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시즌1 마지막 시간 질문 모음!

정군
2022-04-26 11:53
368

여기에 댓글로 모아주셔요!

댓글 12
  • 2022-04-26 11:53

    <차이와 반복> 1장 '차이 그 자체'의 의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차이의 구출'이다. 어디로부터의 구출인가? 역사적인 '차이의 철학들'로부터의 '구출'이다. 여기서 1장 '차이 그 자체'의 핵심적인 논점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차이'가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른바 '차이의 철학'들이 어떤 한계 속에 있다면, 그것은 '차이'를 '개념적 차이'라고 하는, 국소적인 것으로 '차이'를 환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차이(그 자체)'를 개념도, 근거도 아닌 방식으로 드러내려는 듯 보인다. 말하자면 그것은 '힘' 같은 게 아닌가? 그러나 만약 그뿐이라면, '그것은 단지 더 큰, 무규정적인 동일자가 아닌가'하는 반론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영원회귀'는 그러한 '차이'를 생산하는 '힘'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영원히 차이나는 것들이 되돌아 온다'
    그런데, 정말 이와 같은 설명으로 충분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와 반복'이 어떤 계기적 국면(되돌아가는 국면)에서 더 큰 '동일성'이 되는 듯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2022-04-26 22:03

    들뢰즈의 존재론을 차분히 따라가기도 바쁜데 자꾸 주제넘은 생각이 듭니다.  들뢰즈는 니체를 단정적으로 해석합니다. 1)영원회귀는 진실로 차이의 반복이고  2)’니체의 신은 죽었다’에서 클로소프스키를 경유해 자아의 분열(나는 타자이다)을 봅니다. 모두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들입니다. 아직 책이 많이 남았으니, 들뢰즈 주장의 정합성이나 개연성은 읽으면서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만, 저 두가지 생각이 진실로 니체의 문헌들에서 니체에 의해  정합적으로 설명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니체와의 몇년 전 만남은 식상함과 시덥잖음만 남긴 채 좀 처참하게 끝났습니다. 차분하게 니체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며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영원회귀가 진실로 차이의 반복인지, 니체가 정말로 자아의 동일성에서 벗어나 자아의 분열을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지…세월이 지나 읽은 게 늘었고 봐야 할 잣대가 생겼으니 해볼만 하지 않을까 여깁니다.  아마도 들뢰즈가 대체로 맞고 제 생각이 짧을게 확실하지만 확인할 건 확인해야겠습니다.

  • 2022-04-27 09:44

    들뢰즈는 아무래도 헤겔의 대립에 의한 차이 개념을 강하게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헤겔의 모순 편을 다시 보았습니다.

    헤겔의 모순(p.118-)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극단적이거나 상반적인 것들의 대립을 통해 차이를 규정한다 고 들뢰즈는 말한다. 이어서 그들은 무한을 도입하여야만 상반적인 것들의 상호동일성이 귀결되거나, 타자의 상반성이 자기의 상반성으로 바뀌게 된다.고 말한다.(119)

    질문1 ) 헤겔의 철학을 말하는 것일텐데, 줄친 문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

     

    물론 상반성이 오로지 무한 안에서만 내면성의 운동을 재현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대립의 운동성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면성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어떤 무차별이나 무관심의 상태가 여전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규정은 타자를 포함하되, 타자와는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질문2 ) 각각의 규정이 무엇인가? 위 문장에서 말하는 헤겔의 차이의 규정? 아니면 헤겔의 또 다른 철학적 용어?

     

    규정은 외면에 대한 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각각의 상반자는 자신의 타자를 배제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배제하며, 자신이 배제하는 그 타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모순이다.

    질문3) 문장 내에서 자신이 배제한 타자가 되었으니 모순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이런 것이 헤겔이 말하는 모순이라는 말인가? 문장도 이해가 안되지만 헤겔을 모르니 ......

  • 2022-04-27 19:33
    어느덧 차이와 반복의 시즌 1이 끝났습니다.
    이제 다시.. 들뢰즈가 말하려는 '차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들뢰즈의 글 전개 방식은 '차이란 무엇이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방식이라기 보다, 그동안 차이를 말한 철학자들의 차이와 자신이 말하려는 차이, 그 '차이'를 언급하고 비교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들뢰즈의 글의 방식 자체가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이란 점이 지금 생각해보니 흥미롭습니다. 기존의 차이를 언급하여 비교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서의 차이입니다. 이 방식은 차이를 말하는 데 있어, 어떤 면이 부각이 될까요?
     
    한편 기존 철학자들이 말하는 차이와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선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고정된 차이가 아닙니다. 재현의 방식이 아니라는.. 지난 시간 재현의 역사에서 재현의 고유한 한계를 넘어셔려고 했던 두 시도를 읽었습니다. 그 재현의 시도로서의 차이를 드러냈던 두 철학자의 길입니다. 라이프니츠의 길과 헤겔의 길.. 
    라이프니츠는 무한소를 통한 무한한 재현을 추구했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잠재성으로 바탕의 영역에 있는데,  그런데 이게 현실에서는 여러 잠재적인 계열 중 어느 하나의 계열만 현실화됩니다. 따라서 발산이 잠재되어 있을 뿐 현실적으로는 발산의 다양성을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잠재성이 있으나 현실화되는 하나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또 하나는 헤겔의 길입니다. 무한대를 통한 무한한 재현의 추구.. 이것은 변증법적인 방법인데 이 변증법은 모순을 전제로 합니다. 
    이 변증법은 애매한 차이 자체를 존재하고 사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동일한 면을 부각시켜 분명한 모순적 차이로 환원합니다. 여기에 모순의 발견을 위한 차이가 존재하고, 이것은 자꾸 고정된 방식으로 환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추구하는 '차이'란 무엇일까요?
    니체의 영원회귀의 방식이 힌트가 될까요?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가 무엇인지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 해 보면 어떨까요?

  • 2022-04-28 07:42

    동일성과 차이의 관계

     

    이전 차이의 철학이 동일성을 전제로 하고 따라서 차이에 대한 부정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들뢰즈는 유적 동일성을 보완하는 개념일 뿐인 차이(아리스토텔레스)와 대립 개념으로 두 개 항의 동일성 안에 가두어버리는 차이(헤겔)를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유기적 재현이든 망아적 재현이든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차이의 기입-개념 일반의 동일성 안으로 차이를 기입하는 것-과 혼동해버리는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차이, 개념 안에 기입되지 않는 차이의 고유한 개념 ......

    정말 혼동된다.

    “헤겔은... 이념 안에서 독특한 것과 보편적인 것이 맺는 진정한 관계를 일반적 개념과 특수한 것 사이에서 성립하는 추상적 관계로 대체해 버렸다...”(42쪽)고 하면서 ‘특수자들’에 반하는 ‘독특성’, ‘일반성들’에 반하는 ‘보편자’, 보편성과 독특성을 하나로 엮는 형식......을 여기 저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일반성 혹은 동일성을 어떻게 위치짓고 있는 것일까? 들뢰즈가 생각하는 동일성과 차이의 관계가 무엇인지... 동일성은 그냥 내다 버려! 이건 아닐텐데...

     

  • 2022-04-28 09:53

     (질문이라기 보다 소회..^^)

    서론을 다시 읽다보니 일반성과 반복을 대비시키는 들뢰즈의 의도가 새롭게 읽히는 것 같다.

     유사성의 질서와 등가성의 질서로 설명되는 일반성이야말로 다름 아닌 과학이 아닌가? 일반성과 반복은 다르다.  서정적 언어의 경우, 설령 같아 보이는 단어조차 대체 불가능한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반복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차이와 반복>의 서론이 반복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들뢰즈 스스로 과학과는 다른 철학의 출발을 반복으로부터 구명해 보겠다는 선언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여 반복이 해명되지 않는다면 서론 전체에서 우리를 그다지도 괴롭혔던 개념의 자연적 봉쇄를 해명할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서론은 반복은 단지 개념 없는 차이가 아니며, 차이는 단지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과연 반복의 본질은 무엇일까? 들뢰즈는 서론에서 아직 우리는 반복의 참된 본질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 전체가 반복의 참된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반복이 개념 없는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면 차이가 무엇인지부터 밝혔어야 했을 터. 하여 1장은 차이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 아닐까.

  • 2022-04-28 10:15

    93,94쪽까지(종적차이, 유적차이)  이르는 아리스토텔레스 비판을 다시 정리해보고 싶다. 

    세미나 시간에 써둔 메모를 보니 이 부분에서 ‘종차에서 존재의 일의성을 끄집어내고자 했다’라고 되어 있다. 왜 종적 차이가 존재의 일의성까지 나아가는가. 그리고 존재의 일의성이란 대체 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유 개념 설명은  내가 요약을 했지만, 종적 차이와 유적 차이도 개념이 혼동된 채로 썼었다. 자자 철알못을 위해 정리하자면 유적 차이는 사람과 동물의 차이다. 또는 소와 말, 개의 차이다. 종적 차이는 개라는 종 안에서 '애완견'과 '투기견'이라 부르는 개의 차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종적 차이가 가장 큰 차이, 즉 이게 차이다! (상반성)라고 말했다. (제임스 윌리엄스 해설서 참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를 유 안에서의(같은 Dog이라는 유) 종의 상반(투기견과 애완견)으로 정의한다. “) 

    그리고 들뢰즈는 이를 따박따박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자체를 존재로 보고 있다고 말이다. 왜 범주가 존재가 아니냐. 범주는 늘 술어를 포함한다. 그리고 그 술어에 의해 판단한다. '애완견은 사랑을 받'는 개이고, 투기견은 '싸우는 개'라는 술어는 그 자체로 이미 '개'라는 유를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엔 늘 유비가 작용한다. 유비에 의해 존재는 말해진다. 이는 유와 종을 어떻게 올바르게 정의하고 위계를 정립할 것이냐의 맥락에 놓이게 된다. 

    이때 존재는 늘 잘 규정된 사물로서 다의적이다.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의미는 유비에 의한 범주화 속에서 '쪼개진다'.  

    '존재의 다의성'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이 이것인데, 다의성이라는 말은 '존재는 여러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는 식물, 동물, 돌는 각자의 존재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존재방식은 유비를 통해 유라는 범주로 묶인다. 이는 이전에 썼듯이 위계를 불러온다. 

    들뢰즈는 이게 아니라고 한다. 

    "존재란 일의적이며 이 ‘있음’은 모든 사물들에 대하여 같은 방식으로 말해진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들은 그 스스로를 분배하며, 내부적 한계와 스스로 고정되는 방식을 극복하면서 스스로에 대해서만 대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사물이 오로지 순수 차이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윌리엄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적 차이'를 통해 차이를 말하고자 했지만 이는 "사물이 범주들 밖에서 진화해온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각각 다른 존재 방식'이란 언제나 규정되고 고정시키며 위계를 나누고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의 존재방식이라고 말하게 되면 이런 구분을 허물게 된다.  . 서로 다른 존재방식이라는 기준(개는 ~해야한다, !해야 개이다) 이 무너지고, 각각의 개별자들은 스스로의 생성만으로 존재하게 된다. (내가 '애완견'이라고 부르는 저 개는 과연 나에게 사랑받으려고 하는 걸까? 혹시 호시탐탐 나를 물어뜯을 기회를 엿보고 있을 수 있으며 나를 물었을 때 그 개에 대한 범주와 정의는 무너진다..)    

    애완견과 투기견이라는 종적 차이가 '존재의 일의성'으로 나아가는건 이런 흐름일 수 있을까? 

  • 2022-04-28 12:10

    질문이라기 보다는 노트...하지만 질문도.

    p.64 5절에서 들뢰즈는 반복의 본질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왜 반복이 동일성 형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과 자유의 개념 경계에 있다는 장식 모티프를 예로 든다. 예술가가 하나의 표본을 그리고, 그 옆에 ‘똑같은' 표본을 그려넣는다고 했을 때, 단순히 보면 이는 ‘반복'이지만 사실 그 표본은 절대적으로 똑같을 수 없고 이미 앞에 그려진 표본과의 관계 또한 형성(결합)됨으로 이는 더더욱 반복이라 할 수 없게 된다. 사실 그 아래 문장들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칸딘스키의 추상 회화들이었다. (세미나 중에 러시아 구성주의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그의 그림에서는 부분들만 볼 때는 ‘역동적인 구성의 과정 속에 어떤 불균형, 불안정, 비대칭' 등이 느껴지지만 이 모든 것이 한 화폭에 담겨져 앞에 있을 때, 내가 느끼는 것은 하나의 완전함, 또는 깊은 고요함이다.

    그런데 위 반복에 대한 언급을 다시 읽으며 예술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와 관련한 일화가 떠올랐다. 토레스는 1993년 강연 때 레이건과 부시 정권 당시 악화된 사회 상황을 나타내는 통계 자료를 읽으며 자신 뒤로 하나의 이미지를 슬라이드로 반복해서 틀어놓았다. 이미지는 1980년대 TV 시리즈 Dynasty에 나오는 부유한 가족의 사진이었다. 마치 슬라이드가 프로젝터에 끼인 것 처럼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이미지. 이러한 ‘반복' 또한 결코 단순한 반복이 아니었다. 손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사진이라 할지라도, 첫 이미지는 다음의 이미지와 표면적으로는 동일해보이지만 매번 등장할 때마다 보는 이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보는 이에게 매번 나타나는 그 동일한 이미지는 전혀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무엇이 아닐까.

    그런데 64페이지 마지막에 부분에 보면 ‘예술적 인과성이나 자연적 인과성에서 중요한 것은 ... 원인 안에 결여된 요소들, 원인 안에 있지 않은 요소들'이라고 하며 원인이 결과보다 대칭을 더 적게 가질 가능성이 중요하다고 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세미나 때 논의했던 것 같은데 아직 이해가 안된다.

  • 2022-04-28 12:10

    "[헤겔의 사유는] 본질적인 것은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 안에 담고 있는 반면, [라이프니츠의 사유는] 비본질적인 것은 본질적인 것을 자신의 경우 안에 포괄하고 있다." (122)

     

    헤겔과 라이프니츠의 사유는 언뜻 반대되는 듯하면서도 세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같아지는 듯하다. 헤겔의 경우 세계 또는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끊임없는 규정과 모순과 무화의 과정)는 작든 크든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고, 라이프니츠의 경우 끊임없이 발생하는 모나드들은 그 하나하나가 세계를 표현한다. 헤겔에서 전체의 부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전체에 완벽하게 봉사하고,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라는 각각의 경우 또는 계기는 연속체를 이루며 완벽하게 짜여진 전체를 이룬다. 헤겔의 경우 시작이 전체이고 라이프니츠의 경우 시작이 경우일 뿐 결국 전체와 부분, 경우와 전체의 관계는 같아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위에서 인용한 들뢰즈의 문장은 사실 '반면'의 앞뒤가 똑같은 이야기로 보인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는 헤겔이 절대정신이라는 하나의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상태를 상정했고 라이프니츠가 모나드의 질서를 신의 예정조화로 설명하며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상정한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까?

  • 2022-04-28 12:29

    들뢰즈의 헤겔 비판 지점은 무엇인가.

    1. 헤겔의 모순은 차이가 아니다 : 헤겔의 모순은 실증적(실재적)인 측면의 즉자적 차이(차이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차이 일반은 모순 그 자체다..."(118p)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모순은 부정성이라는 내재적 운동성(충동)을 가진  "정립된 모순"(120p)이어야 한다. 이 정립된 모순은 무한히 자기 부정을 통해 타자를 실현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성립하기 때문에 차이를 무력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무한히 커지는 헤겔의 모순 종합(혹은 통일성)은 a도 b도 아닌 새로운 c들을 끊임 없이 생산해내는 차이를 만들어냄으로써 무차별성(무관심)을 무력화시킨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런 모순이 긍정이 부정으로, 동시에 부정이 긍정으로 작용하면서 끊임 없이 생산해내는 것은 동일성의 회귀라는 것이다. 
    2. 헤겔의 무한(대립/부정)은 자신의 고유한 독창성을 잃어버린다 : 먼저 이 책에서는 본질적인 것은 일자, 동등한 것, 동일성을 띠는 것으로 비본질적인 것은 다자, 동등하지 않은 것, 차이나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121p) 들뢰즈의 설명에 따르면 헤겔이 유기적 질서를 넘어서는 방식은 유라는 본질적인 것(일자/동등한 것)의 본질 안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무한의 도입으로 유는 끊임 없이 분열하며, 동시에 분열이 제거된다. 이로써 결과적으로 타자를 본질 안에 포함하게 된다.그 이유는 헤겔의 모순이 무한과 만났을 때 대립이나 부정성(유한한 규정)이라는 운동성을 띄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와 달리 이렇게 본질 안에 타자를 포함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고유한 독창성(122p)을 상실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본질적인 것, 즉 일자, 동일성을 부수적 속성 안에, 개별적인 경우 안에만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본질들의 구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이라는 표현 대신 즉자적(정립), 대자적(반정립), 즉대자적(종합) 존재를 말한다. 그에게 개념과 존재는 다르지 않다.

    **지양 : 1)들어올리다 2)폐지하다 3) 보존하다. 헤겔 철학에서는 세 가지 뜻 모두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지양한다는 것은 차이를 만드는 선별적 시험이다(120p)"라는 문장의 의미는 긍정과 부정의 운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고양된 상태로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으로 차이에도 차등? 단계적? 사고를 드러내고 있다. 

    **규정 : 헤겔의 논리학에서 규정은 1)질적특성 2)부정 3)개념 등을 의미한다. 

    -"각각의 규정은 타자를 포함하되(119p)"라는 문장

    -"이런 헤겔적 의미의 무한은 대립이나 유한한 규정을 통해 언명된다.(120p)"라는 문장

    -여기서는  둘 다 1)이나 2)의 의미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 2022-04-28 12:41

    난 들뢰즈의 알쏭달쏭한 말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것이 ‘대~충’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데, 논리적이거나 명징하게 이해되지 않을 때마다 빌뇌브의 <컨택트(arrival)>를 떠올린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이 기존의 언어체계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헵타포드’와 반복적인 ‘접촉’을 통해 비-언어적으로, 혹은 탈-언어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장면. 그렇게 되자 시·공간의 흐름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는 바로 그 장면. 내 앞에 놓인 이 문장들, 이 종이 한 장이 마치 나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끌 신비한 문처럼 느껴진다―쉽게 말하자면 지금으로서는 ‘그냥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지만.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점에 주목하자. 그것은 일의성 안에서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개체화하는 차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존재, 본연의 차이인 존재이다. 존재는 차이를 통해 언명된다는 의미에서 차이 자체이다. 그리고 존재는 일의적이지 않은데 그 안에서 우리가 일의적인 것을 결코 아니다. 존재는 일의적이다. 그런 존재 안에서, 그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의 개체성이 다의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107)

     

    가령 ‘차이’를 이미 ‘일반화한 개념’으로, ‘개체화하는 차이’로 받아들이고 사용해온 나에게 들뢰즈의 차이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다른 의미’라 함은 ‘차이’라는 단어 하나의 의미일 뿐 아니라, 그에 따르는 의미 체계 전체의 변화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성에 기반한 차이, 술어적 성격의 차이는 우리가 가진 언어체계 전체를 일종의 유비의 무한정한 연쇄로 만든다. 서론과 1장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반복’, ‘차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익히 알던 그것이 아니라는 선언. 그렇게 되었을 때 이 두 단어가 의미의 차원에서, 또 유비의 차원에서 연쇄되어있는 주변의 단어들에는 필히 어떤 변화가 요구된다. 종, 유… 차이와 무관하지 않은 단어들부터, 그 자체로 이미 어떤 완결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던 단어들, 예컨대 “‘존재’는 차이를 통해서 언명된다는 점에서 차이 자체다.” 어떤 단어는, 새로운 의미들 속에서 소거되거나 완전히 새롭게 구성된다.

     

    도달하게 되는 곳이 비-언어적인 곳이더라도, 끝내 그것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더라도 언어학자는 언어적으로 접근한다. 나는 메론이―헵타포드―를 빤히 쳐다보며 이 문장을 생각해본다. 너는 개고, 나는 사람이야. 너는 네 발로 걷고, 나는 두 발로 걸어, 너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러나 이내 이런 종류의 차이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존재는 일의적이다. 메론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집에다 자신의 중성화된 고추로 갈겨놓는 쉬, 그것을 본 내 눈빛과 내 입에서 나오는 짤막한 욕설, 이 표현들. 이런 ‘있음’들… 달라서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 이미 다른 것인 존재…

     

    모르겠다. 아직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문장에서 이해가 안 되는 단어 하나를 붙잡고 어떤 질문을 건져 올리는 것보다, 그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이것들은 다음 문장으로 가면 또 변화할 거다. 메론이를 한 번씩 쳐다보면서….

  • 2022-04-28 13:08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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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 2023.10.25 | 조회 326
정군 2023.10.25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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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철학학교시즌4] 라이프니츠 읽기 [접힘과펼쳐짐] 1주차 후기입니다. (10)
가마솥 | 2023.10.20 | 조회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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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철학학교시즌4] 라이프니츠 읽기 [접힘과펼쳐짐] 1주차 질문들 (11)
정군 | 2023.10.18 | 조회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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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철학학교] 라이프니츠 읽기 첫 시간 세미나 공지
정군 | 2023.10.02 | 조회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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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철학학교시즌3] 에세이데이 후기 (16)
세븐 | 2023.09.24 | 조회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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