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시즌 2> 2회차 후기

가마솥
2022-09-30 12:51
221

   나카지마의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를 마치는 세미나이다. 이제 단촐하게 네 사람이 세미나를 하니 말할 기회도 많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것도 집중되어 좋은데, 매번 발제도 하고 자주 후기도 써야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니께.....(是非를 가리다니, 儒家的 발언으로 보이네......윽! 취소! 이 놈의 말이 문제여)

   자작나무님은 장자의 언어사상에 대하여 장자의 忘言을 無言의 관점이 아닌, 전달 가능성에 대한 아포리아 측면에서 본 저자의 논지를 말한다. 요약하면, 意를 전달하는 데는 言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言은 동시에 意를 손상시킨다는 아포리아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실이 『장자』를 읽었으면 귀가 번쩍 뜨일 문장이다.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그 뜻은 아니었으며 또한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우아하게....... 하지만, 장자가 누구인가? 이런 핑계도 통하지 않을 듯하다. 저자는 장자는 언어에 대한 불신과 언어에 대한 신뢰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오랄리테’(=原(아르키)-소리, 근원적인 소리나 음, 구술성)를 말한다. 음성 이전의, 의미 이전의, 뜻 이전의. 그리하여 그러한 “배경을 이루는 소음과 그 메시지에 내재된 소음에서 메시지를 끄집어내는 것”이 소통이며, 이렇게 보면, 소통은 배경을 이루는 소음을 조건으로 갖는다는 것이다. (’이 새끼들’ 까지는 어쩔 수 없는데,) 전문가가 주변 소음을 다 지우고 들어보니, 그 ‘국회’는 ‘미국 국회’가 아니며, ‘바이든’ 이라는 말은 ‘ooo'이었다고 속이는 대통령실 大便人의 말은 이제 妄言에 추가된 妄言으로 들린다.

  여울아님은 『장자』의 물화와 제동을 ‘세계 자체의 변용’ 측면에서 읽었다. 저자는 『장자』에는 사물이 그 사물이게 하는 “본질”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방법과 달리, 사물이 다른 사물이 되는 “생성변화”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는 후자를 물화(物化)라고 부르고, 장주의 꿈에서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 변화를 儒家의 “교화(敎化)”와 비교하며, 교화는 소인이 군자나 성인이 되는 프로그램이며, 일정한 방향이 정해진 변화에 불과할 뿐인데 비해, ‘물화’는 정치적/윤리적/경제적 체제와 이익을 향해 질서지어지지 않는 변화라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어째 철학학교에서 읽고 있는 들뢰즈랑 닮았다. 요즘 읽는 부분이 ‘이념’에 대해서 인데, 플라톤 식으로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이념의 ‘본질’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결국 아포리아에 이르니, ‘얼마만큼?’, ‘어떻게?’, ‘어떤 경우에?’로 대체하여 우연, 사건, 다양체의 물음, 곧 그 ‘변이 가능성’을 묻는 차이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즉 ‘본질’을 찾으려는 플라톤식 접근은 일자를 생산하고 나머지는 재현에 불과하게 되는데, 들뢰즈는 차이에서 발생하는 생성과 그 변화 가능성으로 이념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와 비슷하다. 그런데, 『장자』를 읽으면 “그러네 !” 하기도 하는데, 『차이와 반복』을 읽으면 항상 “미치겠네!”하는 점이 차이난다. 그것도 반복적으로......ㅎㅎ

    나는 마지막 장,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 -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편을 발제했다. 아침 저녁으로 아들 놈의 출퇴근 기사를 하면서, 녀석에게 『장자』이야기를 한참 풀다 보면 짜식이 묻는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지맘대로 살면 세상이 잘 돌아갈까?(소는 누가 키워?)”. “음.....그러니까 말이지, 그게..... 또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짜식아! 책 좀 읽어라!”로 끝 맺지만, 유교적 교육을 받고 또 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나도 궁금하다.
『장자』, 「양생주」편, ‘물화’의 궁극에서는 사물과의 온갖 연결에서 풀려나(懸解), ‘내’가 완전한 자유를 손에 넣어 생명의 情을 얻을 수 있어서, 그 生을 온전히 향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물과의 온갖 연결에서 풀려난다(懸解)는 것’은 ‘내’가 모든 사태의 가능성을 향해 ‘수동적인 방식으로 열려 있음(不得已)’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또한 『장자』, 「대종사」편, 맹손재의 복상(服喪)의 예를 들면서 지금 ‘이때‘를 과거와 미래에 결부시키지 않는 ’의미 붙이기에서 해방된 자유‘, 과거에 대한 책임이라는 계기가 전혀 없는 ’도덕을 결여한 자유‘라고 해석하며, 『장자』의 자유를 ’도덕없는 자유‘라고 명명하며 저자의 글을 맺는다.

‘수동적인 방식으로 열려 있음(不得已)’과 ‘이때‘를 과거와 미래에 결부시키지 않는 사고, 행동이면 소를 누가 키울지를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댓글 1
  • 2022-10-01 06:43

    이번 기회에 제물론의 올랄리테 부분을 다시 생각해봤는 데요. 인뢰, 지뢰, 천뢰가 제물론 앞부분에 나오는데 그동안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요. 나카지마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결국 내 몸과 마음을 이루는 요소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이런 상태에서야말로 도를 듣게 된다는 것. 비근한 예로 산에 오르는 데 저처럼 정상을 찍고 반환점을 도는 데만 목적이 있는 사람과 산에 사는 동물과 나무, 풀... 버섯에 관심을 두고 산을 오르는 것. 이 둘 중 어느 때 우리는 산과 공명하게 될까요? ㅎㅎ 저자는 세상의 변용에 앞서 자신의 변용은 이렇듯 주변과 특히 자연(천)과  조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 장자 또한 남곽자기의 망아와 천뢰를 같이 배치한데는 그런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98
묵가는 왜 소멸했을까?
여울아 | 2023.06.27 | 조회 217
여울아 2023.06.27 217
197
후기 : 묵자와 공리주의 (1)
토용 | 2023.06.17 | 조회 225
토용 2023.06.17 225
196
묵자가 진나라의 기틀을 다졌다구요?? (1)
여울아 | 2023.06.07 | 조회 241
여울아 2023.06.07 241
195
후기 : '묵경'과 과학기술 (1)
토용 | 2023.06.06 | 조회 219
토용 2023.06.06 219
194
묵자는 반전주의자인가? (2)
여울아 | 2023.05.26 | 조회 225
여울아 2023.05.26 225
193
후기 : 묵자의 천(天)과 귀(鬼) (1)
토용 | 2023.05.22 | 조회 183
토용 2023.05.22 183
192
<절용>, <절장>, <비악>을 중심으로  (1)
여울아 | 2023.05.03 | 조회 329
여울아 2023.05.03 329
191
후기 : 묵자 사상의 키워드 兼 (1)
토용 | 2023.04.27 | 조회 203
토용 2023.04.27 203
190
묵자가 백이 숙제의 자손이란 말인가?(후기) (1)
여울아 | 2023.04.24 | 조회 216
여울아 2023.04.24 216
189
<묵자> 후기 : 묵자는 누구인가 (1)
토용 | 2023.04.17 | 조회 237
토용 2023.04.17 237
188
장자 에세이 모음 (2)
토용 | 2022.12.21 | 조회 284
토용 2022.12.21 284
187
[2023 제자백가세미나] 전쟁과 평화의 시대, 묵가와 병가 읽기 (2)
여울아 | 2022.12.20 | 조회 852
여울아 2022.12.20 852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