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 시즌1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자전거 도둑>(1948)

청량리
2020-04-14 04:25
815

미안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 자전거 도둑, Ladri di biciclette |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 1948

 

 

 

 

 

 

 

함께 봤던 채플린과 키튼의 영화 덕분인지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흑백영화 <자전거 도둑>(1948)에도 우리집 아이들이 호기심을 보입니다. 그래서 함께 보기로 했습니다. 시작 전 아이들이 묻습니다. “여기서도 웃긴 장면 나와?” “아니” “한 개는 나오지?” “아니” 아이들에게 ‘흑백영화 = 웃긴 영화’라는 공식이 생긴 모양입니다. 영화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모인 광장에서 주인공 리치의 이름이 불리면서 시작됩니다. “리치, 내일 일하러 갈 때 자전거는 꼭 챙겨 가야하네!”

자전거를 전당포에 맡겨서 난감해진 리치. 주변에서는 자신들이 대신 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서울로 일하러가는 길, 광역버스에서 내린 후 몇 블록 떨어진 회사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걸어가기엔 좀 멀고 마을버스를 타기엔 애매한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자전거였죠. 집에 있는 자전거를 갖고 갈 수 없어서 회사 근처에서 직거래로 중고자전거를 한 대 샀습니다. 자물쇠도 새로 사고, 경쾌한 소리가 나는 따릉이도 하나 달았습니다. 다시 집으로 오는 길에 광역버스 승강장 맞은편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다녔습니다.

 

비교적 짧게 느껴지는 러닝타임이 지나가고 어느 덧 화면 속에서는 아버지와 아이가 손을 잡고 군중들 속으로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또 묻습니다. “이게 끝이야?” “응” “자전거는 못 찾는 거야?” “어” “그런 게 어디 있어? 이상하잖아?” “왜?” “진짜 이게 끝이야?”

<Ladrón de bicicletas : 자전거 도둑들>....이 원래 제목이다.

 

어느 날 아침, 버스에서 내려 자전거를 묶어 둔 곳에 가보니 글쎄, 안장만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황당한 마음에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회사까지 끌고 왔습니다. 점심 산책길에는 길거리에 세워진 자전거 안장만 눈에 들어옵니다. 나도 하나 훔칠까? 퇴근길에 하는 수 없이 다시 제자리에 묶어 두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건너편에 서 있는데, 왠지 자전거가 불안해 보입니다. 다음날, 결국 자전거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안장이 없는 자전거를 버려진 거라 생각했겠지요. 저 역시 결국 도둑은 못 찾았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현실이지요.

 

창밖으로 보이는 골목길 역시 세트로 만들었다. 양말에선 꼬린내가 나는 듯하다.

 

영화 <기생충>(2019)의 모든 장면이 세트장에서 촬영됐다는 건 이제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박 사장의 대저택은 물론이고 기택이 살고 있는 반지하방과 그가 살고 있는 골목길 모두가 영화를 찍기 위해 제작된 세트입니다. 영화 속에서 냄새가 중요한 은유적 장치임을 감안해 이하주 미술감독은 기택이 살고 있는 골목길에 음식물 쓰레기(봉투)도 소품으로 갖다 놓습니다. 자신의 의도를 명확하게 구현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좀 더 현실적 보이기 위해 선택한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이 돋보입니다.

 

박 사장의 저택에서는 여러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기우가 우연히 첫째 딸의 과외선생으로 위장취업에 성공합니다. 그 다음 기정은 둘째 아들의 미술선생으로, 기택은 박 사장의 운전사로, 마지막 충숙은 그 집의 가정부로 ‘믿음의 벨트’를 형성합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역시 현실적인 세트와 반복적인 이야기 흐름을 갖는 닫힌 구조의 형식을 취합니다. 그 세트 안에 관객을 잡아두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박 사장의 집 2층은 CG로 만들기 위해 블루스크린으로 촬영되었다.

 

하지만 정교하고 ‘리얼’하게 만들어진 세트 위 장면들은 스펙터클하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사건이 반복적으로 재구성됨에 따라 오히려 현실감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지하 아지트에서 벌어진 사건은 근세의 죽음과 기택의 실종으로 일단락됩니다만, 지하실에 숨어 사는 기택의 모습은 사건이 또 다시 반복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때문에 봉준호 감독이 추구했던 ‘리얼’한 현실성은 세트 안에서만 존재하고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휘발되어 사라집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일회성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보이는 데자뷰가 ‘매트릭스’의 오류를 암시하듯,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에서처럼 같은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둘 중에 하나는 ‘상상’일 따름입니다.

 

반면 데 시카 감독은 영화 <자전거 도둑>(1948)의 모든 장면을 세트 없이 로케이션, 즉 현장에서 찍습니다. 영화 속에는 전후 이탈리아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일이 없어 구걸하듯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모인 광장, 수도공급도 안 되고 변변한 도구도 없어 보이는 주방, 물건들을 맡기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줄을 선 전당포가 그대로 영화 속에 배경이 됩니다. 꾸미지 않은 현실의 모습을 담고자 했던 데 시카 감독은 미국 제작자가 제안한 할리우드 배우 대신 공장노동자와 신문배달 소년을 아버지와 아들로 캐스팅합니다.

 

영화에서는 두 명의 도둑이 등장합니다. 리치의 자전거를 훔친 도둑과 리치 자기자신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절도행위는 반복되지 않고 각기 ‘다른’ 사건으로 일어납니다. 그걸 알고 있는 아들은 아버지가 도둑으로 붙잡혀서 눈물을 흘릴 때 그의 손을 잡아 줍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더 이상 지나가는 사람들과 구별하기 어려워집니다. 전후 피폐해진 이탈리아인 모두가 리치이자 그의 아들인 셈입니다. 미안하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로케이션 촬영과 비전문배우들의 연기로 강한 설득력을 얻습니다. 만일 리치도 자전거를 훔치는 데 성공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래서 직장에서 일을 열심히 하게 되었고 자전거 주인에게 돈을 갚는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속편 <자전거 도둑 2 – 명탐정 리치>에서 또 다른 사건으로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벌새>의 한 장면. 중2 은희와 대학생 영지가 한문교실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이미지의 등장으로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던 인간의 욕구는 완성되고 한편 그 욕구로부터 드디어 해방이 됩니다. 대상은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사진 속에서는 영원합니다. 연극이나 음악, 미술, 글쓰기도 현실을 모방하고 그리는 데 있어서는 사진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영화는 여기에 시간의 차원을 더합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담아내는 것을 넘어서 시간의 지속성으로 포착합니다. 리치도 결국 자전거를 훔치려는 장면에서 그가 겪는 갈등의 시간은 그대로 나에게 전달됩니다. 단순히 객관적 재현에 머물지 않고 대상과 나 사이에 존재론적인 연관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렇게 영화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나의 현실에 스며듭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어떤 식으로든 리액션으로 나오게 되고 이미지는 중첩됩니다. 이러한 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인셉션>(2010)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선 디테일 하나하나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토의 경우처럼 카펫의 감촉이 아파트에 있는 모직과 다름을 눈치 채고 꿈에서 깨어날지도 모릅니다. 비록 꿈속이지만 그 사람이 마치 현실처럼 ‘리얼’하게 느끼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작은 씨앗 하나가 마음속에 심어지게 됩니다. 그 씨앗은 자라서 다시 현실로 되돌아옵니다. 문제는 꿈속만큼이나 현실도 무척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현실 속에선 붙잡을 수 있는 작고 사소한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가족의 비극적 사건을 통해 계층 간의 모순을 담아낸 <기생충>보다 중학교 2학년 은희의 일상 속 혼란을 그려낸 <벌새>(2018)가 좀 더 깊숙이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데 시카 감독은 영화 속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흐름을 조절합니다. 리치가 어렵게 구한 새 일자리를 잡기 위해 아내의 도움으로 다시 자전거를 찾아오지만, 출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여기까지는 다소 빠르게 보여줍니다. 아들이랑 동료들과 중고자전거 시장을 둘러보고, 우연히 훔쳐간 사람을 알아보게 되지만 놓쳐 버립니다. 그와 함께 있었던 노인을 겨우 쫓아가고 우여곡절 끝에 도둑의 멱살을 붙잡게 됩니다. 이 부분은 다소 지루함이 느껴질 정도로 촘촘히 보여줍니다. 이유는 마지막 장면에 있습니다.

 

 

아버지 리치 역 - 람베르토 마지오라니, 아들 부르노 역 - 엔조 스타이올라

 

 

이제 해 볼 건 다 해 본 아버지와 아들은 허탈한 듯 도로 위에 주저앉습니다. 그때 리치의 눈에 들어오는 건 경기장 앞에 세워진 수많은 자전거들입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한적한 골목길 벽에 기대놓은 자전거가 보입니다. 영화에서 보여준 긴 시간들은 리치가 갈등하며 서성이는 동안 꾹꾹 눌렀다가 결국 자전거를 훔치려고 손을 대는 순간 폭발합니다. 하지만 곧 주변사람들에게 잡히고 아들 앞에서 온갖 모욕을 당합니다. 미안하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문광의 죽음을 근세가 복수한다거나, 그로 인해 기정이 죽고 기택이 다시 칼을 드는 일은 데 시카의 영화 속에서 보이질 않습니다.

 

영화 <인셉션>에서 아리아드네는 어떻게 하면 꿈을 현실처럼 보이게 할 수 있냐고 코브에게 묻습니다. 하지만 코브는 걱정 말라는 듯, 잠에서 깨어나야만 그게 꿈인 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갖고 있는 허상이 깨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깨뜨려야 할 것과 바라봐야 할 현실은 무엇일까요? 아직 못 찾아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시네마’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으니까요.

 

 

 

댓글 3
  • 2020-04-15 09:18

    댓글달기가 쉽진 않네요.
    이유는?...음.....

    어쨌든 저는 네오리얼리즘의 교과서인 <자전거도둑>과
    장르영화의 정점을 찍고 있는(최소한 지금까지는?!) 봉준호와
    약진하고 있는 새로운 여성독립영화들이
    횡단되어 함께 논의되려면 뭔가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리고 겸서와 한서의 구체적 반응이 궁금궁금.
    어쨌든 아빠와 함께 <자전거도둑> 흑백영화를 보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흐뭇흐뭇^^

    • 2020-04-15 09:50

      네오리얼리즘과 장르영화, 그리고 여성독립영화로 굳이 구별하여 횡단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만,

      영화 자체가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허구임에도 그 안에서 현실을 대하는 태도는 많이 다릅니다.

      그것을 굳이 장르영화와 여성독립영화가 다루고 있는 현실로 나눠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감독의 개인적인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지점이 있는 듯 합니다.

      저는 영화 <기생충>이 왜 장르영화의 정점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세트는 리얼했으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세련된(?) 사건들로 인해

      오히려 그 세트의 리얼함을 떨어뜨렸던 것은 아닌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 2020-04-16 09:52

    그래서 질문이 '리얼'이란 무엇인가? 인건가요?
    아니면 영화에서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인건가요?

    뭔가 이 글을 프린트해서 꼼꼼히 읽아봐야 청량리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네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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