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악수도 하고 떼창도 하는 우리

고은
2023-03-13 12:01
391

 

악수도 하고 떼창도 하는 우리
- <공자의 철학>(하버트 핑가레트)를 읽고

 

 

 

 

     이 책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Herbert Fingarette

 

     공자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가 무미 건조하고 답답한 도덕 군자라고 생각하였다.

 

     책의 한국어 역자는 핑가레트의 말을 받아 정말 그렇다며, 오늘날 한국에서도 공자를 새롭게 보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장문의 <옮긴이의 말>을 작성했다. 그러나 공자에 대한 이와 같은 편견은 책이 쓰인 1972년으로부터, 혹은 한국에 출판된 1993년으로부터 30~5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공자는 우리 또래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주의 인물 중 하나다. 오늘날의 가부장적인 문화가 유교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고, 유교는 공자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직접 <논어>를 읽어도 그 생각이 변하는 경우는 거진 없다. 비교적 젊은 여성 작가인 황선우가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에서 보인 반응이 그 전형이다.

 

     “제가 요새 매일매일 논어를 읽고 있잖아요. (…) 잘 나가다가 굉장히 보수적인 유교 사상이 담겨 있는 어떤 구절을 발견할 때 ‘때려쳐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잖아요. (…) 너무 낡았다.”

 

     공자가 사용하는 개념 중에서도 예(禮)만큼 또래들에게 ‘낡았다’는 평을 듣기 쉬운 것도 없는 것 같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모든 문화가 예(禮)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일 테다. 제사, 남녀의 불평등 문제, 나이에 따른 위계 문제…. 그러나 나는 하버트 핑가레트가 <공자의 철학>에서 주장한 말마따나 예(禮)가 오늘날 우리 또래에게도 쓸모 있고, 의미 있는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1. 예(禮)는 악수와 같은 것

 

     저자는 예(禮)를 “거룩한 예식”(holy ritual) 혹은 “신성스런 예식”(sared ritual)로 번역한다. 예(禮)는 일종의 예식을 통해 합당한 의례, 관습을 만들게 된다. 예, 예식, 의례, 관습…내 친구들이 이 단어들을 들으면 얼마나 기겁할지 상상이 된다. 그러나 하버트 핑가레트에 따르면 의례는 질겁할만한 구시대의 악령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예식과 함께 살고 있다. 사람과 만나면 눈을 마주치고 손을 흔들고 좀 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악수를 한다. 이것이 예식이다. 만일 이것들이 예식이 아니라면 내가 한 인사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손의 휘적임 밖에 되지 않을 것이 된다. 만일 누군가 다가와 코로 내 등을 치고 물을 뿌린다면 어떨까? (최근 읽고 있는 책에 따르면 이 행위들은 핑크 돌고래들에겐 인사다.) 우리가 예식을 사용한다는 건 적어도 공통된 문화, 공통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식을 매체로 하여 우리에게 고유한 인간 생활이 유지되는 것이다. 예식 활동은 따라서 그 어느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제일 우선적인 일이다. (38)

 

     언어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언어는 추상적으로 이해되기 쉬우나, 사실 말 역시 동작만큼이나 예식 행위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 업무용 언어를 배워야 하고(“다름이 아니고, 말씀해주셨던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게임을 할 땐 게임채팅 언어를 쓰며(“ㅇㄷ…”, “ㄱㄴㅇ”), 동물권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에게는 다른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동물’ 대신 ‘비인간동물’). 인권, 페미니즘, 동물권, 생태 등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가부장적인 언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우리가 예식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오늘날 가부장적이라고 불리는 갖가지 문화가 예(禮)와 연결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기도 하다. 예식은 광범위하며 일상 속 생활 양식 곳곳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禮)를 그토록 불편하게 생각해왔을까? 예(禮)가 특정 시대의 특정 예식을 뜻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예(禮)’라고 여기는 가부장적인 예식과, 공자 시대의 예식 그리고 우리 또래의 예식의 구체적인 모습은 모두 다 다르다. 공자가 상대의 손을 맞잡으며 인사하지 않았듯 우리 역시 두 손을 포개고 이마 높이까지 올리며 인사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우선 예식 자체가 너무 구체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시대적인 차이를 잠시 제쳐두고 예식 자체의 의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저자는 예식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로 예식은 사회를 조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식이 없다면 상대와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드는 것이 반갑다는 뜻인지, 혹은 당신의 팔을 뽑아버리고 싶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면 어떻게 타인을 마주할 수 있을까? 누군가 다가와 물을 튀기는 코로 등을 밀고 물을 튀기면 대부분은 적잖이 당황할 테고 그중 누군가는 무례하다 생각할 테지만, 아마존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핑크 돌고래들에게서 영험한 힘을 느끼는 그들은 핑크 돌고래가 인사를 건네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 맞는 환대를 할 수 있다.

 

     예란 모든 사람의 행동을 조화시키고 그들의 복지를 인간답게 확립시키는 그러한 인간적인 행위의 구조물(83)

 

 

 

2. 예(禮)는 떼창과 같은 것

 

     예식이 사회적인 조화를 고취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면, 거기에 인에게 어떤 행위가 ‘강제’된다거나 ‘자유’가 침해당한다거나 개인의 ‘희생’이 따른다고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사회와 개인을 곧잘 분리시킬 수 있는 오늘날 2030 한국인 중 하나라서, 친구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예(禮)가 문제라고 말하면 ‘그렇지는 하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예식의 반대가 “폭력, 협박, 명령에 의한 [강제적, 수동적인 행위]”(102)이고, 예식은 그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잘 배워 익힌 관습의 실천”(102)이다. 즉 예에 따르는 행동이 단순히 기계적이라거나 “공식에 메인 행동 수행”(90)이 아니라는 말이다. ‘해야 하는 일’이라기 보단, 함께 살아가며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말을 포함한) 행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예식은 어렵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타인을 잘 만나는 것일까? 예식은 분명 “많건 적건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행위 수행에 융합성이 있는 미묘하고 이지적인 행위”(90)이다. ‘초대받은 자리에서 수저를 먼저 들어도 될지 안 될지’는 ‘주어진 관습을 따를지 따르지 않을지’에 대한 고민이 될 수도 있지만, 식사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알리고 초대에 기쁘게 응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고민이 될 수도 있다. 전자의 “예식은 빈약하고 공허하며 죽은 것이다. 그 속에는 혼이 없다.”(30) 후자가 비로소 잘 실현되었을 때 진정한 의례가 될 수 있다. 어쩌면 그간 예식에 대해 가해진 비판들은 예식이 제대로 행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식을 행하는 데 다들 실패했기 때문에 생긴 아우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는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를 생동적으로 살려 내기 위한 인간 고유의 형식인 것이다.(29)

 

     예식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 곧 ‘자유’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예식은 “상호간의 깊은 신뢰와 존중이 항상 일반적,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32)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존중하는 마음이 중요하고 또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지만, 마음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실제로 그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뤄져서 상대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상호 존중 행위가 실현되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타인은 그것을 놓칠 수 있다. 애정하는 관계에서 오해로 인한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많이 발생하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예를 실천하는 행위는 곧 타인에게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임과 동시에, 상대와 함께 그것을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에 의해 규제 받지 않는 방식”(92)을 택한다는 것은 “타인을 희생시킴으로써 행위자 자신의 중요성을 높이려는 것”(92)이 된다. 즉, 예를 외면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졌어도 쉽게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이 주위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을 그와 함께 예에 참여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타인들을 자신과 같은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대해 주었는지가 밝혀진다(91)

 

     예식에 ‘희생’이 따른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즉 예식은 오로지 ‘사회’만을 위한 게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공자는 개인과 사회를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않았다. 때로 이러한 예식은 우리가 어떤 존재와 소통하고 있으며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예식의 두 번째 의미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고취시킨다. 사람들은 가수의 노래에 맞춰 손을 흔들고 떼창하며 희열을 느끼고, 오랜만에 만난 그리운 사람과 사전 약속 없이도 서로에게 뛰어가 강하게 끌어안으며 전율하기도 하고, 퀴어문화축제에서 사회적으로 보기에 낯간지러운 복장을 입고 낯간지러운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든 옆의 동료들을 보며 흥분하기도 한다.

 

 

     자기와 같은 타인들과 함께 어울려 이러한 예식이 아름답고 근엄한 공개적인 참여를 통하여 인간은 자기 인격을 실현하는 것이다.(41)

 

     즉 자기 인격 실현은 타인들을 완전히 배제한 관념적인 ‘자유’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조화와 연결 속에서부터 생겨난다. 꼭 인간이 아니더라도, 어떤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갖지 못한 사람은 언제든 생존의 문제를 겪게 될 수 있다.

 

 

 

     <이크스튜디오> 친구들과 <섭식장애인식주간> 라이브 송출을 하던 중, 한 참가자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너는 온 세상이 거울인 사람 같아.” 모든 곳에 자신을 비춰보았기 때문에 어떤 타인을 만나더라도 거기엔 오로지 자신밖에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 참가자는 그 당시에 굉장한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게 그 사람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친구들이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때때로 그건 청년이 장년에게서, 여성이 남성에게서, 동물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감수성이 없는 사람에게서 받는 위협으로부터 기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위협은 예(禮)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禮)가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연결을 끊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연결되어야 생존의 위협을 덜 느낄 수 있다. 악수도 하고 떼창도 하고 있는 우리는 이미 예(禮)와 무관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보면 어떨까, 하고 나를 포함한 우리 또래의 친구들에게 말해보고 싶다.

 

     인간 생활은 그 전체면에 있어서 마침내 하나의 광대하고, 자발적이며 거룩한 예, 즉 인간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궁극적인 관심”이었다. 개개 인간들의 삶 자체보다 더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이 바로 이점이라고 공자께서는 거듭거듭 말씀하셨다. (42)

 

 

댓글 7
  • 2023-03-13 14:07

    요즘 토요일 저녁 <예기>를 읽고 있는데, 같이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아요^^

    • 2023-03-15 09:00

      저 <예기> 진짜 공부하고 싶어용!

  • 2023-03-13 16:24

    고은이가 친구들과 '예'에 대해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네요.

  • 2023-03-13 19:50

    저는 이 책이 진짜 좋았었어요.
    제가 학이당 처음 시작하고 논어를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때도 그놈의 '예'가 늘 문제였거든요. ㅋㅋ

    저는 핑거렛 이 책의 핵심은 부제에 있다고 생각해요.
    "The Secular as Sacred"- 어떻게 번역하는게 온당할까요? 성스러운 세속적 인간들? 성스러운 세속적 행위들? ㅎㅎ

    그리고 예와 관련해서 핑거렛이 하는 핵심적 메세지는, 그것이 규범이 아니라 '수행성'이라는 거에요. (핑거렛은 오스틴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한번도 개인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그 점에서 핑거렛의 예론은 인간을 개인으로 보고 그 개인이 사회를 만든다고 접근하는 서양 근대의 정치학과 완전히 결별하죠)
    매번 의례를 수행적으로 행함으로써만 (그 의례의 어떤 magic을 통해) 공동체를 재구성한다는 거에요.

    솔직히 읽은 지 너무 오래되어 약간 가물가물하지만....전 이런 내용에 엄청 꽂혔었어요.

  • 2023-03-13 22:01

    내한공연 온 월드스타들이 제일 처음 놀라는 게 떼창이라던데.. 얼마전 팬들의 떼창에 감격해서 눈물흘리는 스타들 영상을 봤던지라.. 떼창의식(례)에 바로 공감함~~

    *비밀메모가 필터링되었습니다

  • 2023-03-14 01:42

    제가 그러니까 어흠... 떼창 일세대로서(메탈리카 오아시스 가사 외우던 사람, 지금은 까먹은 사람) 고은님 글이 반가웠습니다 ㅎㅎ 그런데, 역시나 저는 여전히 무지렁이 상태라 의문인 게, 이런 설정으로 쭉 가면 유가적인 '예'와 기타 의례들 사이의 변별점이 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위의 문탁샘의 댓글에 나온 '수행성'을 토대로 '공동체'를 구축한다고 하면, 이를테면 서양 근대의 '개인과 공동체'도 비슷한 도식을 설정할 수 있지 않나 싶어서요..... 읽어봐야겠습니다. 1234가 거의 알라딘 장바구니 축제가 되어갑니다...

    • 2023-03-15 09:31

      ㅎㅎ 맞습니당 딱 고 부분이 이 책의 뒷 부분에 나온답니다! 책 제목은 '예'에 관한 것처럼 되어있는데, 그 부분을 풀려면 '인'이 나와야 하거든요. 정군쌤이 짚으신 부분이 딱 '인'에 관한 부분이랍니다. 쌤 이 책 절판이어요! 제가 여분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거 드릴게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