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기술에 관한 물음] 1회차 후기 - 기술에 관한 물음, 닦달

진달래
2025-06-20 15:14
138

이 책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자누리샘이 읽어보고 싶다고 단톡방에 올려 두신 걸 보고, 나도 얼른 샀다. ‘중국’과 ‘기술’ 이 두 단어가 붙어 있는 책은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내용은 몰랐다. 그냥 제목만 보고 덜컥 샀다. 한 번 들추어보고는 ‘어, 이거 너무 어렵군. 못 읽겠다.’ 그러구는 잘 모셔두었다.

 

정군샘은 기술철학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육후이’라는 젊은 학자를 언급하는데, ‘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근데 싸이트를 뒤져도 이 사람 이름이 안 나온다.

한참 뒤지다보니 ‘육후이’가 아니라 ‘허욱’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책 중에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을 보았다. 이거 우리 집에 있는데...

 

2025년 개념탐구 세미나를 하게 되었다. “인류세 시대 존재론을 다시 탐구하다. - 동양의 기학과 서양의 신유물론 크로스 읽기” 이름이 너무 길다. 나는 신유물론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동양의 기(氣)에 대한 관심으로 이 세미나를 신청했다.

「계사전」을 읽고 있는 중에 봄날샘이 ‘상(象)과 기(器)에 대하여’라는 후기를 쓰셨다. 그걸 읽은 정군샘이 공부방에서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읽으셔야겠는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춘추좌전 세미나 방학이었고, 춘추좌전 세미나원인 봄날, 토용, 나는 모두 개념탐구 세미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번개 세미나를 열었다.

 

첫 번째 시간. 아직 본 책에 못 들어갔다. 하이데거가 너무 많이 나온다. 정군샘에게 하이데거를 가장 짧게, 간단하게 볼 수 있는 책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기술에 대한 물음」을 읽고 책을 읽으란다.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은 하이데거의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분량은 짧지만 이 글은 쉽지 않았다.

내가 이해하기에 ‘기술’과 ‘기술의 본질’은 같지 않으며 기술의 본질을 성찰해야만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인 듯하다.

글을 읽는 내내 지금 개념탐구 세미나에서 읽고 있는 바라드의 ‘장치’와 ‘기술’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바라드의 경우 ‘장치’를 각각 독립된 하나의 사물로 볼 수 없다고 말하는데 하이데거 역시 ‘기술’을 “거기에는 연장, 기구, 기계 등의 제작과 사용이 속하며, 이 때 제작된 것과 사용된 것 자체도 기술에 속하고 욕구와 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들도 기술에 속한다.”고 하며 이 장치 전제가 기술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그 자리에 없던 상태에서 그 자리에 있음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것을 야기시키는 모든 것은 포이에시스 즉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음이다.”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 놓음’은 은폐성으로부터 비은폐성으로 끌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나타나게 되는 것을 탈은폐라고 칭한다. 기술의 본질은 탈은폐와 관련이 있다.

 

현대 기술도 하나의 탈은폐인데, 문제는 이것이 포이에시스, 즉 의미의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음의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농부는 씨앗을 뿌려 그것을 잘 돌봄으로써 곡식을 생산하도록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농토 경작은 단순히 잘 자라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산물을 많이 만들어내도록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이러한 것들을 하이데거는 닦아세운다고 한다. 이러한 닦아세움은 이중의 의미에서 ‘촉진(促進)’이다. 개발하고 산출하는 것으로써의 촉진과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창출하려는 촉진이다.

현대 기술의 탈은폐는 도발적 요청이라는 닦아세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닦아세움에 의해 ‘부품’이라는, 어디에서건 즉시 가까이 지정된 자리에 놓여 있도록 요청된 대비 상태가 만들어진다. 부품은 자립적이지 못하다. 자기 신분에서 수행 가능한 임무의 요청만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인간은 부품이면서 기술을 활용한 탈은폐의 한 방식인 주문 요청에 관여한다.

그런데 인간은 탈은폐가 자신들의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주문 요청을 하도록 인간을 닦아세우는 도발적 요청에 의한 것이다. - 사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탈은폐시키고 있는 것을 부품으로 주문 요청하도록 인간을 집약시키고 있는 그것을 이제 닦달[몰아세움] 이라고 부르자.”

 

아마도 이 ‘닦달’이라는 단어 때문에 이 글을 읽어야 하는 것 같다.

 

“닦달 안에서는 비은폐성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현대 기술의 작업은 현실적인 것을 부품으로 탈은폐시키고 있다. 그래서 현대 기술은 단순히 인간의 행위도 아니고 더구나 그런 행위 안에서의 단순한 수단도 아니다. 기술을 그저 도구적으로 또는 인간학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한 규정들은 단지 그 배후에 감추어져 작용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설명을 통해 보완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려웠던 것은 이후에 나오는 ‘역운(歷運/역사적 운명)’이라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비로소 탈은폐의 길로 보내는 집약을 역운이라고 부르자고 한다. 거칠게 이해하자면 ‘기술의 방향’ 같은 느낌이 든다. 현대 기술이 인공지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역운이라면 이 역운은 강제적 숙명은 아니고 우리의 소망과 연결되어 있으나 한편으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혹은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뭐 이런 말인지....

사족이 더 많은 후기가 되었다. 이해되는 대로만 정리해 본다. ㅜㅜ

 

이 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으로 후기를 급 마무리.

 

“우리가 기술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그것에 매몰되거나 회피하는 한, 기술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가 기술을 열정적으로 긍정하건 부정하건 관계없이 우리는 어디서나 부자유스럽게 기술에 붙들려 있는 셈이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는 기술을 중립적인 것으로 고찰할 때이며, 이 경우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기술에 내맡겨진다. 왜냐하면 현대에 와서 특히 사람들이 옳다고 신봉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를 전적으로 기술의 본질에 대해 맹목적이게 하기 때문이다.”

 

 

댓글 0
('로봇이 아닙니다' 체크 필수)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543
[페미니즘 게릴라 세미나] 3회차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위하여> 3차시 질문과 메모 (7)
동은 | 2025.09.28 | 조회 213
동은 2025.09.28 213
542
[페미니즘 게릴라세미나] 2회차 후기 (6)
우현 | 2025.09.22 | 조회 219
우현 2025.09.22 219
541
[페미니즘 게릴라 세미나] <폭주하는 남성성> 2회차 메모 (7)
동은 | 2025.09.20 | 조회 191
동은 2025.09.20 191
540
페미니즘 게릴라 세미나 첫 시간 후기 (3)
동은 | 2025.09.16 | 조회 228
동은 2025.09.16 228
539
[페미니즘 게릴라 세미나] 1회차 메모 (4)
우현 | 2025.09.14 | 조회 183
우현 2025.09.14 183
538
[폭력X돌봄] 페미니즘 게릴라 세미나 모집합니다! (8)
동은 | 2025.08.30 | 조회 1023
동은 2025.08.30 1023
537
[새벽낭송세미나] 『불경(佛經)』낭송 (ZOOM) (9)
요요 | 2025.08.20 | 조회 537
요요 2025.08.20 537
536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5회차 후기 (6)
토용 | 2025.07.15 | 조회 152
토용 2025.07.15 152
535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4회차 후기 (6)
자작나무 | 2025.07.08 | 조회 173
자작나무 2025.07.08 173
534
[중국에서 기술에 대한 물음] <장자>에서의 포정해우와 기심 vs 스토아학파의 코스모테크닉스 (6)
요요 | 2025.06.28 | 조회 189
요요 2025.06.28 189
533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2회차 후기 (4)
원영 | 2025.06.21 | 조회 171
원영 2025.06.21 171
532
[중국에서 기술에 관한 물음] 1회차 후기 - 기술에 관한 물음, 닦달
진달래 | 2025.06.20 | 조회 138
진달래 2025.06.20 138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