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 |
| 543 |
[페미니즘 게릴라 세미나] 3회차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위하여> 3차시 질문과 메모
(7)
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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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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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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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 2025.09.28 | 213 |
| 542 |
[페미니즘 게릴라세미나] 2회차 후기
(6)
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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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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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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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 2025.09.22 | 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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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게릴라 세미나] <폭주하는 남성성> 2회차 메모
(7)
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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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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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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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 2025.09.20 | 191 |
| 540 |
페미니즘 게릴라 세미나 첫 시간 후기
(3)
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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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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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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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 2025.09.16 | 228 |
| 539 |
[페미니즘 게릴라 세미나] 1회차 메모
(4)
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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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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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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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 2025.09.14 |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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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X돌봄] 페미니즘 게릴라 세미나 모집합니다!
(8)
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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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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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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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 2025.08.30 | 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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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낭송세미나] 『불경(佛經)』낭송 (ZOOM)
(9)
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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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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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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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 2025.08.20 | 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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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5회차 후기
(6)
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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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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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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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 2025.07.15 | 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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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4회차 후기
(6)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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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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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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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 2025.07.08 | 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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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기술에 대한 물음] <장자>에서의 포정해우와 기심 vs 스토아학파의 코스모테크닉스
(6)
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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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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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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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 2025.06.28 | 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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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2회차 후기
(4)
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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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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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 2025.06.21 | 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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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기술에 관한 물음] 1회차 후기 - 기술에 관한 물음, 닦달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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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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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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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 2025.06.20 | 137 |


200쪽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 비단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페미니즘의 부상을 경험한 거의 모든 사회가 아직 청년 남성의 역할과 지위를 명시한 정치적-사회적 서사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 가부장제 비판 이후 가부장적 남성성이 지속될 수 없음은 받아들였으나 여전히 남성이라는 정체성 자체는 간직하고 있는 다수의 청년 남성에게 그들이 새롭게 어떠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일러줄 서사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성'을 '정상적', '보편적'인 것으로 놓음으로써 '여성성'을 '소수자성'에 포섭하는 담론은 매우 유효하나, 한편으로 청년 남성들의 자리를 어떤 식으로 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이런 문제의식 자체가 생물학적, 사회적 '남성' 연구자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만큼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참여와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240쪽
"짤의 문법은 세계를 지금, 여기, 나의 경험을 중심으로 압축하며, 결락된 다층적이고 이질적인 국면은 지적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재미가 있는 한 그 내용은 아무리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라 할지라도 온라인 공간 안에서 절대 기각되지 않는다."
일상적으로 향유하고 있던 '짤'에 대해 이런 분석을 하는 게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한편으로는 7장의 저자도 언급하듯이 남성향 커뮤니티에서는 '유머'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혐오정서가 양산된다는 생각도 들고요. 유머와 그를 통한 공감은 매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그만큼 문제가 될 여지와 그 문제를 은폐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유머'에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258쪽
지금의 현상은 2030 남성들 대다수가 극우화되었다가보다는 2030 남성 집단 내에서 극우의 의미와 영향력이 확장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와 극우유튜버의 영향이 매우 커졌다. 12.3 비상 계엄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디시 중 하나는 미국정치갤러리로 24년 11월 2447건이었던 게시물 수가 25년 1월 33만 501건으로 급증했다. 2030 청년을 대상으로 한 역사.정치 교육을 주요 콘텐츠로 삼는 그라운드씨 채널의 경우, 24년 12월 3일 28만명이었던 구독자가 25년 4월 1일현재 82만 명까지 증가했다. 짧은 기간 내 엄청난 결집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질문] 짧은 기간 내 엄청난 결집을 만든 위기감과 자극은 무엇이었을까?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한 다수의 젊은 남성들이 갑자기 비합리적 극우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p156 성인방송인 벗방이 안전하게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법적 기준을 침해하지 않는 합법적인 환경의 조성이 필수적이다. 방송 송출에 대한 여성 VJ의 동의는 그 선결 조건으로, 성시장에서 동의는 합법과 불법을 나누는 핵심축이다. 여성이 동의했다는 말은 현 사회에서 그 동의를 가능하게 하는 과정, 이를 매개하는 장치, 그 효과에 관한 질문은 무효화하고 위험, 불평등, 종속의 원인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마법 같은 효력을 지닌다. 페이지 156.
"마스크걸"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 극중 못생긴 평범한 직장인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인터넷 방송 BJ로 활동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인물이 외모 때문에 실현하지 못한 꿈을 개인 인터넷 방송으로 이루면서 외모 컴플렉스도 해소되는 모습을 보고, 선정적인 여캠에 대해 큰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벗방 시장의 탄생"을 읽고 나니 내 생각이 안일했음을 깨달았다. 여캠이든 벗방이든 형태보다 본질이 중요하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벗방 BJ 개인을 비난하기보다 그들이 비난 없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남성중심성과 젠더 권력관계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p175 1990년대 말의 국가적인 금융위기와 이를 전후하여 도래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대다수의 청년 남성들에게 가부장의 삶은 달성할 수 없는 목표가 되었다.
청년 남성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나무에 매달린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처럼 자신이 더 이상 가부장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혐오했다. 이어 페니미즘 열풍과 여권 신장을 마주하면서 안티페니즘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짤은 복잡미묘한 정서를 유머러스하게 전달하고 전파하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 ‘찌질함’은 그런 정서 중 하나였다.”(210)
“온라인 공간에서 발화되는 찌질함은 성별에 무관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기보다 남성이 느끼는 감정이었던 것이다.”(212)
책의 후반부는 온라인 공간의 남성화, 그리고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남성간의 연대에 대해 살피고 미디어의 연결이 어떻게 현실정치로 구현되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법, 그리고 그 정서적인 반응이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나는 <소년의 시간>의 케이티가 떠올랐다. 나에게 <소년의 시간>이 어려웠던 이유는 어린 아이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도, 그 사건을 다루는 공권력의 방식도, 일방향적으로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건 케이티였다. 극중 케이티는 자신에게 고백한 제이미를 거절하며 빨간약, 20:80법칙, 인셀이라고 비난한다. 케이티의 사이버 불링이 먼저였으니 케이티가 죽은건 케이티의 잘못인걸까? 당연히 아니지만, 어째서 케이티가 제이미에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나는 책을 통해 케이티에게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90년대 생으로서, 태어났을 때부터 컴퓨터 사용에 익숙한 사이버 원주민으로서, 책에서 말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화법은 아주 익숙한 내용이었다. 그 공간 안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발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글을 마치 극우 유투버들의 라이브 방송을 보듯 지켜보았다. 그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컨텐츠를 향유하면서 서서히 스스로 그들이 말하는 ‘여성’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다른 여성들보다 게임/커뮤니티/인터넷 문화/그들의 화법에 익숙한 여성, 이 정체화의 끝에는 아마도 다른 이들보다 남성을 이해하는 ‘나’, 그들과 다르지 않은 ‘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체화는 성립될 수 없다. 책을 읽으며 고등학생때의 경험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이후 본격적으로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카톡을 통한 교류가 중심이 되던 시기였다. 그 당시 어떤 영상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영상이 카카오톡을 통해 전달된 사건이 있었다. 나는 그 영상이 무엇인지 물었지만 남학생들은 내 앞에서 쉬쉬하며 모른척 했다. 나중에 그 영상이 어떤 연예인의 섹스비디오(로 추정되는 영상)라는걸 알았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그들이 나를 배제하고 있다는 서운함이었다. 그들이 나를 자신들과 다른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감각이었다. (정말 놀랍죠?? 전 정말 그들과 잘 지내고 싶었나 봅니다 ㅋㅋ)
이 남성들의 연대와 나의 위치를 곧바로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지만, 나는 이 경험이 커뮤니티 속 남성성과 나를 동질화하는 방식으로 결국 나 역시 누군가를 배제하면서 스스로를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길 바랐다는 걸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케이티는 제이미를 배제함으로서 배제당하지 않는 이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그런 방식으로 다른 남자들에게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책에서는 보는대로, 소위 ‘응원봉 부대’라고 불리는 ‘이대녀’와 서부지법 태러를 자행한 ‘이대남’의 구도는 여러 언론에서 익히 볼 수 있었다. 계엄을 두고 이렇게 양분된 반응을 보였던 그 기반에 오랜시간 쌓여온 그들의 언어-짤과 커뮤니티라는 공간성 안에서 벌어지는 남성연대-가 있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연애를 하지 못하는 찌질한 남성, 능력주의 사회에서 부상하는 이기적인 여성을 그들만의 공간에서 재생산하면서 자신들의 피해의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마지막장에서는 오늘날의 ‘극우’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우파’의 차이점을 짚고 있는데, 그 중에서 ‘피해의식’이라는 말이 걸렸다.
“(일본의 넷우익은) 역사 부정론과 피해의식등을 바탕으로 혐중과 혐한을 기본 정서에 깔고 있다.”(253)
“다만 극우의 특징은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을 가진 총체적 세계관이 아니라 현존하는 권력 구조에서 다른 누구보다 자격을 갖춘 자신이 소외당했다는 울분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263)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청년 남성들은 ‘이대남’이 되었고, ‘2찍남’이 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논리적 연결고리’가 아니라 ‘감정적 친연성’이 있다.”(263)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가면서 나를 둘러쌌던 것은 촘촘한 피해의식이었다.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 내지 못해 고스란히 남성적 언어를 답습해왔던 자신에 대한 연민과 피해의식은 여러모로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책을 읽으며 다시금 떠오른 10대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얼마 전, 친구와 커뮤니티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계속해서 남성화되고있는 커뮤니티들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우선 그 환경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시간 검색어도, 연예기사의 댓글창도 모두 그렇게 없어지지 않았는가.
“폭력을 무기화한 ‘유해한 남성성’은 극우적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남초 커뮤니티 전반에 사회 개혁을 위한 피치 못할 선택지로 받아들여진다. 즉, 보수 우파가 극우화되었다는 말은 보수 우파의 전통적인 통치 이데올로기인 ‘사회질서의 유지’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위기에 빠졌다는 의미이고, 극우가 대중운동으로 성공했다는 것은 대중들이 문제의 내적 원인을 찾아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 환멸을 느낄 만큼 지쳐 혐오와 배제를 기꺼이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폭력을 매개로 한 폭주하는 남성성이 그 뜻을 펼칠 곳이 준비되었다는 의미다.”(272)
책은 ‘폭주하는 남성성’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된다. 돌이켜보니 남성들의 무대가 되는 온라인 공간을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는 나의 말 속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폭주하는 남성성’이 비쳐보인다. 극우의 행동력은 자신의 울분을 정치적 제도로 해소해줄 수 있는 정치인들로 인해 구체화된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그들의 울분과 피해의식을 구제해줄 수 있을까? 물론 그 일은 정치인도, 유투버도 아닌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성찰하고 연대하는 남성 시민의 자리에 함께해야 한다는 글쓴이의 말에 한 표를 던진다.
(175쪽) 이전까지 한국 남성들은 경제적인 주도권을 쥔 가부장의 삶을 규범이자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왔으나, 1990년대 말의 국가적인 금융위기와 이를 전후하여 도래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대다수의 청년 남성들에게 가부장의 삶을 달성할 수 없는 목표가 되었다. … 자신이 더 이상 가부장적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혐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0쪽) 문제는 가부장제 비판 이후 가부장적 남성성이 지속될 수 없음은 받아들였으나 여전히 남성이라는 정체성 자체는 간직하고 있는 다수의 청년 남성에게 그들이 새롭게 어떠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일러줄 서사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청년 남성들이 가부장의 삶을 남성 정체성의 규범으로 내면화하며 성장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일부 그런 인식이 남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2030 남성들이 가부장을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삼았다고 보기엔 지나친 일반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히려 코로나 이후 심화된 취업난, 부동산 불평등, 사회적 고립감 같은 구조적 문제들이 세대 전체에 누적되면서 2030세대 전반의 불만이 높아졌고, 그 불만이 성별 간 경쟁 구조로 전이된 측면이 더 크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남성 혐오’ 혹은 ‘여성 혐오’라는 현상이 단지 ‘가부장적 권위를 상실한 남성의 반작용’이라는 해석으로 환원되기보다는 좀 더 구조적이고 계층적인 배경까지 고려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더불어 청년 남성의 집단감정은 가부장으로서의 지위 상실의 슬픔보다는 경쟁 압박과 인정 결핍에 더 가까운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번 시간의 논의에 잠깐 등장했던 얘기, 즉 우현님이 이번에 인용하신,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 비단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페미니즘의 부상을 경험한 거의 모든 사회가 아직 청년 남성의 역할과 지위를 명시한 정치적-사회적 서사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 가부장제 비판 이후 가부장적 남성성이 지속될 수 없음은 받아들였으나 여전히 남성이라는 정체성 자체는 간직하고 있는 다수의 청년 남성에게 그들이 새롭게 어떠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일러줄 서사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라는 주장과 관련해 의견 올립니다. 이 시대는 젠더나 세대와 관련해 어떠한 범주에게도 정체성과 관련해 아무런 서사도 제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정체성과 관련된 일종의 '문화적 청사진'이 증발해 버린 시대라고나 할까요? 가령 '칠십에 종심소욕불유구"와 같은 일종의 노년에 성취할만 한 문화적 청사진도 증발해 노년의 꿈은 '중년의 연장'으로 축소되고, 마찬가지로 중년의 문화적 각본도 '돈많은 청년' 정도로 왜소해져 가고 있지 않나요? 그런 시대에 청년 남성이 성취할 만한 역할이나 정체성에 관한 별도의 서사가 가능할까요?
또 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소수성'이나 '열등성'에 대한 비대칭적 구도에서 우월한 위상을 누리고 있던 '정상성'이나 '우월성'에 해당되는 '남성성'은 해체의 대상이지 대체의 대상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강하게 듭니다. 그런 비대칭적 상징질서 자체가 해체되어야 기존의 불평등과 기득권이 해소 가능해 지니 그 구도를 기반으로 해서만 설정 가능한 남성성이라는 개념은 '고쳐서 쓸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모임에서 좀 더 논의해 보고 싶은 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