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시즌3> 이장호의 바보선언(1983)

띠우
2020-11-15 22:02
1352

<영화와 모더니티>

거대한 전환의 시대, 죽지 말고 살아남아라
이장호의 <바보선언(1983)>

 

 

19세기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영화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대표하는 예술 형식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로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일부 예술가들 사이에서 머무를 수 있었던 영화 영역이 넓어졌고, 서사 구현에 있어서도 문학의 자리와 대등해진 것이 있지요. 또한 재현을 통해 인류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형식적 새로움들이 계속해서 시도되었는데,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대중의 탄생도 거기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모더니티’를 예술과 관련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입니다. 그는 『현대 생활의 화가(1863)』을 통해 일시성과 영원성의 공존을 이야기합니다. 즉, 좋은 영화는 어느 때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현대적 감성, 즉 ‘모더니티’를 특징으로 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시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젊은 이순재의 모습)

 

전쟁 이후 60년대 한국영화는 <하녀(1960,김기영)> <오발탄(1961,유현목)>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신상옥)> <대괴수 용가리(1967,김기덕)>등 다양한 스타일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활기 넘치는 사회분위기를 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헌법 선포를 전후로 확연히 쇠퇴기에 들어가게 되지요. 이때 자행된 반문화적 정책들로 한국 영화는 흥행이 보장되는 외국 영화를 수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70년대 ‘진짜진짜시리즈’의 같은 청춘물이나 여배우를 앞세워 찍는 성인영화들이 점점 주를 이루면서 1980년대 한국 영화의 흥행 순위를 살펴보면 10위까지가 대부분 성인영화입니다.

 

보통 7,80년대를 관통해 한국영화의 전통과 현대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던 영화감독으로 이장호를 들곤 합니다. 그는 대마초사건(1975)을 계기로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들을 이어서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극장에 자주 드나들다보니 이미 그의 작품은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무픞과 무릎사이> <어우동> <Y의 체험>등 호스티스영화에 이어 부인시리즈와 궤를 같이 하는 작품들처럼 보였죠. 게다가 인터뷰를 하는 그는 이미 대가인 것처럼 구는 말투까지 갖추고 있어 그저 그런 영화를 찍는 마초적 인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나중에 제가 놓쳤던 이장호 감독의 작품들을 글로 접하게 되었는데요. 풍문으로 들으니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81), <낮은 데로 임하소서>(81), <바보선언>(83), <과부춤>(83)에 이르기까지 격변기의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문화를 보여주었던 감독이었습니다. 이중에서도 이번에 함께 보았던 <바보선언>은 영화적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인데요,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정권에서도 검열의 잣대를 피할 수 없었던 이장호는 쓰는 시나리오마다 거부당했습니다. 그는 제작사와의 1년 제작편수 조건 때문에 영화를 내놓지 않으면 고소당할 형편이 되고 말았고 어쨌든 영화를 찍어야 했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쓴 시나리오로 검열을 통과한 후, 시나리오와는 아무 상관없는 내용을 찍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바보선언>이라는 제목 또한 당시 문화관광부 직원과의 합작품이라고 하네요. “영화라는 것을 망쳐놓고 싶었다”던 그는 ‘모든 것을 거꾸로 찍겠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보선언>의 양식적 실험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죠.

 

 

 

<바보선언>은 시작부터 ‘어라’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서툰 그림과 글씨, 전자오락효과음, 아이의 내레이션과 국악동요 ‘꼭두각시’ 음악에 맞춰 골목에서 주인공 똥칠이 삐딱하게 걸어옵니다. 그리고 영화의 종말을 선언한 감독의 자살로 영화는 시작하지요. 새파랗게 젊은 이장호가 ‘레디고~’ 소리와 함께 건물옥상에서 떨어지는데 울리는 소리가 ‘활동사진멸종위기’입니다. 하늘에서 흩날리는 신문, 프로야구 중계소리와 박수소리들이 뒤엉키지요. ‘나, 세상에 불만있다’고 대놓고 외치는 모습입니다. 죽어가는 감독의 시계를 똥칠이 훔치려고 할 때, 갑자기 감독이 실눈을 뜨고 속삭이네요. 3S정책을 빗댄 유머와 반어적 표현들이 재미있습니다. 똥칠이 옥상으로 올라가 감독이 남겨준 옷과 신발, 돈을 챙기는 사이 ‘새타령’이 울려 퍼집니다. 이 상황에 새타령이라니요.

 

영화 장면들은 지금 봐도 굉장히 세련되어 보입니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보이는 고가를 달리는 차들이나 대학 앞의 풍경을 고속과 저속으로 촬영한 장면은 우리 생각을 계속해서 심리적으로 단절시키죠. 소격 효과, 감정이나 몰입을 방해함으로써 낯설게 하기인가요. 배우들을 청량리역 한 가운데 툭 던져놓고 하게 했다는 즉흥연기를 보면, 그들은 카메라 밖으로 빗나가기도 하고 초점이 어긋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낯선 카메라의 움직임 때문에 더 집중하지요. 무의미한 쇼트들이 무분별하게 이어지기도 하는 사이를 구전민요 ‘알캉달캉’, 국악 ‘어디로 갈 꺼나’ 남인수의 ‘감격시대’같은 음악이 채워가면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도 모르게 똥칠과 육덕, 혜영이 겪는 사회 밑바닥의 세상살이를 따라가게 되지요.

 

 

실제 영화 속 대사가 들려온 것은 30분이 훌쩍 넘어서였습니다. 무성영화도 아니고 현대영화에서 대사는 서사 전개의 중요한 부분인데 말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당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갔던 사람들이 소리가 나지 않자 고장인 줄 알고 교환하러 왔다고들 하네요. 영화 속에서 시각적 단절이 연속성을 파괴하는 것처럼 다양한 사운드의 혼합이나 최소화한 대사 분량도 비슷한 효과를 가져옵니다. 감독이 처음부터 의도적인 단절을 시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감독은 막무가내로 영화를 찍어가는 가운데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고 말하더군요. 다르게 찍어가는 형식적인 실험은 동시대적 문제를 다르게 해석할 수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우연한 발견 속에서 그는 다른 눈을 장착하게 된 셈이지요.

 

 

혜영의 절망적인 죽음 이후 똥칠과 육덕이 그녀를 보내는 의식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습니다. 이장호 감독이 죽던 오프닝 장면이 똥칠의 죽음으로 다시 반복되고, 민중가요처럼 들리는 찬송가 ‘어느 민족 누구게나’가 울려퍼집니다. 국회의사당 앞의 황량한 여의도 광장에서 똥칠과 육덕은 한바탕 춤사위를 펼치며 세상을 향해 발차기를 날립니다. 그리고 내러이션을 맡았던 아이가 외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올바른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바보 똥칠이와 육덕이같은 훌륭한 조상들이 계셔서 우리나라는 행복합니다”

 

좋은 영화는 동시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티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더니티의 핵심적인 부분이 삶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규정하는 것인데요, 이는 신과 인간의 분리 속에 생성된 대중의 탄생과 맞물려 있겠지요. 대중은 과학 발달에 의한 통찰을 통해 앎의 주체로 태어났고, 새로운 경제와 정치 사회는 그들을 삶의 주체로 받아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들이죠. 세계와 자신의 삶 속에서 이전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을 해체하고 새롭게 건설해가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80년대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저항적 힘이 생성되겠네요. 영화전반부가 군부 독재하의 시대적 분위기를 거리와 청년 문화 속에서 포착하고 있다면, 후반부에서는 당시 무분별하게 성장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은밀한 내부에서 비추며 시대적 각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감독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정부 당국의 검열에 대한 영화의 멸종선언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남긴 유언 같습니다. 이장호가 똥칠에게, 똥칠이 아이에게, 아이가 우리들에게 외치고 있는 저 말들의 힘은 현재도 여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 6
  • 2020-11-16 00:15

    영화에 대한 리뷰는 뒤로하고 기억나는건,,,,,,
    젊은 시절 이보희 배우님이 전지현처럼 발랄하고 스타일리쉬해서 감탄!
    행인들의 옷차림과 그 화려한 색채가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 감성 스타일과 거의 비슷해서 오~잉!
    전자음을 듣자마자 갤러그오락이 떠올라서 뜨악!
    포니 택시 코너 돌때 옆으로 넘어질까봐 아슬아슬!
    ㅋㅋㅋ
    이런 추억놀이 하자고 이 영화를 본것이 아니것만;;;;

    암튼,
    시작은 독특하고 유쾌하다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웃음은 사라지고 무거운 마음이 들었던 영화였어요.
    마지막,,시신에 꽃단장 시켜주고 시신과 춤추는 장면은
    좀 기괴+서글픔. 그랬던 기억이.....

    바쁜 중에도 글 쓰시느라 고생하셨어요!

    • 2020-11-17 09:05

      요즘 자주 뵈니 더 반가운 것 같아요ㅎㅎ
      토토로님의 생각을 자주 들을 수 있어서 좋구요.
      저도 영화를 통해 그 시절이 불쑥~~
      오래된 한국영화보기의 또다른 즐거움인 것 같습니다^^

  • 2020-11-16 10:26

    <바보선언>을 보면서, 독재시설-억압-표현-자유 등의 의미를 버렸기에
    오히려 우연적으로, 지금까지 좋은 영화로 평가받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동시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동시대에서 한발 떨어져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보선언>이 그랬던 것처럼요.
    저는 모순이나 모호함이 삶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이 드는데,
    의도를 갖는 표현은 그 의도를 표현하지 못하고,
    동시대성은 동시대를 벗어나야 드러나는 것 같은?
    이게 뭔 소린가 싶은 <바보선언>이 자꾸 생각나는 건
    그런 모순이나 모호함이 우연적으로 뒤섞여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 2020-11-17 09:00

    모호함과 우연성이 만나 무엇인가 촉발할 수 있게 되는데에는
    결국 집단 속의 개인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동일시에 빠진 존재가 아닌 특이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지 기록에 의해서갔죠..
    말과 글, 그림, 형식의 재현등등
    우린 현재의 모더니티를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요?ㅎㅎ

  • 2020-11-17 12:01

    <바보선언>이라 궁금해서 읽게 되었어요^^ 잘 읽었습니다.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에 나오는 동시대적인 것은 반시대적인 것이라는 문구가 문득 떠오르네요.

    • 2020-11-17 13:42

      새털샘이 이 답글을 보실지 알수는 없지만 그래도 질문해 봅니다.
      니체의 "동시대적인것은 반시대적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설명을 좀 듣고 싶네요^^

      동시대성이나 근대성(모더니티), 그리고 시대의 재현.
      영화와 이것들은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이지만 그 용어와 사용이 제게는 좀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영화뿐 아니라 팝과 같은 대중음악도 그렇고요.
      답을 듣는다면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듯 합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29
2023 필름이다 10월 상영작 | 요르고스 란티모스 #1
청량리 | 2023.10.10 | 조회 244
청량리 2023.10.10 244
228
2023 필름이다 8월 상영작 | 장률 #3
청량리 | 2023.08.14 | 조회 334
청량리 2023.08.14 334
227
필름이다 7월 상영작 <두만강> 후기 (3)
스르륵 | 2023.07.23 | 조회 169
스르륵 2023.07.23 169
226
2023 필름이다 7월 상영작 | 장률 #2
청량리 | 2023.07.11 | 조회 346
청량리 2023.07.11 346
225
필름이다 6월 상영작 <경주> 후기 (5)
수수 | 2023.06.25 | 조회 365
수수 2023.06.25 365
224
2023 필름이다 6월 상영작 | 장률 #1
청량리 | 2023.06.17 | 조회 256
청량리 2023.06.17 256
223
#내신평가 #미아 한센 로브 (3월~5월)
청량리 | 2023.05.31 | 조회 185
청량리 2023.05.31 185
222
2023 필름이다 5월 상영작 | 미아 한센 로브 #3 <베르히만 아일랜드>
청량리 | 2023.05.14 | 조회 507
청량리 2023.05.14 507
221
미아 한센 로브 #2 <다가오는 것들>
청량리 | 2023.04.14 | 조회 609
청량리 2023.04.14 609
220
2023 필름이다 3월 상영작 | 미아 한센 로브 #1 <에덴, 로스트 인 뮤직> (1)
청량리 | 2023.03.17 | 조회 415
청량리 2023.03.17 415
219
2023 필름이다 월 후원회원 정기모집 (14)
청량리 | 2023.02.18 | 조회 720
청량리 2023.02.18 720
218
2023 필름이다 특별상영전 < O O O O > (3)
청량리 | 2023.01.06 | 조회 662
청량리 2023.01.06 662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