 조회 279
블랙커피 2023.11.03 279
948
세계 끝의 버섯 -1차 메모 (4)
낮달 | 2023.11.03 | 조회 261
낮달 2023.11.03 261
947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3차시 후기
뚜버기 | 2023.11.02 | 조회 150
뚜버기 2023.11.02 150
946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3차시 메모 (5)
띠우 | 2023.10.27 | 조회 214
띠우 2023.10.27 214
945
시즌3 <루쉰, 혁명의 문학> 에세이에 초대합니다 (7)
반장 | 2023.10.26 | 조회 472
반장 2023.10.26 472
944
인디오의 변덕스런 혼 두 번째 시간 후기
달팽이 | 2023.10.26 | 조회 164
달팽이 2023.10.26 164
943
루쉰읽기, 들풀 후반부 후기 (11)
봉옥이 | 2023.10.21 | 조회 302
봉옥이 2023.10.21 302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