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책 04 - <병원이 병을 만든다> 필연과 자율의 삶, ‘건강’

둥글레
2018-07-2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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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이 사랑한 책들 04  <병원이 병을 만든다>

필연자율의 삶, 건강

 

 

 

 

글 : 둥글레

 

 

 

 

 

 

 

병원이 병을 만든다.jpg

 

 

 

나는 약사다. 의료 전문직으로 그 관련된 업계에서 20년 이상 일했다. 종합병원, 약국, 의약품 도매상, 제약회사를 섭렵하며 건강에 도움이 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일을 해왔다. 아픈 사람을 치유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일을 하기도 했고 전문직으로서 책임질만한 능력을 구비하기 위해 공부도 꽤 했다. 그래서 이반 일리히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내게 힘든 책이었다. 이 책이 직접적으로 의료제도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인문학 책들처럼 읽고 나서 감상이든 의견이든 쉽게 떠벌릴 수가 없었다. 작가의 말에 동의하면 내가 벌어먹고 사는 직업에 대해 나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내가 배운 학문은 과학에 근거하고 있었고 내 사명감은 건강 담론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나 또한 의료제도에 어느 정도 비판적일지언정 일리히에게 전면적으로 동조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의료제도가 목표로 하고 있는 질병 퇴치와 건강관리가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이자 필수 소비품이 되어 가는 과정의 부자연스러움과 그 이면에 삭제된 인간의 자율성에 공감하는 만큼 나는 크게 흔들렸다. 처음 이 책을 읽고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지만 다시 읽고 이 글을 쓰면서 난 어느 정도 입장 정리가 되었다. 약사이기 때문에 더 강하게 의존하고 있던 의료제도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건강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의료화가 잉태한 병들

병원이 병을 만든다라는 제목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료사고를 다룬 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Limits to Medicine; Medical Nemesis, The expropriation of Health이다. ‘의료의 한계; 의료적 응징, 건강의 착취로 번역할 수 있겠다. 일리히는 이 책에서 전문화되고 독점화되고 상품화된 의료는 오히려 건강을 착취하고 있고 그 결과로 병이 만연하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현재 의료는 한계에 봉착해 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단순히 병원이나 의사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의료가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문화 심리적으로 이데올로기화 되어 나타나는 부작용의 차원, 결국 사람의 일상과 일생의 차원의 이야기이다. 일리히는 이런 부작용들을 세 가지 병원병1, 곧 임상적 병원병, 사회적 병원병, 그리고 문화적 병원병으로 명명한다. 그는 의료화라는 진보가 잉태하게 된 이러한 병원병들은 마치 인간이 인간이기보다는 영웅이고자 하는 비인간적인 시도를 할 때 그 교만의 대가로 신이 내리는 응징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임상적 병원병을 보자. 일리히가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의료 과오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보더라도 모든 약물은 잠재적으로 독성이 있고, 의사에 의한 의료 과오도 의료 행위의 한 부분이다. 즉 의료 행위에는 언제나 이런 과오가 잠재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 윤리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기능인에서 과학적 법칙을 적용하는 전문가로 변모함에 따라, 의료 과오는 윤리적 문제에서 장치나 수술자의 우연적 사고로 합리화되었다. 의료 집단은 자신들의 과오를 윤리적으로 책임지려 하지 않고, 그 전문성을 집단적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따라서 환자에 대한 의료의 이익과 사회적 공헌은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고 되려 과평가 되어 의료적 신화가 만들어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비윤리와 과평과라는 임상적 병원병의 결과는 당연히 사회 전체적으로 또 개인의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갔다. 바로 의료는 언제나 효과가 있고 과학적이기에 부정할 수 없는 발전이나 진보로 여겨져 제도적으로 강화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사회적 병원병이 생겨난다. 예컨대 건강보험제도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조건에서 치료받고 궁극적으로 사망률이나 질병률을 낮추기를 바라서 시작되었지만 오히려 과잉진료와 과잉투약을 낳았다. 일리히는 의료가 제도가 되어 관료적으로 관리될 때 평등과 진보라는 사회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의료는 더욱더 의사와 병원이라는 전문적 영역에 독점되어 버린다고 지적한다. 이 독점이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행위하고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다는 점에서 그는 이를 근원적 독점이라고 부른다. 이 독점의 결과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위기의 연속으로 인식하고, 무엇보다 의료 전문가 없이는 질병과 싸울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스스로 싸우는 힘을 상실했다.

이렇게 해서 사회적 병원병은 문화적 병원병을 낳는다. 특히 건강 관리와 임종 관리가 상품화되어 구입하는 것이 될 때 사회적 병원병은 극한으로 치닫고 병적 사회는 탄생한다. 병적 사회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간적인 유약함, 취약성, 독특함을 자기 나름의 자율적 방법을 통해 다루는 능력을 파괴한다. 일리히는 이러한 문화적 병원병에 있어 핵심적 문제는 통증, 질병, 죽음을 개인적 과제에서 기술적 문제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삶의 필연; 통증, 질병 그리고 죽음

일리히가 이 책을 쓴 1970년대와 다르게 지금은 시민의 정치적 힘이 커지면서 임상적 병원병과 사회적 병원병이 현실적으로 해결될 여지가 더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의식 속에 깊숙하게 자리 잡게 된 문화적 병원병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나머지 병원병들의 치료 또한 요원할 수밖에 없다. 문화적 차원에서 병원병은 지금이 훨씬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전통문화는, 각 개인이 통증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질병이나 장애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죽음의 그림자를 의미 있게 하는 방법을 갖추게 하는 능력으로부터 그 위생적 기능을 끌어낸다. 그와 같은 문화에서 건강 관리는 언제나 먹고, 마시고, 일하고, 숨 쉬고, 사랑하고, 정치를 하고, 운동을 하고, 노래하고, 꿈꾸고, 싸우고, 고통받는 것을 위한 계획인 것이다. 치유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치유받는 동안 그들을 위로하고, 돌보고 편안하게 해주는 전통적인 방법이며, 병자 치료의 대부분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관용의 한 형태이다.(141-142)

 

통증을 견딘다거나 질병을 이해한다거나 죽음을 의미 있게 맞이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약국과 병원에서 떨어져서 그것들을 다뤄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전통문화에서 통증, 질병, 죽음은 언제나 있는 것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의료화 된 문화는 통증을 없애고 질병을 제거하며 고통과 죽음을 다루는 기술에 대한 욕구를 사람들로부터 없애버렸다.

통증이 인간의 삶에서 일으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일리히에 의하면 그것은 아프다는 감각(pain)과는 다른 독특한 인간 행동 즉 고통(괴로움, suffering)을 의미한다. 이 고통은 인간이 현실에 의식적으로 대처할 때 피할 수 없는 부분이고 인간은 그것에 직면하여 대응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또한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전달할 수 없고 타인의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지만 고통의 체험은 타인도 고통을 체험하는 존재임을 확신케 한다. 고통은 이렇게 개인적인 체험을 넘어서 사회적 체험으로 확장된다.

이런 고통엔 언제나 의문부호가 붙는다. 왜 이런 고통이 존재하고 왜 내게 또는 남에게 닥쳐온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고 세상을 알게 된다. 그러나 현대의 의료는 이러한 질문과 상관없이 통증을 증상으로 객관화하고 진통제와 마취로 없앤다. 고통을 만들어낸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원인을 찾을 수 없게 한다. 제거될 수 있게 되면서 통증은 더 이상 인내할 대상이 아니라 이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인내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이 환기하는 의문 부호는 묻혀버렸고 우리는 어떤 가치도 거기에서 끌어낼 수 없게 되었다.

통증 또는 아픔과 별다를 것이 없었던 질병이 임상적인 공공의 사건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18~19세기로 최근의 일이다. 과학적 진보는 질병을 진단, 분류하였고 그것이 의사와 환자의 지각으로부터 독립된 존재의 자율성을 갖는다는 신앙을 만들어 냈다. 질병과 건강은 뚜렷하게 구분되어 질병은 비정상으로 분류되었고, 건강은 임상적 증상의 부재라는 임상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의사의 관심이 환자에서 질병으로 옮겨짐에 따라 의사의 눈 속에서 환자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고뇌의 반영이 아니라 입력과 출력의 계산에 종사하는 생물학적 회계원의 응시일 뿐이다. 더 나아가 환자의 질병은 의료 기업의 원재료로 변하고 말았다.

죽음에 대한 이미지도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400년에 걸쳐 과학적, 정치적 진보와 함께 드라마틱하게 변해 왔다. 죽음은 생명의 부활의 기회도 아니고 일평생 대면해야 하는 것도 아닌 삶의 끝이라는 순간의 사건으로 변했다. 죽음이 자연사로 불리는 자연의 한 현상으로 되면서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새롭게 부상한 부유한 계급(부르주아)은 발달된 의료에 돈을 지불하면서 생명연장이라는 불평등을 만들어 냈다. 노인은 은퇴를 늦추고 건강하게 살아남는 것을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 이제 자연사는 의료관리하에서 건강한 노년기에 찾아온 시의 적절한 죽음곧 임상적 죽음이다.

이 새로운 죽음의 이미지는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통제를 보증한다. 정치적 진보가 죽음에 평등을 요구함에 따라 제도로써 의료적 치료를 보장하는 것이 사회의 책임 있는 서비스라고 여겨졌다. 사회는 각 개인의 죽음을 방지할 책임을 지게 되었고, 치료는 유효하든 유효하지 않든 의무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사람들은 출생 시부터 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통증, 질병, 죽음은 삶의 필연이 아닌 타율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전락했다. 일리히는 우리의 인식을 의료화 이전으로 회복하자고 한다.

    

 

건강에 대한 진정한 정의

이제 임상적 건강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건강에 대해서 다시 정의해 보자. 책 서문에서 일리히는 건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건강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내부 상태와 환경 조건이라는 양자에 투쟁하는 경우의 강도를 나타내기 위한 일상어에 불과하다. ‘호모 사피엔스에 있어서 건강한이라고 하는 말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의 성질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 어떤 국민의 건강은 정치적 행위가 환경의 조건을 만들고, 모든 사람에 대한, 특히 약자에 대한 자기 신뢰, 자율성, 존엄성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의존한다. 그 결과 건강 수준은 환경이 자율적인 개인의 책임 있는 대처 능력을 발휘하게 할 때에 최고가 될 수 있다. 생존이 어떤 한도를 넘어 유기체의 항상성에 대한 타율적인 규제에 의존하게 되면, 건강 수준은 저하될 뿐이다.(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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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2021-10-01 10:08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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