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겨울번개 들만철] <8. 칸트의 네 가지 경구> 세미나 후기

호수
2022-02-09 23:40
422

어제 세미나를 마치고 곧바로 후기를 쓰고 싶었는데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 지금 이 시간까지 미뤄졌네요. 늦어진 김에(?)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뭘 빨리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많이 낯섭니다만) 중간중간 어제의 이런저런 장면에 잠시잠시 머물러 보고 방금 막 김재인의 논문도 읽어보았어요. 김재인의 논문은 미사여구를 조금 과하게 붙여보자면 들뢰즈의 글에서 시간이 거치는 장대한 여정을 뽑아낸 것 같은 느낌까지 드네요. 저는 어제 세미나 시간에 중간중간 말을 보태고 질문을 던지다 크게 두 가지(‘나’와 ‘자아’의 관계,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미학에서 시간의 의미)를 새로 깨닫게 되었는데요, 이 두 가지를 찬찬히 되짚으며 열리는 새로운 지평이 음... 뭐랄까요, 괜찮다면 송송이님의 표현을 빌려 ‘아름답다’로 하겠습니다.

 

칸트, 원래 어떤 사람인가?
어제 첫 논의는 김언희샘의 큰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칸트가 세 비판서라는 방대한 작업을 통해 무엇을 그리고 싶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우리는 중간중간 들뢰즈가 설명하는 칸트가 아닌 칸트를 궁금해했는데요, 그 차원에서 몇 가지를 기억해보자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우리가 인간으로서 갖는 인식의 공통 기반을 찾으려고 했고, 경건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시대에 상식에 부합하는 삶을 중시했으며 그런 면에서 세 비판서 중 <실천이성비판>이 칸트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라는 평이 있었어요. 저는 칸트에게 보편성이나 자기동일성 같은 문제는 당연한 것으로 주어져 있었고 이를 설명해내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인상을 자주 받았습니다.

 

시간이라는 깊은 신비(를 왜 그냥 놔두었는가?)
두 번째 질문부터는 주로 시간에 관한 논의였어요. 사실 어제의 논의는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 시간,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그 시작에서 정군샘이 짚어낸 것이 무척 흥미로웠어서 여기에도 적고 싶습니다. 요요샘이 첫 번쨰 경구 글에서 들뢰즈가 쓴 “시간이 지니는 이러한 자율적인 형식은 그 어떤 깊은 신비를 가리킨다”(164)라는 말에서 신비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띠는지 질문하셨는데, 쓱 읽어 넘길 때는 아 시간이 신비롭다는 거구나, 하고 넘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신비라는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 또 여기서 더 나아가 들뢰즈가 칸트에게 왜 철학자가 이런 작업을 마저 하지 않고 그냥 두었냐고 말하는 힐난으로 읽은 것이 무척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시간이라는 주제는 세미나 내내 우리와 같이 있었습니다.

 

‘나’와 ‘자아’
여기서 두 번째 경구에서 다뤄진 ‘나라는 것’과 ‘자아라는 것’의 관계로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상당히 충격적이었어요. 오늘도 가던 길을 잠시 멈추어 서서, 아이를 데리러 가며 운전을 하다 이 문제를 순간순간 떠올렸어요. 저는 세미나 전에 요약문을 작성하면서도 ‘나’와 ‘자아’ 중 ‘자아’가 물자체이고 이 변화하는 물자체라는 대상을 나는 내 안에 표상하고 그 표상을 갖고 종합이라는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요약문을 같이 읽지 않으니 뭐라고 썼든 대체로 아무 논평도 안 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허점이 있습니다. 흐.).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니 ‘자아’가 타자 아닌가 싶고, ‘나’는 여전히 나였고, ‘나’와 ‘자아’의 거리가 참 멀었어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말씀해주셨듯 그 물자체가 ‘나’였던 것이지요. 세미나 때는 미처 다 못 느꼈는데 이후 다시 생각하니 소름이 돋습니다. (식스센스의 브루스 윌리스가 된 기분) 생각해보면, “자아는 그 자체가 시간 속에 있으며, 따라서 자아는 변화하기를 멈추지 않는다”(165)고 했으니 ‘자아’는 물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 다시 말해 내 안의 직관 형식인 시간에 이미 들어와 있으니 표상인 것이지요. 표상된 자아, 수동적인 자아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의 표상이냐, 바로 ‘나’의 표상이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언제까지나 나를 바로 알 수 없고 나의 표상(자아)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 시간마다 현재, 과거, 미래를 분배하면서 끊임없이 시간의 종합을 이루는 행위”인 내가 의식하는 것은 나 자체가 아닌 행위하는 나의 표상입니다. 이 ‘적극적인 나’는 이 행위를 통해 나의 표상을 늘 새로이 촉발하고, 새로 촉발된 나의 표상을 나는 다시 종합합니다. 이렇게 나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표상되고 또 그 표상을 종합하며 나에서 나를 오갑니다. 그렇게 나는 ‘무한한 변조’ 속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시간을 구성하는 것은 곧 현기증이자 흔들림(진동)”(167)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통해 경험되는 나의 표상이 있고 수없이 쏟아질 이 표상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나’라는 생각은 분명 칸트에게서 왔습니다. 하지만 칸트는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가 자기 동일성을 갖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면, 들뢰즈는 이 사태에서 자기 동일성이 환상임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칸트 자신도 여기서 곧바로 자기 동일성이 확립될 수 없음을 편지에 언급한 적이 있다는 정군샘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로고스와 파토스와 시간
그 다음으로는 역시 다른 분들의 도움으로 새로이 깨달은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미학을 보겠습니다. <판단력비판>을 칸트의 미학 저작이라고 분류하지만, <순수이성비판>의 능력 설정만으로 설명되는 ‘아름다움’의 쾌감이 있습니다. 전에 발도르프식 수학 교습법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컴퍼스와 눈금 없는 자만 갖고 황금비율을 가진 직사각형을 그렸어요. 이러저러한 설명을 따라 도형을 완성시키다보면 수학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이때 느끼는 미감은 감성적인 것들을 시간이라는 형식을 써서 가산적으로 표상하여 오성의 작용을 거쳐 갖게 되는 로고스적인 미감입니다. 그러나 이를테면 숭고미에 이르면 여기에서는 “감성적인 것이 (오성의) 모든 논리를 넘어 파토스 속으로 그 스스로를 전개합니다”(172). 전체로서 한꺼번에 덮쳐오는 어떤 것입니다. 시간은 이때 형식이되 차례차례 더해가는 나열의 방식 따위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표상해주는 형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숭고미를 일으키는 어떤 감성적인 것이 전체로서 우리를 덮칠 때, 우리는 말하자면 시간을 꿰뚫어 보는 셈입니다. 정말이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구하는 데요, 그 새로운 정의에 얼마나 가까이 가볼지 많이 기대됩니다. ㅎㅎ 아, 쓰고 보니 이것은 마무리 멘트로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안 그래도 쓰다보니 A4 한 장 반이 넘었으니 갑자기, 서둘러, 마치겠습니다.

 

다음 시간 다룰 부분은 12장 유목적 사유이고요, 한스 샘께서 요약을 맡아주셨습니다. 🙂

댓글 15
  • 2022-02-10 16:04

    저는 <네가지 경구>에서 랭보의 '주형'과 칸트의 '변조'를 대비하는 부분과,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을 대비하는 방식으로 정리한 부분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며 설명할 때 이것도 저것도 잘 모르면 어려운 게 너무 당연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 역시 호수샘이 정리한 것처럼 이 두 가지 포인트에서 어떤 강력한 파토스의 촉발이 있었답니다.^^

    들뢰즈가 '나는 타자다'라는 랭보의 경구가 '주형', 혹은 '모델'형 사고방식의 표현이라면 칸트의 나-자아관계는 오히려 '변조'에 가깝다고 했을 때, 그건 칸트가 뭐라고 이야기했느냐보다도 오히려 들뢰즈의 어떤 시각을 보여주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촉발에 의해 수동적 자아가 현상하는(표상되는?) 프로세스는 사실 나로부터 자아가 시차를 두고 인과적으로 선형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동시에 일어나는 발생이자 변조(변용)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요. '나'라는 것이 이데아처럼 고정되어 존재할 리 없으니, 그로부터 촉발되어 시간형식 속에서 표상되는 '자아'는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저의 느낌으로는 이것은 사실 나-자아의 문제에 국한된다기보다는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차이의 발생과 생성, 지속의 문제를 들뢰즈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나-자아의 관계를 통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가설을 세우게 되네요. 그러니 어쩌면 여기서 핵심은  칸트가 창안한 감성의 형식 중에 내감으로서의 시간형식을 그저 직관의 선험적 형식으로만 두지 않고 다른 문제계와 교차시키려는 의지가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순수이성비판>의 로고스의 미학과 <판단력비판>의 파토스의 미학으로 옮아가는 '감각의 착란' 부분은 정말 착란적이었어요!! 앞서 읽은 흄과 스피노자에서의 신체의 강조와도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성에서 상상력으로의 반전이기도 한 것 같고요. 암튼 거기에서 나오는 현란한 표현들은 살짝 기가 질리게 하는 면도 있어요. 저로서는 도대체 범접할 수 없는 문학적 수사와 문체라니! 이것이 철학이란 말입니까? ㅋㅋ 그런 생각마저 드는군요.^^ 아무튼, 그랬습니다. 아!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ㅋㅋㅋ

    • 2022-02-11 00:54

      네, 저도 스피노자를 말하는 들뢰즈를 떠올린 대목이 있었어요. 저는 나와 자아에 관한 부분에서 그랬어요. 스피노자도 우리는 스스로를 직접 알 수 없고 외부와 마주침의 흔적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했고, 들뢰즈는 이 부분에 대해 '의식에 대한 평가절하'로 표현한 기억이 나서요. 그때도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과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해석하며 말하고 싶어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종종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요요샘 말씀처럼 저도 생각해볼수록 들뢰즈가 나-자아의 관계를 통해 그 이상의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이라는 짐작이 들어요. 이건 정말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를 읽는 것이라는 🙂

  • 2022-02-10 23:12

    <차이와반복> 2장 앞부분을 보니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반복을 지배하는 불연속성이나 순간성의 규칙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다. 즉 어떤 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것이 사라져야 한다. 이것이 순간적 정신에 해당하는 물질의 상태이다. 하지만 어떻게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그것은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반복은 생성하는 가운데 소멸하기 때 문이다. 즉자(卽自)로서의 반복은 없다. 반면 반복을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중략)

    반면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정신 안에서 어떤 차이, 새로운 어떤 것이 발생하는 것이다. A가 나타난다고 해보자. 그러면 나는 이제 B가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 이것이 바로 반복의 대자적 측면이 아닐까? 이때 대자적 측면은 반복을 필연적으로 구성하고 있어야 하는 어떤 근원적 주관성에 해당한다. 반복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응시하는 정신 안에 차이나 변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반복이다. 하지만 반복에 대해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것이 끌어들이는 바로 그 차이나 변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오로지 정신이 반복에서 훔쳐내는 어떤 차이를 통해서만 반복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호수샘 후기의 두번째 부분에 등장하는 '나-자아'의 분열상과 관련이 아주 많아 보이는 문장입니다. 들뢰즈가 <칸트의 비판철학>을 1963년에 출간하고, 영역판 서문에 해당하는 <네가지 시구>는 80년대에 쓴 걸로 보아 이미 <차이와반복>을 쓰기 이전에 이와 같은 착상을 가졌다고 봐도 되겠죠. 그리고 그러한 착상은 아마도 스피노자-흄, 그리고 결정적으로 칸트를 독해하면서 얻어낸 것 같습니다. (아우 짜릿하군요 ㅎㅎㅎ)

    언젠가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두고 '무의식의 순수이성비판'이라고 했다던데, 그의 사유 안에서 칸트는 결정적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들뢰즈가 언제나 극복하려고 하는 헤겔 변증법도 칸트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변증법'이 아닌 방식으로 '칸트'를 써먹겠다는 것이죠. ㅎ 

    요약문만큼이나 깔끔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아, 두 번 밖에 안 남았지만, 세미나 시작과 동시에 '요약문'을 한번 읽을까요? 요건 선생님들의 의견에 따라 어찌할지 정해보겠습니다.

    (마지막에 '한스님'을 보고, '어떤 스님?'을 떠올린 건 저 뿐인가요........?)

    • 2022-02-11 00:29

      하도 '차이'라는 필터로만 <들만철>을 읽다 보니 반복은 잠시 잊고 있다가, 지난 시간 (무한한) 변조 부분에서야 '이거 뭐지?' 이게 반복인가 했더랬습니다. 뇌피셜로 치부하고 읽다보면 드러나겠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군샘 댓글을 보다 보니 그 생각이 다시 나는군요. 정군샘이 인용한 부분을 들여다보다가 책의 제목이 <차이와 반복> 보다는 <차이의 반복>으로 했어야 하는거 아닌가 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역시 의문은 의문으로 남겨두고 읽으면서 확인을 해야겠지요.  

      그나저나 요약문을 읽자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요? 주석서나 요약서를 읽고 가자는 말씀인가요?

      • 2022-02-11 01:00

        발제(요약)문을 말씀하신걸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한스 선생님 부담 느끼시겠다. 

    • 2022-02-11 00:57

      네, 그런데 정군샘의 의도와 다르게 발췌문을 통해 저 뒤에 곰이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도 드는군요 ㅋ

      그리고 아니요, 반대입니다. 그러다간 12시를 넘기게 될지도요 ㅎ 게다가 요약문을 이제 와서 읽자고 하면 한스 샘과 다른 한 분은 어쩌시라고요?? ㅎㅎ 죄송해요. 제 눈에도 의도치 않게 어느.. 스님으로 보이네요. 한스 샘께는 어떻게 느끼실지 잘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한스 샘께는 한스 샘이 어울리십니다. ㅎ

      논란의 여지를 막기 위해 제가 다시 썼어요 ㅎㅎ

       

       

    • 2022-02-12 13:35

      올려주시는 요약분들, 저와 무사샘이 (둘이 하는 세미나에서) 정말 잘 읽고 있습니다.  소리내서 한 문장 한 문장 뜯어가면서..요약문으로 '강독'하고 있거든요..^^   세미나 해보니 질문으로 토론하기 전에 요약문으로 흐름과 개념을 한번 잡고 가는 거 넘 유용해요!  

      • 2022-02-13 11:15

        반갑습니다 매실샘. 말씀에 동의해요 🙂 하지만 어쩄든 세미나에서 직접 읽든 읽지 않든 저 역시 요약문에서 이미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요, 적어도 절반을 넘긴 지금의 세미나는 이대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갑자기 포맷을 바꾸기엔 매번 시간이 빡빡했어요 🙂 

  • 2022-02-11 00:33

    칸트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밝히신 호수샘 덕분에 어찌어찌 나중에는 칸트 강독도 열리겠구나 생각을 해 봅니다. 호시탐탐은 아닐지라도 요놈의 칸트 하고 벼르는 분이 제가 알기로는 요요샘과 호수샘 그리고 저까지 세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나타나실 정군샘까지면 그럭저럭 절반은 모인건가요? 말만 하지 말고 진짜로 읽어보시지요. 당장은 말구요...2030년 전에는 우리 한 번 짬을 내 보시지요. 

    김언희 샘의 거대한 질문으로 시작한 지난 시간 초반...그 칸트를 요약해 주시느라 애써주신 정군샘 감사합니다. 복받으실 겁니다.

    • 2022-02-11 01:00

      아니, 욕심이야 부릴 수 있는 거니까 저야 누구를 읽건 거의 매번, 왠만하면 그런 생각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샘께서 강독을 열어주신다면 기꺼이 고려해보겠습니다 ㅎ

  • 2022-02-14 05:41

    한 주의 세미나 완성이 후기와 댓글을 통과해야만 하는군여. 호수 샘의 정갈한 후기를 읽고 있자니 세미나 시간의 그 차분한 목소리가

    음성 지원되는 듯합니다:). 저 역시 모호하고 난해한 것들이 세미나를 거치면서 또 후기와 댓글을 거치면서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미나 시간에도 지금도 여전히 걸리는 게 있는데요, 

    '나'와 '자아'와 관련해서  이해의 편의를 돕고자 '물 자체'와 '사물'로 생각하면 편하다고 '팁'을 주셨는데요,  이 비유가 적절한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나'와 '자아'의 관계에서 핵심은 이 둘의 이중의 전환, 즉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면서 변조가 가능하다는 건데,

    '물 자체'와 '대상'은 이런 관계가 아니지 않나?라는 궁금증이 계속 생겨서요, 떨쳐버리고 싶어요^^     

     

    세미나가 축적된다고 해서 들뢰즈의 글이 쉽게 읽혀지기는 커녕 우째 점점 더 어려워지네요. 이번 글이 젤 어렵다는 튜터 정군샘의 '약'에 더이상 혹하지 않기로 했습니다ㅎ

    그래도 약간의 '근거없는' 희망, 혹은 베짱도 함께 생기긴 하네요,  마치 마감에 헉헉대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글이 '어쨌든' 나오는 것처럼,'어차피 읽어도 이해 안되는 것들 세미나에서 다 해결될꺼다' 라는 뭐 이런...마음만이라도 좀 편해보자는 내면의 전략인가봐요ㅋㅋㅋ  

    • 2022-02-14 14:27

      <들뢰즈, 유동의 철학>이라는 책을 읽다보니, 이와 연관된 <차이와 반복>의 인용이 나와요.

      "'나'에는구석구석까지 하나의 균열이 뻗어 있는 듯하다. 그것은 시간의 순수하고 공허한 형식에 의해서 금이 가 있다. 이 형식 아래에서 '나'는 시간 속에 나타나는 수동적인 자아의 상관물이다. '나'에서의 하나의 단층 혹은 균열, 자아에서의 어떤 수동성, 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수동적인 자아와 금이 간 '나'의 상관관계는 초월론적인 것의 발견, 또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기본요소를 이루는 것이다." (들뢰즈 유동의 철학, 113쪽)

      이 인용이 나오기 전에 <들뢰즈, 유동의 철학>의 저자는 이렇게 말해요.

      "데카르트의 '나'는 무전제로 자발적이고 실체적이지만 칸트에게 있어서 '나'란 어디까지나 수동적이고 시간 속에서 마치 '타자처럼' 출현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아마도 이 해석은 <네 개의 경구>에서의 들뢰즈의 칸트론과도 관련된 것 아닌가 싶어요. 데카르트도 칸트도 근대적 주체를 상정한 점에서는 같았지만 칸트는 시간형식을 매개로 '나'와 '자아'가 상관관계를 맺는다고 보았잖아요. 그렇다면 사실 '나' 역시 시간형식의 상관물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나'를 물자체로 '자아'를 현상으로 보는 비유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겠구나, 저도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네 개의 경구>에서도 한편에서는 시간 속에서 변화를 체험하는 '자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매 순간마다 현재, 과거, 미래를 분배하면서 시간의 종합을 이루는 행위로서의 '나'가 있다고 했지요. 칸트에게 있어서 '종합'이야말로 직관형식과 범주를 통해 우리 정신이 하는 일이잖아요. 그렇게 해서 '나'인 정신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요. '종합' 자체도 사실 시간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간은 '나'를 만들면서 또한 '나'와 '자아'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르꾸샘의 의문에 공감하지만.. 음.. 갈수록 더 어렵군요.^^ 온갖 뇌피셜을 동원해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기분이에요. 언젠가는 코끼리 다리를 넘어서기를 바라면서..ㅋ (지금 제게 <차이와 반복> 책이 없어서 위의 <차이와 반복>의 인용문이 어디쯤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정군님은 2장 앞부분에 이어 더 짜릿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2022-02-14 14:39

      ㅎㅎ네 그 '내면의 전략' 때문에 굳이 세미나에 참여하는 것 같습니다 ㅋ

      의문을 갖고 계신 부분은 요요샘이 댓글로 써주신 것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네 가지 경구>에서 들뢰즈는 칸트가 설명하는 '나'와 '자아'의 관계로부터 결국 '무한한 변조'를 끌어내는데요, 이 나와 자아 사이에 '시간의 실'이 있어요. 그런데 이 관계를 통해 실은 (첫 경구 글에 나온) '시간에 종속된 운동하는 모든 사물'도 이 무한한 변조 속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것이 요요샘 말씀이신 것 같고 저도 거기에 수긍이 갑니다. 그러니까 나와 자아는 하나의 예시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자아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백종현 판 B132)을 찾아보면 나-자기의식(근원적 통각)라는 용어로 등장하는데요, 여기서도 나-자기의식의 관계를 '나'와 '나의 표상'으로 놓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나-자기의식(자아)'의 관계 설정은 '물 자체-표상'의 관계에서 도출되었어요. 다만 '자기의식'(자아)이라는 표상은 특별한 표상인 것 같아요. 르꾸님 말씀대로 이중의 전환이 일어나는 관계를 가능케 하는 표상이니까요. 칸트는 이 상황을 "내가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한 의식에서 결합할 수 있음으로써만[종합], 내가 이 표상들에서 의식의 동일성을 스스로 표상하는 것이 가능"(B134)하다고 설명하면서 자기동일성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들뢰즈는 이로부터 '시간에 종속된 모든 사물에서 일어나는 무한한 변조'의 사태에 주목시키려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확장해서 이야기하려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속인가 뭔지 반복인지 하는 뭐 그런 것들이@@ 덧붙여져야 할 것 같습니다. 깊은 한숨...ㅎㅎ

      • 2022-02-14 15:00

        아..제가 써놓은 글에 제가 댓글을 답니다. 올리고 보니 요요샘과 거의 동시에 댓글을 달았는데, 그래서 제가 쓴 것도 다시 생각해보니 나-자아는 물자체로서의 나-나의 표상에 곧바로 대칭되지 않네요. 무엇보다 저는 '나의 표상=자기의식'으로 보았는데 적어도 칸트는 그렇게 쓰지 않았어요. 자기의식 즉 근원적 통각은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되는 것으로서 자기 동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이네요. 표상은 표상인데 의식 또는 직관의 표상이요. ㅎㅎ 이쯤되면 지나치게 멀리까지 가는 것 같네요.

        아무튼 요요샘 말씀대로 한 의식에서 표상들을 종합하는 것은 '나'이고 이 종합이라는 행위가 지속적인 변조를 일으키고 있으며 이 과정은 줄곧 시간의 형식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로 들뢰즈의 이야기는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 르꾸샘의 날카로운 지적 덕분에 아무래도 조금 더 머무르게 될 것 같네요. ㅎㅎ .. 다시 일하러 갑니다...

    • 2022-02-14 15:58

      아, 네 그 '나-자아' 구도가 '물자체-현상' 구도와 동형적인 점은 있지만, 그렇게 딱 놓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어서 가급적 그 부분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ㅎㅎㅎ 저는 그럼에도 '이게 좀 비슷하구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건 좋다고 보기는 합니다. 어쨌거나 그 부분에서 핵심적인건 요요샘께서 말씀해주신 "시간은 '나'를 만들면서 또한 '나'와 '자아'를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들뢰즈가 이른바 '생성'의 사유를 했다, 그걸 '시간'을 토대로 했다라고 할 때 그게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니까요. 그리고 다음주에 읽게 되겠지만 거기엔 베르그손의 사유도 크게 작용했을테고요. (이건 마치 계보학 같군요. )

      그나저나 코끼리가 한마리만 되어도 눈감고 만지면 뭔지 알기가 힘들텐데 ㅎㅎㅎ 코끼리 두마리라니... 저는 재미있습니다 ㅎㅎㅎ

      그리고... 약은 다음주까지만이라도 사주시면.... ㅎㅎㅎ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773
[2023철학학교시즌4] 라이프니츠 읽기 [접힘과펼쳐짐] 1주차 후기입니다. (10)
가마솥 | 2023.10.20 | 조회 262
가마솥 2023.10.20 262
772
[2023철학학교시즌4] 라이프니츠 읽기 [접힘과펼쳐짐] 1주차 질문들 (11)
정군 | 2023.10.18 | 조회 318
정군 2023.10.18 318
771
[2023 철학학교] 라이프니츠 읽기 첫 시간 세미나 공지
정군 | 2023.10.02 | 조회 253
정군 2023.10.02 253
770
[2023철학학교시즌3] 에세이데이 후기 (16)
세븐 | 2023.09.24 | 조회 572
세븐 2023.09.24 572
769
[2023철학학교시즌3] 에세이를 올려주세요! (11)
정군 | 2023.09.18 | 조회 426
정군 2023.09.18 426
768
2023 철학학교 시즌4 라이프니츠 『형이상학 논고』읽기 모집 (15)
정군 | 2023.09.18 | 조회 1473
정군 2023.09.18 1473
767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정치론 3 후기 - 스피노자는 남자다 (6)
진달래 | 2023.09.11 | 조회 349
진달래 2023.09.11 349
766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7주차 질문들 (10)
정군 | 2023.09.06 | 조회 354
정군 2023.09.06 354
765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6주차 후기 - '다중'과 '주권자의 죄' (8)
가마솥 | 2023.09.01 | 조회 461
가마솥 2023.09.01 461
764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6주차 질문들 (11)
정군 | 2023.08.30 | 조회 415
정군 2023.08.30 415
763
[2023철학학교 시즌3] 스피노자 정치론 1,2장 후기 (5)
아렘 | 2023.08.25 | 조회 336
아렘 2023.08.25 336
762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5주차 질문들 (12)
정군 | 2023.08.23 | 조회 319
정군 2023.08.23 319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