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과 청년 #4 | 스승, 후지노 겐쿠로

문탁
2018-09-1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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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후지노 겐쿠로 
- 애닯고 아득한 청춘의 모퉁이, 그곳에 늘 서 있는 스승들(1) -
 
 
 
 
 
글 : 문탁
 
 
 
 
 
나도 무지에서 홀로 방황한다  
 
1909년 29세의 루쉰은 약 8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딱히 내세울만한 성과는 없었다. 3년 전 의대를 때려 치고 문학으로 방향을 틀었었다. 중국인의 병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어리석고 겁약한” 정신이기 때문에, 생리학이 아니라 문학이 그들의 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잡지를 만드는 일도 문예운동을 펼치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현실을 돌파하는 것은, 바람만으로는, 희망으로만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무게가 그를 귀국시켰다. 그리고 그는 교사로 취직한다.
  
그 시기, 일본, 중국, 조선의 사정은 엇비슷했다. 유학파들이 귀국하여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만만한 것 중의 하나가 ‘교사’였다. 물론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계몽의 파토스에 불탔던 많은 청년들, 예를 들어 조선의 이광수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루쉰의 경우, 그것은 밥벌이였다. 그렇다고 그가 불성실한 교사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첫 직장이었던 저쟝의 2급 사범학당에서 그는 자기가 맡은 화학과 생리학을 충실히 가르쳤다. 삽화를 포함시킨 교재, 요점이 분명한 설명으로 학생들의 신뢰도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루쉰 자신은 “죽을 만큼 황량”하다고 말한다. 식물학을 가르치는 동료를 도와 열심히 식물채집을 하러 다녔고, 당나라 때의 백과사전(類書) 등을 뒤적이며 옛날 소설들을 모아 편집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교사로서의 사명 때문도 아니었고, 학자로서의 탐구정신 때문도 아니었다. 루쉰은, 그것이 “공부라고는 할 수 없고 좋은 술과 여인을 대신하는 것들”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루쉰, 쉬서우창에게 보내는 서신, 1920.11.15., 전집13, 447쪽) 후에 그는 그것이 자신의 적막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써서 내 영혼을 마취”시키는 일이었다고도 (「서문」, 1922.12.3., 『외침』, 전집2, 24쪽)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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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채집책에 루쉰이 직접 그린 부엉이와 불새​
 
 
 
 

학교가, 교육계가 청정구역이라는 믿음은 전혀 없었지만 어쨌든 루쉰은 꽤 오랫동안 선생 일을 했다. 귀국 직후(1909년)부터 신해혁명 후 교육부 직원으로 취직할 때(1912년) 까지 약 2년 반 동안 사범학교의 교원 혹은 교장으로 근무했고, 교육부 직원으로 근무하면서도 1920년부터 베이징대와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에 출강했다. 1926년 샤먼으로 남하한 이후에는 아예 샤먼대에서 혹은 중산대에서 교수 노릇만 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이미 신문, 잡지 등에 글을 쓰고, 여러 청년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꽤 명성 높은 시대의 스승이 되어 있었다. 많은 ‘신청년’들이 그에게 길을 물었다. 쉬광핑 역시 처음에 그런 ‘신청년’ 중의 하나였다. 그는 “흉중에 오랫동안 품고 있던 수많은 의혹과 갑갑증”을 풀고자 루쉰에게 “언제 어디서라도 가르쳐 주시고 이끌어주시기를 희망”했다. (쉬광핑, 1924.3.11.,『먼 곳에서 온 편지』, 전집13, 37쪽) 

 

그러나 루쉰은, 어쩌면 루쉰만이 그들의 그런 희망을 거부했다. 그는 쉬광핑에 대한 첫 답장에서부터 자신은 청년을 지도하는 재주가 없다는 것, 청년을 지도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어디로 가야할지 나침반조차 갖고 있지 않으니 자신에게 희망을 품지 말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다음 해 북경여사대 사태 한 복판에서, 쉬광핑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 6명이 교내시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제적된 직후, 그 유명한 「스승」이라는 글을 쓴다. 
 
 
요즘 젊은이에 대한 담론이 크게 유행하고 있어서 걸핏하면 젊은이를 입에 올리고 있다. 그러나 젊은이라고 어찌 똑같이 논할 수 있겠는가? 깨어 있는 젊은이도 있고, 잠들어 있는 젊은이도 있고, 잠이 덜 깨 멍한 젊은이도 있고, 누워 있는 젊은이도 있고, 놀고 있는 젊은이도 있으며, 이밖에도 많다. 물론 전진하려는 젊은이도 있다.
전진하려는 젊은이들은 대개 스승을 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그들은 아마 영원히 구하지 못할 것이다. 구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행운이다. 스스로를 아는 이는 불민하다면서 사양하는데, 스스로 자부하는 이는 과연 진정 길을 알고 있을까? 스스로 길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은 대개 ‘이립(而立)’의 나이를 넘겨, 완연히 회색적이고 늙은 티가 역력하여 원만할 따름임에도, 스스로는 길을 안다고 잘못 여기고 있다. 만약 진정 길을 안다면, 스스로가 일찌감치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을 터이니, 어찌 스승 노릇이나 하고 있겠는가? 불법을 떠는 스님이나 선약(仙藥)을 파는 도사는 장차 백골과 ‘한통속’이 될 터인데, 사람들이 그들에게 성불의 대법을 듣고 승천의 비법을 듣겠다니, 어찌 가소롭지 않겠는가!”
- 「스승」, 1925.5.11., 『화개집』, 전집4, 86쪽
 
 
그 다음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무덤』이라는 잡문집을 엮은 후, 서문을 쓰고도 뭔가 미진하여 덧붙인 후기. 왜 쓰는가, 왜 출판하는가에 대한 자기 해부. 거기에서도 과정으로서의 삶에 대한 핍진한 서술이 기록되어 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길을 인도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조차도 어떻게 길을 가야 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대개 청년들의 ‘선배’와 ‘스승’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러나 나는 아니며, 나도 그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하나의 종점, 그것이 바로 무덤이라는 것만은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이므로 누가 안내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길에 달려있다. 그 길은 물론 하나일 수 없는데, 비록 지금도 가끔 찾고 있지만 나는 정말 어느 길이 좋은지 알지 못하고 있다.
- 「『무덤』뒤에 쓰다」, 1926.11.11.,『무덤』, 전집1, 413쪽
 
 
빈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전히 그는 쓰고 있고, 가르치고 있고, 강의하고 있고, 논쟁하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소진시키고 있지만, “무엇을 하는 지 끝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청년 시절부터 숱하게 품었던 희망은 늘 속절없이 좌절되었었다. 희망은 허망하다. 삶은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암흑이 나를 삼킬 수도 있고, 광명 역시 나를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그림자의 고별」, 1924.9.24.,『들풀』, 전집3, 29쪽) 하지만 어쩌면 절망도 허망한 것 아닐까? 하여 비록 몸둘 곳이 만만치 않더라도(無地)  “밝음과 어둠 사이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다면(「그림자의 고별」, 『들풀』, 전집3, 29쪽), “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허망’ 속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면”, “ 이 공허 속의 어둔 밤과 육박”하여, “저 스러져 버린, 애닯고 아득한 청춘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닐까? (「희망」, 1925.1.1.,『들풀』, 전집3, 44쪽) 
 
나는 루쉰의 삶이, 그의 작품이 갖는 그 독특한 품격과 정조는 바로 이런 희망과 절망, 광명과 암흑, 삶과 죽음, 열정과 냉정 사이의 그 팽팽한 긴장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스승이 아니라 전사로 살았던 분투의 삶, 어둔 밤에 육박하여 매번 다시 찾아간 애닯고 아득한 청춘에, 루쉰에게는 후지노 겐쿠로(藤野嚴九郎)와 장타이옌(章太炎)이라는 두 명의 스승, 냉정과 열정의 두 꼭지점이 존재한다.
 
 
 
 
후지노 겐쿠로 – 중국과 일본의 이중부정
 
후지노 선생은 루쉰의 일본 유학시절, 정확하게는 1904년 8월부터 1906년 3월까지의 센다이 의대시절의 해부학 교수였다. “검고 야윈 얼굴에 팔자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끼고 옆구리에 크고 작은 책들을 가득 끼고” 다녔으며, “옷차림을 몹시 등한시해서 때로는 넥타이 매는 일까지 잊어버”리는 인물이었다. “겨울이면 낡은 외투를 걸치고 다니는데 그 행색이 심히 초라하여 언젠가는 기차에 오르자 차장은 그가 도적이 아닌가 의심하여 승객들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교수에게 그의 학생들은 존경이 아니라 비웃음을 보냈다.
 
수업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루쉰은 후지노 선생에게 불려간다. 그는 루쉰의 노트를 보여달라고 한다. 루쉰의 노트는 예의 그의 달필로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후지노선생은 노트를 며칠 있다가 돌려준다고 했고, 며칠 후 돌려받은 노트엔 “첫머리부터 마지막까지 죄다 빨간색으로 고쳐져 있었는데 미처 받아쓰지 못한 많은 대목들이 보충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법적인 오류까지 일일이 교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일주일에 한번씩 학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몇 가지 추가적 에피소드. 어느 날 다시 불려간 루쉰. 루쉰의 노트에는 팔의 혈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후지노 선생이 그 그림을 보며 조용히 나무랐다. 루쉰의 그림이 보기는 좋으나 해부도는 미술이 아니니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게 좋겠다는 충고. 루쉰은 속으로 생각한다. 실물 이미지는 머리 속에 다 있고, 그림은 내 것이 더 나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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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의 팔 해부도

 

 
 

미신의 습속이 강한 중국출신 유학생 루쉰이 해부실습에 참여하지 않을까 전정긍긍했다는 이야기나 남자인 그에게 중국여성의 전족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과정은 루쉰을 살짝 당황시키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중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 그러나 우리는 이런 에피소드에서 어떤 위계적 시선도 느끼기 어렵다. 오히려 대책 없이 순진한 교사와 적절한 리액션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조숙한 제자 사이의 마음 따뜻해지는 교류의 순간들을 발견하곤 한다. 루쉰이 20년 후에 그려낸 「후지노 선생」(1926.10.12,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선집3) 안에서는 정녕 그러하다.

 
후지노 선생은 루쉰이 학업을 중단하겠다고 하자 진심으로 안타까와 한다. 루쉰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뒷면에 ‘석별’이라 쓴 사진을 한 장 주면서 루쉰의 사진도 한 장 달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루쉰은 사진을 갖고 있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면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결국 지키지 못했고 교류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반 남짓한 이 짧은 만남 속의 후지노 선생을 루쉰은 오래 오래 마음에 담았다. 루쉰은 후지노 선생이 자신이 “스승으로 모시는 분들 가운데 가장 나를 감격시키고 고무해 준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의 성격은 내가 보기에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있어서는 위대했다”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그토록 루쉰을 감격하게 한 것일까? 「후지노 선생」에서 감추어진 부분은 하나도 없다. 말 그대로 후지노 선생의 루쉰을 향한 “열렬한 기대, 지칠 줄 모르는 가르침”에 감동한 것일 게다. 그것은 중국에 새로운 의학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순수한 열의이고, 루쉰을 통해 그것이 전파되기를 희망하는 대가없는 선의였다. 그때도 지금도 후지노 선생같은, 그런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후지노 선생이 아니라 「후지노 선생」이다. 그것은 1926년 10월 12일 샤먼에서 쓰여졌다. 베이징에서 탈출하여 샤먼으로 갔으나 샤먼은 베이징 보다 더 불합리하고 답답한 곳이었다. 수천년간 지속된, 루쉰이 그토록 뜯어고치고 싶어했던 중국의 깊은 병, 예를 들면 번지르한 말만 앞세우는 것, 대충대충 둔감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 들. 거기에 지방 특유의 ‘텃세’까지 보태져 있었다. 그 속에서 다시 소환한 루쉰의 청춘, 앞서의 말을 다시 반복하자면 샤먼, 그 “공허 속의 어둔 밤과 육박”하여, “저 스러져 버린, 애닯고 아득한 청춘을 찾아” 다시 도착한 일본 유학시절. 그 시절에 대한 「후지노 선생」은 “도쿄도 그저 그런 곳이었다” 라는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거두절미하듯 시작된 이 첫 문장은 묘하게 우리를 긴장시킨다. 루쉰에게 도쿄가 결코 그저 그런 곳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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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도 그저 그런 곳이었다” ​

 

 

알다시피 루쉰은 1902년 관비유학생이 되어 일본에 간다. 그는 그곳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과 일본어라는 창구를 통해 서양의 최신학문을 미친 듯이 흡입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도쿄는 중국혁명가들의 집결지. 루쉰은 서점에 가서 신간서적을 구경하고 고르고 구입하는 일 만큼이나 중국혁명가들이 개최하는 집회에 참석하고 강연을 들었다. 그는 일본 도착 일년 만에 머리를 잘랐고 (이것은 다음 절, 장타이옌 부분에서 다시 설명), 혁명적 파토스에 감염되었다. 일본은 결코 그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청년 루쉰을 키워낸 곳, 사상가 루쉰의 원형을 만들어 낸 곳이었다. 일본은 중국의 안티테제. 루쉰의 출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발의 중국유학생이 모여, 한편으로는 비분강개를 쏟아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식 방에서 사교춤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던 도쿄는, 예민한 루쉰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곳이었기도 하다. 그곳은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중국의 고루함과 비루함을 매일 매일 환기시키는 곳이기도 했다. 하여 센다이는 도쿄의 안티테제. 루쉰의 두 번째 출구였다.
 
그러나 센다이는 또 어떤 곳이었을까? 일본은 그에게 출구였지만 그것이 막힌 출구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 곳이 바로 센다이였다. 일본의 급우들의 어이없는 모략과 소위 환등기 사건의 경험은, 루쉰이 이방인으로서, 약소민족의 일원으로 겪었던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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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노 겐쿠로 선생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후지노 선생은 어쩌면 루쉰에게는 센다이의 안티테제 아니었을까? 중국의 자대주의와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이중의 부정, 하여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았던 청년 루쉰의 정신이 유일하게 공명한 어떤 특이적 지대가 후지노 선생이 아니었을까?
 
그는 검고 야윈 인물이었다. 옷차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위대한 사상이나 주의 같은 것은 없었다. 명성도 없었다. 그가 한 일은 성실하게 제자의 노트에 빨간펜으로 첨삭을 하는 일이었다. 하여 20년 후에도 루쉰은 글을 쓰거나 제자를 챙기는 일에 게을러질 때마다 자신의 숙소에 걸려있는 그를 보며 “용기를 붇돋우곤 한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 붙여 물고는 또다시 ‘정인군자’ 따위들한테 자못 미움을 사게 될 글을 계속 써 내려간다.” 
 
하여 검고 야윈 두 사람. 옷차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두 사람. 위대한 사상이나 주의 따위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낸 두 사람. 루쉰과 후지노선생은 20년의 격차를 두고 수렴한다. 1926년의 루쉰은 때론 후지노 선생처럼 보이고, 1904년의 후지노 선생은 때론 루쉰처럼 보인다. 후지노는 루쉰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자 루쉰의 또 다른 자아, 루쉰의 청춘이었다. NM
 
 
 
*장타이옌이라는 열정 / 다시 스승과 더불어 홀로.... 는 다음 편에 계속 됩니다.​
 
 
댓글 5
  • 2018-09-11 14:50

    오늘따라 루쉰의 글이 문탁샘 글이 쏙쏙 들어옵니다^^ 2편 기대됩니다.

    위대한 사상이나 주의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낸다.

    본받고 싶은 스승, 본받고 싶은 삶입니다. 

  • 2018-09-12 16:04

    후지노 선생과 루쉰을 이렇게 중첩시킬 수 있군요^^

    루쉰을 읽을 때 '스승'이란 잡문을 암송했던 것도 떠오르는군요^^

    스스로 일찌감치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느라 스승노릇 할 시간이 어디있느냐?는 반문..

    루쉰은 언제 읽어도 '날카로운 첫 키스'인가 봅니다^^

  • 2018-09-13 07:58

    아~ 역시 멋있다 루쉰..

    들풀이 이런 맥락으로 읽으니 다시 와닿네요..

    역쉬 들풀~^^!

  • 2018-09-14 09:23

    저는 개인적으로 삼미서옥의 수경오샘도 루쉰의 스승으로 기억 되네요. 관직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공부를 하였던, 자식들에게도 관직에 나가지 말기를 권했던 분. 

    술에 관련된 글을 외우시며 삼매경에 빠지시던 그 부분이 재밌었는데 ㅋㅋ

    그 틈을 타 그림을 베끼던 루쉰

  • 2018-09-18 15:26

    루쉰을 읽고 싶을 때가 종종 있어요..

    루쉰을 다시 소환하면 제 삶도

    다르게 전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사람의 글에서 사람을 그토록 진하고

    아프게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루쉰은 그랬어요..

    그래서 루쉰이었죠..

    루쉰을 잠시나마 다시 읽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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