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차이와반복>읽기 본문2 요약-메모 모음

정군
2022-04-12 18:07
523

메모는 여기에

댓글 본문으로 모아주셔요!

댓글 13
  • 2022-04-12 18:54

    107~110

    읽은 요약. 차이를 통해 언명되는 존재(존재=차이)는 일의적이라 했고, 그 안에서 개체성은 다의성을 띈다.(107) 들뢰즈는 2절에서 종차를 들여와 어지러운 횡단을 거듭한 끝에3절 시작부분에서  위 문장을 남긴다. 여기에 서론에서 얻은 문장들을 가져와보자. 반복은 거칠게 말해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적 행위이고 차이나는 반복이다. 이 두 문장을 합쳐본다.  존재는 일의적인데, 차이나는 반복을 통해 수 많은 개체들이 생긴다. 일의적 존재와 다양한 개체들의 양립가능함을 따라가야 한다. 이 틈을 들뢰즈가 메울텐데, 이 양반 듣던대로 읽던대로 만만치 않다. 여전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먼저 일의성의 철학사적 단계들(둔스 스코투스): 들뢰즈는 존재라는 말이 파르메니데스 입에서 나오건 하이데거 입에서 나오건 그 함의는 ‘존재는 일의적’이라는 자장안에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일의성을 정교화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로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를 꼽는다. 둔스 스코투스는 기존의 존재론적 자장을 넘어서(앞질러) 있다. 무한자/유한자, 보편자/단독자, 창조자/피조물의 구분을 가능하게 한 유비를 넘어서 있다는 말이다. (중립적/중성적/무차별적의 의미) 이런 일의적 존재론에서 다의성은 어떻게 끌려 나오는가? 형상적 구별(실재적 구별)와 양태적 구별이다. 형상적 구별 안에서 신은 자신의 통일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일의적 속성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 속성들이 강도적 요인/개체화하는 등급들과 관계할 때 양태들의 다양성이 펼쳐진다. 이렇게 일의적 존재는 차이와 관계를 갖는다.

     

    일의성의 철학사적 단계들(스피노자): 이러한 흐름은 스피노자에게서 상당한(?) 진전을 이룬다. 스피노자는 실체/속성/양태를 통해 일의적인 존재와 개체의 다의성을 설명한다. 그에게 실체는 하나다. 하나인 실체는 무한한 속성을 갖는다. 속성들은 실상 질적으로 차이나는 의미들처럼 행동하고, 하나의 똑같은 지칭 대상과 관계하듯 실체와 관계하는 동시에 실체를 표현하는 양태들로 역량의 정도에 따라 펼쳐진다/펼친다. (실재적 구별과 수적 구별.)  그렇게 실체가 속성을 통해 다양한 양태들로 역량껏 펼친/펼쳐진/표현한/표현된 것이 이 세상이다. 이를 일러 들뢰즈는 일의적 존재가 표현성을 띠게 된다고 표현한다. (둔스 스코투스는 모르겠고, 들뢰즈는 박사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의 부논문으로 <스피노자와 표현문제>를 썼다. 그러니까 110쪽 스피노자 부분은 <스피노자와 표현문제>의 본인 요약인 셈이다. 짐작하겠지만 역시 두툼하고 차이와반복 만큼이나 페이지를 넘기기 쉽지 않다. 프랑스 철학박사 이거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 2022-04-13 07:44

    분배의 두 유형 101~104

     

    분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미 분배된 것을 나누는 것(정착적 노모스)과 경계 없는 공간을 점유하는 것(유목적 노모스)이다. 분배된 것을 나눌 때는 판단의 유비적 규칙들(고정되고 비례적인 규정들, 재현 안에 제한되어 있는 ‘소유지’나 영토들과 유사한 규정들)에 의해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다. (동일성에 바탕을 둔 차이에 의해 각각의 사물이 정해진 범주에 배치된다. 종속과목강문계)

    이것과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분배는 소유지도 울타리도 척도도 없는 유목적 분배이다. 여기에는 미리 배당된 몫이 없다. 제한도 없고 명확한 한계가 없는 열린 공간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분배할 뿐이다. 마치 짐승들을 숲이나 산등성 같이 한정되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에 분배하듯이. 이는 방황의 분배, ‘착란’의 분배이다. 존재가 재현의 요구들에 따라서 배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이 존재 안에서 할당된다.(그 이유가 일의적 존재의 본질은 개체화하는 차이들에 관계하기 때문일까?) 이런 분배는 악마적이다. 왜냐하면 울타리를 침입해서 어지럽히듯 신들의 영역 사이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악마의 도약은 전복적인 혼란이다. 이것은 유목적 분배들이 재현의 정착적 구조들 안으로 끌어들이는 엄청난 혼란이다.

    위계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존재자들을 하나의 원리에 대한 멀고 가까움의 정도에 따라 측정한다. 그러나 역량의 관점에서 사물과 존재자들을 보는 위계가 있다. 존재자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궁극적으로 ‘도약’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여기서의 한계는 사물을 하나의 법칙 아래 묶어두거나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역량을 펼치는 출발점이 된다. 이 척도는 자신을 봉인하는 동등성에 이르게 되는 곳에서 유일한 최대치를 형성한다.

    동등한 존재는 중개나 매개 없이 모든 사물들에 직접적으로 현전한다. 존재의 일의성은 존재의 동등성, 평등을 의미한다. 일의적 존재는 유목적 분배이자 왕관을 쓴 무정부상태이다.

  • 2022-04-13 08:02

    115~118

    이유로서의 근거

    헤겔은 차이가 소멸되는 동시에 생산되는 계기에 주목하는데, 여기서 한계의 의미는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한계는 더 이상 유한한 재현의 마지막 경계선이 아니라, 규정이 망아적 재현 안으로 부단히 봉인되고 펼쳐지는 모태를 가리킨다. 한계는 형상의 제한이 아닌 근거를 향한 수렴이다. 역량의 정지가 아닌 역량이 발휘되고 근거지어지는 요소이다.

     

    망아적 재현의 원리는 근거에, 재현의 요소는 무한에 있다. 반면 유기적 재현의 원리는 형상에, 재현의 요소는 유한에 있다. 규정을 사유 가능하고 선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한이므로, 차이는 규정에 대한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이다.

     

    그러나 왜 망아적 재현에는 큼과 작음, 최대와 최소 등의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선택지가 남아있는 것일까? 두 사태는 무한 안에서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무한은 유한한 규정이 사라져버린 장소가 아니다. 유한한 규정이 존속할 때만 망아적 재현은 자신 안에서 무한을 발견할 수 있다. 재현의 조건상 무한과 유한은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서 재현될 수 있으며, 이때 무한은 무한하게 작은 것이나 무한하게 큰 것으로 언명된다. 두 ‘차이’는 대칭적이지 않다. 큼과 작음은 무한 안에서 동일해진다. 라이프니츠와 헤겔은 큼과 작음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지만 다시 무한하게 큰 것과 무한하게 작은 것의 양자택일에 부딪힌다. 따라서 망아적 재현은 이원성을 향해 열려 있다.

  • 2022-04-13 08:49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존재의 일의성을 정의한다. (110~113)

     

    일의성의 철학사적 단계 - 니체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의 관계는 여전히 독립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니체는 이를 동일성이 일차적이지 않다는 것, 동일성은 원리로서 현존하지만 이차적 원리로서, 생성을 마친 원리로서 현존하다는 것, 동일성은 차이나는 것의 둘레를 회전한다는 것, 이런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통해 전복시킨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통해 동일자의 회귀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선행하는 동일성이 폐기되고 와해되는 어떤 세계(힘의 의지의 세계)를 가정한다. 회귀는 존재이지만 오직 생성의 존재일 뿐이다. 영원회귀의 반복은 차이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같음을 사유하는데 있는데 이것은 이론적 재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의 반복은 차이들을 산출하는 능력에 따라 실천적으로 선별하기 때문이다. 선별적이라고 하는 것은 돌아오는 것이 극단적 형상들뿐이기 때문인데 이로써 영원회귀의 반복은 다른 것으로 이행하면서 동일한 것으로 생성한다.

    니체의 고귀함은 자신을 스스로 변형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말한다. 전도된 위계는 동일자를 차이나는 것에 종속시키고 이런 여러 측면으로 볼 때 영원회귀는 존재의 일의성이며 그런 일의성의 실제적 실현이다. 영원회귀의 바퀴는 차이에서 출발하여 반복을 산출하는 동시에 반복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선별한다.

  • 2022-04-13 09:34

    일의성과 유비의 화해 불가능성

    일의적 존재 그 자체는 중개나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존재자들에 현전한다. 그렇다면 존재 그 자체는 그렇다 해도 혹시 존재 그 자체의 양태 혹은 존재자들은 유비적인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일의적 존재+유비의 방식으로 개체 혹은 개체간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유비의 방식은 종적차이와 유적차이를 매개로 개체화를 설명한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유비는 개체화 원리를 구성의 과정이 아닌, 이미 구성된 개체의 구성 요소안에서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체화를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경험 안에서 이미 구성된 개체간의 무엇이 아니라 그 개체의 구성을 가능하게 했던 초월론적 원리와 그 과정에 있을 것이다. 개체화의 장은 어떻게 형상과 질료, 종과 부분들, 그리고 구성된 개체의 요소들에 ‘선행’한 것일까. 그리고 일의적 존재는 개체화하는 차이들을 통해 어떻게 사물들 안에 직접 언명된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 과정은 아직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가 암시될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체화하는 차이라는 것조차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것은 개체화하는 차이 그 정도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보다 훨씬 깊은 심연의 비-존재, 그래서 도리어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엇. 들뢰즈가 본연의 차이, ‘차이 그 자체’라 부르는 그것, 그것의 존재가 아닐까?

  • 2022-04-13 14:11

    메모모음입니다! 지난주 것과 합쳤습니다.

  • 2022-04-20 04:15

    여울아 (118~122p) 헤겔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과 존재론 :모순

    헤겔의 차이에서 주요한 개념은 모순과 무한,  2가지로 요약됩니다. 

    헤겔의 모순은 정반합의 전개를 통해 스스로 해소됩니다. 이때 모순은 절대적 최대치, 즉 실재성들 간의 차이를 충분히 멀리 밀고 나아갈 때 대립을 생성하고 그 결과 모순이 되며, 결국엔 절대적 모순 그 자체로 생성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립을 통해 차이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대립은 추상적인 것으로 남게 되기 때문에 무한을 도입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반성은 상호 동일성으로 귀결되거나 타자의 상반성이 자기의 상반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부정적인 것이 긍정을 생성하고 동시에 긍정으로 회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반합의 전개를 의미합니다. 

    헤겔에게 무한은 무엇일까요? 대립이나 유한한 규정으로 통해 언급됨에도 불구하고 신학에서 말하는 무한하게 큰 것이라고 합니다. 칸트는 사물의 실재적 모순의 본성을 처음으로 정식화했지만 무한한 크기를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헤겔은 무한하게 큰 것으로, 라이프니츠는 무한하게 작은 것으로 둘 다 유기적 재현을 극복하고 망아적 재현으로 나아갑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유기적 질서를 넘어서는 방식에 있습니다. 헤결의 출발점은 유라는 본질적인 것인 반면 라이프니츠의 출발점은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비본질적이라는 것은 타자를 본질 안이 아니라 부수적 속성 안에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부차모순이라 합니다. 

  • 2022-04-20 10:23

    라이프니츠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과 존재론: 부차 모순(연속성과 식별 불가능자들)

     

    (122~125쪽)

    부차 모순은 오직 부수적 속성들에만 관계한다. 그렇다고 해서 부차 모순이 모순보다 멀리 나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멀리 나간다.) 여기에서 차이는 자신의 개념을 발견한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차이 개념을 미분비를 통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dx, dy는 x와 y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부정성), dy/dx는 내적이고 질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미분비는 가변 계수들의 상호의존성을 번역하고 있는 어떤 상호적 규정의 절차 안에서 파악된다. 그러나 상호적 규정은 진정한 이유율의 첫 번째 측면일 뿐이다. 이 원리의 두 번째 측면은 완결된 규정이다. 왜냐하면 미분비는 특이점들의 실존과 할당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완결된 것은 전체적인 것이 아니다. 미분비는 특정한 점에서의 곡선의 본성에 의해 규정되는 기울기(직선)로, 그것은 대상에 대한 완결된 규정이지만, 대상 전체가 아니라 전체의 일부분(도함수)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한 사물은 반드시 적분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전체에 의존함 없이 차이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일까?) 미분비는 각각의 특이점에서 극한을 표현하고 미분비들은 변이의 등급을 표현한다. 각각의 등급에서 특이점들은 급수들(계열들)의 극한인데, 이 급수들은 서로의 안에서 해석적으로 접속되고 확장된다. 이러한 미분적 관계, 미분비를 들뢰즈는 누승적 잠재력의 순수한 요소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극한은 연속체의 역량이며 연속성은 극한들 자체의 역량이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의 경우, 차이는 dx라는 부정성 안에서 자신의 개념을 발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연속체 안에는 비본질적인 것에 고유한 두 가지 범주가 있다. 두 범주는 특이한 것과 평범한 것, 혹은 독특한 것과 규칙적인 것의 구별을 통해 형성된다. 특이점과 평범한 점, 이 두 종류의 점들을 통해 본질들 자체가 비본질적인 것들인 것(부수적 속성, 개별적 경우들, 부차 모순) 안에서 구성되는 과정이 예비 되고 규정된다. 여기서 비본질적인 것이란 사소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심층적인 것, 보편적인 질료나 연속체를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본질을 형성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개념정리

    1) 범함수: 함수들의 집합을 정의역으로 하는 함수

    2) 도함수: 도함수는 미분계수를 일반화한 개념, 미분하여 나온 함수라고 이해하면 될 듯.

    3) 원시함수: 부정적분은 미분의 역연산이다. 부정적분이 적용되어 나온 함수를 원래 함수의 '부정적분(indefinite integral)'이나 '역도함수(antiderivative)' 혹은 '원시함수(primitive function)'라고 한다.

    4) 극한: 어떤 양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어떤 일정한 값에 한없이 가까워질 때, 그 값.

    5) 급수: 급수는 부분합의 극한을 의미한다. 특정 수열에 대해 지정된 항에서 지정된 다른 항까지의 수를 모두 더하란 의미다. 유한급수와 달리 특정한 항까지 더하는 개념이 아니며 끝없이 보탠다.

    6) dx: 무한소라고 한다. dx는 x값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변화값을 갖는다는 뜻. dy/dx는 도함수 f' 과 같다. d는 derivative (미분)의 머릿글자.

  • 2022-04-20 18:46
    4절
    차이와 망아적 재현: 무한대와 무한소 (113~115)
     
       차이가 행하는 선별이란, 일의성 안에서 다의성이 나타나고 스스로 펼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 성립한다.
    이 때 무한대와 무한소라는 큼과 작음은 이러한 다의성의 하나의 선택지이기에 거꾸로 한편에서 큼과 작음은 동일성을 뜻하게 된다. 여기서 무한대란 무수히 큰 값과 같이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 무수히 증가하는 개념이며, 무한소란 0이 아니라 무한히 감소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이러한 큼과 작음의 상호 동일성을 발견할 때, 재현은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의 모습을 취한다.
       유기적 재현은 형상을 재현하고 유기적 질서를 재현하는 것이고, 망아적 재현은 탈유기적이고 유기적 질서를 넘어서는 것이다. 망아적 재현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무아, 몰아 상태를 가리키며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에 조응한다. 큼부터 작음까지, 무한대부터 무한소까지 모든 것으로 온갖 변신을 취할 때, 그 전체로서의 개념은 ‘규정을 근거fondement의 자리에 놓는 가운데 순수한 차이로 재현한다.‘
       여기서 유기적 재현의 형상과 구별되는 망아적 재현의 ’근거‘란 무엇인가? ’형상’이 동일성의 요구들이라면, ‘근거‘는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향한다. 형상이 어떤 제한을 뜻한다면, 근거는 무한한 생성이다.

  • 2022-04-20 21:00

    아이고... 마지막 부분을 제가 한다고 그런걸 까먹고 있었습니다. 휴양주간을 흠뻑 즐기다가, 오늘 오전에 얻어맞고 나서야 정신을 좀 차렸습니다. ㅠㅠ


    4절 마지막

    들뢰즈는 지금까지 '차이의 철학'들이 '차이'를 다루는 방식, 다시말해 '재현적 차이'의 두가지 방식을 살폈다. 첫번째는 '유한한 재현'이고, 두번째는 '무한한 재현'이다. 첫번째(아리스)의 경우 '유'의 동일성 안으로 '차이'를, '매개' 속에서 가둔다는 점에서 유한하다. 두번째(헤겔과 라이프니츠)의 경우 '전체'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재현적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한'하다. 가령, 헤겔의 체계에서는 모든 사물이 동일화 되는 순간 다시금 모순이 나타나고, 발생한 대립은 다시금 동일화를 향해 나아간다. 이때의 '극한'은 대립물이 다시 합쳐진다는 점에서 점점 큰쪽으로 향하는 극한이다. 반대로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안정된 한 점인줄 알았던 것 안에서 작은 차이들(부차적 속성들)이 발견된다. 이 작은 것들 안에 또 작은 것, 또 작은 것, …… 무한소, 작은 것을 향한 극한. 이 작은 것들이 결국에는 어떤 '본질적인 것'의 '본질'을 이룬다.
    들뢰즈가 보기에 '무한한 재현'은 '유한한 재현'을 부분적으로 극복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 '무한'은 '수렴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도 안에서 차이들은 '특수하고 유한한 자아'(절대정신, 모나드) 안으로 봉인되기 때문이다. 헤겔과 라이프니츠 모두 '세계'를 '어떤 것'(큰-절대정신, 작은-모나드)의 '전개'로 구축해 나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이 그와 같은 '전개' 속에서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한다고 한들, 그 배후에는 언제나 '참된 규정'으로서의 '본질-바탕'이 있게 되고, 이때 '차이'는 그저 그것들의 재현물, 부수적 속성이라는 성격 안으로 묶인다.
    따라서, 두 사유 모두 '재현' 안에 머물게 된다. 다시 말해 '재현의 전제조건인 동일률'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동일률'이란 무엇인가? 'A는 A다'라는 형식으로 언명되는 논리학적 원리로서, 그것은 '정군의 정군됨'이라는 '본질'로부터 '정군'을 규정하는 존재론적 원리로 이항된다. 이런 이유로 라이프니츠의 개체는 '예정조화'의 원리에 따르는 사건들의 '수렴항'이 되고, 헤겔에게 있어서 개체는 '단일한 중심'(절대정신, 역사이성)의 나선적 운동 안의 한 점이 되고 만다. 이때 '차이'는 절대성 또는 적극성을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차이'는 결국 되돌아와 '동일한 것'이 될 '차이'이기 때문이다. '동일률'이 '실존' 위에 군림한다. 어떻게 실존해도 '본질'을 벗어날 수가 없다. '차이'는 그저 '동일자'가 탄생하기 위한 '바탕'에 머문다. 따라서 이 역시 '차이'를 온전히 드러내기에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 2022-04-20 21:37

    (p.125~127)

    - 연속성의 법칙과 식별 불가능자들의 원리: 연속성의 법칙은 부수적 속성들, 변영들, 혹은 완결된 경우들을 지배하고, 식별 불가능자들의 원리는 본질들, 곧 전체를 이루는 개체적 기초개면들로 파악되는 본질들(모나드들)을 지배한다.

    - 연속성의 법칙: 모든 모나드들은 공통적으로 세계를 표현하고 있지만, 세계는 자신의 표현들보다 앞서 실존한다. 그런데 세계는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의 바깥에서, 곧 모나드들 자체의 바깥에서는 진정 실존하지 않는다. 각각의 세계의 공가능성을 정의하는 것은 연속성일 것이다. 라이프니치는 세계의 공가능성 (수렴하는 다른 계열들 안으로 접속)과 세계들의 비-공가능성(획득된 계열들을 발산하게 만들 특이점들 근방에서 정의)으로 설명한다.

    - 식별 불가능자들의 원리: 모나드 안에서 유한한 차이는 명석하게 표현된 세계의 영역으로 규정된다. 반면 무한하게 작은 차이는 이 명석함의 조건이 되는 혼잡한 바탕으로 규정된다. 이런 두 가지의 방식을 통해 망아적 재현은 규정을 매개하고, 그 규정을 차이의 개념으로 만든다. 망아적 재현은 매개된 규정에 하나의 ‘이유’를 지정해주는 가운데 규정을 차이의 개념으로 만든다.

  • 2022-04-20 21:47

    -부정적이 것의 배제와 영원회귀

     

    앞에서 들뢰즈는 ''필연적 파괴'를 불러들이는 두 가지 방식'을 이야기하며, 하나는 '차이 자체'를 긍정하며 부정이 일차적인 '시인의 방식',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차이나는 것을 부정하며 긍정을 일차적으로 여기는 '정치가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이 중 그는 두번째 방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에 따르면 긍정은 차이와 거리를 긍정하며 부정은 긍정의 환영만을 산출하며(구판 138p와는 반대) 부대현상이다. 또한 이는 차이나는 긍정의 효과이며 본연의 차이라는 두 국면을 지닌다. 

     

    니체는 당나귀의 '예'와 '아니요'를 디오니소스-차라투스트라의 그것과 대립시킨다. 이 두 관점, 즉 '아니요'에서 긍정의 환영을 끌어내는 노예의 관점과 '예'로 부터 부정적 귀결을 끌어내는 주인의 관점은 대립한다.

    확립된 가치들과 창조 간 구별을 역사적 상대주의에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이 둘 사이에는 본성적 차이가 있다. 가장 심층적인 본성상의 차이는 평균적 형상과 극단적 형상들(새로운 가치들) 간에 성립한다. '따라서' 평균적 형상들을 무한으로 끌고간다해도 극단적 형상이 되지는 못한다.

    니체에 따르면, 참된 선택은 대립이나 투쟁보다는, 영원회귀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우월한 형상"을 끄집어냄으로서 된다. 

     

    극단성은 차이남의 일부고, 우얼한 형상은 영원회귀 자체의 비형상이다. 영원회귀는 차이를 "만든다". 이에 따르면 부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부정된다. 부정적인 평균적 긍정, "아니요"에서 비롯한 "예", 등은 이러한 '폭력적인 (영원회귀라는 바퀴의)원심 운동'에서 '축출된다'.

    "귀결로서의 부정은 긍정의 결과이고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소진시키며 그 스스로 영원회귀의 움직이는 중심에서 소진된다." 영원회귀에서는 본연의 차이가 중심, '같음'이 가장자리에 있으며, 이는 비동등성을 맴돌 뿐이다.

  • 2022-04-20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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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철학학교시즌4] 라이프니츠 읽기 [형이상학 논고] 3주차 후기 (5)
세븐 | 2023.11.17 | 조회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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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철학학교시즌4] 라이프니츠 읽기 [형이상학 논고] 3주차 23-끝 질문들 (11)
정군 | 2023.11.15 | 조회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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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 <형이상학논고> 12~22절 후기 (6)
아렘 | 2023.11.13 | 조회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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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학교 시즌 4] 라이프니츠 읽기 보너스 - 라이프니츠와 하노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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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철학학교시즌4] 라이프니츠 읽기 [형이상학 논고] 2주차 12-22 질문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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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학교 <형이상학 논고> 첫번째 시간 후기 (6)
세션 | 2023.11.03 | 조회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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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철학학교시즌4] 라이프니츠 읽기 [형이상학 논고] 1주차 1-11 질문들 (12)
정군 | 2023.11.01 | 조회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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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철학학교시즌4] 라이프니츠 읽기 [접힘과펼쳐짐] 2주차 후기: 누가 한 말입니까? (12)
봄날 | 2023.10.30 | 조회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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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철학학교시즌4] 라이프니츠 읽기 [접힘과펼쳐짐] 2주차 질문들 (12)
정군 | 2023.10.25 | 조회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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