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 다른 할배의 탄생

문탁
2023-02-15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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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할배의 탄생

-영화, <그랜토리노>(2009,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글에는 두 개의 영화가 등장하는데 둘 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1. 왜 내 눈엔 할머니들만 보이는 걸까?

 

87세에 한글을 깨쳐 “먹고 싶은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갈 때 대가 곱게 잘 가는 게 꿈이다.”라는 시를 쓴 칠곡의 박금분 할머니가 94세를 일기로 얼마 전 돌아가셨다. 신문 기사를 보니 당신 시처럼, 당신 바람처럼 가신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박 할머니 기사를 찾아 읽다가 소위 ‘권안자체’ ‘추유을체’ ‘이종희체’ ‘김영분체’ ‘이원순체’ 등 칠곡할매체의 주인공들의 짧은 글도 읽게 되었다. 폰트 개발을 위해 4개월 동안 한 명당 2,000장의 종이를 사용했다는 할머니들의 글씨는, 내용도 폰트도 따뜻하고 정감이 넘쳤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의 저자인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도 비슷했다. 거기에도 할머니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진솔하고 유머러스하게 펼쳐지고 있다. 할머니들의 삶에는 그 험난한 생애 여정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뭔가가 있다. 노년 구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야기청’의 구술작가 ‘육끼’ 역시 주름진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편안해지며, 그 주름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아카이브 같다고 말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들의 얼굴은 묘하게 아름답다. 웃을 때마다 물결처럼 움직이는 그 주름들은 길게 이어진 밭의 이랑과 고랑을 연상시킨다...나는 밭의 이랑과 고랑이 만들어내는 굴곡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머니들의 주름을 볼 때도 비슷한 안도감을 느낀다. 밭의 이랑 고랑도, 할머니들의 주름도 아주 평범하지만 들을수록 찰지고 구성진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야기들의 아카이브인 것이다. 노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래서 삶의 최전선인 주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고, 동시에 이야기가 된 삶을 만나는 것이다. (노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술로 표현하는 '이야기청'의 총괄 기획자 육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노년성찰인터뷰 7회)

 

 

 

칠곡군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은 코로나 기간 중 안부편지를 썼고, 이 글씨는 군청 공무원에 의해  폰트로 개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할아버지들은 어떨까? 할아버지들의 주름도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많은 할머니가 그러하듯 할아버지들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야기꾼이나 시인이 되어 가는 것일까? 그런데 나는 경험적으로나 자료를 통해서나 ‘이야기꾼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육끼’ 작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 구술에 참여하는 분들의 95%는 할머니라는 것이다. 할머니들이 더 장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할아버지들은 이야기하기보다는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늙어서도 ‘맨스플레인(mansplain)’*을 버리지 못하나 보다.

 

그렇다면, 경로당이나, 교회, 절 같은 커뮤니티에서도 만날 수 없고, 영화나 다큐 같은 영상물에서도 재현되고 있지 않다면, 그 많은 할아버지는 다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맨스플레인(mansplain) :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친 단어로, 어느 분야에 대해 여성들은 잘 모를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가진 남성들이 무턱대고 아는 척 설명하려고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뉴욕타임스는 2010년 맨스플레인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으며, 2014년에는 옥스퍼드 온라인 영어사전에 이 단어가 등재됐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 국내에 번역, 출간된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통해 ‘맨스플레인’이 널리 알려졌다.(네이버 지식백과)

 

 

 

2. ‘종삼(鐘三)’은 할아버지들의 성지(聖地)? 혹은 성지(性地)!

 

 

2005년경, 지식인 코뮌 <수유 너머>의 원남동 시절, 나는 이동을 위해 혹은 산책을 하느라 거의 매일 종묘 공원을 가로질러 다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수없이 많은 할아버지를 만났다. 분주한 도심 한복판에 마치 외딴섬처럼, 남성 노인들이 삼삼오오 혹은 각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그 모습은 참으로 기괴했다. 그리고 그 풍경은 10년 후에도, 심지어 코로나 정국을 지나면서도 변함이 없다.

 

 

지난 8월 18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종묘 공원을 찾았다. 이날 서울 최고기온은 섭씨 34.3도를 기록했고 폭염경보가 발령됐다... 노인 70여 명이... 나무 그늘 밑 인도에 은박 돗자리를 펴 놓고 부채질하며 바둑을 두는... 이 공터는 마치 ‘노인 전용 출입 구역’인 것처럼 청년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 중에도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모두가 남성이었다. ( “종묘 공원 노인들 “왜 그렇게 살았느냐 물어보면…””, <경향신문> 2016년10월5일)

 

 

코로나19로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던 시기였지만 아랑곳없이 더 많은 인파가 찾아왔다....백여 명의 어르신들이...신문을 보거나, 바둑을 두느라...구경꾼에게 물으니 매일 거의 비슷한 숫자가 모인다고 한다...이모(83) 어르신은 '여기 오는 사람들 대다수는 잊혀진 사람들이며, 가끔 이런 식으로 만나서 이야기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마저도 친구가 있는 이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그냥 앉아서 사람 구경이나 하다가 가는 거지’라고 체념조로 말한다. (“탑골공원 "코에 바람이라도 넣으려고 나온다"” , <이모작 뉴스> 2021년7월9일)

 

 

 

출처: 국민일보  2020-10-08

 

 

 

소위 ‘한강의 기적’의 주인공, 산업화 세대의 주역인 우리나라 7, 80대 남성 노인들은 경로당이나 교회, 노인복지회관 대신에 종묘 공원 혹은 탑골공원에 모여든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노인들이 대체로 가난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무료인 지하철로 접근할 수 있고 무료 급식이 제공된다는 등의 공간적 가성비가 첫 번째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할아버지들의 ‘종삼’ 집결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OECD 1위라는 한국의 노년 빈곤도 젠더화되어 있어, 더 가난한 것은 남성 노인이 아니라 여성 노인이기 때문이다. 2022년 현재, 국민연금 수급자 비율은 남성 54%, 여성 20%인 반면, 기초연금 수급자 비율은 남자는 60%, 여성은 73%이다. 여성 가구주 노년 세대 세 명 중 두 명은 빈곤 상태로 남성 가구주 노년 세대 빈곤율의 두 배 이상이다. (“코로나19가 부채질한 노인·여성 빈곤”, <매일노동뉴스> 2021년11월10일) 그런데도 ‘종삼’의 거리에서 할머니들을 만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할아버지들이 그곳을 찾는, 경제적 이유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인정 욕망이다. 그들은 젊었을 때 열심히 일했으나 이제 “잊힌 사람”이 되어 한편으로는 “쓸모없다”라는 좌절을, 다른 한편으로는 “기관총으로 국회의원들 다 갈기고 싶다”(위 경향신문 기사)라는 분노를 품고 산다. 그래서 이들은 동병상련을 할 수 있는 또래 집단을 찾아 그곳으로 모여든다. 덤으로 그곳에서는 자신을 여전히 심리적, 육체적으로 위로/인정해주는 여성도 값싸게 구매할 수도 있다.

 

이재용 감독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는 바로 이 탑골공원의 노년 생태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65세의 소영은 ‘빈곤의 노년화’와 ‘빈곤의 여성화’라는 중층 억압의 최일선에서 매일 매일 자기 몸을 놀려야만 연명할 수 있는 처지이다. 하지만 전쟁통에 고아가 되어 식모살이와 공장일, 그리고 동두천의 ‘양공주’를 거친 늙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여성이 밑천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폐지를 줍는 일 정도인데 2022년 KBS의 조사에 따르면 평균 하루에 열한 시간 정도 폐지를 주어 고작 9,000원 정도를 손에 쥔다고 한다.(“폐지수집노동 실태보고서 : GPS와 리어카”, <시사기획 창 373회>, 2022년5월31일) 소영의 경우, 이 정도의 돈으로는 일수를 찍어 빚을 갚아나가고, 월세를 내기에도 빡빡하다. 물론 자존심도 좀 상한다. 그녀는 폐지를 줍는 대신 ‘종삼’으로 매일 출근하여 남성 노인을 상대로 건당 3만 원 혹은 4만 원에 성(性)을 판다. 다행히 그녀는 '죽여주는 여자'라는 별명답게 단골이 꽤 있는 박카스 아줌마이다.

 

영화에서는 그녀의 단골, 세 명이 등장한다. 재우는 아내를 사별하고 급격히 삶의 의욕을 잃은 인물인데 이제 발기불능이어서 그녀의 벌이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소영은 재우를 통해 또 다른 단골의 소식을 듣는다. 연금 덕분에 주머니가 두둑했고, 늘  맞춤 양복을 입고 다녀서 ‘세비로 송(せびろ 宋)’이라 불렸던 그는 “풍을 맞아” 요양병원에 누워있다. 그는 이제 대소변 처리를 포함 아무것도 혼자 못한다. “죽을래도 혼자 못 죽어”라며 우는 그 노인을, 측은지심 가득한 소영이 농약을 통해 ‘죽여준다.’ 재우의 또 다른 친구 종수는 치매를 앓고 있다. 그는 재우에게 “내가 너도 못 알아볼 날이 올 텐데 그땐 네가 날 좀 보내주라”고 부탁하지만 재우는 그 일을 소영에게 떠넘긴다. 결국 소영은 그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여준다.’ 마지막 재우,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털어 소영을 데리고 비싼 밥을 먹고 좋은 호텔에 간 그는, 혼자 죽기 외롭다며 소영에게 동반자살을 제안하고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는다. 소영은 이제 재우까지 ‘죽여 준’ 여자가 되어버렸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스틸 컷

 

 

소영의 고단하고 쓸쓸한 일상을 별다른 수사와 신파 없이 담백하게 보여주는 <죽여주는 여자>는 많은 호평을 받았다.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는 “<죽여주는 여자>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방식으로, 타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가지고, 그들의 마지막 순간, 죽음까지 지켜보는 여성, 그 주인공의 이야기다”라고 평했고, 제20회 몬트리올판타지아국제영화제에서는 이 영화에 각본상과 여우주인공상을 안겼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에 분노했다. 나에게 이 영화는 늙은 성매매 여성이 교환관계를 떠나 “타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갖고 능동적으로 조력사를 수행하는 과정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 영화가 평생을 부인(혹은 다른 여성)에게 의존하며 살아왔던 무능력한 남성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까지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자기보다 가난하고 약한 여성에게 떠넘기는, 가부장적 권력과 위계, 공모에 대한 영화로 다가왔다. 종수는 왜 벼랑 끝에서 스스로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것일까? 재우는 왜 친구 종수의 조력사를 기꺼이 떠맡지 않는가? 또 재우는 왜 자살하는 순간까지 외롭지 않기 위해서라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소영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일까? 혼자서는 죽지도 못하는 극도의 무능력과 비겁함! 우리 사회 남성 노인들은, 우에노 치즈코처럼 말한다면 ‘싱글력’이 전무하다. 그리고 그들의 불행은 많은 부분 그것으로부터 연유한다.

 

 

3. <그랜토리노>, 다른 할배의 탄생

 

영화 <그랜토리노>(2009)의 첫 장면은 상징적이다.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장엄하게 울리는 성당의 장례식장에서 죽은 아내의 관 옆에 서 있는 주인공 월터 코왈스키는 손자들의 옷차림과 태도가 못마땅해 시종일관 인상을 쓰고 있다. 이런 아버지에 대해 뒤에 앉아 있던 아들 둘이 뒷담화한다. “애슐리(손녀) 노려보는 표정 봤어? 어머니 장례식에서도 여전하시네”, “당연하지, 아직도 50년대인줄 알고 계시는데...” 장례미사가 끝난 후 다가와서, 죽은 부인의 부탁이었다며 월터를 돌봐주겠다는 신부한테도 가서 다른 양이나 보살피라고 쏘아붙인다. 이 할아버지, 고집불통에 구태의연하고 괴팍한 꼰대가 분명하다.

 

영화 속 월터는 <죽여주는 여자>의 ‘종삼’ 노인들처럼 미국 산업화 세대의 일원이다. 그는 20대 때 한국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으며, 평생을 포드사에서 자동차를 조립하면서 살아왔다. 단골 이발소 가게의 주인장하고는 “미친 이태리 똥개”, “자린고비 후레자식” 같은 ‘싸나이’ 대화를 일삼아 주고받고, 술집에서는 친구들과 “멕시코, 유대인, 흑인이 술집을 갔는데 바텐더가 보더니 그랬지, ‘모두 냉큼 꺼져’”라는 농담을 즐긴다. 그러니까 그는 꼰대일 뿐 아니라 50년대 미국의 배타적이며 인종차별적인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는 블루칼라 출신 마초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 싱글력만큼은 만랩이다. 홀로된 아버지를 자식들은 걱정하지만, 그는 추호도 자기 집을 떠날 생각이 없다. 평생 그러했듯이 자기 집 잔디를 손질하고, 이웃의 싱크대를 고쳐주고, 친척의 병원 수발을 하고, 자신의 보물이자 프라이드인 1972년산 세단, 그랜토리노를 쓸고 닦으며, 늙은 개와 함께 발코니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일상을 지속한다. 다만 문제는 그의 동네가 너무 변해서 이제 백인 친구들은 다 죽거나 떠나고 그 자리에 “중국 놈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월터의 바로 옆집에도 잔디를 손보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베트남계 몽족이 이사를 왔다.

 

이후 영화는 몽족의 남매, 똘똘한 누나 ‘수’와 숫기 없는 그의 남동생 ‘타오’, 그리고 월터, 이 셋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건은 그 동네를 주름잡는 몽족 갱 중 한 명인 타오의 사촌이 타오에게 남자가 되기 위해 그랜토리노를 훔치라는 미션을 내리면서 시작된다. 타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일을 계기로 월터와 타오 사이에 일종의 채무 관계가 형성된다. 월터는 절도를 반성하는 타오에게 온 동네 집들을 수리시키고, 성실한 태도를 확인하자 그에게 건설 현장 일자리를 주선하고, 일에 필요한 개인 장비를 빌려주거나 사준다. 또한 그가 좋아하는 여자애와 어떻게 말문을 터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둘 사이에는 천천히 우정 비슷한 것들이 쌓여나가기 시작한다.

 

 

 

영화 <그랜토리노> 스틸 컷

 

 

그런데 문제는 몽족 갱들이 타오를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타오의 장비를 빼앗고 폭행하고 뺨에 담배빵을 놓는다. 분노한 월터는 몽족 갱들 집에 쳐들어가 총을 들이대면서 타오를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이 부분에서 월터는 영락없는 더티 해리였다^^) 돌아온 것은 타오 집이 갱단에 의해 습격당하고, 타오의 누이, 수가 그들에게 납치당해 끔찍한 성폭력을 당하는 일이었다. 월터는 한국전 당시 항복한 소년병을 살해한 일이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 다시 자신의 성급함과 무책임함 때문에 수와 타오 남매가 위험에 처했다. 월터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게다가 타오는 격렬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폭력은 폭력을 부를 뿐 아닐까? 월터는 이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일단 타오를 진정시켜 집으로 돌려보낸 후, 무심하게 잔디를 깎고 목욕하고 담배를 피우고 이발하고 양복을 맞추고 세금 체납 등 소소한 일들에 대해 묵은 고해를 한다. 그리고 타오를 따돌리고 홀로 갱들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계획대로 갱들의 난사를 유인하여 그들을 감옥으로 보낸다. 월터가 치른 대가는 그의 목숨이었다. 그는 제 죽음을 통해 수와 타오, 이 두 명의 아시아계 소년의 삶을 지켰고, 수십 년 전 한국전에서의 실수에 대해 속죄했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구원했다. 김도훈 평론가의 말처럼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근사한 퇴장”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 내 십 대 시절의 우상.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미국 공화당원이자 정통 보수주의자이다. 하여 나의 두 번째 질문. 어떻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주의자인 채 저런 위엄과 관용을 갖춘 ‘늙은 더티 해리’가 될 수 있었을까? 그의 보수주의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4. “옹호를 너머, 등 떠밀려서 그랬다는 것은 핑계다”

 

영국 휘그당 소속의 젊은 자유주의자 에드먼드 버크는 당대 프랑스 혁명에 경악하였다. 그에게 있어 프랑스 혁명은 “이 세상에 벌어진 일 중 가장 경악스러운 일”, “경박함과 잔인함이 빚어내고, 온갖 종류의 죄악이 온갖 어리석은 짓과 더불어 뒤범벅이 된 괴상한” 혼란에 불과했다.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한길사, p49) 그리고 그는 그것이 혁명에 대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접근, 사회를 이념에 따라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기하학적 설계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형이상학을 많이 가졌는데, 그것은 나쁜 형이상학이다. 기하학을 많이 가졌지만 나쁜 기하학을 가진 것이다. 비례산술을 많이 가졌지만 잘못된 비례산술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형이상학, 기하학, 산술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정확하다고 해도, 그들의 계획에서 그 모든 부분이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좀 더 그럴듯하고 구경거리가 될 뿐인 환상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들이 사람들을 대규모로 재편하는 일에서, 도덕과 관련된 어떤 것이나 정치와 관련된 어떤 것을 참조한 바는 무엇이 되었든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인간의 관심사, 행위, 정열, 이익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맛이 없다” (위의 책, p289)

 

 

한마디로 혁명에는 이념이 있을 뿐 살아있는 구체적 인간, 인격과 애정을 나누는 구체적 인간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의 전통과 관습에는 인간이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지혜가 있으며 우리는 그런 사회의 일시적 거주자에 불과하므로 그것들을 잘 보살피고 늘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랜 규약과 모델들은 바꾸더라도 천천히 신중하게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갑자기 공자님과 맹자님이 떠오른다^^) 나는 버크의 이 오래된 보수주의 교의가 영화에서는 ‘자기의 공간을 스스로 돌보고 지키는 일’, ‘자기의 사람(공동체)을 힘껏 돌보고 지키는 일’, 그리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는 단어 뜻 그대로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보존하는 것, 지키기 위해 돌보고 가꾸는 것을 의미한다.

 

“어르신과 꼰대 사이, 가난한 남성성의 시원을 찾아”라는 긴 부제가 붙어있는 최현숙의 『할배의 탄생』은 김용술, 이영식이라는 두 명의 칠십대 남성에 대한 인터뷰집이다. 기본적으로 두 남자의 삶을 옹호한다는 최현숙도 후기에서 “옹호를 너머, 등 떠밀려 그랬다는 것은 핑계다”라며 그들의 성찰 없는 삶에 대해 지적한다.

 

 

김용술은 한편으로는 소설 <아큐정전>의 주인공 아큐처럼 생존본능과 정신 승리와 자가당착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꺼삐딴 리처럼 기회주의적 변신과 위선이 보인다. 사실 우리 모두 그렇다. 김용술이 말하는 ‘세상 이치’, ‘남들이 하는 식으로’, ‘상식적으로’, ‘다 그렇게 돌아가는 거’, ‘그때는 다 그랬어.’ 등에 멈칫한다면, 우리 모두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아큐나 꺼삐탄 리의 시대를 지나고 김용술의 한창나이도 지난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 모두 더하면 더했지 덜하고는 살 방법이 없다....그렇더라도 그게 다는 아니다. 살아남으라 그랬고, 있는 것마저 뺏길까 봐 그랬고, 악의 없이 남들 하는 만큼 했더라도, 세상에 침묵하고 공조하며 숟가락을 얹어왔다...사람은 모두 자신의 등을 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등 떠밀려 그랬다는 말은 핑계다 (최현숙, 『할배의 탄생』, p141)

 

 

 

 

 

'종삼'의 할배들도 늙은 더티 해리가 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우리 부모 세대들, 탑골공원 할배와 광화문 태극기부대를 넘어 이제 종일 유튜브와 종편 뉴스를 시청하면서 그들의 혐오 선동에 자신의 울분을 포개는 그분들의 삶은 아마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는 그들과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민주화 세대인 우리는 나이듦에 대한 다른 비전을 갖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내 남자 사람 친구들이  '다른 할배'로 살아가게 될까? 그것을 몹시 염원하지만, 여전히 이념은 과잉이고 손끝은 무딘 내 또래의 수많은 남성을 떠올리면 사태는 별로 낙관적이지 않다. 싱글력 없고 살림에 젬병인 그들의 노년을, 그리하여 나는 진심으로, 몹시, 근심하고 있는 중이다.

 

 

 

 

 

 

 

 

 

 

 

 

 

댓글 5
  • 2023-02-15 13:35

    노후 대비는 ‘이념 디톡스’와 ‘야무진 손끝’으로 정했습니다! ㅎㅎ

  • 2023-02-15 18:30

    '싱글력 없고 살림에 젬병인 그들의 노년을,
    그리하여 나는 진심으로, 몹시, 근심하고 있는 중이다.'

    흐엑!!! 뜨끔 !!!

  • 2023-02-16 09:14

    손끝이 야무진 하지만 보수적인 싱글 할배 한 분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보수적이라고 뭐라고만 할 건 아니네요. 그분의 싱글력을 높이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하나둘 늘어나는 주름을 ‘소듕히’ 여기기로! ㅋ 이야기 아카이브로 자글자글한 할매를 꿈꿔봅니다~~ 칠곡할매체 애용하고 있어요. ^^

  • 2023-02-17 14:38

    최현숙님의 문장, 마음을 콕콕 지르네요, 샘^^ 잘 읽었습니다~

  • 2023-03-18 22:53

    ㅎㅎㅎㅎ잘 읽었습니다!!!
    도서관에 가보면 어르신이 꽤 계신데, 거의 다 남자 어르신들인게 특이하대요.
    뭘 보시는 지는, 다들 제각각 입니다만, 가끔 온라인으로 쪼금 부적절한 걸 보시는 분들도^^;;;

인문약방 에세이
    “감정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 캐럴라인은 사안의 경중과 상관없이 달아나기보다 오히려 문제에 다가가는 사람이었다. 해결이 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감정의 여파로 아무런 비난이나 앙금을 남기지 않았다. 내게도 비슷한 문제해결 본능이 있었다. 침묵과 거리두기가 정면충돌보다 훨씬 더 해롭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수년 동안 우리 사이에 해결하지 못한 부유물이 남지 않았던 것은 이런 공존 능력 덕분이었다.” (게일 콜드웰 , 먼길로 돌아갈까?, 문학동네, 2021, p51)       1. 30년 지기, K   감정의 여파로 비난이나 앙금, 부유물이 남지 않는 관계라니...이 문장으로 나는 오랜 친구인 K를 떠올렸다. K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로 지금껏 근거리에서 교류를 이어가는 사이다. 공통의 관심사로 끊임없이 이어지던 우리의 대화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끊어지는 시간들이 생겼고 나는 K가 내 인생에서 소중한 만큼 어떻게 우리의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런 고민으로 두 번째 글쓰기는 K와의 “이 우정이 잘 되어가고 있나”라는 글을 썼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와 드러나는 것 말고도 생각해 보는 건 뭘까 라는 질문이 내게 던져졌다.     요즘 부쩍 위스키에 관심이 많아진 난 베트남여행을 하는 K에게 면세 위스키를 부탁했고 귀국 후 동네 근처에서 만났다. 중학교 물리교사인 K는 방학이라 적당히 느긋하고 편안한 모습이었고 나도 바쁜 시기가 아니라 여유로웠다. 동네 횟집의 평일 점심 특선에 감탄하며 이번 여름휴가지인 강원도에서 있었던 인상 깊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감정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 캐럴라인은 사안의 경중과 상관없이 달아나기보다 오히려 문제에 다가가는 사람이었다. 해결이 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감정의 여파로 아무런 비난이나 앙금을 남기지 않았다. 내게도 비슷한 문제해결 본능이 있었다. 침묵과 거리두기가 정면충돌보다 훨씬 더 해롭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수년 동안 우리 사이에 해결하지 못한 부유물이 남지 않았던 것은 이런 공존 능력 덕분이었다.” (게일 콜드웰 , 먼길로 돌아갈까?, 문학동네, 2021, p51)       1. 30년 지기, K   감정의 여파로 비난이나 앙금, 부유물이 남지 않는 관계라니...이 문장으로 나는 오랜 친구인 K를 떠올렸다. K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로 지금껏 근거리에서 교류를 이어가는 사이다. 공통의 관심사로 끊임없이 이어지던 우리의 대화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끊어지는 시간들이 생겼고 나는 K가 내 인생에서 소중한 만큼 어떻게 우리의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런 고민으로 두 번째 글쓰기는 K와의 “이 우정이 잘 되어가고 있나”라는 글을 썼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와 드러나는 것 말고도 생각해 보는 건 뭘까 라는 질문이 내게 던져졌다.     요즘 부쩍 위스키에 관심이 많아진 난 베트남여행을 하는 K에게 면세 위스키를 부탁했고 귀국 후 동네 근처에서 만났다. 중학교 물리교사인 K는 방학이라 적당히 느긋하고 편안한 모습이었고 나도 바쁜 시기가 아니라 여유로웠다. 동네 횟집의 평일 점심 특선에 감탄하며 이번 여름휴가지인 강원도에서 있었던 인상 깊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새봄 2023.09.03 조회 170
인문약방 에세이
두려움_임신의 경험   ‘이 제도(‘제도로서의 모성’)가 빚어낸 가장 기본적이고 당황스러운 모순은 우리 여성들을 우리 몸 안에 가둠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몸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130쪽, 에이드리언 리치)      30살에 첫 임신을 했다. 입덧으로 시작된 임신 기간은 나른함과 졸림, 움직임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낯설고 불편한 시기였고, 임산부인 나에게 몇 가지 제약이 따라왔다. ’건강한 아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임산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술, 카페인, 흡연-이것을 어길 경우 태아에게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2021. 헬스조선) 와 같은 문구들의 홍수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술‘과 ’담배‘, ’커피‘를 즐길 수 없었다. 한동안 피웠던 담배는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남편 때문에 끊은 뒤였지만 술과 커피는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음에도 가끔씩 아쉬웠다. 어느 날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던 중 직원이 건넨 믹스커피를 무심코 받아서 마시려는데 옆에 앉아있던 남편이 갑자기 화를 내며 커피를 버리라고 했다. 남편의 관점에서 나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먹는 부주의한 여성(임산부)이었고, 결국 나는 커피를 마시지 못한 채 버려야만 했다.      4~5개월쯤에는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산전 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남편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산부인과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산전 검사 결과 일정 확률의 가능성으로 ’태아 기형‘의 위험성이 발견되었다는 것과 양수 검사를 해 정확한 확인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양수 검사는 선택 사항이었다. 검사를 받는다는 의미는 몸속의 태아가 ’장애‘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두려움_임신의 경험   ‘이 제도(‘제도로서의 모성’)가 빚어낸 가장 기본적이고 당황스러운 모순은 우리 여성들을 우리 몸 안에 가둠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몸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130쪽, 에이드리언 리치)      30살에 첫 임신을 했다. 입덧으로 시작된 임신 기간은 나른함과 졸림, 움직임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낯설고 불편한 시기였고, 임산부인 나에게 몇 가지 제약이 따라왔다. ’건강한 아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임산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술, 카페인, 흡연-이것을 어길 경우 태아에게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2021. 헬스조선) 와 같은 문구들의 홍수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술‘과 ’담배‘, ’커피‘를 즐길 수 없었다. 한동안 피웠던 담배는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남편 때문에 끊은 뒤였지만 술과 커피는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음에도 가끔씩 아쉬웠다. 어느 날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던 중 직원이 건넨 믹스커피를 무심코 받아서 마시려는데 옆에 앉아있던 남편이 갑자기 화를 내며 커피를 버리라고 했다. 남편의 관점에서 나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먹는 부주의한 여성(임산부)이었고, 결국 나는 커피를 마시지 못한 채 버려야만 했다.      4~5개월쯤에는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산전 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남편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산부인과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산전 검사 결과 일정 확률의 가능성으로 ’태아 기형‘의 위험성이 발견되었다는 것과 양수 검사를 해 정확한 확인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양수 검사는 선택 사항이었다. 검사를 받는다는 의미는 몸속의 태아가 ’장애‘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천유상 2023.09.03 조회 100
인문약방 에세이
    따스함과 자유   『먼길로 돌아갈까?』(게일 콜드웰, 문학동네, 2023)는 게일 콜드웰이 마흔 둘에 폐암으로 죽은 캐럴라인 냅과의 우정을 기억하며 쓴 책이다. 그들은 우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말도 추가하고 싶다. 이들의 사랑은 희생, 인내, 고통 보다 자기 긍정, 성장, 자유와 연결된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5,6년이었다. 둘 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들이 만들어낸 사랑과 우정의 경이로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게일은 친밀한 관계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자연스러운 관계가 주는 따스함과 오롯한 자유로움 둘 다를 원했던 그녀는 따스한 관계가 만족되면 자유를 잃었고, 자유를 얻었다 싶으면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처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캐럴라인도 게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자신의 자율을 침해 받는 것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따스함과 자유가 공존하는 관계를 구현해낸다.       게일과 캐럴라인은 닮은꼴이다. 게일은 소아마비를 이겨냈고, 캐럴라인은 거식증의 물살을 헤쳐 나왔다. 두 여성은 알코올중독이라는 자기 파괴의 늪에서도 과감하게 살아나와 존재를 파산시키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개를 통해서 터득하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공통적으로 술이든 사람이든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과 자립을 지켜내기 위해, 그런 힘을 지니기 위해 분투했던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이 공유한 명제는 “삶은 고되고 때로 가장 치열한 싸움은 고독하게 치러야 하지만, 두려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상처를 입고 나올지라도 여전히 숨을 쉴 수 있다는 믿음”(119쪽)이었다.       이런...
    따스함과 자유   『먼길로 돌아갈까?』(게일 콜드웰, 문학동네, 2023)는 게일 콜드웰이 마흔 둘에 폐암으로 죽은 캐럴라인 냅과의 우정을 기억하며 쓴 책이다. 그들은 우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말도 추가하고 싶다. 이들의 사랑은 희생, 인내, 고통 보다 자기 긍정, 성장, 자유와 연결된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5,6년이었다. 둘 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들이 만들어낸 사랑과 우정의 경이로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게일은 친밀한 관계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자연스러운 관계가 주는 따스함과 오롯한 자유로움 둘 다를 원했던 그녀는 따스한 관계가 만족되면 자유를 잃었고, 자유를 얻었다 싶으면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처리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캐럴라인도 게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자신의 자율을 침해 받는 것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따스함과 자유가 공존하는 관계를 구현해낸다.       게일과 캐럴라인은 닮은꼴이다. 게일은 소아마비를 이겨냈고, 캐럴라인은 거식증의 물살을 헤쳐 나왔다. 두 여성은 알코올중독이라는 자기 파괴의 늪에서도 과감하게 살아나와 존재를 파산시키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개를 통해서 터득하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공통적으로 술이든 사람이든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과 자립을 지켜내기 위해, 그런 힘을 지니기 위해 분투했던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이 공유한 명제는 “삶은 고되고 때로 가장 치열한 싸움은 고독하게 치러야 하지만, 두려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상처를 입고 나올지라도 여전히 숨을 쉴 수 있다는 믿음”(119쪽)이었다.       이런...
윤아 2023.08.29 조회 168
인문약방 에세이
    “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 /단어들이 지도이다/ 난 이미 행해진 파괴의 정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보물들을 보러왔다/<중략>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것은 잔해이지 잔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체일뿐 그것을 둘러싼 신화가 아니다”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6쪽)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는 그녀의 작품 활동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다. 1960년대 서구 가부장제 사회를 ‘난파선’으로 명명하며 위험한 심해에 들어가 그녀가 응시하고자 한 ‘잔해’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 속의 자아는 불편한 잠수복을 입고 산소마스크를 달고 내려가 검은색으로 변한 바다 속으로 몸을 옯겨 놓는다. 그곳에는 중력이 없고 산소가 없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권력이 없고 너와 내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스트레스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익사자의 시체, 고장난 나침반, 물먹은 일지. 그곳에서는 이 모두가 그녀 자신이며, 우리이다. 여기에서 길어올린 ‘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레즈비언이며 가부장제에 부역한 이혼녀이고 세 아이의 엄마였던 미국여성 시인인 그녀의 글속에서 자유롭게 횡단하고 있다. 그녀의 에세이 <뿌리에서 갈라지다>와 <피,빵 그리고 시>에서는 자신을 손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 제치는 그녀의 소심함과 용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유대인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토큰이 되고자 했던 그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수치스럽지만 꼭 써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표현된다. “내가 유대인인 것은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까”(288쪽) , “유대인으로서 나의 양가감정이 대체 어디서...
    “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 /단어들이 지도이다/ 난 이미 행해진 파괴의 정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보물들을 보러왔다/<중략>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것은 잔해이지 잔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체일뿐 그것을 둘러싼 신화가 아니다”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 6쪽)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는 그녀의 작품 활동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다. 1960년대 서구 가부장제 사회를 ‘난파선’으로 명명하며 위험한 심해에 들어가 그녀가 응시하고자 한 ‘잔해’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 속의 자아는 불편한 잠수복을 입고 산소마스크를 달고 내려가 검은색으로 변한 바다 속으로 몸을 옯겨 놓는다. 그곳에는 중력이 없고 산소가 없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권력이 없고 너와 내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스트레스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익사자의 시체, 고장난 나침반, 물먹은 일지. 그곳에서는 이 모두가 그녀 자신이며, 우리이다. 여기에서 길어올린 ‘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레즈비언이며 가부장제에 부역한 이혼녀이고 세 아이의 엄마였던 미국여성 시인인 그녀의 글속에서 자유롭게 횡단하고 있다. 그녀의 에세이 <뿌리에서 갈라지다>와 <피,빵 그리고 시>에서는 자신을 손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 제치는 그녀의 소심함과 용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유대인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토큰이 되고자 했던 그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수치스럽지만 꼭 써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표현된다. “내가 유대인인 것은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까”(288쪽) , “유대인으로서 나의 양가감정이 대체 어디서...
꿈틀이 2023.08.29 조회 69
인문약방 에세이
      지난 시간 세미나에서 현모양처와 관련된 나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셨다. 그때는 단순히 현모양처가 아이 옷을 잘 입히는 게 아니지 않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난 우리 아이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엄마이고 애를 자율적으로 키웠다고 자부하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내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난 왜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을까? 노력도 안 하면서 왜 그토록 줄기차게 애기하고 다닐까?       난 기억력이 안 좋은 편임에도 기억나는 몇 가지들은 음식에 대한 것이 많다. 엄마 심부름으로 아빠 드릴 보신탕을 사러 심부름 하던 기억. 비린 것을 싫어하는 엄마가 생선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해주시던 생선조림. 가족이 많다 보니 항상 음식은 부족했고 엄마음식은 너무 맛있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엥겔지수는 상당했을 것이다. 애들은 서로서로 같이 잘 켰고 엄마는 때에 맞춰서 밥을 해주는 것으로도 엄마의 소임을 다 하신건데 거기다 돈까지 벌어오셨다. 물론 엄마의 고단한 생활은 어린 자식들에게 폭발한 적이 많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명절에도 엄마의 주방은 빛을 발한다. 육형제의 장남인 아버지 형제들과 그 가족까지 모두 모이면 30명은 족히 되는 대가족의 음식준비의 대장인 엄마는 작은 엄마들을 지휘하며 요리를 만드시고 그 모든 행사가 끝나시면 그것으로 아빠에게 유세를 하셨다. 나이가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엄마는 아빠의 밥을 챙겨주시는 것으로 아내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신다. 배우자가 정말 원하는 게 무언지 궁금하지도 묻지도 않으신다. 엄마에게는 가족을 위해 차리는...
      지난 시간 세미나에서 현모양처와 관련된 나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셨다. 그때는 단순히 현모양처가 아이 옷을 잘 입히는 게 아니지 않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난 우리 아이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엄마이고 애를 자율적으로 키웠다고 자부하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내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난 왜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을까? 노력도 안 하면서 왜 그토록 줄기차게 애기하고 다닐까?       난 기억력이 안 좋은 편임에도 기억나는 몇 가지들은 음식에 대한 것이 많다. 엄마 심부름으로 아빠 드릴 보신탕을 사러 심부름 하던 기억. 비린 것을 싫어하는 엄마가 생선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해주시던 생선조림. 가족이 많다 보니 항상 음식은 부족했고 엄마음식은 너무 맛있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엥겔지수는 상당했을 것이다. 애들은 서로서로 같이 잘 켰고 엄마는 때에 맞춰서 밥을 해주는 것으로도 엄마의 소임을 다 하신건데 거기다 돈까지 벌어오셨다. 물론 엄마의 고단한 생활은 어린 자식들에게 폭발한 적이 많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명절에도 엄마의 주방은 빛을 발한다. 육형제의 장남인 아버지 형제들과 그 가족까지 모두 모이면 30명은 족히 되는 대가족의 음식준비의 대장인 엄마는 작은 엄마들을 지휘하며 요리를 만드시고 그 모든 행사가 끝나시면 그것으로 아빠에게 유세를 하셨다. 나이가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엄마는 아빠의 밥을 챙겨주시는 것으로 아내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신다. 배우자가 정말 원하는 게 무언지 궁금하지도 묻지도 않으신다. 엄마에게는 가족을 위해 차리는...
시소 2023.08.29 조회 75
인문약방 에세이
    출생의 비밀 잠결에 엄마와 외할머니의 말소리를 들었다. “남의 자식 키우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억울하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곧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잠결이지만 나는 놀랐다. ‘이런 일이 우리 집에? 나에게?’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가 가출을 했다. 언니네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엄마에게 “계모라서 애한테 너무 신경 안 쓴 거 아니냐고” 모진 소리를 하고 갔다. 살기 바빠서 내 새끼고 남의 새끼고 간에 건사하지 못한 건 맞지만, 본인 또래의 여자에게 계모소리 들은 것을 엄마는 분해했다. “지가 뭐라고!” 언니는 가출청소년이 되었고, 우리 집은 문제아가 있는 문제 가정이 되었다. 당시는 밤 9시만 되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계몽적’ 멘트가 나왔던 시절이다. 뉴스에서는 ‘문제 청소년은 문제 가정에서 나온다’는 캠페인을 자주 내보냈다. 나는 우리 집의 문제가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보다는 이걸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우선이었다.     언니의 가출은 계모 때문일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한다. 그러나 언니네 담임선생님 말고 언니의 가출을 엄마와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계모라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 언니는 가출했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이다. 가난과 돌봄의 공백은 이어진 문제이고,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언니는 격렬하게 맨몸으로 겪어냈다. 언니의 가출은 두 달 정도 지속되었다. 돌아왔지만 우리와 살지 않고 혼자 사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거기서 학교에 다녔는데, 몇...
    출생의 비밀 잠결에 엄마와 외할머니의 말소리를 들었다. “남의 자식 키우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억울하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곧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잠결이지만 나는 놀랐다. ‘이런 일이 우리 집에? 나에게?’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가 가출을 했다. 언니네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고, 엄마에게 “계모라서 애한테 너무 신경 안 쓴 거 아니냐고” 모진 소리를 하고 갔다. 살기 바빠서 내 새끼고 남의 새끼고 간에 건사하지 못한 건 맞지만, 본인 또래의 여자에게 계모소리 들은 것을 엄마는 분해했다. “지가 뭐라고!” 언니는 가출청소년이 되었고, 우리 집은 문제아가 있는 문제 가정이 되었다. 당시는 밤 9시만 되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계몽적’ 멘트가 나왔던 시절이다. 뉴스에서는 ‘문제 청소년은 문제 가정에서 나온다’는 캠페인을 자주 내보냈다. 나는 우리 집의 문제가 걱정스러웠지만, 그것보다는 이걸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우선이었다.     언니의 가출은 계모 때문일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한다. 그러나 언니네 담임선생님 말고 언니의 가출을 엄마와 연관 지어 생각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계모라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 언니는 가출했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이다. 가난과 돌봄의 공백은 이어진 문제이고,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언니는 격렬하게 맨몸으로 겪어냈다. 언니의 가출은 두 달 정도 지속되었다. 돌아왔지만 우리와 살지 않고 혼자 사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거기서 학교에 다녔는데, 몇...
겸목 2023.08.29 조회 100
먼불빛의 웰컴 투 60
      내가 아니 에르노의 책과 만난 건 작년 2022년이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그녀의 모든 책이 다시 주목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사회학적 글쓰기 방식은 독특했다.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울 정도로 고스란히 글로서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그 사회의 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고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정면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경했고, 글도 낯설었고, 문장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뜻밖에도 아니 에르노와 닮기도 한, 다르기도 한 내가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고, 게시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늘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분명한 목적과 자기 사명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쓸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사회적 해석과 만나 더 많은 보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나 관습화된 몸, 인식, 타인에 대한 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글을 만들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내가 아니 에르노의 책과 만난 건 작년 2022년이었다. 그즈음 공교롭게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그녀의 모든 책이 다시 주목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사회학적 글쓰기 방식은 독특했다.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울 정도로 고스란히 글로서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결국 그 사회의 젠더 문제,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고발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솔직하게. 정면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도 생경했고, 글도 낯설었고, 문장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뜻밖에도 아니 에르노와 닮기도 한, 다르기도 한 내가 보였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자유롭게 쓰고, 게시하고, 함께 공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자기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늘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내밀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분명한 목적과 자기 사명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쓸 수 있는 용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사회적 해석과 만나 더 많은 보편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너무나 관습화된 몸, 인식, 타인에 대한 의식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적당히 타협하는 글을 만들게 한다.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먼불빛 2023.08.24 조회 215
인문약방 에세이
    ‘품위’ 있는 학교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기     모로       초등학교 4학년인 나의 아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다. 고기능 자폐라고도 부른다. 인지나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으나 사회성만 떨어지는 경우다. 거기에 상위 1%의 지능을 가진 영재이기도 하고, ADHD가 있고, 간혹 틱도 보인다. 이렇게 동시에 두 개의 특성을 가진 것을 2E(twice exceptional)라고도 하는데, 두 번의 예외라는 뜻이다. 2E들은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영재 집단에서는 비슷한 관심사를 만날 수 있지만, 소통이 잘되지 않는다. 장애 집단에서의 반복적인 행동 수정 교육은 흥미를 떨어트린다. 아이들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커서, 자랄수록 정신적인 문제가 두드러진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난관의 연속이었다. 학교를 빠지는 건 기본, 단체 운동이나 학원은 다녀보지도 못했다.   학기 초에 공개수업을 했는데, 교실에서 만난 아이는 내 걱정보다 많이 자라있었다. 물론 수업 중간에 큰 소리로 “엄마 왔어?” 인사를 하고, 심지어 뭔가를 보여주겠다며 뒤에 서 있는 나에게 걸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지시하는 것을 수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반 친구들의 태도였다. 아들은 다행히 여러 가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복이 있다. 쉬는 시간에도 몇몇 아이들이 몰려와 이것저것 말을 걸어주고, 대답을 안 하는 아들을 위해 서로 주고받는 손 하트를 날렸다.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별로 구성된 팀원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양 우리 아이를 전담 마크하고 있었고,...
    ‘품위’ 있는 학교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기     모로       초등학교 4학년인 나의 아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다. 고기능 자폐라고도 부른다. 인지나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으나 사회성만 떨어지는 경우다. 거기에 상위 1%의 지능을 가진 영재이기도 하고, ADHD가 있고, 간혹 틱도 보인다. 이렇게 동시에 두 개의 특성을 가진 것을 2E(twice exceptional)라고도 하는데, 두 번의 예외라는 뜻이다. 2E들은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영재 집단에서는 비슷한 관심사를 만날 수 있지만, 소통이 잘되지 않는다. 장애 집단에서의 반복적인 행동 수정 교육은 흥미를 떨어트린다. 아이들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커서, 자랄수록 정신적인 문제가 두드러진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난관의 연속이었다. 학교를 빠지는 건 기본, 단체 운동이나 학원은 다녀보지도 못했다.   학기 초에 공개수업을 했는데, 교실에서 만난 아이는 내 걱정보다 많이 자라있었다. 물론 수업 중간에 큰 소리로 “엄마 왔어?” 인사를 하고, 심지어 뭔가를 보여주겠다며 뒤에 서 있는 나에게 걸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지시하는 것을 수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반 친구들의 태도였다. 아들은 다행히 여러 가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복이 있다. 쉬는 시간에도 몇몇 아이들이 몰려와 이것저것 말을 걸어주고, 대답을 안 하는 아들을 위해 서로 주고받는 손 하트를 날렸다.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별로 구성된 팀원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양 우리 아이를 전담 마크하고 있었고,...
문탁 2023.07.20 조회 178
인문약방 에세이
      좋은 삶을 위한 ‘정치’가 바로 ‘정의’이다   둥글레     인문학을 공부하며 친구들과 공동체적 삶을 도모하고 가끔이지만 연대하며 살고 있다. 그럭저럭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미나에서 읽는 책들이 늘어날수록 내 삶이 안이하게 느껴진다. 나의 ‘그럭저럭 좋은 삶’은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구성이 되었을까? 나는 전문직을 가진 이성애 비혼 여성 한국인이다. 중산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빈곤층도 아니다. 비노인이며 비장애인이다. 나의 사회적 정체성은 비혼 여성으로 차별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지만 전문직 이성애 비장애인 비노인 한국인으로 차별을 하는 쪽에도 서 있다. 차별을 받는 쪽에만 있었다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반대쪽의 삶의 지분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생각은 『동자동 사람들』(2021, 빨간소금)을 읽고 뼈아프게 다가왔다. 작가는 “사회 전체가 누리는 행복과 물질적 풍요는 사회의 한구석에 버려진 채 가난, 고통, 질병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자동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버려졌다고 결론 내린다. 작가는 그들에게 개입된 돌봄들(주로 복지나 자원봉사 형태)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회적 버려짐’에서 찾는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차이의 정치와 정의』(2017, 모티브북)에서 천착한 정의(justice)와 정치의 문제도 『동자동 사람들』에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결이 같다. 그녀는 분배적 패러다임에 묶인 정의를 그 너머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정의의 조건이자 요소로 민주주의(정치)의 쇄신을 제안한다.     동자동 쪽방촌         분배 패러다임이 놓치고 있는 구조적 부정의   기존의 정의 담론을...
      좋은 삶을 위한 ‘정치’가 바로 ‘정의’이다   둥글레     인문학을 공부하며 친구들과 공동체적 삶을 도모하고 가끔이지만 연대하며 살고 있다. 그럭저럭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미나에서 읽는 책들이 늘어날수록 내 삶이 안이하게 느껴진다. 나의 ‘그럭저럭 좋은 삶’은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구성이 되었을까? 나는 전문직을 가진 이성애 비혼 여성 한국인이다. 중산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빈곤층도 아니다. 비노인이며 비장애인이다. 나의 사회적 정체성은 비혼 여성으로 차별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지만 전문직 이성애 비장애인 비노인 한국인으로 차별을 하는 쪽에도 서 있다. 차별을 받는 쪽에만 있었다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반대쪽의 삶의 지분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생각은 『동자동 사람들』(2021, 빨간소금)을 읽고 뼈아프게 다가왔다. 작가는 “사회 전체가 누리는 행복과 물질적 풍요는 사회의 한구석에 버려진 채 가난, 고통, 질병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자동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버려졌다고 결론 내린다. 작가는 그들에게 개입된 돌봄들(주로 복지나 자원봉사 형태)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회적 버려짐’에서 찾는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차이의 정치와 정의』(2017, 모티브북)에서 천착한 정의(justice)와 정치의 문제도 『동자동 사람들』에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결이 같다. 그녀는 분배적 패러다임에 묶인 정의를 그 너머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정의의 조건이자 요소로 민주주의(정치)의 쇄신을 제안한다.     동자동 쪽방촌         분배 패러다임이 놓치고 있는 구조적 부정의   기존의 정의 담론을...
문탁 2023.07.20 조회 70
인문약방 에세이
      나의 곤경노트 - 법이 폭력이라고?   무사     법이 무사 폭력이우까?!   폭력을 응징하는 법이 폭력이라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람.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폭력을 휘둘러 왔다는 말이야? 나는 강하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18년 전 기억을 소환했다. 2005년 가을이었고, 입대한 지 3년차였다. 관할 지역 남성 지휘관이 여성 장교를 강제추행한 사건이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피해자 조사 입회 임무를 맡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뭐라도 해주려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그 후배는 물었다. “선배가 여기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날돕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냐” 고. 나는 조사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2차 피해를 막고 있다고 답했다. 가해자는 처벌되었고, 후배는 전역했다. 그리고 다른 유사한 사건들에 치어 나는 곧 이 일을 잊었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타인에 대하여 부당하거나 불법한 방법으로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법에 따른 힘의 행사(체포, 구속, 사형 등)나 법이 허용한 힘의 행사(정당방위 등)는 법질서를 위반하는 폭력에 대한 합법적인 억압에 해당한다.(<법률학 사전>, ‘폭력’ 편) 이처럼 법과 폭력은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알고 있던 나로서는 법과 폭력이 별개가 아니라고 말하는 버틀러의 주장 앞에 멈칫했다. 내가 수 십 년간 공부하고 다뤄 왔던 법에는 나름 양심이 있고, 일부 감정도 있다고 믿어 왔다. 피해 전부를 보상 받거나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법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경우도 많았다. 법은 단순히 법전 안의 글자만은 아니다. 판결문에 자주 등장하는 ‘일반인의 법감정’이나 판사가...
      나의 곤경노트 - 법이 폭력이라고?   무사     법이 무사 폭력이우까?!   폭력을 응징하는 법이 폭력이라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람. 그렇다면 내가 그동안 폭력을 휘둘러 왔다는 말이야? 나는 강하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18년 전 기억을 소환했다. 2005년 가을이었고, 입대한 지 3년차였다. 관할 지역 남성 지휘관이 여성 장교를 강제추행한 사건이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피해자 조사 입회 임무를 맡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뭐라도 해주려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그 후배는 물었다. “선배가 여기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날돕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냐” 고. 나는 조사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2차 피해를 막고 있다고 답했다. 가해자는 처벌되었고, 후배는 전역했다. 그리고 다른 유사한 사건들에 치어 나는 곧 이 일을 잊었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타인에 대하여 부당하거나 불법한 방법으로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법에 따른 힘의 행사(체포, 구속, 사형 등)나 법이 허용한 힘의 행사(정당방위 등)는 법질서를 위반하는 폭력에 대한 합법적인 억압에 해당한다.(<법률학 사전>, ‘폭력’ 편) 이처럼 법과 폭력은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알고 있던 나로서는 법과 폭력이 별개가 아니라고 말하는 버틀러의 주장 앞에 멈칫했다. 내가 수 십 년간 공부하고 다뤄 왔던 법에는 나름 양심이 있고, 일부 감정도 있다고 믿어 왔다. 피해 전부를 보상 받거나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법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경우도 많았다. 법은 단순히 법전 안의 글자만은 아니다. 판결문에 자주 등장하는 ‘일반인의 법감정’이나 판사가...
문탁 2023.07.20 조회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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