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시즌2 리들리 스콧 <블레이드 러너>

뫼비우스의 띠WOO
2020-07-17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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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 에 대해

      블레이드 러너(1982) /리들리 스콧     

 

제1차 세계대전은 발전하고 있던 유럽영화산업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유럽은 서둘러 영화산업을 복구해 나갔지만, 이미 할리우드는 규모와 기술면에서 시스템을 구축해나간 상태였지요. 차츰 유럽감독들은 할리우드에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영화산업은 여러 면에서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68혁명이후 청년문화, 여성해방, 인종에 대한 편견 등에 대한 전위적인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고, 차이와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마이너 영화들이 주목을 받게 됩니다. 변화무쌍했던 70년대를 거치면서 80년대 영화들은 주류와 비주류, 장르와 장르사이, 관습과 새로운 감수성 등 ‘경계 무너뜨리기’를 실험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행위는 기존의 관행을 거부하여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요.

 

 

차츰 힘을 잃어가는 메이저 영화 산업을 살리기 위해 할리우드는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문명과 야만, 세대, 여성, 인종 등의 대립구조를 벗어나야 했던 할리우드가 새롭게 내세운 것은 바로 비인간세계였지요. 대표적으로 SF의 세계입니다. SF영화는 우주에 대해 아직까지 무지했던 인간들에게 우주생명체라는 존재가 인간의 적이 될지, 친구가 될지 상상하게 만듭니다.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미지와의 조우(1977)>, <스타트랙(1979)>등에 이어 1982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가 제작비의 35배가 되는 수입을 거둬들입니다. 같은 해 우리가 주목할 또 한 편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도 발표됩니다. 필립 K.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원작으로, 감독은 <에일리언(1979)>으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 그야말로 세간의 기대를 모으며 <블레이드러너>는 개봉했지만 평가는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관객흥행뿐만이 아니라 평론가들에게도 보는 시간이 아까운 졸작이라는 악평을 받게 된 것이죠.

 

 

 

당시 2200만 달러가 넘는 제작비와 시기적으로 주목받았던 SF, 해리슨 포드(데커드역)가 주연이었음에도 영화가 쫄딱 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다시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지금 와서 본다면, 기존의 영화문법을 파괴한 변혁의 결과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당시 영화문법에서 견고했던 창작자와 관객의 역할이 무너진 작품이죠. 그 하나의 계기는 홈비디오의 보급입니다. 집집마다 갖게 된 비디오 플레이어는 비디오샵에 묻혀있던 <블레이드 러너>를 살려냈지요. 단지 수용자에 그쳤던 일반 대중에 의해 영화가 재발견된 것입니다. 동시에 일부 영화평론가가 갖던 권력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문화평론가나 진보지식인들이 경계를 넘어서 영화로 사회를 해석하게 됩니다. 기계문명에 대해 인간중심적 사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늘 아래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은 이후 여러 작품에도 영향을 주지요.

 

감독 리들리 스콧의 주제 의식은 미래사회를 통해 현실사회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이 작품이 다시 현실로 소환되는 것도 그 현재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면, 영화 연출할 맛이 나겠는데요. 이제 영화의 내용으로 들어가 볼까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우리에게는 이미 지나버린 2019년 LA, 대기업 타이렐사는 불모지가 되어가는 지구를 대신할 행성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리플리컨트(복제인간)를 만들어냅니다. 극소수의 인간을 위해 노예화된 리플리컨트를 통해 오늘날 일부 계층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내포하지요. 과학자들은 유전학적으로 우수하게 만들어진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4년이라는 짧은 수명을 부여합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리플리컨트는 지구로 돌아와 자신들을 만든 과학자에게 생명연장을 요구하죠. 그러나 리플리컨트는 인간들의 식민지 개척을 위해 쓰인 후, 생명연장을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의해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데커드가 그들을 살해하는 장면을 보면,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되는군요.

 

 

영화는 인간세상을 어지럽히는 리플리컨트를 블레이드 러너가 처리하는 영웅담으로 본다면, 이야기 구조는 단순합니다. 그렇다고 강렬한 액션이나 화려한 영상미가 돋보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화면은 줄곧 어둡고 비가 내려 질척거리죠.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거대하게 솟은 타이렐사는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를 모토로 내걸고 있습니다. 인간다움, 영화에서 리플리컨트를 진짜 인간과 구별하는 방법은 질문을 통해 변화하는 눈의 초점을 통해서입니다. 눈동자는 복제인간의 기억을 저장하는 도구이며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회에서는 ‘기억과 감정’, 이것이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죠. 고성능의 리플리컨트인 레이첼(숀영)은 추억이 이식되어 있기에 데커드가 검사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기억과 감정을 통해 리플리컨트를 구분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데커드가 레이첼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 판단은 믿음의 문제로 넘어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사실 감정이나 기억은 미화되거나 왜곡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이제 가짜와 진짜의 구분이 불명확해진 복잡한 시대를 살고 있지요.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를 시뮬레이션이나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실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가상세계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가상은 지시할 수 있는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며 모사의 논리만이 작동하는 것이죠. 이것이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시뮬라크르 개념입니다. 즉, 그 자체의 실재 외에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나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인 것입니다. 영화 속 세계를 잘 설명해주는 개념들입니다. 복제인간들의 기억과 감정은 완벽한 가상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죠. 영화 <Her(2013)> 를 통해 인공지능과의 사랑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게다가 데커드 역시 리플리컨트일지 모른다는 복선이 영화 속에 묘사됨으로써 인간과 복제인간의 경계는 더욱 불분명해집니다.

 

리플리컨트는 인간을 복제한 ‘가짜’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인간의 가짜 기억과 정체성이 심어졌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때문에 괴로워하죠. 마지막에 이르러 생명연장의 꿈을 이루지 못한 리플리컨트 로이와 그를 쫓는 인간 데커드의 긴 격투씬을 떠올려볼까요. 로이는 마지막 순간에 데커드를 구합니다. 법적 질서를 위해 리플리컨트를 아무런 감정없이 회수하는 데커드의 모습과 대조적이죠. 그리고 자신만의 기억을 데커드에게 들려준 후 죽어갑니다. 로이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룻거 하우어, 그가 작년에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2019년이더군요. 그가 직접 썼다는 그 유명한 대사, “나는 너희 인간들이 결코 믿지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성운 언저리에서 불타 침몰하던 전함, 탄호이저 기지의 암흑 속에 번뜩이던 섬광. 그 모든 것이 곧,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 빗속에 흐르는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죽음의 순간, 로이도 자신의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생명연장을 원하는 복제인간들을 적으로 보기보다는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할지, 새로운 질문이 이어지네요.

 

 

우리는 우리가 지녀야할 가치에 대해 끝없이 개념화합니다. 말을 통해 상대와 소통하는 인간에게 그 일은 중요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그만큼 무언가를 바라볼 때 그 틀에서 바라보기도 쉽습니다. 인간, 여성, 남성, 보수, 진보, 야만, 문명 등등 그 정의에 따라 ‘00답게’라는 자신만의 틀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닐까요? 마치 복제양 돌리의 탄생은 기뻐한 인간들이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순간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며, 순간순간 자신의 편의에 의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처럼 말입니다. 근대적 인간으로 살아온 저로서는 정해진 틀이나 경계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커다란 도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를 무너뜨리고 기존의 관습에서 탈주하여 서로가 소통할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탈주하는 것이야말로 오히여 인간다움에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과학문명이 우리의 상상을 넘어 우리에게 칼을 겨누는 오늘날, 우리는 비인간존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할까요? 영화를 보고 나니,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갈 지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댓글 2
  • 2020-07-17 10:05

    로이배티... 좋아하는 캐릭터였는데 배우께서 돌아가셨군요..

  • 2020-07-17 12:38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구나 감독이 드니 빌뇌브라고 해서 엄청 기대하고 개봉되자마자 극장에 가서 그 영화를 봤어요.
    근데...음....기대가 너무 높았을까요? 제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어요. ㅋㅋ
    이건 오리지날리티가 진짜 높은 작품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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