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4주차 차이와 반복 후기

매실
2022-03-2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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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아니면 후기 쓸 시간이 없을 거 같아서 번쩍 손 들어 자진했는데, 생각해보니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부분이었더라고요. 끙. 정군샘이 추천해주신  <프로이트 패러다임> 에서 ‘죽음 충동’ 부분을 읽으며 참고해보았습니다. 3절과 4절이 이어지는 범위이고, 지지난 시간에 3절 복습 겸 요약하면서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무지하게, 질려버리게, 길어졌군요. 줄일까 하다가 이런 반복도 필요할 거 같아 그냥 올립니다. 

 

 

 

*3절 

 

<차이와 반복> 서문 3절(번역서)에서는 개념의 관점에서 반복과 일반성을 구분하고 있다. 들뢰즈는 왜 ‘개념’에 이토록 천작했을까. 

 

나처럼 기본적인 ‘개념 정리’(!)부터 안 된 분들을 위해 처음부터 써보겠다. 요즘 군-닐 <서양철학사>를 읽고 있는데, 거기에서 설명을 가져오자면 플라톤에게 ‘개념’이란 특정 개체를 지칭하는 실례가 아니라  ‘일반’을 지칭한다. 즉 철수네 말이 아니라 관아에 있는 말, 경마장에 있는 말, 제주 한라산 중턱에 사는 말, 몽골 초원에 있는 말 등, 세상 어디에 있든,  BC 5세기에 있든 21세기에 있든,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개념은 언제나 ‘동일성’을 말한다. 

 

들뢰즈가 3절에서 말한 “논리적 봉쇄”가 이것이다. (저처럼 모든 걸 망각한 분들 위해 정군샘이 친절하게 댓글로 써주신 글을 다시 요약해서 풀자면, - 반복, 반복!! )  피에르와 폴은 ‘인간됨’이라는 정의 안에서 ‘유사한 것’이 되고, 여기에서 인간됨은 ‘개념적 정의’다. 들뢰즈는 이걸 “봉쇄”된다고 표현한다.  개념적 정의는 사물 간의 유사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철수도 영희는 ‘인간’이다.’라고 할 때 여기서 ‘ㅇㅇ이다’ 라는 술어는 개념인 ‘인간’에 묶이게 된다. 

 

그런데 유사성은 ‘일반’이지 “부분적 동일성”이 아니다.  ‘ㅇㅇ이다’라는 술어는 각각의 사물 안에서는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된다고 하는데,  다시 말해 이 세상의 수 많은 인간은 모두 다르다는 거다. 

 

여기에서 들뢰즈는 앞에서 말한 논리적 봉쇄와 다른 “자연적 봉쇄”를 말한다. 자연적 봉쇄는 개념이란 유사성의 질서를 구성하지 않고, “실존 안에서 참된 반복”을 형성한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간’들’은 인간이라는 단어로 정의된 개념을(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ㅇㅇ이다 등) 언제나 넘어선다.  들뢰즈는 개념으로 식별되지 않는 차이를 말하고자 정말 복잡하게 설명한다. ( ‘개념’에 대한 ‘일반적’ 정의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아..증말 읽는 내내 알겠다구요!! 알겠어!!라고 외치게  된다. 쉽게라도 써주등가..) 

 

들뢰즈는 “자연적 봉쇄”로의 개념에도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1) 명목적 개념 2)자연의 개념 3)자유의 개념이다. 

1)”명목적 개념”으로 보자면 인간의 개념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다 포착할 수 없다. 인간이라는 개념엔 “외연 =1”이 부과되지만 (모든 철수, 영희, 존, 안나 등을 싸잡아 너희 다 인간이다,라고 하는, 즉 ‘1’개로 퉁쳐버리는) 이 개념은 유한한 국면에서만 포착한 것이라서 언제나 취약하다. 이 세상 인간들의 차이는 무한한데 그걸 무시하고 특정한 측면에서만 포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다’라고 했을 때 그 ‘사유’는 어떤 기준인가? 그래서 개념엔 “이산적 외연”이 있게 된다. 이산적이라는 말은 연속성을 깬다는 거다. ‘어, 정말 인간이 다 똑같을 수 있나?’라고 묻을 수 있다. 즉 실존에서는 모두 저마다 다르다.   

 

2)두번째,  자연적 개념에선 ‘무한정한 내포-개념’을 말한다.  즉 개념으로 식별되지 않는 차이가 있고, 개념으로 규정되지 않는 실존들이 있다. 이 차이는 반복에서 온다. 늘 규정하고 포섭하려는 개념들에 맞서서 끝없이 반복함으로써 무한한 차이를 드러낸다.  

 

3) 세번째, 자유의 개념이 있다. 이건  무한한 내포를 가졌으나 자기 의식을 결여한 ‘자연’이다. 왜 자연은 무한한 내포를 가지고 의식하지 않는다고 하는 걸까. 여기에서 (서삼풍 샘의 요약문을 보자면) 들뢰즈가 말하는 자연은 ‘정신성 없는 물질적 사물’이다. 즉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 즉 정신-사유가 있어야 우리 주변의 수많은 차이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는데, 자연엔 정신이 없으니 ‘일반성’으로 말해질 수가 없다는 거다.(라고 나는 이해했다.) 자연은 반복하기만(그러면서 끝없이 차이를 만들어내기만) 한다. (==> 이 부분은 두번째 자연적 개념으로 가야하는데 잘 못 써놨습니다. 요요샘 댓글을 참고해주세요!)  

 

세번째 자유의 개념에서  반복은 무의식처럼 드러난다. 들뢰즈는 앎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앎은 사유와 의식의 영역이 아니었던가? 들뢰즈가 보기엔 의식하지 못하는 ‘무한한 앎’이 있고, 반복되면서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이 예로써 프로이트의 이론을 가져온다.. 즉 누군가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치료 과정에서 인식을 새롭게 고쳐 인식하게 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3절 복습이 겨우 끝났군요. ..이제 시작일 뿐~ ) 

 

 

 

 

*4절. 

 

들뢰즈는 앞서 ‘자연적 봉쇄’를 통한 반복을 설명하기 위해선 “실증적인 힘” (그러니까 들뢰즈는 독자들이 "들뢰즈씨,  자꾸 이건 아니고, 저건 아니고라고 말하지 말고 예를 좀 들어보라고요!" 라고 하지 않을까 뜨끔하셨던 건 아닐까.-ㅎ)  이 필요하다고 하며 프로이트의 죽음 본능을 가져온다. 

 

프로이트의 ‘죽음 본능’이란 무엇인가. <프로이트 패러다임>에 아주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요약해서 써보자면, 

 

“죽음 충동은 자아가 자아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성향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자아에게 성적인 충동 이외에 죽음과 파괴를 향한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1910년대 후반부터 쾌락원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보고된다. 요즘 용어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전쟁신경증 환자들. 불나방처럼 삶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반복 강박이란 어쩔 수 없이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는 것. 나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 문제는 반복되는 것이 쾌락이 아니라 불쾌를 주는 것이란 점이다.  

 

프로이트는 여기에서 쾌락원칙에 맞지 않은 뭔가가 있음을 발견한다. 자아가 삶이 아니라 죽음을 지향할 수 있다고 가정하게 된다. 성적인 결합을 목표로 하는 삶의 충동이 아니라 분해와 파괴를 목표로 하는 죽음의 충동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죽음 충동을 다음과 같은 가설로 설명한다. 

 

-가설1)  인간은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산다. 성장이란 죽기 위한 몸부림이다. 태어나기 전 상태인 비유기체적인 상태로 회귀하려는 성향이다. 

-가설2) 그래서 비유기체와 같이 긴장을 제로로 만드는 것을 지향한다. 삶이 갈등과 긴장을 유발한다면 죽음은 그 긴장을 종료시키는 안식처다. 긴장의 제로화가 죽음 충동이다. 

-가설3) 생물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보면 두 가지 작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세포들이 서로 동화하려고 하는 작용이고 하나는 분리하려고 하는데 죽음 충동은 분리시키려고 한다. 

-가설4) 생리학적 원리를 우주 전반에 작용해보면 우주의 법칙은 통합과 해체라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죽음이란 긴장을 끌어내리고 갈등을 종료 시키는 역할을 한다. 성욕이 흥분을 불러일으킨다면 죽음은 그 흥분을 제로로 끌어내린다.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상상한 건 생명의 보수적인 성향이다. 그리고 그 후에 쓴 <자아와 이드>에선  이 관점을 다시 뒤집는다. <자아와 이드>에서 제시되는 죽음 충동은 분리와 분해를 지향하는데, 삶의 충동은 통합과 결합을 지향한다. 삶의 충동이 화합과 절충이고 사랑이다. 여기에선 삶의 충동이 소란을 중화시키는 고요한 과정이 된다. " 

 

암튼 프로이트도 확신이 없어서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는데... <프로이트 패러다임>에선  여기서 보아야 할 건 프로이트에게 죽음 충동이라는 개념을 꺼내들 수 밖에 없는 문제 의식이라고 한다. 

 

들뢰즈도 가설 자체보다 ‘문제의식’을 보고 프로이트의 가설에 대해 좀 더 다른 해석을 내놓았던 것 같다.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기원/무기질 상태로 돌아가도록 가둬버린 죽음 본능을 오히려 반복과 생성의 측면으로 만들어낸다.  즉 죽음 충동은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에 내재하는 것으로 그러부터 다음 가면으로, 그리고 다시 다음 가면으로 움직이려는 충동”이다. (제임스 윌리엄스)  

 

"죽음은 물질적 모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반대로 죽음본능은 가면이나 가장과 죽음 본능이 갖는 정신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면 된다. 반복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구성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 위장하는 것, 스스로 위장함으로써만 자신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가면이다. 우리는 현실적인 사태, 감각, 잠재적인 이념, 그리고 이것들이 활기를 띠게하는 강도의 조합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다른 측면들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또 다시 연극하려는 충동 때문에 반복한다." (들뢰즈) 

 

들뢰즈는 “억압하기 때문에…반복한다”라는 정신분석의 명제를 뒤집는다. 억압이 반복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복 하면서 우린 유사성을 재현하는 표상의 형식을 파괴하면서 경험을 체험하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런 예가 치료자와 치료 받는 사람의 감정 전이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반복은 일종의 유희가 되어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떠올리려 할 때 그 반복은 불쾌를 반복하는 강박이 아니라 그 반복을 통해 “가면을 선별”하고 “연극화”하여 표상과 재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여기서 떠오른 예. 아이들의 놀이를 잘 지켜보면 어린이집이나 부모가 혼내는 말투나 장면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역할 연기를 할 때가 많다. 그건 일종의 강박이라기 보다는 ‘유희’다. 어른들의 말을 재현하거나 말버릇이 잘못 생긴거라거나  어른들의 망각한 영향력으로 만들어진 치명적인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아니라 어린이집 교사나 부모가 자신에게 전달한 분노를 비트는 연기라고 볼 수도 있을 거 같다. 사실 아이들의 회복성은 어른들이 생각하기보다 강하고, 들뢰즈에 따르면 어른들이 함부로 쏟아내는 말들도 아이들은 이런 과정을 유쾌하게 해내면서 떨쳐내버릴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거 보면, 칙칙하고 눅눅하기 이를 데 없는 프로이트와 달리 들뢰즈는 참으로 긍정적인듯.  

 

 

 

 

*5절  

 

5절은 막 시작했는데 ‘신호’와 ‘기호’에서 다들 멘붕에 빠졌다.  도대체 ‘장식의 모티프’의 반복이 왜 예술가에겐 하나의 도형의 재생산이 아니라 역동적인 구성 과정에서의 표본과 표본의 다른 요소와의 결합이 되는가. 그리고 대체 신호는 뭐고 기호는 뭔가. 

 

장식적 모티프의 예로 구글 검색을 해보니 의외로 마티스의 작품 분석 논문들이 나오던데,  

자연과 인물에서 따온 표현 모티프들을 레이어링하고, 고도의 치밀한 계산하에 배열함으로써 장식성을 지니게 되는 작품들이라고 한다.  우린 모티프를 반복하고, 장식으로써 쓴다고 하면 마치 벽지처럼 계속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붙여 넣는거라고 생각하지만, ‘예술’에서 그런 반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모티프는 다른 요소와 결합하면서 조금씩 바뀌어 배치된다. 사실 이건 당연하다. 고스란히 100%로 붙여넣게 되면 오히려 전체 균형이 깨지게 된다.  

공산품이냐 예술이냐이 차이는, ‘차이 나는 반복’에 달려 있다고 나는 이해를 했다. 아래의 하트 모양과 색은 모두 다르다. 만약 여기서 하트를 똑같이 붙여 넣었다면 마티스의 작품은 우리에게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앙리마티스의 컷아웃 꼴라쥬의 이미지 특성을 응용한 패션디자인> 라는 논문에 재미있는 분류가 있어서 가져와 본다. 모티브 반복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잘 써놨다.  

 

 

 

나는 신호와 기호는  좀 단순하게 이해 했는데, 이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진 모르겠다. 음악에 빗대어보면 신호라는 체계는 ‘악보’이고 기호는 그 악보를 ‘연주’하면서 일어나는 효과 같다.  

 

예를 들어 쇼팽의 녹턴 9-2번 (들으면 딱 아는 핸드폰 벨소리로도 많이 나오는 곡)을 보면 악보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면 모두가 보고 해석할 수 있는 언어로 쓰여져 있다. 이건 약속이며, 매우 ‘객관적’이다.

 

 

 

자, 안단테로 치시오. 여기서는 F(포르테)해주고! , 여기서는 P(피아노)... 페달은 여기서 밟고, 요기선 떼고, 여기는 트릴하시고,....(여기서 ‘기호’라고 쓰려다가 들뢰즈가 말하는 기호와 혼동이 생길 수 있어서 쓰지 않았다.)  

그런데 연주할 땐 악보에 표기되지 않은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즉 악보대로만 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럼 음악이 되지 않는다. 즉 똑같은 반복, "헐벗은 반복"만 할 때는 '하수'다. 박자 정확하게 지키고 계이름 지키고 셈여림 지킨다고 음악이 되진 않는다.

특히 쇼팽 음악에선 ‘루바토’가 매우 중요한데, 루바토란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템포를 조정하는 것이다. (악보엔 씌여있지 않다)  그렇다고 갑자기 마음대로 늘리고 줄이는 건 아니다. 쉽게 말해 박자는 지키되, 선율의 리듬을 박자 안에서 밀고 당긴다고 해야할까. 

놀라운 것은 루바토를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같은 악보의 곡이라도 그 곡에서  어마어마한 감정들이 폭발한다는 거다. 나는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기호’라고 이해했다. 아래 영상을 보면 어떻게 '기호’가 막 촉발되는지 알 수 있는데,  

 

악보대로만 친 연주. (피아노 취미생으로 10개월 동안 이 곡을 연습했는데도 나는 악보대로도 못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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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바토를 넣은 연주. (레슨 영상을 보면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의 머뭇거림이 '떨림', '긴장', '울컥임' 등을 만든다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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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바토를 안 넣은 녹턴은 핸드폰에 들어가는 미디 벨소리가 된다. 루바토를 넣으면 들을 때 울 수도 있다. 

 

같은 악보를 두고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정말 들뢰즈가 말하는 어쩌면... “이념”까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연주 해석으로 인해 쇼팽 연주에서 무수하면서도 엄청난 차이들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쇼팽 콩쿨’은, 이전의 연주들을 단순히 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차이를 설득력 있게 만들어내느냐의 경연장이 된다. 우승자의 연주를 두고 쇼팽답다, 답지 않다 의견이 분분해지는 이유다. 그런데 그 쇼팽답다는 건 늘 바뀐다는 것이다. 왜 같은 곡을 수없이 반복해서 연주하지? 다 똑같지 않나? 이미 전설의 명반들이 수두룩한데 왜 굳이 똑같은 곡을 계속 치지? 권위를 쌓으려는 건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을 통해서 기호가 만들어지고 그 기호와 마주침을 통해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게 된다. 늘 새로운 쇼팽이 생성되는 거다. 관객들은 그걸 기다린다.  

 

아무튼 5절은 음악에 빗대어 이해를 해보면 조금은 막막함이 겉어지는 느낌. (일단 아는 선에서 총동원 해봐야하지 않겠어요?) 

 

 

-

서론은 워밍업 하듯이 읽어야할 거 같고 도식화나 말끔한 정리에의 유혹을 떨쳐버려야 할 거 같은데, 한번 이렇게라도 정리해보지 않으면 그 후로 줄줄이 멍 때릴 거 같아서 좀 단순하게 이해한 바를 써보았습니다. 저처럼 이런 반복이 필요하신 분도 계시겠지요.. 단 음악에서의 루바토를 쓰고 보니 우리가 들뢰즈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태도 역시 비슷하단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루바토를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아무리 말을 하고 설명을 해도 루바토란 정말 0.01초의 미세한 차이에서 일어나고 전적으로 연주자의 역량에 따라 벌어지고 명쾌한 설명이 불가능한 것 일텐데.... 뭔가 <차이와 반복>의 텍스트도 그런 거 같습니다. 

 

 

 

댓글 7
  • 2022-03-28 11:53

    우와.. 덕분에 복습을 찐하게... 감사합니다. 특히 음악은 일하면서 자주 듣지만 이론은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루바토.. 재미있네요. 지난 시간에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프로이트를 너무 많이 얘기했는데(하아..) 각주에서 말한 <억압에 관하여> 앞부분을 읽어보니 "대리적 표상"(차이와 반복)은 외부 대상의 표상이 아닌 "본능의 정신적 대표자/표상화된 대표자"(억압에 관하여)였네요. 그리고 '고유한 의미의' 억압도 다른 의미로 쓴 것 같아요. 밤에 더 자세히 보고 다시 정리해서 댓글 달아보겠습니다;; 

     

    가열차게 공부해도 자꾸만 휘발되어버리지만 그래도 찬찬히 깊게 새기려고 애썼을 때 거기서 다른 의미있는 변화도 나오는 것 같아요. 강독으로 서론을 이 정도 강도로 한 달만에 봤으면 아주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정군샘이 조급하게 책장을 넘기던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 하나...ㅎ 저는 아주 흐뭇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 

  • 2022-03-28 14:39

    오 감사합니다! _()_😍😍😍 

  • 2022-03-28 16:15

    아 재미있습니다. ㅎㅎㅎ

    저도 호수샘을 따라 일단, 인용문 하나 던져놓고 천천히 정리된 댓글을 달아보겠습니다. 🙂

    들뢰즈의 거미에 대한 몇 줄의 글을 가지고 우리는 '사유'와 '진실'과 '비자발성'과 '기관없는신체'를 이어 줄을 그어 보았다. 논의를 될 수 있는 한 간단히 하기 위하여, 나는 할 수도 있는 말을 하지 않은 채로 지나갔다. 다시 말해서, 거미에 대한 이 짧은 글은 잠재적으로 무한히 다른 줄들로 이어지고 확장되어 있으나, 단지 내가 여기에서 글로 현실화시키지만 않았다는 뜻이다. 거미에 대한 이야기는 '안티-로고스', '반-변증법', '법', '무의미' 등과 이미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들뢰즈의 글은 이 가운데 하나만 알아도 모든 논의를 한꺼번에 알 수 있는 스타일로 씌여져 있다. 바로 여기에 들뢰즈 스타일(문체)의 비밀이 있다. 들뢰즈는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던 방식으로 철학책을 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하였으나, 이는 '낡은 스타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기 보다는, 들뢰즈 철학이 요구하는 바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들뢰즈는 표현하고자 하는 바의 것을 하나하나 차례차례 설명하느라 잃어버리고 마는 전통적인 철학의 문체를 거부하고, 그 스스로 '표현의 새로운 수단'에 대한 탐구, 새로운 문체에 대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그의 글은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거미가 거미줄에 달라붙은 자기 먹이를 감지하듯이 그렇게 읽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언젠가 한꺼번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신지영,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그린비, 8쪽

  • 2022-03-29 08:19

    멋지네요! 마티스의 예도, 쇼팽 콩쿨의 예도! 지난 번 쇼핑콩쿨 때 밤잠을 설치며 경연을 보고 이야기나누던 몇몇 친구들의 상기된 얼굴이 

    뙇! 떠오르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저는 후기 중에서 자유의 개념과 관련한 정리에 대해서는 어, 이상한데.. 이런 생각이 들어서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어서 댓글을 붙여봅니다.^^

    저는 자유의 개념에 '자연'이 들어오는게 이상한 거 같아요. (물론 이 자연은 정신 빼고 물질적 자연에 한정된 자연..^^)

    음.. 자유의 개념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활동과 관련된 개념에서의 자연적 봉쇄와 관련한 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자유의 개념에 대해 들뢰즈는 "무한한 내포를 지니고 기억을 갖추었으나 자기의식을 결여한 어떤 개별적 기초개념이나 특수한 표상"같은 거라고 해요.

    저는 자유의 개념은 (벌어진 사건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는 개념들을 말한다고 생각했어요.

    기억에는 사실 벌어진 사건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표상될 때 어떤 이유로 인해 기억에 결여되는 것이 있다는 거겠지요.

    그 결여된 것은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자면 "의식의 대자적 차원이자 재인의 차원"이고요. 

    제임스 윌리엄스는  "원래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 사이의 간극 때문에 일어나는 봉쇄"라고 설명하고 있더군요.(113쪽)

    그러므로 자연적 봉쇄와 관련된 자유의 개념이란,  기억에 대한 자유로운 재인식이 방해되는 경우의 기억과 관련된 개념이나 표상.

    그래서 프로이트를 소환하여 재인이나 의식화가 결여된 상태에서 반복되는 트라우마 같은 걸 끌어오는거죠. (프로이트야말로 이 세번째 봉쇄의 이유를 설명한 사람이니까요.)

    그렇지만 사실 이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의 개념이 봉쇄된 결과 발생하는 반복은 진정한 반복을 이야기하기위한 징검다리 같은 거에 불과해서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닐 수도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반복은 바로 뒤 4절에서 죽음 본능을 끌어들이면서 다시 부수어지고 마니까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반복은 의식의 대자적 차원과 재인의 차원이 결여된 반복이지만, 그것은 기억을 동일하게 재인하고 의식화할 수 있다는 동일성의 철학을 전제로 한 것에 불과하다는 거죠.

    사실은.. 죽음본능에 의한 반복이 봉쇄로 인한 반복보다 더 근본적인 반복이다, 라는 걸로 바뀌고 있으니까요.

     

     

     

     

     

    • 2022-03-29 15:04

      엇. 그러네요. 제가 2.3번을 섞어서 써놨네요. ;; 

      "여기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자연은 ‘정신성 없는 물질적 사물’이다. 즉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 즉 정신-사유가 있어야 우리 주변의 수많은 차이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는데, 자연엔 정신이 없으니 ‘일반성’으로 말해질 수가 없다는 거다.(라고 나는 이해했다.) 자연은 반복하기만(그러면서 끝없이 차이를 만들어내기만) 한다. " -->>> 이 부분은 2번, '자연적 개념'으로 가야겠군요.  

       

       

       

       

  • 2022-03-30 00:44

    들뢰즈는 참으로 긍정적입니다! ㅎㅎㅎ 후기를 읽다가, 어째서 들뢰즈는 그렇게나 '긍정적'으로 보이는 늬앙스를 풍기는 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읽은 바, '차이나는 것들의 반복'을, 그 중에서도 그 어떤 것과도 동일하지 않은 바로 그때(지금 여기)의 '반복'으로 이 세계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반성'이 이차적인 것이고 그 보다 앞선 곳에 각기 다른 것들이 우글거리고 있으니... 거기엔 '부정'이 자신을 지탱할 자리가 없으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그와 동시에 프로이트는... 당신은 도대체 왜... 그런가요? 아마 프로이트의 '동기'가 뿔뿔이 흩어져가는 정신을 부여잡는데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뒷부분의 '루바토'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지금까지 통과해 온 몇몇 구절들이 떠오르는데요,

    이를테면 머리말에서 본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오로지 앎이 끝나는 최전방의 지점에 도달할 때'라는 말과 '축제에는 바로 그런 역설,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반복한다는 역설'이라는 말,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반복이란 결국 위반이다'라는 말, '직접적으로 정신에 힘을 미치는 어떤 진동, 회전, 소용돌이, 중력들, 춤 또는 도약들을 고안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 등등.......

    저 말들을 바꿔보면 

    '연주가 시작되는 것은 오로지 암보가 끝나는 최전방의 지점에 도달했을 때'

    '연주는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반복'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연주는 악보를 위반한다'

    오오... 이해가 잘 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아는 것을 총동원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가령 거미줄에 걸린 사냥감에 대한 거미의 반응은 비자발적인 '역량의 총동원'일테니까요. 

     

    어쨌거나 이번주면 어떻게든 '서론'이 끝난다는 게 씐납니다. 저는! 

    (보아하니 기호-신호이야기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잔뜩 써놓으신 것 같다는 고급정보를 살며시 흘려봅니다.)(그리고 역시 뮤직은 매실샘이 추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2022-03-30 01:27

    저는 지난 시간에 나왔던 '억압'과 '전이' 개념을 확인하고 정리해봤어요. 정신분석학에서 전이가 치료 현장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이 무척 놀랍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의 치료가 말하자면 어떤 '사실의 재구성'이 아니라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나는 반복으로서 '환상의 구성'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1. '원초적 억압'과 '고유한 의미의 억압'
    <억압에 관하여>에서 프로이트는 억압을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지난주부터의 아주 짧은 프로이트 읽기를 통해 알게 된 것은 프로이트가 연구 시기에 따라 여러 개념을 복잡하게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인데요, '억압'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프로이트는 '억압'을 불쾌의 원인이 되는 외부 자극으로부터의 도피에 집중해 설명했던 것 같아요. 이러한 억압을 프로이트가 '고유한 의미의' 억압--열린책들 판에서는 '본래적인 의미의 억압'--이라고 쓴 것 같아요.
    이후 프로이트는 '억압'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여기서는 거부해야 할 대상이 본능입니다.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이 본능은 '정신적 대표자(표상화된 대표자)'를 의식에 진입시키려고 하는데 이것이 거부되는 것이 억압입니다. 이 경우가 프로이트가 새로 발전시킨 '원초적 억압'입니다.

    들뢰즈가 이 원초적 억압에 집중한 이유는 이것이 "의식의 정신활동과 무의식의 정신활동의 간극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들뢰즈가 말한 '알려지지 않은 앎', 즉 무의식에서는 알려져 있지만 의식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앎이라서요.

    *사실 세미나 때는 '대리적 표상들'이란 게 무엇을 말하는가, 라는 질문이 나왔는데요, 용어의 유사성 측면에서 보면 프로이트의 <억압에 관하여>에서 '원초적 표상'과 관계된 '표상화된 대표자'처럼 보이지만, 맥락상 '고유한 의미의 억압'에서의 '거부감을 주는 "표상"'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억압에 관하여>에서는 '억압된 표상과 연계 관계를 맺게 되는 관념들'이라고 표현된 것이지 않을까 해요). '대리적 표상들'이라고 표현한 것은(원문은 확인 못했고 영어판은 그냥 'representations'네요) 그 아래 '순수한 직접적 현시들'과 대비하려고 그렇게 쓴 것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2. 전이
    '전이'라는 개념은 맹정현의 <프로이트 패러다임>에서 확인해봤는데, 다른 분들도 이 책 175~203쪽 추천드리고 싶어요. 저는 들뢰즈가 반복이라는 개념을 프로이트 이론을 가져와서 설명할 때 정신분석학의 반복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해서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저의 의심을 뒤집는 놀라운 대목이 있었어요.

    일단 전이의 대표적인 현상은 정신분석가를 아버지나 어머니와 혼동하는 경우인데 처음에 프로이트는 이것을 '표상의 혼동, 기억의 혼동'이라고 설명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 시기에는 "전이는 단순히 표상의 이동이 아니라 표상의 질서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요소가 반복되면서 나타나는 대상의 대체"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시기에서 전이는 "자유연상을 통한 내러티브의 재구성"이 됩니다. 즉 "환상의 구성"이 됩니다!

    세미나 시간에도 요요샘께서 정신분석학에서 '전이' 개념이 무척 중요하다고 설명해주셨는데요, 맹정현도 그것을 지적합니다. 옮겨 볼게요.
    "요컨대 정신분석을 다른 심리 치료와 구별해줄 수 있는 것은 전이라는 현상과 더불어, 그리고 전이 속에서 치료를 한다는 점입니다. 전이 속에서, 전이에 대해 조작을 가함으로써 치료를 한다는 것이죠. 전이가 억압된 유년기의 신경증을 재생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전이를 통해 다루게 될 것은 결국 유년기의 무의식적인 환상이며 정신분석은 그러한 무의식적인 환상을 구성하는 것이 됩니다. 분석 과정의 목표가 전이를 통해 환상을 구성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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