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시즌1. 존 포드 <역마차>

띠우
2020-04-05 21:59
416

공동체의 위기, 그 앞에 선 당신의 선택은?

 

인간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스펙과 안전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자기를 지킬 것은 자기밖에 없다고도 하죠. 그러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현재를 보면 그런 말도 우스워집니다. 둘째아이가 요즘 주로 하는 말인데요. 죽으면 아무 소용 없다네요. 그러다 보니 사회적 거리두기를 문제해결의 최고자리에 두고, 국가의 지침을 어기는 일에 예민해져갑니다.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죠. 이때 불특정하게 발생하는 문제로 인한 공격 대상은 나를 제외한 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국가가 잘 굴러가도록 무조건 협력해야 할까요? 당연하다구요? 오늘 영화는 이러한 당연한 질문을 낳는 존 포드의 <역마차>입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은 1939년, 세계 대공황 한복판에서 제 2차 대전이 이제 막 시작되려던 때입니다. 아직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던 미국은 전쟁에 불참하게 되고 내부 문제로 깊이 파고들게 되는데, 이때 중심이 되는 가치가 미국적 국가주의입니다. <역마차>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은 이러한 역사적 한계 속에서 행해집니다. 영화 초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신분에 따라 분리되기도 하지만 역마차를 탄 순간부터 극단적 대립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외부의 적인 인디언의 위협 앞에서 서로 결합하고 뭉치는 모습을 보여주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역마차가 파괴되거나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탑승중인 사람들의 운명 역시 불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그들이 강건해져야 하는 것이죠.

 

코로나19가 모두를 덮쳐버린 한편에서 중요한 선거를 앞둔 우리의 상황을 떠올려봅니다. 타협과 협조를 통해 질서를 잡으려는 공동체의 요구, 요즘 비례정당을 둘러싼 이야기 같네요. 그러나 현실은 온갖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자의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다른 가치를 가졌든, 다른 사회적 신분이든, 역마차의 안전을 위해 하나로 뭉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치논리와 유사해 보입니다. 국민과의 약속은 우선 하나의 공동체, 정당이 붕괴되지 않는 전제하에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타협을 정당화하고 훗날을 약속합니다. 정당이 강건해져야 하는 것이죠. 곧 투표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개인으로서 선택은 쉽지가 않네요.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죠.

 

상업영화로서 웨스턴의 황금기는 1930년대에서 50년대까지를 말합니다. 웨스턴은 현대 사회의 기본 조건인 법과 질서라는 개념이 막 형성되었던 20세기 초엽을 많이 보여줍니다. 따라서 당시 웨스턴은 주로 문명과 야만의 기본 갈등은 다루지요. 그것은 다양한 이분법으로 확장되어 보여집니다. 즉 사회 질서 대 무정부, 마을 대 황야, 카우보이 대 인디언, 개인 대 공동체 등이죠. 대부분 웨스턴들은 실제로 이런 대립 요소들을 우리에게 암시하면서 영화를 시작합니다. 나누고 분류하고 다시 쪼개고... 끊임없는 분리가 이루어지네요.

 

 

<역마차>도 예외는 아닌데요. 영화의 첫 장면은 애리조나 주의 모뉴먼트밸리를 보여주는 숏으로 시작됩니다. 이어 사막 저편에서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그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들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갑니다. 전보기 앞에서 전신이 끊어지기 직전, 긴박한 상황에서 ‘제로니모’라는 오직 한 단어를 내뱉죠. 제로니모는 1848년 이후, 자신들의 땅에 침범한 멕시코 군과 미국 군대에 맞서 30년 동안 싸웠던 인디언 전사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단어는 단지 그 인물만이 아닌, 미국의 대척점에 있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셈이죠.

 

<역마차>는 적대적인 인디언 지역을 통과해 로즈버그로 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영화의 기본 내용은 단순합니다. 군인 부인, 술집여성, 도박꾼, 자격박탈 의사, 은행가, 보안관 그리고 탈주범인 주인공까지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하나의 역마차에 타서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고 이를 물리친다는 이야기죠. 역시 큰 틀은 문명과 야만의 대립입니다. 공동체의 갈등, 모순되는 가치들을 지휘하는 존 포드의 능력에 의해 <역마차>는 뛰어난 영화로 평가받습니다. 기병대가 구조대가 되고, 사막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단순한 형식 속에 감독은 사회에서 추방된 사람들을 배치함으로써 포괄적인 사회 문제를 제시하지요. 그런 인물들을 통해 포드는 동시대가 요구하는 미국적 인간조건이나 가치의 모순을 구체화시켰습니다.

 

 

<역마차>의 마지막 장면은 문명화되지 않은 무법자 링고와 댈러스가 기회와 약속의 땅인 미국 서부, 즉 신세계에서 함께 떠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존 포드가 다르게 보인 지점은 여기였지요. 영웅으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만 그는 공동체 안에 머무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웅과 공동체 모두 야만적인 환경과 관계를 맺으면서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하지요. 그러나 공동체가 문명화될수록 그래서 더욱 법치화되고 자본주의화되면서 부패할수록 공동체는 자신의 근원인 자연과의 접촉을 점차 잃어갑니다. 영화 속의 영웅은 공동체와 야만의 주변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두 세계 모두와의 접촉이 가능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링고와 댈러스를 함께 떠나보냄으로써 또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품기도 합니다. 우리는 단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다시 1939년의 이야기가 아닌 2020년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우리는 강력한 법 체제 아래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죠. 우리는 그러한 공동체 속에서 살기 위해 협력을 요구받습니다. 코로나19나 선거를 앞둔 정당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유럽 상황이나 일본의 상황을 견주어 우리나라의 방역체계가 칭송되고, 미국 못지않은 국가주의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신천지이후 확진자들의 동선을 보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오늘 벌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거리두기가 어떻게 들릴까요. 선거를 앞두고 비례정당을 바라보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정당이나, 현 정권의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 연합세력을 모으는 정당이나 모두 하나의 역마차를 탄 모양새입니다. 그러다 목적지에 내리면, 뿔뿔이 흩어져가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영웅이 아니기에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협력’에 대해 묻고 싶어졌습니다. 공동체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협력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을까요. 협력 자체가 목표가 되는 삶을 산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요. 리처드 세넷은 <투게더>에서 협력 자체가 목적인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을 획득된 권위, 상호존중, 위기 속에서의 협력이라고 하죠. 획득된 권위는 일상적 불평등속에서 특정한 방식, 의례를 통해 생겨납니다. 서로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함께 하는 일에 진지하고 헌신적인 참여가 일어나죠. 인간의 관계능력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상호존중이 발생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도약하는 신뢰라고 합니다. 나는 너를 믿어, 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닌 상대를 믿고 땅에서 발을 뗄 수 있는 믿음이지요. 그렇게 되면, 모든 매뉴얼화된 해결방식이 통하지 않는 위기 상황에서 (권위와 신뢰에 의해)비공식적인 협력방식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하네요. 협력 자체가 목적이라면,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댓글 5
  • 2020-04-06 15:30

    "마지막 장면에서 링고와 댈러스를 함께 떠나보냄으로써 또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품기도 합니다. 우리는 단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띠우님의 글에서 제가 여전히 헷갈리는 부분입니다;;; 또 하나의 공동체, 단 하나의 공동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맥락을 좀 더 알려주세요~~

    이 글을 읽으니 저 영화를 본 기억이 좀 더 구체적으로 떠오릅니다.
    그 때 '제로니모'라는 의미를 잘 몰라서 이들이 역마차를 타고 왜 도망가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던 기억ㅋㅋ
    지금 다시 보면 더 실감날지도 모르겠네요^^
    다음 글로 쓸 영화는 뭔가요? ㅋ

    • 2020-04-06 19:20

      예를 들자면, 코로나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들을 볼 때 신천지를 비롯한 종교행사와 해외입국자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마치 단 하나의 공동체(국가)를 최우선에 두고 사는 것처럼 그려져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잖아요. 우리는 가족으로서도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친구들과도 공동체를 이루고 삽니다. 정치적인 연대를 하기도 하지요. 영화 속에서 두 남녀가 함께 떠나는 모습은 우선은 가족공동체를 연상시키지만 저로서는 새로운 관계의 공동체로 나아간다고 읽고 싶었어요^^ 다음 글은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로 써볼까 합니다~~

  • 2020-04-06 16:07

    반들반들한 지금의 세상에서 볼 때 거칠고 투박한 그 때의 세상이 그냥 좋을 뿐이예요 저는^^
    특히나 석양을 등지고 외로이 말을 타고 가는 ^^

    • 2020-04-06 19:23

      봉옥샘~~ 영화인문학을 같이 하셨어야 했는데...
      거칠고 투박한 그때의 세상을 많이 보실 수 있는데ㅎㅎㅎ
      거기에 서로를 가로지르는 해석까지... 함께 하지 못해 아쉽구만요~~

  • 2020-04-07 09:00

    음...'협력'이라는 말을 스피노자의 '공통관념'으로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네요. ㅋㅋ
    전 '또 하나의 공동체'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공통관념이 지속적인 진리가 아니듯, 또 그때 그때 만들어져야 하듯,
    기존의 것이 계속 진리일 수는 없지 않을까요?
    떠날 수도, 또 폐기할 수도 있어야 '협력'이란 말이 진정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네요.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17
2022 필름이다 아홉 번째 정기상영작 <플루토에서 아침을, Breakfast on Pluto> (2005) (1)
청량리 | 2022.12.12 | 조회 682
청량리 2022.12.12 682
216
필름이다 여덟 번째 정기상영작 <뷰티풀 보이> 후기 (3)
청량리 | 2022.11.20 | 조회 247
청량리 2022.11.20 247
215
2022 필름이다 여덟 번째 정기상영작 <뷰티풀 보이, Beautiful Boy>(2018)
청량리 | 2022.11.12 | 조회 555
청량리 2022.11.12 555
214
필름이다 10월 상영작 <새벽의 황당한 저주> 후기 (2)
스르륵 | 2022.10.30 | 조회 242
스르륵 2022.10.30 242
213
필름이다 8월 상영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후기 (2)
뚜버기 | 2022.09.24 | 조회 207
뚜버기 2022.09.24 207
212
<애플> 후기
기린 | 2022.08.19 | 조회 233
기린 2022.08.19 233
211
2022 필름이다 여섯 번째 정기상영작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カメラを止めるな, 2018 (3)
청량리 | 2022.08.15 | 조회 688
청량리 2022.08.15 688
210
<십개월의 미래> 후기 (2)
둥글레 | 2022.07.11 | 조회 274
둥글레 2022.07.11 274
209
2022 필름이다 다섯 번째 정기상영작 <애플> Apples, Mila, 2020
청량리 | 2022.07.11 | 조회 647
청량리 2022.07.11 647
208
생각의 틈을 만들어내는 비급(祕笈) - 22년 필름이다 5월 정기상영작 <스위스 아미 맨> 후기 (2)
청량리 | 2022.06.13 | 조회 352
청량리 2022.06.13 352
207
22년 필름이다 네 번째 정기상영작 <십개월의 미래> Ten Months, 2020
청량리 | 2022.06.09 | 조회 391
청량리 2022.06.09 391
206
<필름이다> 4월 상영작 '코다' 후기 (2)
| 2022.05.23 | 조회 314
2022.05.23 314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