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차이와반복>읽기 본문1 요약-메모 모음

정군
2022-04-05 23:47
437

메모는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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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4
  • 2022-04-06 00:23

    86-88쪽

    재현의 네 측면
    '차이'는 하나의 바탕, '미규정적'인 바탕이다. 반대로 일자一者는 그러한 '미규정적인 것'에 '규정'을 부여한다. 얼굴, 이성, 형상 같은 말들은 '규정'의 다른 이름들이다. 문제는 여기에 미규정자를 향한 규정자의 규정운동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형상'이 바탕에 관계할 때 '형상'도 무언가를 잃어간다. 그런 이유로 '차이'는 저주의 대상이 된다.

    '차이의 철학'이 '차이'에 걸린 저주를 풀려는 기획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차이의 철학'적 시도들이 있었을까?
    1) 차이를 '동일성' 안에 넣으려는 시도
    2) 차이를 궁극적 개념들 간의 '유비적 질서' 안에서 다루려는 시도
    3) 차이를 개념적 항들 사이의 '대립'으로 파악하려는 시도
    4) 차이를 개념 규정된 대상 안의 유사성으로 파악하려는 시도
    각각의 시도들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재현'이다. 이와 같은 시도들 속에서 '차이'는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네 개의 항 중 하나의 항으로 '매개'된 채 나타난다.

    동굴 속의 벌거벗은 '차이'에게 '재현'이 말한다. '차이야 이리 나와 옷을 입으렴. 네 가지 옷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입으면 된단다'. 옷입지 않은 차이, 여전히 직접적인 '차이 그 자체'로 남아있는 차이만이 '괴물'로 남는다. '괴물'은 여기(철학)서 함께 놀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동굴 속의 차이를 불러내는 일은 괴물적인 '비재현적 차이'와 포획가능한 '개념적 차이'를 선별하는 일이 된다. 불려나온 '차이'는 '개념 일반 안에 기입'된다. 이를테면 '시민권'을 얻는 셈이다.
    이것이 '차이의 철학'임을 자처하는 '재현의 철학'이 괴물적인 '차이'를 다루는 방식이다. '재현'으로부터 '차이'를 설명하는 구도가 세워질 때에만 이런 물음들이 가능할 수 있다. '차이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차이가 얼마나 큰가? 또는 작은가?' 말하자면 '차이'가 움직일 수 있는 특정한 폭, 반경이 부여되는 것이다. 서론에서 스치듯 지나간 '법칙은 주체들로 하여금 법칙 자신을 예시하도록 내몰지만, 이때 그 주체들은 자신의 고유한 변화들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와 같은 말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구도 아래에서 '차이'는 도덕적 '악'이 되고, 법적으로는 '불법'이 된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것이 진정 '차이의 철학'인 것인지, '차이'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이 과연 제대로 하는 것인지 묻는다. 명백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차이'를 '차이'로서 사고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 2022-04-06 08:10

     

    2절. 개념적 차이 :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차이 (구판 90-91)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의 본질적 속성들로 종의 개념을 이끌어냈다. 말horse은 말의 본질적 속성(갈기털, 긴꼬리)으로 구성된 종이다. 이런 속성을 일컬어 "가장 크면서도 가장 완전한 차이"라고 한 것 같다. 또한 여기에서 차이는 어떤 사태에 의해 다른 것이다. 말이 소와 다른 건, '갈기털'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 소에겐 없다. 즉 다른 동물엔 없는 특징이 있기에(꼬리라는 사태가 있기에) 차이가 있다. 말이나 소는 또한 닭과는 다르다. 말이나 소는 '유類'(유사함)에서 합쳐지고, 유사함끼리 묶여진 것 사이에서 다시 조류나 포유류냐 하는 (종적)차이가 생겨난다.

    말< 말과 < 유제류(발굽) < 포유강 < 동물계 이런 식이다.

    이런 분류를 할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대립'에 기반한 차이다. 대립은 언제나 가장 큰 차이다. 그리고 대립 중에서 가장 잘 합치하는 형식은 상반성이다. 상반성이 완전한 차이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질료에 의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스텐그릇과 사기그릇은 질료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질료에서 온 차이는 우연적이다. 오로지 본질이나 형상을 통해서만 개념(그릇-이라는 '종')을 얻을 수 있다. 즉 이것들을 '그릇'으로 묶으려면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형상이라는 특징이 공통되게 있어야 한다.

    발이 달린 것과 날개가 달린 것은 상반적이며 차이를 만들지만 포유류라는 유사함으로 묶인다. (즉 포유류라는 하나의 유로 분할된다) 우린 유적 차이들을 통해 상반성, 그리고 대비를 알아가는데, 이건 다시 종차를 이룬다. 유-종-유-종-유-종 이런 식이다. 들뢰즈는 유적 차이를 질료에 비교하고, 종적 차이는 형상에 비교하는 것 같은데, '스테인레스'라는 질료라고 해도 그것은 2차 또는 3차 질료이다. 즉 하나의 질료도 계속 종으로 묶어진다. .... 종적 차이는 그 뒤에 이어서.....

     

  • 2022-04-06 08:58

    재현의 네 측면: 개념의 동일성, 판단의 유비, 술어들의 대립, 지각된 것의 유사성(p94-96)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설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차이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규정 가능한 궁극적 개념들 간의 관계안에 성립하는 판단의 유비(類比)로써, 개념 내부적 규정들의 관계 안에서 성립하는 술어들의 대립으로, 개념 자체의 규정된 대상 안에서 나타나는 지각된 유사성으로 재현될 뿐이다.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미규정적인 유적(類的) 차이나 범주적(範疇的) 차이를 개념의 동일성이라는 규정으로 기입하지 않고, 미규정성, 다의성을 계속 밀고 나갔으면 유(類)를 ‘존재’의 차원으로 다룰 수 있었던 순간에 오히려 존재를 유(類)안에서(개념의 동일성 안에서) 다룬다고 비판한다. 유비(類比)를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의 개념에는 분배적으로만 공통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과 위계적 순서에서만 일차적 의미를 갖는다는 두 가지 특성이 있는데, 이는 판단의 두 가지 기능 (공통감 능력의 분배 기능과 일차적 감각 능력의 위계화 기능)으로 분배의 위계적 질서(심급,審級)를 정할 수 있다. 이 둘은 올바른 측정의 근간, 판단의 가치인 ‘올바름’의 근간을 이룬다. 모든 철학적 범주론은, 칸트 그리고 심지어 헤겔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판단을 모델로 한다. 그런데, 이 때 이 판단의 유비는 공통감과 일차 감각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개념의 동일성이 여전히 존속하게 된다. 따라서 차이를 판단 자체의 유비에 기입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므로 차이의 고유한 개념에 도달할 수 없다.

  • 2022-04-06 09:05

    차이와 유기적 재현(97~99)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 즉 유(類)와 종(種)의 사유가 곧 ‘동일성’의 사유임을 강조한다. 서로 다른 범주는 공통점을 통해서만 범주들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차이’는 동일성을 의미하는 범주에 종속되고 말 것이다. 이 경우 가장 상위 유(類)들이 하위 유(類)를 종속시키면서 범주를 형성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범주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하고 만다.

    공통의 유 안에서 성립하는 종들의 일의성 배후에는 상이한 유들 안에서 성립하는 존재의 다의성이 자리한다. 사물들이 같은 방식으로 있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사물들 사이에는 유비가 버티고 있다. 유비적 관계들은 재현 안에서 특성들을 선택하는 판단의 맥락 속에 놓이게 된다. 유와 종을 정의하고 위계를 정해야 하니까.

    여기에서 차이는 오로지 반성적 개념으로만 드러난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유사한 종들로부터 그 종들을 포섭하는 어떤 유적 동일성으로 이행할 수 있고 감각 가능한 하나의 연속적 계열의 흐름 속에서 유적 동일성을 절단해낼 수도 있다. 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각기 동일성을 띤 유들로부터 그 유들의 유비적 관계들로 이행할 수 있다.

    이런 반성적 개념으로 머물러 있는 한에서 차이는 자신이 재현일 뿐이다. 재현은 바로 그런 차이를 통해 유기적 재현이 되는 것이다. 반성적 개념 안에서 매개하고 매개되는 차이는 개념의 동일성, 술어들의 대립, 판단의 유비, 지각의 유사성에 복종한다. 차이가 유와 집합이 정의된 이후에 이들을 하위로 다시 나누고 조직하기 위해 도입될 때(반성적 개념이 되었을 때) 개념과 술어, 유비 그리고 지각이 서로 연결된다(제임스 윌리엄스 145쪽)는 것이다.

    차이가 참다운 개념을 되찾을 수 있다면, 이는 차이가 곧바로 어떤 파국을 지시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비-개념적 차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차이들은 술어들 내에서의 대립과 차이에 따라, 부분이나 하위집합의 규정성 속에서 제기되는 재현의 요구에 저항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파국으로서의 차이야말로 환원불가능하고 반항적인 어떤 바탕, 유기적 재현이 표면적인 균형 아래 계속 움직이고 있는 바탕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파국으로서의 차이, 그 차이의 평면인 바탕은 존재의 일의성을 증언하는 것이 아닐까?

     

  • 2022-04-06 09:27

    1절 차이와 어두운 바탕

    (83쪽~85쪽) 무차별성은 두 측면을 지닌다. 한 측면은 분화되지 않은 심연, 규정되지 않은 동물이다. 이것은 검은 무다. 다른 한 측면은 다시 고요해진 표면이다. 여기에는 서로 연결되지 않은 규정들이 떠다닌다. 이것은 하얀 무다. 미규정자는 미분화된 것이므로 어떤 차이도 없다. 떠다니는 규정 역시 서로에 대해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차이란 무엇일까? 이 둘 사이, 심연과 표면 혹은 미규정과 떠다니는 규정 사이에 있는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차이는 이 둘을 떠난 극단, 현전과 정확성의 계기일까? 차이는 본래적 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태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차이란 두 사물 사이의 경험적 차이나 외생적 규정에 의한 것도 아니다.

    들뢰즈는 번개와 하늘의 관계를 예로 든다. 번개는 하늘로부터 구별되려 한다. 그러나 그 구별에는 바탕이 끌려 들어올 수밖에 없다. 번개에게 하늘은 바탕이기에 분리 불가능하다 그러나 번개는 하늘과 구별된다.

    본래적 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상태로서의 차이란, 일방향적인 구별에 해당하는 이런 규정의 상태이다. 차이는 만드는 어떤 것, 만들어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런 차이 혹은 본래적 규정이란 잔혹성(?)이다.

    플라톤주의자들에 따르면 일자가 아닌 것은 일자와 자신을 구별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형상은 질료와 자신을 구별하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별자체가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형상들은 재상승하는 바탕(?) 안에 반영될 때 흩어지고 만다. 그때 바탕은 미규정자이기를 그친다. 형상들 역시 상호공존적이거나 상보적 규정으로 남아있기를 그친다. 바탕은 자율적 실존을 얻고 형상도 더 이상 형상이 아니다.

    • 2022-04-06 11:14

      고야, 에칭 연작 <로스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 - Wikipedia

      고야,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5/Museo_del_Prado_-_Goya_-_Caprichos_-_No._43_-_El_sue%C3%B1o_de_la_razon_produce_monstruos.jpg

      오딜롱 르동 작품
      https://nwfc.pam.org/daily-art-moment-odilon-redon/
      https://www.artic.edu/artworks/95599/germination-plate-two-from-in-dreams

      • 2022-04-07 15:35

        앗 그림을 찾아보긴 했는데, 이렇게 크게 보니 정말 거기에 들뢰즈의 문장이 그대로 다 있군요. 오딜롱 르동의 첫번째 작품 말입니다^^

    • 2022-04-07 10:46

      『연극과 그 이중』_ 앙토냉 아르토, 이선형 옮김, 지만지 드라마

       

      아르토_<잔혹연극 선언>(1932)_발췌

       

      그러므로 연극이 심리적이고 인간적인 제자리 걸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연극에서 표현과 제스처와 파롤의 형이상학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러한 노력 뒤에 일종의 실제적인 형이상학적 유혹이나 그 운명이 정확하게 제한될 수도 없고 형식적으로 그려질 수도 없는 이질적인 이념에 대한 호소가 없다면 어떤 것도 쓸모없을 것이다. 창조, 생성, 카오스와 접혹하는 이념들, 전체가 우주적 질서인 이 이념들은 총체적으로 낯선 연극의 영역에 최초의 개념을 제공한다. 이 이념들은 인간, 사회, 자연 그리고 대상물들 사이에서 일종의 열정적인 방정식을 창조한다. (164쪽)

       

      음악, 춤, 팬터마임, 또는 마임에 호소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언어가 움직임, 조화, 리듬을 활용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특정한 예술에는 이익이 되지 않는 일종의 중심표현과 일치한다는 점에서만 그러하다. 또한 이 언어*는 일상적인 정념이나 일상적 사실들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웃음에 의한 유머—파괴와 마찬가지로, 도약대로서 이성적인 습관과 화해시키는 데 활용한다. (165쪽)
      * 연극의 '신체적 측면'을 함축한 언어. 이성적-재현적 연극으로부터 돌려받은 '연극의 표현적 언어'

       

      결국 이 언어는, 특별한 주술의 위엄으로 세워진 기호들 밑에 그리고 제스처 아래 감추어진 더욱 심오하고 새로운 지성의 의미를 제공함으로써, 언어를 지성적인 예속과 단절시킨다.
      왜냐하면 진정한 연극이, 우리가 한 측면만을 지니고 있고 그 완성이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창조의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하지 못한다면, 신체적으로 정신을 어떤 궤도에 올려놓을 수 없다면, 이 모든 자기장, 모든 시(詩) 그리고 모든 직접적인 매혹의 방법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166쪽)

      중요한 것은 뚜렷한 수단에 의해 감성이 더욱 섬세해지고 더욱 깊이 있는 지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술의 대상이고 제의이며, 연극은 그 반영일 뿐이다. (166쪽)

       

      만일, 꿈처럼 연극이 유혈 낭자하고 비인간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그 이상으로, 창조 속에서 모든 것이 지속된 우리의 상태에 반하여 세워지고 실행되는, 삶이 매 순간 잘라 버린 경련과 영원한 갈등의 이념을 우리가 망각하지 않도록 표현하고 정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와 잔인성 자체가 본질적 원리로서, 그들의 근원과 연속성을 제시하기에 충분한 특정 우화들의 형이상학적 이념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영속하게 하는 것이다. (168쪽)

       

      다른 한편 코드화된 언어와 음악적 전사는 목소리를 전사하는 수단처럼 귀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언어를 기반으로 억양을 특별히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억양은 기꺼이 재생산될 수 있는 파롤의 제2의 변형, 조화의 균형을 구성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가면의 상태를 취하는 수만의 얼굴 표정은, 무대의 구체적인 언어로 직접적이고 상징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명칭을 붙이고 종류별로 나눌 수 있다. (170-171쪽)

       

      이외에도 음악의 구체적인 이념이 있다. 여기에서 소리는 등장인물처럼 개입해, 소리의 하모니가 이 둘을 짝짓고, 단어들이 정확히 개입하면서 스스로 사라진다. (172쪽)

       

      잔혹성 : 모든 스펙터클의 저변에 잔혹성의 요소가 없다면 연극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처한 퇴화 상태에서, 형이상학을 다시 정신 안으로 들어오게끔 하는 것은 바로 살(몸)을 통해서다. (177-178쪽)

       

       

      아르토_<잔혹에 대한 편지>(1936)_발췌

      첫번째 편지
      여기서 잔혹이라는 것은 사디즘이나 피의 문제가 아니며, 적어도 배타적인 방법도 아닙니다.(184쪽)

       

      그런데 철학적으로 말해 잔혹이란 무엇인가요? 정신의 관점에서 잔혹은 엄격함, 적용, 준엄한 결정, 절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철학적 결정론은 우리 존재의 관점에서 잔혹의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잔혹이라는 단어에, 유혈이 낭자한 가혹함의 의미 부여나, 신체적 악에 대한 무관심하고 근거 없는 탐구는 잘못된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왕이 패배한 왕자들을 수레로 운반해 노예로 삼은 것은 피에 대한 절망적인 사랑에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잔혹은 사실상 흘린 피, 순교자의 살, 십자가에 처형된 적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잔혹을 육체적 고통과 동일시하는 것은 정말 사소한 문제일 뿐입니다. 사형집행인인 고문자가 스스로 복종하고 경우에 따라 지지하기로 결정해야 하는 일종의 최고의 결정론을 실행하는 것은 이 잔혹에서입니다. 잔혹은 무엇보다도 명철한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엄격한 방향과 필연성에 대한 복종입니다. 잔혹 없이는 의식도 없습니다. 적합한 종류의 의식도 없습니다. 삶의 모든 행위의 실천에서, 피의 색과 잔혹한 뉘앙스를 제공하는 것은 이 의식입니다. 삶은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184-185쪽)

       

      두번째 편지
      나는 삶에 대한 욕구의 의미로, 우주의 엄격함과 불가분인 필요성의 의미로, 어둠을 집어삼키는 삶의 소용돌이의 영지적인 의미로,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삶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고통이라는 의미로 '잔혹'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중략)
      숨은 신이 창조할 때 스스로에게 부여된 창조의 잔인한 필요성에 복종합니다. 그리고 신은 창조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선의 자발적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더욱더 압축되고 더욱더 소모되는 악의 핵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체적인 마술적 행동과 끊임없는 창조의 의미에서, 연극은 이러한 필연성에 복종합니다. (186-187쪽)


      아르토의 글들을 읽어보니 '잔혹성'이라는 게 어쩐지 '영원회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편지들'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고요. 

  • 2022-04-06 09:32

    91~93pg.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설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개념 일반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다.”

     

    들뢰즈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크고 완전한 차이’라 여겼던 ‘종적 차이’가 “단지 상대적으로만 큰 차이”, “전적으로 상대적인 의미의 최대치”일 뿐임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종차는 동일성에 의존하고, 그렇게 해야만 “차이는 대립에까지 이르고 상반성으로까지 끌려갈 수 있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종차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차이가 동일성으로, 동물과 식물이라는 유적 차이에서는 다시 사람과 동물이라는 종차가 동일성으로…. 그리고 이렇게 동일성으로 묶은 뒤에야 차이는 대립, 유비, 유사성 등 매개의 측면들에 종속이 가능하다.―그리고 그것이 차이에 대한 선입견(저주받은 차이), 차이를 개념 일반에 기입하기 위한 그리스식의 ‘요술’이다. 이것이 “차이의 철학을 파멸로 몰고 간 혼동의 원리”이고, 차이라는 개념이 착오와 모순에 빠져 있는 이유다.

  • 2022-04-06 11:04

    3절 일의성과 차이(99~101)

         들뢰즈는 둔스 스코투스의 존재론만이 존재론이라고 말한다(한 문장에서도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쓰는 들뢰즈를 흉내내본다). 존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유비) 판단이 아닌 명제를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단 하나 뿐인 존재론적 명제는 '존재는 일의적이다'라는 것이다.

         명제에는 첫째, 의미(the sense), 둘째, 지칭되는 것(the designated), 셋째, 표현하는 것들 또는 지칭하는 것들(the expressors or designators, 변별적 요소로서 수적 양태)이 있다.

         ‘새벽 별(샛별)’과 ‘저녁 별(개밥바라기)’의 예를 보자. 같은 사물(금성)을 지칭하지만 의미는 다른 경우다. 둔스 스코투스는 이것을 ‘개념적 구별’의 예로 들었지만 들뢰즈는 이것을 ‘실재적 구별’이자 ‘형상적 구별’이자 ‘질적인 구별’이자 ‘기호학적인 구별’이라고 말한다. (‘존재론적 구별’은 될 수 없다. 뒤따라 나오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그 무엇도 구별되지 않는다.) 이 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형상적으로는 구별되지만 존재론적으로는 하나인 복수의 의미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의미의 차이조차도 형상적 구별을 낳는다. 의미도 존재론적으로 같다.

         그러나 들뢰즈는 일의성의 본질은 일의성(존재가 단 하나의 똑같은 의미에서 말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존재는 차이를 통해 말해진다(언명된다). 각기 차이나는 양상들을 통해 말해진다. 일의성의 본질은 개체화하는 차이와 관계한다.

  • 2022-04-06 11:34

    90-91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 차이의 개념과 개념적 차이의 혼동

    종차는 형상적이므로 순수하고 본질 안에서 내생적이다. 종차는 질적이고 (유가 본질을 지칭한다면) 매우 각별한 , ‘본질에 따르는' , 본질 자체의 질이다. 종차는 종합적이다. 종차는 매개되고, 매개이며, 매개항이다. 종차는 산출적이다. 유가 나뉠 종들을 생산하는 차이들에 의해 나뉘기 때문이다. 종차는 언제나 원인, 형상인이다. 

    종차는 매우 특수한 유형의 술어다. 종차는 1) 종에 술어로서 귀속되면서도 2) 동시에 유를 종에 귀속시키며, 3) 자신이 술어로서 귀속되는 종을 구성한다. 술어는 자신과 자신이 귀속시키는 것을 함께 실어 나른다.

    본질은 유를 다른 어떤 사물로까지 만들 수 있으며 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같은 것으로 남더라도 자신을 나누는 차이들 안에서는 전적으로 다른 사물이 된다. 

    차이는 자신, 유, 그리고 모든 중간 차이들을 함께 운반한다. 차이의 운반, 차이의 차이인 종별화는 연쇄적 나눔을 가로지르며 차이와 차이를 연결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최종적, 최하위 종의 차이에 이른다. 그리고 이 차이는 분할 불가능한 단일한 것이 된다. 

  • 2022-04-06 14:19

    요약문 모음입니다! 더 올려주시면 추가하겠습니다.

  • 2022-04-06 14:36

    구판 95-96

    종적 차이와 유적 차이

    종차는 질료 '안'에 있는 가장 크고 완전한 차이이며 '더함과 덜함'을 통해 작동한다. 동시에 이는 (어떤 규정되지 않은 개념=)유의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종차는 (규정가능한 개념=)유의 차이와의 비교에서는 '이런' 유들은 공통의 유를 가지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사소한 것이다.

    존재자체는 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를 종별화시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유적 차이들의 어떤 '다른' 본성은 종차와 관련되어서 생각되어야 한다. 두 개의 로고스, 즉 유라는 개념의 동일/일의성을 전제하는 종들의 로고스와 존재의 개념들의 상이/다의성 안에서 있는 유의 로고스가 있다. 

    "우리가 일의적인 것을 말할 때, 이는 여존히 우리 안에서 언명되고 있는 다의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여기에 차이의 철학을 위한 기회가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 2022-04-06 23:23

    (p.85~86)

    미규정자는 보통의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규정(차이를 만드는 유일한 규정) 안으로 혼융(混瀜)되어 가는 그런 거울 안에서 분해된다. 이러한 미규정자(바탕)와 규정(형상)의 관계설정이 예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 방식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고야의 아쿠아틴트와 에칭, 그리고 오딜롱 르동의 명-암과 추상적인 선을 통해 형상과 바탕의 다른 관계설정의 표현방식을 설명한다. 그것은 어두움 속에 감춰져 있던 바탕을 올라오도록 만들고, 형상을 와해시키는 것으로 그 저변에 ‘차이’가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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