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책 01 - <나무에게 배운다> 아주 찬찬히 전해지는 것들

히말라야
2018-07-2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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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이 사랑한 책들 01  <나무에게 배운다>

아주 찬찬히1 전해지는 것들

 

 

 

 

글 : 히말라야 

 

 

 

 

나무에게 배운다.jpg

 

내게 전해진 말들

어느 날 곱게 장정된 책 한 권과 만났다. 그와 동시에 상추쌈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출판사를 알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용인에서 멀고 먼 지리산 자락의 어느 마을. 하루의 농사일을 마치고 세 아이들이 잠들고 난 밤에 두 사람이 마주 앉으면 문을 여는 출판사다. 못 견디게 이 세상에 내 놓고 싶은 글을 골라 매일 밤 서로에게 조금씩 읽어준다. 그 말들은 책이 되면서 동시에 두 사람에게는 다시 힘내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경전이 된다. 그래서 이 기묘한 출판사의 책들은 무척이나 더디게 나온다. <<나무에게 배운다>> 역시 이런 식으로 일 년여에 걸쳐 만들어낸 책이다.

일본의 고대건축물인 궁궐이나 사찰을 짓는 궁궐목수들의 삶을 다룬 이 책은, 90년대에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이미 출간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누렇게 빛바랜 이 옛 책을 간직하고 있었다. 더 이상 도시의 속도에 맞춰 살 수 없었을 때, 두 사람은 지리산 자락으로 내려가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각오는 했지만 미처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새로운 삶에 찾아올 때마다 둘에게 힘이 되어 준 책이었다.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둘은 이 책에 다시 고운 옷을 입혀주고 싶었다.

궁궐목수들의 이야기이지만 책의 저자는 집 짓는 장인이 아니다. 옛 장인들의 손의 기억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40대의 글 짓는 사람시오노 요네마쓰다.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여든을 훌쩍 넘긴 집 짓는 사람니시오카 쓰네카즈다. 그는 대대로 궁궐목수집안에서 태어났고, 궁궐목수들의 우두머리인 대목장이었던 할아버지는 그를 어릴 때부터 대목장으로 길렀다. 대목장 니시오카는 나무건축에 관한 오래된 구전과 목수의 삶 그리고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말한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의 목소리와 함께 다른 것들에도 자꾸 마음이 쏠렸다. 우선 책 속에선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내내 나이든 장인의 말을 듣고 있을 저자 시오노 요네마쓰. 저자들은 대부분 책의 어느 구석에선 자기의 주장을 내놓게 마련인데, 그는 자기 목소리를 한 번도 드러내지 않는다. 책의 서문마저도 니시오카 대목장이 썼고 저자 후기도 없다. 그리고 상추쌈과 장인의 삶 사이의 연결고리다. 나이 많은 대목장이 들려주는 장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반농반X’(먹을 만큼 농사 지으며 생계를 해결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택한 젊은 두 사람에게 힘을 줬을까?

    

 

마음을 기른다

궁궐이나 사찰을 짓는 목수가 여염집을 짓는 일반목수들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마음가짐이라고 대목장은 강조한다. 빨리 실용적인 기술만 배우는 일반목수와 달리, 수 백 년 간 서 있을 예배의 대상이 되는 건축물을 짓는 궁궐목수들은 마음가짐부터 배워야 한다. 그런데 어린애들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되어 장인이 되겠다고 찾아온 이들의 마음을, 게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마음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대목장의 답은, “밥 짓고 청소하기였다.

궁궐목수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은 누구나 우선 밥 짓고 청소하면서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스승과 함께 나눈다. 거대한 건축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맨 아래에 놓일 주춧돌이다. 주춧돌을 잘 못 놓으면 거대한 건축물 전체가 위험하다. 그런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뛰어난 장인도 역시 주춧돌에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음에 흔들리지 않을 주춧돌을 놓기 위해서는, 지금의 마음자리에 놓여있는 욕심이나 조급함 등을 비워 버려야한다. 그렇게 아이처럼 순진한마음이 되어야, 모든 것에 마음이 열리고 배움이 일어난다. 대목장은 이를 옷 벗기라 부른다.

 

제자로 들어 올 때는 목수가 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하나하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그저 가르쳐 주기만을 바라는, 마치 옷과 같은 것을 덮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마음을 빨리 버려야합니다. 함께 생활해 가며 스스로 이 옷을 벗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옷은 가르치는 이가 벗기는 것이 아니라, 제자 스스로 벗는 것입니다. 스스로 벗을 마음이 없으면 기술은 전해지지 않습니다.”(91)

 

 

마음의 옷을 벗은 장인들은 자기가 다루는 나무의 마음도 알아볼 줄 안다. 요즘 건축주의 눈에 나무는 그저 재료다. 그러나 뛰어난 장인들의 눈에 나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저 마다 모두 다른 성깔인 개성을 지닌 생명이다. 바람을 견뎌낸 튼튼한 나무는 들보에 쓰고, 수분과 영양분을 충분히 받으며 자란 골짜기의 부드러운 나무는 정교한 천장에 쓴다. 이렇게 한 그루의 나무가 지닌 성깔을 알고 살려 써야한다는 장인의 설명을 듣고 있자면, 뭔가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그가 살아온 고유한 역사를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를 보자마자 이것은 얼마짜리 나무, 이것은 오십 년밖에 안 된 나무라서 싸다. 이것은 천 년짜리이므로 비싸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라도, 그것이 어떻게 해서 씨앗으로 뿌려지고 어떻게 다른 나무와 겨루며 컸을까, 거기는 어떤 산이었을까, 바람이 심한 곳은 아니었을까, 햇빛은 어느 쪽으로 받았을까, 저라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그 나무가 살아온 환경, 그 나무가 지닌 특징을 살려 쓰지 않으면, 좋은 나무도 그 가치를 살리지 못하고 망쳐버리게 됩니다.”(22)

 

자연에 대한 똑바로 선 생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목장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무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말한다. 나무는 살아있다. 생명 있는 것에는 모두 마음이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기 마음을 길러 본 이들은 다른 마음도 알아 볼 수 있다. ‘옷을 벗은마음의 맑은 밑바닥에는 만상이 오롯이 비춰 보이기에, 그들은 말이 없는 나무와 이야기를 나눠가며 그를 다시금 생명 있는 건물로 바꿔낼 수 있다. 대목장은 그 모든 것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밥을 짓는 일에서부터 비롯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몸에 새긴다

마음가짐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에서 기를 수 있지만, 장인의 일은 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다. 대목장도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이를, 일을 배울 현장이 없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장인의 일은 스스로 배울 수는 있지만 자기가 아닌 다른 이가 가르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한다. 스승이 아무리 장인들의 구전(口傳)을 전하고, 아무리 기술의 본을 보여줘도, 자기가 직접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상황에 놓이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저는 할아버지께 대목장이란 이런 것이다, 나무 사용 방법은 이렇다, 구전에 이렇게 전한다, 라는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혼자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구전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호류지의 금당을 해체 수리하면서부터입니다. ... 구전이나 할아버지 말씀은 머릿속에 들어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그때까지 몰랐던 것입니다.”(98)

 

제 아무리 열심히 밥 짓고, 나무의 마음을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장인은 일을 못하면 아무소용이 없다고 대목장은 냉정하게 말한다. 현장에는 피할 도리가 없는, 결코 피해서는 안 되는 현실의 문제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일들이 늘 벌어지면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그러니 장인에게 앎이란 그저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능력과 일치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앎과 몸의 능력의 일치! 이런 것은 누군가가 머릿속에 기억을 심어주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 몸에 배움을 새겨 넣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몸의 앎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이번에도 대목장의 답은 간단하다. 경험을 쌓기 위해 뭐든지 반복하여, 직접 해보라는 것. 자기 몸에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는 반복을 통해서 몸에 배게 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그래서 한 번 듣고 기억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왜 그런지 의문을 갖는 사람, 머릿속으로는 절대 납득이 안 되어 직접 제 손으로 해 보는 사람, 한 번에 조금씩 알게 되고 그 만큼씩만 납득해 가는 사람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명공이 된다.

 

통째로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억력이 좋은 것만으로는 제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통째로 하는 암기에는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뿌리가 제대로 돼 있지 않으면 나무는 자라지 못합니다. 뿌리만 확실히 서 있다면, 거기가 바위산이든 바람이 심한 곳이든 해 나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만, 사람이나 나무나 기른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119)

 

스스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만드는 이런 배움은 오래 걸리며, 끝도 없다. 그래서 장인에게 스승이란 오래 기다려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현장의 경험을 직접 자기 몸에 새기기 전에, 일을 빨리하도록 강요하는 스승은 생각의 싹을 자르는 사람이다. 일을 빨리 배우게 할 요량으로 칭찬하는 스승은 제자의 마음에 건방을 떨고 솜씨자랑을 하려는 흐트러진 생각을 심는다. 장인에겐 강요하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면서 인내와 자비심으로 제자를 기를 수 있는 스승이 필요하다. 그래야 차근차근 스스로 실력을 쌓아가며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는 장인으로 자란다. 밥짓기부터 시작된 장인의 배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몸에 새기는 일이다.

    

 

존재의 실타래 속에서

시간을 들이는 몸의 앎을 강조하는 장인의 말은 마치,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알면서 다르게 행하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 같다. 무엇이든 자동화되고 기계화된 세상에서는, 시간을 들여야 하는 몸의 앎이 필요 없을까? 뒤집힌 세월호나 폭발한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는 혹시 몸의 앎을 터득하지 못한 장인의 건축물과 닮진 않았을까? 장인의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하여 아니 오히려, 시간을 들이는 몸의 앎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이런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진 않을까.

 

뒤를 돌아보면, 어림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긴 실에 꿰여있고, 그 끝에 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천삼백 년 전에 지어졌으나 지금까지 견뎌 온 사찰이 남아있고, 우리가 세운 탑이나 당도 이제부터 시간의 시련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저로서 끝이 아닙니다. 이 뒤로도 이제까지 보다 더욱 오래 이어질 것입니다. ... 어딘가에 탑이 있다면, 나무를 아는 자나 일을 제대로 하는 자는 그 탑을 보고 옛 사람은 이렇게 했구나, 라며 우리가 천 삼백 년 전에 세워진 호류지의 힘참이나 우아함에 감동하며 배웠던 것처럼, <span style="color:rgb(0,176,162);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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