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필사

넝쿨
2022-05-18 23:06
557

댓글 6
  • 2022-05-19 00:21

  • 2022-05-19 08:27

    와, 넝쿨님의 필사를 연이어 만나는군요.. 저도 얼른 해야겠네요^^

  • 2022-05-19 08:46

    저도 이제 시작 합니다~~  

    한 그루가 열매를 맺으면 나머지도 모두 열매를 맺는다. 독불장군은 하나도 없다. 작은 숲의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작은 숲 전체가, 큰 숲의 작은 숲 하나가 아니라 모든 작은 숲, 카운티 전체와 주 전체가 한꺼번에 번식한다. 나무는 개체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 행동한다. 정확히 어떻게 그러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단결의 힘을 목격한다. 하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에게 일어난다. 굶어도 함께 굶고 배를 채워도 함께 채운다. 모든 번영은 상호적이다.

    와... 선물은, 상호부조는 인류의 지혜가 이나라 지구의 지혜, 생명의 지혜였네요.     (관리자 계정으로 로그인한 뚜버기가)

  • 2022-05-19 19:37

    왜 참취와 미역취는 함께 있을 때 아름다울까? 그것은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인 현상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파장이 필요하며 깊은 지각이 필요하다. 세상을 과학의 눈으로 아주 오랫동안 쳐다보면 전통 지식의 잔상이 보인다. 어쩌면 과학과 전통 지식은 서로에게 자주색과 노란색일까, 참취와 미역취일까? 세상을 더 온전히 보려면 두 지식을 다 활용해야 한다.

    물론 참취와 미역취의 문제는 내가 정말로 알고 싶었던 문제의 한 예일 뿐이다. 내가 간절히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관계의, 연결의 구조였다.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아렴풋한 끈을 보고 싶었다. 왜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지, 왜 초원의 가장 평범한 구석이 우리를 뒤흔들어 경외감에 빠지게 하는지 알고 싶었다. 

    ......

    원주민 학자 그레그 카제테는 토착적 앎의 방식에서는 존재의 네 가지 측면인 마음, 몸, 감정, 영혼으로 사물을 이해해야 비로소 이해한 것이라고 썼다. 나는 과학자로서 훈련을 시작하면서 과학이 네 가지 앎의 방식 중에서 오로지 한 가지 - 어쩌면 마음과 몸의 두 가지-만 우대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식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젊은이였기에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은 인간 존재의 한 측면이 아니라 존재 전체다. 

    과학적 세계와 토착적 세계 양쪽에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디디고 아슬아슬하게 비틀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웠다. 적어도 시도는 해봤다. 두 꽃 사이를 오가는 법을 내게 보여준 것은 벌들이었다. 벌들은 두 꽃 사이에서 꽃꿀을 마시고 꽃가루를 모았다. 이 타가 수분의 춤이야말로 새로운 종류의 지식, 세상에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쨌든 세계는 둘이 아니다. 이 선한 초록 대지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해 9월 자주색과 황금색의 짝은 호혜성을 살아냈다. 그 지혜는 하나의 아름다움이 나머지 하나의 빛을 받아 더욱 빛난다는 것이다. 과학과 예술, 물질과 정신, 토박이 지식과 서구 과학이 서로에게 참취와 미역취가 될 수 있을까? 참취와 미역취 곁에 있으면 그 아름다움은 내게 호혜성을 요구한다. 보색이 되라고, 자신이 베푼 아름다움의 대가로 너도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라고.

    p77~78

     

    ---- 아름다운 문장이다. 늘 뭔가를 열심히 하다보면 주위를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 혼자 의미를 부여할 때가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한다. 농사도 땅만을 보는게 아니다. 또한 함께 하는 사람들만 보는게 아니다. 선한 초록대지 하나가 어우러지는 하모니를 내고 있는가 자문해본다. 또한 작게는 17명이라는 사람들 사이에 흘러다니는 빛의 대가로 나는 어떤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 있을까.  

  • 2022-05-19 21:29

  • 2022-05-19 21:38

    단풍당의 달

    우리에게 위대한 설눔릉 ㄹ배푼다는 것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 선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책임은 당풍나무만 지는 것이 아니다. 나머지 절반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단풍나무의 변화에는 우리도 한몫한다. 단맛을 증류해내는 것은 우리의 일이자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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