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차이와반복 읽기] 1회차 질문은 여기에 올려주세요!

정군
2022-03-01 22:45
446

드디어! 철학학교 개학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다들 <유동의 철학>은 잘 읽고 계시겠지요? 

공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각자 1개 이상 3개 이하로 질문을 만들어서(쥐어짜내서) 이 게시물에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댓글 18
  • 2022-03-02 23:06

    ‘철학사는 사고의 모델을 만들어냄으로써 사람들이 사고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여 왔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읽지 않고서 도대체 어떻게 사물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사고하기 전에 먼저 중후한 체계를 배워야만 한다.’ (97쪽)

    ‘그리고 들뢰즈는 앞 장까지 보아 온 철학자들을 선택하여 취하고 그들의 사고의 궤적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철학사를 둘러싼 벽을 쳐부수어 왔던 것이다.’ (같은쪽)

    얼핏 보기에 두 문장은 서로 정합적인 것처럼 보인다. ‘철학사'가 ‘사고의 모델'을 구축하고 있고, 들뢰즈는 그것을 쳐부수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되니까. 그런데, 약간 파고들어보면 두 문장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철학사는 사고의 모델을 만들어냈’고 ‘들뢰즈는 철학자들을 선택하여 취하고 재해석했다’고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 역시 ‘사고의 모델'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가? ‘사고의 모델'이 없더라도 ‘사고'는 할 수 있겠지만, ‘체계적인 사고'는 불가능한 것 아닌가? 나아가 들뢰즈가 세운 것도 ‘사고의 모델', ‘중후한 체계'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철학사'는 그와 같은 ‘재해석의 장' 그 자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 2022-03-03 00:49

    플라톤의 이데아가 교묘하게 비틀어지는 들뢰즈의 이념부분에서 뽑아봅니다.  사건에도 두 계열(차원)이 있다는 그 차원은 이념/잠재성/문제의 차원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실재/현동성/해답의 차원이라는 소리라고 저자는 요약하면서 들뢰즈의 말을 아래와 같이 인용합니다. 여기서 이념적인 계열이 실재에 대하여 초월성과 내재성을 향수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뜬구름만 잡다가 유동의 철학, 김상환의 차이와 반복, 구글링해서 찾은 영역본을 비교해보니 겨우 주어 술어 구분은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흐릿합니다.

     

    유동의 철학, P124) 두 개의 평면 위에 전개되는 사건의 이중 계열을 마음속에 그려 보는 것은 적확할 것이다. 두 가지는 유사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공명할 뿐이다. 한편은 만들어지는 해답의 수준에 있는 현시적인 사건이고 또 한편은 문제의 조건에서의 이념적 관념적인 사건이기에. 이것은 우리의 역사를 이중으로 하는 신들의 행위 혹은 몽상과 같은 것이다. 이 이념적인 계열은 실재에 대하여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두가지 특성을 향수하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 P415) 이런 방향에서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사건들이 지닌 이중의 계열을 표상해야 한다. 이 이중의 계열은 두 평면 위에서 펼쳐지고, 그런 가운데 서로에 대해 유사성 없는 메아리가 된다. 이때 한쪽의 계열들을 실재적이고, 이 실재적 계열들은 산출된 해들의 수준에 속한다. 반면 다른 한쪽의 계열들은 이념적이거나 이상적이고, 이 이념적 계열들은 문제의 조건들 안에 있다. 이것들은 마치 우리의 역사를 중복하고 있을지 모르는 신들의 활동들, 혹은 차라리 신들의 꿈들과 같다. 실재적 계열과의 관계에서 볼 때 이념적 계열은 초재성과 내재성이라는 이중의 속성을 향유한다.

     

    영역본 189) In this sense, it is correct to represent a double series of events which develop on two planes, echoing without resembling each other: real events on the level of the engendered solutions, and ideal events embedded in the conditions of the problem, like the acts - or, rather, the dreams - of the gods who double our history. The ideal series enjoys the double property of transcendence and immanence in relation to the real.

  • 2022-03-03 08:37

    질문1) “물질(지각)과 기억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기억에서 이완과 긴장의 다양한 정도(강도)의 차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유일한, 동일한 것의 무한한 변이라고 하는 들뢰즈의 일원론적 관점이 베그르송주의에서 발견된다. 이 일원론은 사물의 무한한 차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가능한한 수용하기 위한 일원론이다.” (37쪽 요약)일원론이라는 건 단어만으로는 마치 모든 것을 유일하고 단일하게 통합하는 것 같은데, 왜 ‘동일한 것의 무한한 변이’, 하나의 사물이 이완하고 긴장하면서 차이를 가진다는 것을 왜 일원론이라고 부르나.

     

    질문 2)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철학을 ‘사물 그 자체일 뿐인 뉘앙스를 사고한다’고 하여 “유물론적”(40쪽)이라고 했는데 기존에 베르그송을 생명의 신비적 원리와 같은 몰정치적이고 비역사적인 관념론과 보는 입장과 다르다.(41쪽) 들뢰즈는 사고에 운동을 주입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조차 띈다고 했는데, 베르그송을 ‘유물론’으로 읽게 되면 왜 정치적이 되는가.

     

    질문 3)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존재와 사고 속에 차이를 내재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는 구석구석까지 하나의 균열이 뻗어있는듯 하다. 그것은 시간의 순수하고 공허한 형식에 의해서 금이 가 있다….’나’에서의 하나의 단층 혹은 균열, 자아에서의 어떤 수동성, 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113쪽)

    들뢰즈는 코키토의 자아(데카르트의 자아)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자아를 파악하고 있다. 자아는 시간 속에서 ‘금이 가 있다.’고 파악하며 시간의 ‘순수하고 공허한 형식’에 주목한다.(114쪽) ‘시간은 순수하고 공허한 형식’은 경험론의 차원을 넘은 초월론적 의미이고, ‘죽음본능(타나토스)’에 관계된다고 하며 모든 질문의 원천으로 본다.(116쪽) 순수하고 공허한 형식은 미로 같은 것이며 형태가 없고 여기에서 자아는 자발성도 주체성도 빼앗긴다. (119쪽) 들뢰즈는 이런 것을 ‘나르키소스적인 자아와 죽음 본능’이라고 보는 정신분석적 관점과 다르게(115쪽) 들뢰즈는 자아가 파괴되는 상황을 ‘위대한 건망증’이자, 창조적인 상황(116쪽) 으로 본다. 왜 여기에서 ‘긍정성’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들만철을 제대로 안 읽어서인지... 베르그송편에서 거의 이해를 못해서인지, 질문이 많습니다. 

  • 2022-03-03 09:00

    "들뢰즈는 이러한 사건의 이념성이라는 측면을 매우 강조하고, 그것을 언어의 본질로 생각하고 있다. 사물과 신체가 서로 작용하고 서로 혼합함으로써 끊임없이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차원에 대하여, 그것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떨어진 '비신체'의 차원이 언어인 것이다."(125쪽)

     

    앞에서 "'이념'이란 사물을 구성하는 전개체적인 차이"라고 했고(123쪽), "사건의 표명은 언어에 의해서 행해질 수 밖에 없다"(125쪽) 했는데, 언어가 어째서 '비신체'의 차원이고, 전개체적인 차이라고 정의하는 이념이 언어의 본질인지 잘 모르겠다. 

  • 2022-03-03 09:24

    들뢰즈는 흄의 철학이 '관계와 조작의 명석함, 중간을 사고하고 중간의 조작을 목표로 하는 명석함을 드러내는 것'을 칭찬한다. 그리고 이 철학을 '민중적이고 과학적인 철학'이라고 말한다. 과학적이라는 의미는 잠재성에 대해 정밀하고 충실하게 바라본다는 의미에서 '과학적'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민중적'이라는 말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여기서  '민중'은 대중, 다수, 서민과 구별되는데, 역시 잠재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55p)들뢰즈의 사유에서, 특히 <차이와 반복>에서 민중의 등장, 혹은 그 잠재성의 출현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

  • 2022-03-03 09:33

    "우리에게 철학사는 회화에서 콜라주가 달성한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101쪽)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서문에서 썼다는 도발적인(<유동의 철학> 저자의 표현) 말입니다. <유동의 철학> 2장을 읽으며 저는 바로 이렇게 철학사를 사용하는 것이 들뢰즈가 사용한 콜라주인가, 라는 느낌적인 느낌을 가져보았는데요.

    제1의 반복과 제2의 반복에서는 베르그손의 습관기억과 회상기억을 가져오고, 거기에 프로이트의 쾌락원칙과 에로스를 더합니다. 제3의 반복은 논리전개가 복잡하여 어질어질할 정도인데요. 들뢰즈는 데카르트와 칸트로부터 '시간의 공허한 형식'이 제3의 반복이라고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시 공허한 형식과 죽음을 결합시키고, 이와 관련하여 블랑쇼와 하이데거, 다시 프로이트의 죽음본능을 결합시킵니다.

    그야말로 저자가 말한 바대로 이 각각의 철학자들의 세부사항을 다 안다고 하더라고, 들뢰즈의 이런 철학을 따라잡기란 쉽지 않아보입니다.(몰라서 괴로운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어쩌면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더 힘들 수도 있다는..ㅎㅎ) 이 내용을 문자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철학하는 방법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회화의 콜라주와 같은 것이라고 하는,  우리가 <유동의 철학>을 통해 잠시 맛본 착란적인, 그러나 광기가 아니라 명징한 논리인 정기(正氣)로 행한 콜라주, 어떠셨는지 같이 이야기 나누어보고 싶군요.^^

     

    • 2022-03-03 12:01

      아... 역시 요요쌤이 언급해주시네요..

      저의 질문은 저것이었어요. 철학에 대한 공부가 짧은 저는 역시나 제 2의 반복부터 막히더라구요. 각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정말 하나도 모르니, 쾌락원리, 에로스, 팔루스.. 부터 막히면서 완전히 길을 잃었습니다.  각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무엇이었으며,  들뢰즈는 그걸 어떻게 끌고 온 것인지 설명을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몇 번 반복해서 읽었다면 어쩌면 조금은 이해했을지도 모를 '명징한 논리인 정기로 행한 콜라주'를 놓치게 되어 아쉽습니다.  

  • 2022-03-03 09:42

    니체 ‘힘에의 의지’

     

    1. 어떤 것의 의미, 가치를 아는 것이란 그 자체가 어떠한 ‘힘’에 의해서 점유되고 어떠한 ‘힘’을 표현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P.76)

    2.하나의 힘이 하나의 대상에 이른다. 이 때 그 대상 자체가 이미 하나(이상)의 힘의 출현이기 때문에, 힘은 힘과 관계되어 있다. 힘은 언제나 복수, 다수의 힘의 장(場)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p.77)

    3.....(중략) 사람은 힘의 의지의 진정한 성질을 오인하고 만다. 우리가 하는 모든 가치평가의 가소성이 풍부히 유연한 원리이고 아직 승인되지 않은 새로운 가치창조를 위한 창조를 위한 숨겨진 원리인 ‘힘에의 의지’의 본성을 오인하는 것이다(p.78)

    4.(위키백과) ‘힘에의 의지’ : the will to power. 더 높은 곳으로(가치)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

     

    질문 1) ‘힘에의 의지’를 더 높은 가치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로 이해하고(1,3,4) 힘은 언제나 다수의 힘의 장(場)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면(2),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을 ‘힘에의 의지’(가치)들의 경쟁으로 볼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니체는 헤겔을 비판하였다고 하나? 어떤 점을 비판하였는지?

    혹시 이 ‘힘에의 의지’는 인간 개인들에 관한 사유이지, 사회적인 현상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인가? 그렇다면 위의 2번 문장, ‘힘은 힘과 관계되어 있다. 힘은 언제나 복수, 다수의 힘의 장(場)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p.77)’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질문 2) ‘힘에의 의지’로써 한 인간이 목표한(?) 가장 높은 곳(가치)에 이르렀을 때,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 “반동적인 힘으로 채워지고 그 부정성을 극한까지 경험한 인간에게는 반동적인 생 그것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고, 그것은 ‘자기 자신을 능동적으로 파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바뀐다.(p.82). 드라마틱한 가치전환을 말하며 이 가치전환은 어떤 원환상의 시간(영원회귀)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가치전환이 높은 곳(善?)에 다가가는 방향이라고 누가 가치평가할 수 있을까? 니체는 도덕 등과 같은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할텐데....그렇다면, 한 인간이 독재자로 변해도 그 개인에게는 ‘가치전환의 영원회귀 과정이다’ 라는 의미 부여를 한다면 독재자(범죄자)를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는가?

  • 2022-03-03 09:48

    (p.33) 운동과 시간에 침투하는 사고를 실천하고, 또 사고 속에 운동과 시간을 주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질문) 들뢰즈는 모든 대상을 고정되지 않는 변화의 프로세스(생성)”로서 파악하고, .. 단순히 정적인 차이가 아니라 차이화하는 프로세스(시간)에서 파악하라고 한다. 그것은 그의 사고가 늘 시간과 불가분의 형태로 실천되는 것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고가 늘 시간과 불가분의 형태로 실천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대상을 고정되지 않는 변화의 프로세스(생성)으로 파악하라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는 것인지? 정적인 차이가 아니라 “차이화하는 프로세스(시간)에서 파악” 한다는 것은 차이를 만들어 내는 ‘시간’이라는 것에 무게중심을 두고 대상을 파악해 가야 한다는 것인지요? 

  • 2022-03-03 10:10

    "공간의 철학자는 모든 요소를 공간 속에 열거하고 병치하면서 대상을 가시성 속에 두고 가시성과 공간성을 일체로 하여 '명석하게' 사고하고자 할 것이다. 시간의 철학자는 시간이 끊임없이 파괴하고 보이지 않게 해버리는 대상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늘 불가시성에 직면하면서 가시성의 한계에 별도의 명석함을 만들어내고자 할 것이다.(34)"

    "근대의 권력기구를 일망감시장치(파놉티콘)로 모델화하는 푸코의 방법은 확실히 공간적이고 가시적인 차원을 향하고 있다. (...)푸코는 공간성과 가시성에 따라 사고함으로써 시간의 형이상학과 단절한 지점에서 새로운 역사학을 구상한다. 들뢰즈는 그러한 단절에 의하기보다 오히려 베르그송의 시간철학에 극히 충실하게 사고하면서, 결국 시간의 형이상학이 포함하는 모든 고전적인 강제를 돌파해 감으로써 이윽고 푸코가 개척한 지평과 서로 이웃하는 지평에 서게 되었다.(47)"

    1.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에 대한 의문. 들뢰즈의 비선형적 시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공간 역시 굴절되고 침투되는 불가시성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들뢰즈의 '판'이나 '홈', '구멍' 등을 그러한 공간적 표현의 연장에서 읽었는데 이때 말하는 '공간'이란 '모델화'의 동의적 표현일 뿐인가? 선형적 시간, 예를 들어 고전적인 역사 역시 가시성의 시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은가?
    2. 들뢰즈가 '시간의 형이상학이 포함하는 모든 고전적인 강제를 돌파해' 도달한 곳이 '푸코가 개척한 지평과 서로 이웃하는 지평'이라는 것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시성(모델화)에 따른 사고의 결과와 '가시성의 한계에 별도의 명석함을 만들어내고자'했던 것의 결과가 어떻게 같은 곳이 될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들뢰즈 공부를 통해 푸코가 가진 한계, 내가 푸코를 통해 사유하는 것이 가지는 한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는데(모델화에 입각한 사유로 회귀하게 되는 것), 저자는 푸코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 

  • 2022-03-03 10:29

    일단 말을 펼쳐놓고 뒤에서 질문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노 구니이치는 <차이와 반복>을 “‘사고의 이론’으로서 사고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저작이라고 설명한다(99). ‘사고와 이성⸱의식의 대립’이라는 절에서 이성⸱의식의 대립물로서 사고를 만나는데 이성⸱의식과 대립하는 사고 또는 생각이란 무엇인가? 일단 이 절에는 칸트와 헤겔을 떠올리게 하는 인용이 있다.

     

    이성은 사고를 예속시키는 것의 권리들을 집중하여 표현하기 때문에, 사고는 자신의 권리들을 다시 쟁취하고 이성에 대항하여 자신을 입법자로 한다.(80) .... 역사를 공격하는 니체는 역사적인 의식과 이성이라고 하는 형태를 위한 예속성과 반동성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비판적이었다.(81)

     

    이성에 의해 예속되는 ‘사고’란 무엇일까? “주체와 객체에서 해방된 사고”(푸코 인용, 98)를 말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이런 것일까?

     

    그건 그렇고, 기관 없는 신체란 도대체 무엇일까? 거미 또한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어떤 것도 지각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생각해내지 않는다. 그저 거미줄의 한쪽 구석에서 자신의 신체에 강도의 물결로서 전해져 오는 희미한 진동을 받고, 중요한 장소에 덤벼들어 간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이 거미는 오직 신호에 반응하고, 희미한 상징으로 채워질 뿐이다. 그것이 그의 신체를 물결처럼 횡단하고 먹이에 달려들게 하는 것이다.(92)

     

    정리하자면, 1) ‘사고’와 ‘이성⸱의식’을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 또는 타당한 일일까? 2) ‘이성⸱의식’ 또는 ‘주체와 객체’식 사고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을(이 역시 논의가 필요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에서 ‘해방된 사고’의 시도는 어떻게 가능할까?

  • 2022-03-03 11:17

    질문은 아니고요...

    들뢰즈는 범주 없이 차이를 사고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스스로 자신의 범주와 분배의 위치를 할당하는 노마드적 분배, 그 범주조차도 계속 이탈하는 변이로서만 존재하는, 즉 변이하는 정도들을 느낄 수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시작도 안했지만 <들뢰즈 유동의 철학>에 인용된 <차이와 반복>의 내용들을 보면서 들뢰즈를 이해할 수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이 크지만, “사상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사용하라”(18쪽)고 하니 한편으로 위로가 되기도 하는데, 어떻게 “어떠한 단편이라도 좋으니 그것을 손에 잡고 사용해 보는 일, 두드리거나 뒤집거나 냄새를 맡거나 해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른 맥락으로 이동시키고, 사용 방법을 발견하는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겠다.

     

  • 2022-03-03 11:36

    저자가 들뢰즈의 철학을 "비실재론적 프래그머티즘"이라고 소개하면서 흄과 스피노자의 경험론적 영감을 얘기하는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던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가 과거 혹은 역사를 어떻게 자신의 관점으로 탐구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내게 흄은 경험론자인데 관계론으로 풀어내는 것이, 또 내게 스피노자는 관계의 철학자(합리주의/이성주의)인데 신체(감각)의 촉발을 경험론적 영감으로 풀어내는 것이 들뢰즈라는 광학렌즈를 통과했을 때 어떻게 기존의 철학을 미시적으로 탐구하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66p) 여기서는 들뢰즈의 면(plan)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신의 계획이나 설계도가 아니라고 했는데, 앞서 푸코와의 비교에서 공간의 철학자가 아니라 시간의 철학자라고 했던 저자의 설명에 비추어 보면 그에게 이런 평면(내재성의 평면)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평면을 공간과 배치로 해석하지 않고(field가 아니다), 누군가의 횡단면, 내재면을 얘기하고 있다.  공간성을 갖지 않는 면을 말하고 있을까요? 아닌 것 같거든요. 다만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미립자들에 유동하는 시간성의 공간 아닐까요? 내재성의 공간이라는 말도 괜찮겠네요. 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2022-03-03 11:47

    p48 위에서 4-7행중 A와B, A와B의 외부, 모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어떻게 모르는 건지는 셈나시간까지 생각 좀 해볼게요

  • 2022-03-03 12:59

    질문들입니다

  • 2022-03-03 14:29

    1) 69p에서 언어가 어떤 힘의 구체적인 작용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렇다면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2)(79p) 힘의 능동성과 의지의 반동성? “의식은 힘의 의지에서 반동으로부터 생기는 것"의 뜻은 무엇인가? 또한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능동적인 힘은 어떤 것인가?

     

    3)(109p) 습관-반복에서 자기의 행동을 관조하며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작은 수동적인 자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2022-03-03 15:55

    질문 올립니다..

  • 2022-03-03 17:26

    질문들 최종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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