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시즌1 밀로스 포만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띠우
2020-04-30 00:26
297

 

어차피 피곤한 것이 인생이라면...

 

요즘 선진국이라 칭해졌던 나라들이 코로나19를 두고 벌이는 행태들이 막장드라마를 연상케 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총기류에 대한 구매가 나날이 늘고 있다고 하네요. 그 중심에는 혐오와 배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과 1950년대 뉴딜 정책을 거치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층민을 비롯한 모든 국민들에게 그 경제적 혜택이 돌아갔고, 그들은 점차 모든 면에서 비슷해지기 시작했죠. 그 속에서 평등은 강요된 동일화로 드러났고, 자연스럽게 비슷한 생활 방식에 따라야 한다는 순응의 미덕이 강조됩니다. 우리도 경제성장을 중심으로 이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집단주의적 색채가 강해지면서 거대한 조직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5,60년대 미국에서는 사회에 해가 되는 중증 정신질환 치료를 위해 전두엽 절제술을 권장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에가스 모나즈는 전두엽을 잘라낸 원숭이가 온순해지는 사실을 실험중에 발견하지요. 이후 정신장애인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 수술이 빈번하게 자행된 것입니다. 뇌의 일부를 파괴하기 때문에 환자가 반영구적으로 무기력해지고 공감능력을 상실하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수술은 사회유지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1970년대까지 이어졌지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밀로스 포먼, 1975)는 바로 그러한 상황의 정신병원을 보여줍니다. 그 속에서 개인을 보호해야 할 사회가 어떻게 변질되었고, 질서 유지를 위해 서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을 억압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조직의 권위에 저항하거나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개인은 어떻게 될까요? 이미 우리는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영화는 반항적이고 멋대로 살던 건달 맥머피(잭 니콜슨)가 정신병원에 수감되면서 시작되지요. 처음에 주인공이 정신병원에 들어갔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그는 힘든 교도소 생활보다 정신병원이 훨씬 자유롭고 편할 것만 같아서 일부러 미친 척 하고 정신병원으로 오게 된 것이죠. 그러나 그는 감옥보다도 더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정신병원의 환경에 놀라게 됩니다. 이 병원은 환자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학대도 서슴지 않는 랫체드 간호사가 장악하고 있죠. 맥머피는 환자들을 부추겨 랫체드의 권위에 맞서고 병원 탈출을 계획합니다. 현실이 아닌 영화에서는 이것이 성공할까요.

 

 

모든 일은 아주 우연하고 단순한 데서 시작되었지만, 맥머피의 저항적인 행동들은 그야말로 병원의 실질적인 권력자에 맞서 싸우는 진정한 영웅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에게는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정상적인 일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해왔던 대로 무탈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기계의 톱니바퀴에서 더 효율적인 부품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혼자만 튈 때 쏟아지는 비난은 무탈한 우리의 일상을 흔든다는 두려움 때문일 거에요. 차이를 인정하는 대신 틀렸음을 지적하고 강제적인 조치에 들어서는 것이죠. 게다가 우리는 부조리하고 억울한 현실을 맞이해도 떠날 수도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이 이미 경제적 논리로 굴러가는 상황에서 영웅처럼 지는 태양을 등지고 훌훌 떠날 수도 없으니까요.

 

급속한 발전과 자유, 평등의 가치아래 미국인들, 아니 우리들은 정서적 안정과 만족감을 얻고 있나요? 영화는 시종일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정신병원의 관리체제에 대한 고발을 통해서 당시 미국 사회가 가진 구조적 문제점을 비판합니다. 어느 틈에 질서유지를 위한 선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까지 이르렀음에도 무감각합니다. 1960년대 미국 상황은 경제적으로는 물질만능주의와 경제 발전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정치적으로는 인종차별이나 여러 사회 문제를 엄격한 보수주의로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강압적이고 지배적인 사회체제에 저항하여 인간의 자유에 대한 질문이 다시 부각되었고,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정치경제적 상황이 지금의 한국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툽니다. 저는 다툼이 없는 인간 세상이 있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사실 모든 다툼에는 각자의 입장이 있다는 것이 문제 해결에서 어려운 점이죠. 서로 다른 가치관, 다른 상황, 다른 이데올로기들이 그 속에 존재합니다. 나는 완전히 옳고 너는 완전히 틀린 경우는 많지 않죠. 그러나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우리는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입장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 중도를 의미해서는 변화란 요원하겠죠. 요즘 저는 중도란 말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판단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냥 시간에 몸을 맡기고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라는 핑계하에 몸을 숨겼던 것이죠 그러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판단을 찾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때 더욱 중요한 것은 나의 입장에 대한 책임도 함께 필요하다는 것이죠.

 

 

인디언 추장 브롬든은 늘 빗자루를 들고 병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주변 상황을 용의주도하게 살핍니다. 그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척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철저하게 세상과 자신을 단절하고 잔뜩 웅크리고 있지요. 그의 행동은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방법일 겁니다. 혹시 이 모습이 나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사는 것이 피곤하고 무기력하지 않나요. 결국 브롬든은 정신병원을 탈출합니다. 그도 어딘가에서 다시 삶을 살아가야 하겠지요. 우리는 개인이 주체라는 환상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늘 무리 속에서 살게 됩니다. 저 역시도 조금은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고 문탁에 들어왔던 것처럼요. 그렇지만 여기도 피곤하네요. 모두의 공유지를 발명하기란 순응하며 사는 것과는 결이 다른 피곤함이 있더라구요. 살피고 듣고 간혹 싸움도 아주 잘 해야 하니까요.

 

 

많은 영화 속에서 개인의 일탈과 저항은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매번 다른 구조임에도 이러한 반복을 습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습관이란 참 무섭지요. 누구는 조직의 유지를 위해 선택한 판단을 따르고, 누구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저항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시간 뒤에 숨어 중도의 길을 선택한 저와 같은 부류의 병동 친구들이 존재하죠. 자주 개인과 조직(공동체) 사이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 속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으니까요. 여기 이곳이 저들이 있었던 정신병원과 별 다를 바 없다면 다수결에 갇히거나 많은 사람들과 나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긴장을 받아들이고 갈등과 다툼을 받아들이면서 입장의 차이를 숙고해나가야겠죠. 순응하는 가운데 남을 탓하고 짜증을 내며 피곤해하기보다는 수많은 차이를 통합해가면서 내가 가야할 길을 찾아 헤매는 피곤함이 나란 존재를 긍정하는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댓글 1
  • 2020-05-01 08:02

    언제 이 영화를 처음 봤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푸코니, 규율권력이니, 생명권력이니, 이런 걸 잘 모르는 상태에서 봤던 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도 이건 정신병원에 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정신병원이 된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구나, 라는 걸 느꼈습니다.

    나중에 푸코를 공부하게 되었을 때 늘 이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푸코를 영화로 만든다면 바로 이 영화겠구나, 라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의 영화적 버전이구나, 이 영화는!! 이라는.

    전... 최근에 쏟아져나오는 정치드라마? 역사드라마? (남산의 부장들, 1987, 변호사... 기타 등등)들을 보면서...늘, 조금은, 아니 많이 아쉬워하는데... (영화가 너무 '남성'스러워. 너무 구태의연해..ㅋ... 왜 영화를 이렇게밖에 못 만들지? ㅋㅋ)
    '삼청교육대'나 '녹화사업'을 <뻐꾸기 둥지 위로 ...>같은 방식으로 만들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잭 니콜슨같은 배우는 우리나라에도 있을 것 같구...문제는 밀로스포만같은 감독이 아직 없는거죠? 우리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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