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큰 플라워> 후기

산새
2020-05-23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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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로큰 플라워>를 보고...

 

 짐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을 좋아한다. 소소한 일상을 그렇게 잘 들려주는 영화가 또 있을까싶다. 그래서 <브로큰 플라워>도 기대를 갖고 갔다. 지금샘처럼 <패터슨>보다 볼만했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난 그렇지는 않았고.. 여전히 <패터슨>이 최고^^

 

 2005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봉준호가 송강호를 염두에 두고 <기생충>을 쓴 것처럼 짐자무시는 처음부터 빌머레이를 주연으로 점찍고 각본을 썼단다. 애초에 썼던 <하늘에 뜬 세 개의 달>이란 각본을 (왜 마음이 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작 들어가기 전 2주 만에 다른 내용으로 바꿔 쓴 게 <브로큰 플라워>라고 한다.

 

 어느 오후, 소파에 길게 누워 TV를 보는 돈 존스톤(빌 머레이)이 있다. 백발이 성성한 무표정의 독신남. 그는 돈 후안(카사노바)을 다룬 흑백영화를 보고 있다. ‘돈 후안’을 보고 있는 ‘돈 존스톤’ (이름이 같았네~)

 동거 중이던 쉐리는 이제 막 그를 떠났고 발신자 없는 분홍색 편지가 도착한다. 19년 전 그가 알지 못하는 동안 옛 애인이 낳아 기른 아들이 찾아올 거라는 편지다. 그 내용은 까무러칠만한데 돈은 어떤 상황에 놓여도 다 상관없다는 듯 그저 무표정하다. 늘 어두운 집 소파에서 TV만 보다가 잠들고, 곤색과 녹색의 츄리닝 두 벌로 일상을 버티며 산다. 내 눈엔 ‘인생 참 살맛 안난다’는 것으로 보였다.

 

 타자기로 쓴 편지는 우체국 소인도 알아 볼 수 없고 보낸 사람의 이름도 주소도 없다. (돈의 유일한 친구로 보이며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듯한) 이웃집 윈스톤은 그 편지를 보고 당장 그녀를 찾아가 보는 게 좋겠다며 가능성이 있는 옛 연인들을 방문토록 준비해준다. 그렇게 등 떠밀려 츄리닝을 벗고 길 위로. 분홍색 편지지와 타자기를 단서로 (분홍색 꽃다발을 들고서) 옛 연인들을 찾아간다. 김혜리 기자의 글처럼 “출발 전-여행-귀향 후”의 고전적인 3막 구조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아이의 엄마인가?” 라는 질문을 붙잡고 영화를 보게 된다.

 

 레이싱사고로 사별했지만 발랄한 로라(샤론 스톤)와 히피에서 단정한 부동산업자가 된(그러나 창백해 보이는) 도라(프랜시스 콘로이), 동물의사 소통가가 된 카르멘(제시카 랭), 삶이 힘든 페니(틸다 스윈튼)를 차례로 만나지만 아들의 흔적과 사랑의 기억은 어디에도 없다.(재회의 순서는 혹시 뒤로 갈수록 더 나쁘게 헤어진 순서? 그래서 페니는 만나자마자 주먹부터 날렸나)

 여행을 통해 희망을 찾고 성장해간다는 ‘로드무비의 공식’을 이 영화는 비껴간다. 길은 새로운 돈 존스턴을 낳지 않는다. 대개의 영화가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지만 짐자무시는 그 반대를 택했다. 우리는 아들을 찾는 아버지를 따라가지만 과거를 추적하는 여행에서 그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동안 그의 집 화병에서 시들어가는 꽃(broken flowers)이 현실일 뿐.

 

      과거는 떠나갔지. 잘 알다시피.   The past is gone. I know that.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어.           The future isn’t here yet,

      어찌 흘러가건 그러니까..           Whatever it’s going to be.

      지금 여기 있는 건 현재야.         So, all there is is- is this. The present.

      이게 다야.                                     That’s it.

 

 <패터슨>에서 보였던 짐자무시 특유의 반복은 이 영화에도 있다. 여정자체가 반복. 비행기를 타고 렌트카를 운전하며 윈스턴이 구워준 CD로 뽕짝같은 음악(물라투 아스탓케와 에티오피아 재즈 5중주)을 듣고 장미꽃을 사서 옛 연인의 집을 방문하고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아무런 진전없이 돌아온다.

 색깔의 반복도 있다. 우체통과 자동차, 집배원유니폼, 빌머레이의 츄리닝은 파란색으로. 여자들의 의상과 머리끈이나 배낭에 맨 리본 같은 포인트 소품은 분홍색으로. 감독이 특별한 의미로 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단연코 빌머레이의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 다음은 <패터슨>에서도 보여준 짐자무시 특유의 여유. 영화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간다. 그리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청량리샘도 이점이 좋다고 하셨다)  

그래서 행간을 읽어내는 재미는 우리 몫이 된다.

 윈스톤이 방문리스트에서 교통사고로 이미 죽은 '미셸 페페'를 빠뜨리지 않은 점도 인상적이다. 돈은 비오는 날 묘지를 찾아갔고 꽃다발을 바치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 그리고 연인들을 찾아가는 렌터카에서 존스톤이 힐끗힐끗 백미러를 들여다보는 장면도 빠뜨릴 수 없다. 자무시는 영화를 통해 우리 역시 인생의 뒷자리에 놓인 삶의 백미러를 한 번 쯤은 훔쳐보게 만든다.

 영화 뒷이야기를 할 때 돈의 연인들이 각자 너무 다른 스타일이라 이상하다는 얘기도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취향이 아니라 그녀들의 취향이 모두 같은 ‘돈’이 아니었을까ㅋ. 그녀들의 사랑이 훨씬 컸기에 20년 후의 그를 모두 한 눈에 알아본 건 아닐지..

 

 이야기 중에 가장 이해가 안된 부분은 ‘연기의 본령은 액션이 아닌 리액션(reaction)’ 이라고 말한 부분인데.. 데뷔 30년차 베테랑 배우 한석규의 말을 빌리자면 연기는...‘하는’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연기가 달라진다는 것. 그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그도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인터뷰 글을 봤는데 빌머레이의 연기가 그런 경지라는 얘기였을까요? (청년 두 분과 청량리샘~~ 그 얘기는 어쩌다 나온건지 몰라서ㅎ)

 

 다시 또 보고 싶을 정도의 영화는 아니었지만ㅎㅎ 짐자무시 영화중에서 나름 서사도 확실하고 빌머레이라는 연기자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다음 영화는 6월 25일(목)이고 영화음악의 모든 것을 다룬 다큐영화 <스코어>다.(2017년 개봉, 미국) 한스 짐머를 비롯한 최고의 음악감독들이 밝히는 전설의 명작을 완성시킨 영화음악의 탄생,과정,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았다. 이 영화는 진짜 끝내주는 오디오가 필요한데^^

 

p.s. 삶은 옥수수 가져다 주신 분~ 덕분에 맛나게 먹으며 영화 잘 봤어요. 감사!

 

 

 

댓글 4
  • 2020-05-24 10:31

    이번 달 영화가 자무시 영화라고 해서 청량리는 진짜 자무시를 좋아하는구나,
    난 또 조금 졸겠네 했었는데, (왜냐하면 오전에 세미나 하고, 오후에 문형 강좌 하고, 작업했기 때문에)
    어머 웬걸요 진짜 재밌게 봤어요. 안 졸고. ㅋㅋ
    패터슨도 좋았었는데, 이번 영화는 은근한듯 하면서 대놓고 하는 유머가 재밌었어요.
    뒷이야기 못하고 와서 더 아쉽네요.

  • 2020-05-24 21:41

    생각하지 못한 많은 관객들과 함께 본
    모처럼 아무 생각없이 막 웃으며 본
    영화였어요.
    산새님 영화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는 것도 새로 알았네요 ㅋㅋ

    맨 마지막 주인공과 꼭 닮은 아들(진짜 배우 아들임)에 빵터졌네요

  • 2020-05-25 20:05

    2년째 필름이다 우수 관객임을 자처하는 저로서는 올해 새로운 관객들을 봐서 좋았어요~~
    진달래, 토용, 지금, 노라,산새 등등... 산새는 후기도~~~
    작년의 관객님들^^ 분발하셔야 겠어요~~ ㅋ

  • 2020-05-31 00:47

    삶은 옥수수....
    돈 존스턴의 삶은 우수수....

    띠우샘 남편 분이 옥수수를 갖다 주셨습니다. 엄청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토크를 거의 나누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띠우샘과 영화를 보실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고 들었는데....흠...
    다음 번에 꼭 한 번 더 모시고 싶네요.

    <많이 올까 걱정되는 영화모임>의 두 분이 함께 해 주었습니다.
    우리 동네 영화감독입니다. 안재영과 권지용

    오랜만에 영화 상영 때 맥주는 없냐고 어느 분이 질문하셨습니다.
    맥주는 없어도 간식은 준비해 놓겠습니다.
    참고로 파지사유에서 맥주를 3,000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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