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곤란한 감정 첫 번째 모임 후기 

아낫
2021-10-26 16:05
334

마음의 생태학을 힘들게 읽었으니 조금 쉬어갈 수 있는 책을 읽자고 시작한 책이었다. 그런데 ‘쉽게’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일까 말랑말랑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마음의 생태학이 지적인 이해가 어려웠다면 이 책은 사회적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저자가 느끼는 불편함이 텍스트 안에서 해소되지 않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도 1조 멤버들의 메모를 듣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재는 풍부했다. 

 

우리의 이야기 소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이런 면까지 고민을 해야 할까, 상담에 대한 주변의 관심이 크다. 특히 ‘요즘’ 세대들이 그런 것 같은데 그 효용이, 필요가 궁금하다, 감정을 중시하는 풍조가 지나친 것 아닌가, 혹은 소중한 사람의 감정을 나는 충분히 알아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감정이라는 것도 너무 해석되고 소위 ‘올바른’ 방향이 제시되면서 이상하게 제도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 기업의 사과와 죄책감과 수치심, 그런 게 가능한가, 그래서 이 책은 어떤 효용이 있는가?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감정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 감정과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해 질문해보고 답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는 감정 자체를 긍정과 부정으로 너무 쉽게 분류하고 그 감정을 해결하려하거나, 소위 ‘감정적’이 되지 않으려고 너무 애쓰며 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경험적으로도 우리는 감정에 대해서 부정적이기 쉽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안전하게 풀어낸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든 전문가든 내 감정과 함께해줄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모임에서 잠깐 어떤 감정도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 그 뒤에 우리 모두가 연결될 수 있는 삶의 필요(공동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렇지.. ’ 싶었고 반가웠다.  그런데 ‘명량하다’에서 저자도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감정이 너무 분석되고 정의되어서 ‘어떤 감정이 바람직하다’하다고 외부에서 강요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눴다. 우리 사회가 감정에 대해서도 세세히 정의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이미 기업에 기관에 적용되는 ‘괴롭힘 방지’와 관련된 법적 규제가 있고 이런 것이 우리 각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리 사회는 또 어떻게 변해갈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괴롭힘’이라는 것이 한 영역에서는 면밀히 정의되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보호’는 또 제도화된다. 소위 ‘피해’가 얼마나 많이 다양하게 발생하는지 접할 기회가 종종 있어서 ... 개인적으로 이런 제도화에 대해 그러지 말자고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마냥 찬성하기도 찜찜한 무엇이 있다. 제도화는 최소화되고 개인도 마음들이 튼튼했으면 좋겠다는 좀 심심한 의견이 있다. 

또, 기업이 ‘사과한다’에 대해서 이야기 나눈 부분도 생각난다. 사과는 ‘진심’이 담겨야 하는데 기업이 하는 사과는 누가 한다는 것인지 이 부분을 감정으로 다룬 것은 좀 너무하지 않냐라는 의견과 저자가 이런 사건에 ‘감정’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기업이 감정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기도하고 또 이런 일일수록 감정의 문제가 간과될 수 없는 것 같아서 다 맞는 말이다 싶었다. 종종 내가 진행하는 워크숍에서도 밀양의 한 장면을 이야기했었는데 저자도 그 장면을 언급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몇 년 전부터 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고 이 둘을 구별하면서 “수치심을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에 따르게 하는 감정, 죄책감을 개인이 자신의 기준을 따르는 감정이라고 구분”이라고 정의, 활용되는데 늘 이 설명이 불만스러웠다. 그런데 저자가 하이데거를 빌려와 양심을 설명해준 부분을 보면서 내 불만이 좀 정리되었다. 죄책감이라고 할 때 자신의 행동을 상벌과 연결하게 되고 우리는 상벌을 ‘누군가’ 힘이나 권위가 있는 사람이 내린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 힘이 있는 사람, 권위가 있는 사람은 실제 누구인가? 밀양의 그 사람처럼 스스로 그 권위를 위임받아 ‘죄를 뉘우치고 용서받는 것’은 흔한 일이다. 죄책감이라고 할 때 나는 이 흔한 현상을 걱정하게 된다. 양심을 “개인이 본래 자신을 오롯이 잘 지키기 위한 마음이며 이는 선행과 악행의 위에 있다”라고 볼 때 그럼 우리는 “본래 자신”을 무엇이라고 보는지, “본래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저자가 이 부분을 논의하지는 않지만 나는 이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행동이 자기 세상을 파괴했을 때 우리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라고 온 몸과 마음으로 괴로워할 수 있고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추가로.. 내가 1조 메모조였는데 완전히 잊고 딴세상에 있었기에 별도로 이야기를 보태본다. 

나는 ‘혐오’ 부분을 읽으면서 일상의 몇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늦여름이었나 동네 공원 놀이터에서 어떤 가족을 맞닥뜨렸다. 나는 그 놀이터를 빠져나가고 있었고 그들은 들어오고 있었는데 내 옆으로 작은 철쭉이 있는 화단에 삐죽이 자란 잡초를 보며 아이 엄마로 보이는 분이 놀란 듯 소리쳤다. “어우 잡초봐.. 혐오스러워.” 나는 순간 약간 정지상태가 될 정도로 의아해졌다. 저 분이 정말 잡초를 두고 “혐오”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 뒤로도 그 장면이 여러 번 생각나면서 생각도 마음도 복잡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또 한번은 내가 동네 어디를 다녀오다가 골목 끝 지점쯤에 왔을 때 눈앞에 방금 교통사고를 당한 듯한 비둘기가 있었다. 날개를 봐서 비둘기인줄 알았고 붉은 살과 내장이 보였다. 순간 놀랐고 왜인지 겁났고 계속 쳐다볼 수 없는 강한 불편함.. 혐오감을 느꼈다. 그런데 곧 걱정이 되었다. 이대로 두면 차들이 꽤 다니는 것으로 보이는 이 길에서 저 비둘기 몸은 계속 자동차 바퀴에 깔릴 것이었다. 쳐다보기도 힘든 혐오감과 이 걱정이 정말 격돌해서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흙으로 돌아가게 해주고 싶었다. 결국 가방에 있던 좀 두꺼운 김밥집 비닐봉지와 책을 끼워두었던 도화지로 된 책받침을 빼들고 길바닥에서 비둘기 사체를 들어 비닐에 넣고 그 봉지를 든 채로 삼십분 정도를 걸어 집으로 왔다. 그리고 밖에 두었던 큰 화분에 흙을 파내고 그 안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씨를 뿌렸다. 이 과정 내내 여러 감정과 함께 혐오감이 올라왔다. 

 

잡초는 아무리 자라도, 어디에서 자라도 나에게 혐오스러운 것이 될 수 없고 비둘기의 죽음은 너무 안타깝지만 그 시체는 끝까지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나에게 혐오의 대상은 좀 정해져있는 것인데 저자는 이 감정이 사람을 대상으로 올라오거나 표현되는 경우를 논하고 있다. ‘사람이 혐오스럽다’는 생각은 말도 표현도 못하는 것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세상이 그러고 있다. 왜 그럴까? 앞 부분만 봐서는 저자는 그저 혐오와 관련된 현상을 분석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 같다. 이유도 없다면서 인간을 싫다. 혐오스럽다 하는 현상, 자신의 취향이라면서 혐오를 존중해 달라는 현상 등. 

나는 자기 안전에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껴서 아마 저기 DNA부터 올라오는 극심한 불편함을 말하는 게 아닌데 ‘혐오’라는 단어로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경우, ‘내 감정을 소중히 대해주세요.’ 혹은 ‘나는 개성있는 존재로 살아있는게 맞나요?’ 혹은 ‘나는 다수에 속하며 보호받고 안전하고 싶어요’라는 비명이 들린다. ‘혐오’라는 단어의 실체보다 그저 그 강도가 필요한 것같다. 또 공원에 잡초를 두고 ‘혐오스럽다’고 말한 분은 깔끔하게 정리된 도시의 공원에서 안전함을 느끼거나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고 보면 ‘혐오’라는 감정은 이제 신체적 안전만이 아니라 존재의 안전함에 경고를 보내는 신호가 된 모양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사람들 속에서 자기 존재의 안전함을 느끼는 영역이 좁아지고 있는 모양이다. 

 

저자는 “그냥 싫다”라고 말하는 우리에 대해서 “당신과 난 그렇게 인간이 싫어진다. .. 아무튼 싫다는 생리적 혐오감에 당신과 나. 전염되어버렸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그냥 싫다”고 말할 때 그 뒤에 피곤함과 이해받지 못했던 순간들이 만들어내는 두려움, 외로움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건 혐오라는 표현을 쓰던 쓰지 않던 우리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외로움일 것 같고. 또 혐오를 취향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보며 “자신의 혐오를 정당화하기위한 아집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비판 전에 우리가 얼마나 표준화되는지, 우리의 안전망이 얼마나 성긴지를 돌아보고 싶다. 그래서 자주 겁나고 외로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으로 만나고 싶다. 

저자는 “사회적 감정”에 대해서 면밀히, 지속적으로 파고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감정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에 희망을 두고 싶지 않고 또 한 개인의 ‘감정투쟁’을 “스스로의 자아와 지지고 볶는데서 그친 ‘안온한 싸움’으로 폄하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한다. 어쩌면 저자는 일부러 결론이나 해결책없이 부유하면서 최대한 많은 장면을 그저 담아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힘들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책이었다. 

댓글 2
  • 2021-10-27 07:47

    개인적으로 이런 제도화에 대해 그러지 말자고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마냥 찬성하기도 찜찜한 무엇이 있다. 제도화는 최소화되고 개인도 마음들이 튼튼했으면 좋겠다는 좀 심심한 의견이 있다. 

    : 맞아요, 이 제도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가 늘 숙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제도화에 너무 빨리 적응해버려서 그 이전이 어땠는지 너무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구요. 

  • 2021-10-27 13:50

    사실은 이제까지 감정이라는 것 자체를 들여다볼 줄을 몰라....... 늘 감정 이전에 관계만을 봤던 것 같아요.

    둘이 분리된 것도 아니지만, 감정이 늘 관계와 연루된 것만도 아니고, 감정 자체를 들여다 볼 줄도 알아야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감정하면 거의 부정적인 방향으로 떠올렸던 거 같아요.  아직도 감정을 생각하려니, 피곤함이 함께 오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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