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겨울번개 들만철] 2주차 후기

르꾸
2022-01-27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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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얼른 남기려고 합니다. 후기 쓰는 게 ‘일’이 되지 않는 ‘효율적’ 작성을 위해 두 요약자가 ‘분업화’를 합의했습니다. 저는 5장(‘스피노자와 우리’)을 중심으로 남기겠습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시각에서 철학의 계보학을 다시 세우면서, 지난 시간에는 플라톤, 이번 시간에는 스피노자와 흄을 가지고 왔습니다. 보통의 대가들이 그러하듯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갖고 오지만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이론적 구도 속에서 스피노자 논의에 개입하고 전유하며 자신의 지향을 곳곳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이미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충분히 익숙하다는 전제 하에 글을 전개시키고 있어 ‘철알못’인 저같은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일단 스피노자 이해하기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래서 ‘실체, 속성, 양태, 변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스피노자 <윤리학> 개론’으로 세미나가 출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무림의 고수들께서 "실체는 자기원인으로서의 자연이자 신이며, 오직 하나이다. 실체가 지닌 본질을 속성이라 하고, 실체가 변용돼 있는 것들이 양태이다. 다시 말해 양태가 실체를 발현하고 있다. 우리 모두 양태이며 지금 우리는 다 변용되고 있다. 실체와 속성과 양태는 한 '셋뚜'다"라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 주시네요. 갑자기 <윤리학> 특강 때 진모 선생님의 “신 즉 자연, 데우스 시베 나투라”라던 음성이 지원되는 듯 했습니다. 

 

두 번째 저희들이 목청 높이며 한 논의는 어디까지가 스피노자의 얘기고 어디서부터 들뢰즈의 ‘해석’인지 구분을 좀 해보자는 얘기였습니다. 역시 철학 공부하시는 분들은 끈질지고 집요하십니다. 그러면서 들뢰즈가 중요하게 제시하는 동역학적인 ‘입자의 느림과 빠름’, 역동적인 변용, ‘내재성의 공통 평면’, '초월성의 평면' 등이 막 던져졌습니다. 이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입자’를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모든 물체는 운동하거나 정지해 있다’고 얘기한 것에 기반한다면, ‘입자’는 스피노자의 ‘물체’를 들뢰즈 식으로 해석한 듯하다. ‘내재성’은 스피노자도 얘기했다. ‘평면’은 들뢰즈 얘기다" 등이 오고 가다 그럼 ‘내재성의 평면’은 도대체 뭐냐?로 모아졌습니다. 무림의 고수분들이 또 답하기를, "빠름과 느림의 ‘경도’와 변용의 ‘위도’가 있는 지도라는 이미지를 떠 올려볼 때, 이건 이차원적인 평면도로서 다른 층위가 없는 일종의 장(場)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것은 다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이 평면 바깥은 없다. 이 얼마나 혁신적인 발상이냐? 이데아를 상정하지 않고도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 있지 않냐!"로 술술 이어졌습니다.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는 모든 것이 양태로서 변용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위계가 없고 다 ‘평등’할 수 있다는 것에 밑줄 쫙을 그었습니다.

 

이러자 이 양태적 평면이 “그 자체로서 이미 충만하게 내재성의 평면”인데 왜 우리는 그 자체의 충만함 속에 그치지 않고, “스피노자적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평면을 건설”하자고, 들뢰즈는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요상한 소리를 하냐는 묵직한 세 번째 논의로 이어졌습니다. 완전하다고 얘기해 놓고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의 모순어법의 진의를 파악해야 하니깐요. 음..고수님들 가라사대, “내재성의 평면 위에 있으면서도 자꾸 이를 알지 못하고, 쓸데없이 신을 불러 세우면서 초월성의 평면을 구축하려고 하니깐 이를 깨우치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양태들이기 때문에 어딘가에 묶여있는 제한된 존재들이다. 그래서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며 자기의 존재 역량을 더 잠식하는 형태로 변용할 수도, 더 확대시키는 형태로 변용할 수도 있으니깐 이를 긍정적으로 변용하자는 얘기다”라고 또 찰떡같이 말씀해주셨습니다.

 

들뢰즈는 첫 세미나 때부터 플라톤식 사고방식에 계속 딴지를 걸고 있습니다. 이데아, 저 천상의 본질, 초월 이런 거 완전 싫어라하니깐, 들뢰즈에게는 오직 ‘내재성의 평면’만 있을 뿐이고, 그래서 초월성의 평면 이딴 거 없는 데도 자꾸 초월성의 평면으로 바라보려는 그 ‘시선’에 대해서, 스피노자를 경유하면서 더 확실하게 못을 박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스피노자가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겨난 것도 결국 ‘인간이 믿는 그런 신은 없다’라고 말했다가 그렇게 된거라고 하니깐요.

 

이쯤 되다 보니,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변용 능력이 엄청 중요함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 우리 모두 양태로서 변용되고 변용시키는 이중적인 자기 능력 아래 헤쳐 모여야'...하다가 문득 이것을 계속 밀어붙이면 ‘양태들에게 무한책임을?’이 되나?라는 해괴한 의구심이 얼핏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들뢰즈는 멋있는 사람입니다. 흄을 읽으면서 제가 어느 대목에서 ‘멋있는 들뢰즈!’라고 써 놓았는데, 세미나에서 무림의 고수분들도 그 대목을 언급하지 뭡니까.  저 '철알못'에서 잠시 탈주할 수 있는 건가요?? 혼자 ‘흐흐흐’ 했었답니다. 어떤 대목일까요? 궁금하시면...흄 후기를 놓치지 말아주세요!:)

댓글 18
  • 2022-01-27 15:42

    깔끔한 요약에 이어서 꼼꼼한 후기까지! 잘 읽었습니다. ^^ 

     

    저는 들뢰즈를 읽을 때나, 스피노자를 읽을 때나, 잘 모르겠는 가운데에서도 늘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게 무슨 '위로'나 '힐링' 같은 건 전혀 아니지만요. 뭐랄까요. 마지막에 써주신 '책임' 문제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내재성의 평면' 안에 있다는 걸 깨닫고 나면, 내가 어리석어서, 악해서 여타 무슨 도덕적 결함 같은 게 있어서 무슨 벌을 받는게 아니니까요. 말하자면 그 모든 지혜롭지 못한 것들 그 자체가 이 상태의 '결과'인 셈입니다. 거기에 무슨 '책임'을 더 지는 게 아니라는 거죠. 달리 말하자면 이게 '무한책임'인 건 맞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내 어리석음을 누가 책임져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매우 확실히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대단히 절망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초월적 평면'에 근거해 생각해 보면 그 '초월'이라는 게 이미 나의 상태와 연결 없이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리석음'은 결국 '믿음'에 의존해서 타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전 어쩐지 그 경로가 '나'를 더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이와 같은 '내재성'-'초월성'의 대립은 우리가 읽은 것처럼 삶의 여러 국면에서 끊임없이 생겨나곤 합니다. 이걸 정치적 차원이나, 젠더나, 하다못해 상품소비나 기타 등등 여러 차원들에 적용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124쪽의 말들은 아마 그런 의미이지 않을까 싶고요.

     

    여하간에, 잘 읽었습니다! <스피노자와 우리>를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후기였습니다!!

  • 2022-01-28 17:03

    '르꾸쌤, 뻥쟁이!!!' 

    라고 일단 내지르고 (심히 무도하게.. ) 봅니다.

     

    허나..

    '철알못이라더니..', '르꾸쌤만 믿었구먼.. ㅠ 아니잖아..', '아.. 그게 이런 말들이였구나..', '오!  혹시 르꾸쌤은 철학천재가 아닐까.. 어떻게 이렇게 다 기억하고! 이해하고! 적어냈지!?', '이제 쪼매 알거같아! 저번 세미나를 다시 들어볼 용기가..!' '고마워요, 철영르쌤!' 으로 흘러간 저의 감상으로 끝내봅니다.

     

    '철학 영재 르꾸쌤 (철영르) ' 께 감사인사를 드리며.. 저는 떡국이나 우적우적 먹고 힘내서 와야겠어요.

     

    다들 설날 떡국 맛나게 드세요~ 

    고수님들이 계셔서 정말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 2022-01-28 20:42

    맛깔진 후기 감사합니다. 르꾸샘 글 앞으로 자주 보고 싶습니다. ㅎㅎ 저는 오랜만에 세미나에 참석하니 참 좋았나봅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방에서 나간 저더러.. 아니, 철학 세미나 들어간다는 거 아니었어?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자꾸 크게 웃어? 하더라고요. ㅎㅎ 지난 한 학기 어떻게 참았나 모르겠습니다. 아, 네, 올해 철학학교 신청해야겠습니다. 

    예전에 스피노자를 같이 읽을 때 왜 '신 즉 자연'이라고 하지? 그냥 '자연'이잖아. 왜 굳이 '신'이라는 말을 남겨 놓는 거야?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날 세미나에서는 막상 실체를 '신'으로 먼저 떠올린 제 자신이 신기합니다. 사실상 첫 철학 공부였던 스피노자를 통해 서양사상사에서 '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스피노자의 논변으로 헝클어진 머릿속 실타래를 풀고 풀다.... 문득 신은 자연의 지위로 '내려오고' 자연은 신의 지위로 '올라가' 결국은 같은 높이에 자리하게 되는, 아니, 어떻게 따로 떼어볼 수도 없이 한데 얽힌 장면을 목격했을 때 좀 짜릿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것은 김언희 샘이 던지신 질문인데요. 자신과 맞지 않는 환경에서 애써 노력했지만 좌절을 겪었고 그리하여 결국 슬픔에 빠진 누군가에게 스피노자 철학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물으셨던 걸로 기억해요. 정군샘이 스피노자의 정념론을 필사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낼 힘을 얻었단 얘기도 해주셨구요. 세미나 때는 말을 못했지만 사실 그때에도, 세미나가 끝나고도, 그 질문을 여러 번 생각했어요. 슬픔의 정념에서 거의 익사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물밖으로 빠져나온 상태로 스피노자를 읽었던 기억이 나서요. 그때 저는 아무튼 나는 나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추구하는 노력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나만 그런 게 아니라 원래 다 그렇다니까 ㅎㅎ)에서 시작했던 것 같아요. 또 그 자체로 충만한 건 나뿐만 아니라 이대로 모든 것이 그러하고, 단지 외떨어진 원자 같은 '나' 하나만 양태인 것이 아니라 이 '나'가 소속된 이 모든 것들 역시 양태라고 하고, 뭐 양태는 실체하고 떨어질 수도 없다 하니..... 이 '무한책임'을... 어이 할지..는 다시 세 번째 논의로 돌아가야 하나요? ㅎㅎ 아무래도 올해 머리가 좀 자주 아플 거 같네요. ㅎㅎ

     

  • 2022-01-29 10:29

    고수님들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한 개념입니다.

    책모임에서 스피노자를 읽고 있는데, 어제 자유에 대한 이야기에서 두 가지 이야기가 나와서요. 

    한 분은 자유는  '우주 자체가 자기 법칙 속에 존재하며, 필연성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자유롭다'까지만 해서 정의해야 한다고 하셨구요. 

    저는 그 개념에 "2부 정리 19. 인간의 정신은 신체가 자극 받아 변화된 변용의 관념을 통해서만 인간의 신체 자체를 인식하며 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 와 "2부 정리 23. 정신은, 신체의 변용의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 있어서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 를 덧붙여서 그럼 내가 필연성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변용을 통해야지만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 변용을 많이 해본 사람이 필연성 속의 나를 깨달을 기회가 더 많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변용을 많이 해 본 사람이 자유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은 것이 아니겠는가.. 까지 갔는데요. 제가 너무 멀리, 잘못된 방향으로 '자유'를 끌고 간 것일까요? 

    문득.. 필연성을 깨닫는 것은 이성이 하는 것인데... 아~~ 모르겠습니다.. 길을 잃은 저에게.. 등불이 되어주시옵소서, 고수님들.

     

     

    • 2022-01-29 15:46

      '세미나'에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맥락이 있기 때문에, '그' 세미나에서 나눈 이야기를 '이' 세미나에서 무어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시던 중에 가졌던 생각들을 잘 검토해 보면서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거지요. 그리고, 그걸 가지고 또 다른 세미나를 하면서 생각을 갱신시켜나갈 수 있을테고요. 그건 그렇고, 간단하게 제 생각을 밝히자면, 저는 말씀하신 내용 두가지가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필연성' 속에 있는 것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과 다르다는 점이 스피노자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요. 더불어서 어디까지 읽으셨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문제는 5부에 이르러서 돌아보면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 정도입니다. 언젠가 <에티카> 세미나를 다시 한다면 더 이야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모르겠네요. ^^ 그리고 '등불'은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되어야 합니다. ㅋㅋㅋ

      • 2022-01-29 16:13

        오호.. 5부까지 가면 풀릴 수도 있다고 하시니 또 열심히 가봐야겠군요. 

        저희 책모임 분들께 말씀을 전해드리니 역시 고수들은 답을 쉽게 주시지 않는다고 탄식을.. ㅋㅋㅋ

        제가 자꾸 개념들을 가지고 너무 나가는 경향이 있는지라... (1종 인식쟁이라는 걸 깨달은^^;;) 불안불안했었는데. 알겠습니다. 부지런히 열심히 고민하며, 생각하며 가보겠습니다.  

        내가 나의 등불이라..  우문에 현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언젠가 <에티카>로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기회라니.. 기대되네요.  ^^

        • 2022-01-30 11:19

          정의7: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 이렇게 여러번 '~만'을 사용하는 좁은 자유에 대한 정의로는 자유는 불가능합니다. 아울러 '스피노자는 자유와 필연을 대비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자유에 대한 대비 개념은 필연이 아니라 제약이다' 라고 좋게 해석하는 사람들 역시 너무 많이 나간 해석입니다. 이 정의만으로는 꿈보다 해몽이 좋은 틀린 해석이 됩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자유와 필연성은 같이 설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양태인 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5부의 소제목이 '지성의 역량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입니다. 지성의 역량과 자유의 깊은 연관이 아주 강하게 암시되는 제목입니다. 정의7의 해석과는 많이 동떨어져 보입니다. 정군샘이 5부에 이르면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말씀도 이 간극을 나름대로 채워보심이 어떠냐는 제안 같습니다. 5부에 수긍하신다면 스피노자가 고만큼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들뢰즈 준비 세미나에, 에피쿠로스 읽기에, 더군다나 차이와 반복 세미나에...... 아이고 이 분 대단하다 했는데, 따로 스피노자도 읽으시는군요. 진정한 능력자십니다. 

           

          • 2022-02-05 20:37

            인간은 양태인 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말에 시선이 오래 머무르게 되네요. 그리곤 으쓱~ 한번 하고 넘어가봅니다. 

            고맙습니다. 세미나 시간 안에서도 늘 여러가지 배움을 받는데 이렇게 댓글로까지..

             

            능력자라니요.. 저는 서당개라니깐요. 풍월을 읊고 싶은! 풍월 읊으려면 부지런해야하니.. ㅋ

  • 2022-01-30 10:54

    마치 세미나를 다시 보는 듯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나눴던 내용이 알토란 같이 다 들어가 있는지...진정한 후기의 왕이십니다. 한 가지 정정할 것이, 스피노자가 한 번도 입자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제가 세미나 시간이 이야기했는데, 이는 제 기억이 틀린 것이었습니다. 5부에 입자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쯤 되면 에티카 어느 곳이 또 입자를 등장시켰을지 모르겠습니다.ㅎㅎㅎ

    • 2022-01-30 11:35

      에티카에서 '입자'는 5부에 딱 한번 스콜라철학자들(이라고 쓰고 아마도 데카르트)를 논박하며 한번 씁니다. 

  • 2022-02-02 12:47

    변명 같지만 며칠째 후기를 작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컴퓨터 앞에 앉아 르꾸샘의 후기와 댓글들을 읽으며, 지난 주 우리가 나눈 내용이 ‘이런 거였어?’라는 생각만 하며 시간을 보냈네요. zoom 화면에는 분명 열심히 듣고 있는 제 모습이 보이나, 제 머리 속은 수시로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세미나 중간중간 시청자의 입장이 되어 ‘와! 난 뭘 읽은 거지? 저런 내용이 글자 사이에 있었나?’라는 생각을 하며 zoom 화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뭘 써야 하지?’,‘쓰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열망을 누르며, 지난 시간 나눈 내용 중 ‘흄’에 관련된 부분-외성의 개념스피노자와의 연관성 부분에 대해 오간 내용에 관해 간단히 작성하겠습니다.

     

    1) 외성의 개념

    흄은 우리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이게 확정이 되려면 내적으로 완결되어 있는 법칙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지 (세계의) 원리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흄을 회의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라고도 한다. 들뢰즈가 보는 흄은 외적이며, 착각 자체가 현실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관념 연합 자체가 외성이다. 들뢰즈는 본질적으로 관계 중심의 철학을 살려내려고 하고 있으며, 본유성과 선천적인 것 자체는 지각의 결과라고 보는 경험주의이다.

     

    2) 흄의 외성과 스피노자의 입자 비교

    스피노자는 존재론에 가깝고, 흄은 인식론에 가깝다.(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합리론에 가깝고, 흄은 경험론자이다.) 따라서, 흄의 외성과 스피노자의 입자는 가까운 듯 다르다. 흄에게 외성은 병렬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로 이어져 있는 것을 원자라는 단위로 생각하면 스피노자와는 다른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는 원리가 있다. 그럼에도 관계와 변용을 맞대어 놓고 생각해 보는 것은 색다른 재미가 있다. 흄의 원자론은 우리의 지각들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지, 세계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외부항을 인식하는 것은 원자들과 같은 요소들만을 지각하는 것이다.

    칸트는 흄에게 연합의 원리 자체가 인간 본성에 있다고 보며, 그것을 선천적이라고 비판했다. (칸트는 이것을 선험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경험론의 극한에 흄이 있다고 하는데, 흄은 순수 인식론보다는 사회철학 또는 실천철학에 관심이 있었고, 철학의 존재의미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의 이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주된 고민은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요?’이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과정을 타당화하는 작업을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일견 흄의 관념의 연합에 의한 가상의 자기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정(상상력을 통해 정념을 반성하고 정념을 공명하게 해서 정념의 본성적 편파성과 현재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이러한 작업을 함에도 불구하고, 가상의 자기 개념에서 벗어나는게 이토록 어려울까?

    • 2022-02-03 10:36

      마지막에 '가상의 자기 개념에서 벗어나는게 이토록 어려울까' 하는 질문이 계속 다시 생각납니다.(사실은 어제 올리신 직후에 읽었거든요)

      사실 세미나 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제가 경험한 허무감과 우울감 같은 것도 나(자아)라는 관념이 너무 단단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주의'에서 어떤 해방감 같은 걸 느꼈던 것도 그게(자아가) 순전히 임시적인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고요. 그게 저는 그랬는데, 이게 사실 일반화할 수는 없는 문제라 어떨지 모르겠네요. ㅠ 다만, 그런 이유로 저는 그 다음부터 '공부'를 멈출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요. 

       

      '쓰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열망을 누르며 쓰신 후기 잘 읽었습니다. ^^ 

    • 2022-02-03 14:43

      이번 세미나 덕분에 흄을 새롭게 보게 되었어요. 들뢰즈 글은 술술 읽히지 않기 때문에 자꾸 다시 보게 되고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다시 구성하게 되고..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 말고도 그런 고된 씨름에 묘한 매력을 느끼며 함께 머리를 맞댈 다른 분들이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고 기쁩니다. 

      샘께서 다른 분들과 하시는 작업의 의미를 흄으로 풀어내신 것이 참 인상적입니다. 어느날 내가 지나온 시간을 단순한 하나의 해석으로 고장난 라디오처럼 무던히도 반복해왔던 것을 깨달았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저도 또다른 해석을 떠올릴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공부가 좋더라고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2-02-03 10:59

    와우!  멋진 후기들을 잘 읽었습니다.

    연휴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ㅎㅎ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펼쳤습니다.

    담주에 뵙겠습니다.

  • 2022-02-03 11:00

    다음주 글을 어떻게 소화해야할지 된통 모르겠는데 후기와 댓글들을 읽으니 지나간 세미나가 그려지네요

    다음주 세미나도 이후 후기와 댓글들로 복기하며 다시 보면 좀 보일라나요 ㅠㅠ

  • 2022-02-03 11:18

    설연휴 끼고 일주일 잘 쉬었는데, 지난 세미나 후기와 댓글을 읽으며 다음주 세미나 준비를 시작해야겠어요.

    붓다는 '영원하고 단일한 자아, 그런 거 없다'는 의미로 '무아'를 말했는데,

    어디선가 흄이 관념의 다발에 대해 이야기한 게 불교의 무아와 비슷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관념의 다발이라고 이야기하는게 이번 책에서 보니 관념연합이었나 봅니다.

    흄의 입장에서는 세계도 신도 자아도 그저 관념의 연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 정말 공감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자아, 신, 세계 같은 것이 아무 근거 없다는 것을 허물어뜨린 흄이야말로 형이상학의 토대를 뒤흔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서양철학사를 공부하면서 '칸트'가 얼마나 중요하고 위대한 철학자인지 감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흄이 없었다면 칸트도 없었겠지요.

    흄의 회의주의야말로 현대철학으로 가는 교량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칸트는 흄으로 인해 무너진 형이상학의 근거를 새롭게 정초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그렇게 보였을 뿐.

    어쩌면 흄이 무너뜨린 것들이 계속해서 무너져 간 것이 이후의 철학사인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봅니다.(인간에서 인간 너머로..)

    작년 철학학교에서 읽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도 '플라톤 이래 당연한 전제였던 자아와 주체, 그런 거 없다'는 이야기로 시작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여전히 <존재와 시간>은 인간의 시선, 인간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기는 하지요.. 음... 

    우리 들뢰즈 선생은  '그런 거 없다'는 것을 넘어,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이야기하려고 환영이니 차이니 하는 개념을 말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올 한 해 들뢰즈를 읽으면서 알아가야 할 숙제인 듯.^^

    들뢰즈가 주목한 철학자들은 들뢰즈라는 안경을 통해 우리에게 도대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세미나에서 스피노자와 흄에게서 공히 '관계성'에 주목하는 사유를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이겠지요..

    (아, 그런데 불교의 무아가 흄과 비슷하다는 건.. 뭔가 초점이 어긋난 이야기 같습니다. 음..)

     

     

  • 2022-02-05 10:57

    이번 번개 세미나를 함께 하지 못해서, 무사샘과 둘이서 주말 아침에 만나 읽고 있는데, 올려주시는 요약과 후기에 정말 많은 도움 받고 있습니다. 후기에서 육성 지원 되어서 (누가 저 말 했을 것이다) 추측하는 재미도 쏠쏠하구요. ㅎㅎㅎ 

     

    • 2022-02-06 10:36

      어제 파지사유 잠깐 들렀다 무사샘을 만났어요. 조용히 혼자 들만철 읽고 계시더군요.

      매실샘과 책을 읽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어요. 두분, 멋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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