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시즌2 빔 벤더스 <돈 컴 노킹(2005)>

띠우
2020-10-04 00:09
375

내가 니 애비다? 어쩌라고!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Don't Come Knocking (2005)>

 

 

영화는 옛 서부극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에서 한 남자가 말을 타며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곧이어 등장하는 세트장,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중이었군요. 왕년에 잘 나가던 서부극 스타 하워드(샘 셰퍼드)가 촬영장을 무단이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제압하며 그의 뒤를 쫓는 남자 서터(팀 로스)가 등장합니다. 살짝 미스터리를 기대했으나, 그는 제작사의 손해를 막기 위해 파견된 보험회사 직원일 뿐이죠. 촬영장에서 도망친 하워드는 30년 동안이나 연락한 적 없는 엄마의 집을 향해 먼 길을 떠납니다. 무려 30년 만에 만난 엄마로부터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강하게 부정하던 그는 옛 사진첩을 뒤적이다 오래전 몬태나 촬영 현장을 떠올리게 되지요.

 

하워드가 어떤 인물인지는 그의 엄마가 스크랩해 둔 기사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집에서 가출하고 나서 그는 잘 나가는 영화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술과 마약, 여자와 돈에 빠져 온갖 방탕한 일을 저지르며 30년이 되도록 집에 전화 한 번을 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엄마와 함께 들른 카페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욕을 하고 나와 버립니다. 그런 그를 대신해 사과하는 것은 엄마입니다. 얼핏 존 웨인을 상기시키는 하워드는 서부극에서 보여주었던 미국의 남성상을 상징하고 있죠. 서부 개척기의 미국인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안정을 찾지 못하던 하워드는 몬태나에서 만났던 도린을 떠올리며 다시 길을 나섭니다. 도린, 그리고 아들의 존재를 찾아 몬태나의 작은 마을 뷰트로 향하는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엄마의 유골함을 든 스카이(사라 폴리), 그녀 역시 뷰트를 향하고 있었지요.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서, 짐 자무쉬의 <브로큰 플라워>가 떠오르네요. 두 영화는 같은 해(2005)에 만들어졌고 스토리도 유사합니다. 해체된 가족 복원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이죠. 하워드가 왕년에 잘 나가던 배우라면, <브로큰 플라워>의 주인공 돈 존스턴(빌 머레이)는 IT 사업에서 성공한 인물입니다. 그들은 젊어서 물질적 성공과 풍요 속에서 무책임한 삶을 살다가 뒤늦게 찾아온 존재론적 허무와 상실감에 빠져 있습니다. 더 이상 젊지도 활력이 넘치지도 않는 하워드와 돈이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를 찾아 길을 나선 것이죠. <브로큰 플라워>의 돈이 자신의 아이를 알 수 없는 가운데 영화가 끝났다면, 하워드는 아들뿐만 아니라 영특하기 짝이 없는 딸까지 얻고 있습니다. 하워드는 복도 많은 건가요.

 

 

하워드의 삶은 엉망진창입니다. 촬영장을 벗어나 뷰트까지의 여정은 또 하나의 일탈 같습니다. 때늦은 답답함과 후회는 남은 인생이 너무나 암담하여 시작되었지만, 철모르게 놀만큼 놀다가 편히 쉴 곳을 찾는 모습이랄까요. 엄마에게서 안정을 찾지 못한 그가 도린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은 너무나 뻔뻔해 보입니다. 그런데 도린마저 등을 돌린 그를 받아주는 것은 이름도 존재도 몰랐던 딸, 스카이입니다. 아빠를 만난 스카이가 하워드의 이야기도, 이복형제 얼(가브리엘 만)의 이야기도 평온한 모습으로 들어주는 모습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위대한 사랑, 가족애의 승리인가요. 하워드는 스카이에 의해 구원을 받고 얼과도 화해하지요. 방탕한 삶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가족, 부재하는 아빠가 너무나 그리웠다며 스카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얼까지 설득해 인류애를 구현합니다.

 

황량한 미국 서부를 가로질러 과거를 향해 먼 길을 왔던 하워드는 가족을 만나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30년쯤 후에 얼 또한 누군가에게 용서를 바라며 어딘가를 헤맬 것만 같은 느낌은 저만의 것일까요. 결국 위약금을 지불할 능력이 안 되는 하워드는 서터에게 붙잡혀 촬영장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상 자체가 역겨운 곳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는 서터, 세상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서터가 내민 스케줄표 위로 보이는 영화제목(The Phantom of the West)이 의미심장합니다. 자식뻘인 어린 여성과 키스를 하며 마지막 촬영을 마친 하워드, 그의 세상은 이제 달라질까요. 영화는 희망적인 결말로 끝나는 것 같지만 저는 그렇게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하워드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저 받아주는 여성들이 바뀔 뿐이죠.

 

 

첫 장면에서 인간의 눈처럼 보였던 바위산의 두 개의 구멍을 기억하시나요. 그것은 주인공 하워드의 삶이 텅 비어버렸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아름답지만 광활한 풍경은 하워드의 삶을 더욱 고립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지요. 감독은 유령 같은 하워드의 삶을 처음부터 보여주고 있었던 셈입니다. 영상과 서사가 빗겨가는 가운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얼과 스카이는 흥겨운 노래를 불러대며 도로를 질주합니다. 아버지를 향해가는 것처럼 보이죠. 그들이 지나가는 도로위의 표지판이 우리의 눈을 오래도록 사로잡습니다. 표지판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글자는 ‘DIVIDE 1, WISDOM 52’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서로가 나뉘기는 쉬운 현대의 삶 속에서 지혜의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더군요.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찌푸려졌던 눈살은 펴지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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