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철학학교] <차이와반복>읽기 시즌2 2장4절-3 요약 모음

정군
2022-07-13 13:28
317

시즌2가 벌써 끝이라니... 믿겨지질 않습니다 ㅎㅎㅎ

여기에 댓글로 올려주세요!

댓글 6
  • 2022-07-13 14:26

    한 페이지인데, 앞에서 얘기한 것 요약 같아서리......

     

    가마솥, 무의식의 본성에 대한 귀결들 4(p250-251)

     

    에로스와 므네모시네의 종합은 여전히 모호하다. 하비투스에 의한 첫 번째 수동적 조합에 비추어 보면 현실적인 것의 계열과 잠재적인 것의 계열은 발산하는 두 원환을 그리고 있다(서로 차용하고 양육하는 관계이다.p230.). 두 번째 수동적 종합의 원리이기도 한 ‘대상=x’에 비추어 보면, 이제 어떤 공존하는 계열을 형성하는 것은 매 순간 계속 이어지는 현실적 현재들이다. 이 두 준거점이 혼동을 겪고, 그래서 순수과거가 어떤 사라진 현재의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게다가 에로스의 삶은 순환주기로서, 혹은 순환주기의 요소로서 펼쳐진다. 이 요소에 대립하는 또다른 요소는 기억의 바탕에 있는 타나토스일 수밖에 없고, 이 요소는 사랑과 증오, 구축과 파괴, 인력과 척력처럼 조화된다. 근거 또한 여전히 모호하다. 이는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부과하는 원환 안에서 표상되기 때문이고, 자신이 원리적으로 규정하는 표상의 회로 안에 다시 요소의 자격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 2022-07-13 15:09

    (253~256) 죽음본능, 대립, 물질적 반복/요요

    나르키소스적 자아가 잠재적 대사들의 전치를 감당하고 현실적 대상들의 위장을 책임질 때, 우리는 세 번째 종합안으로 들어와 있다. 말하자면 시간은 므네모시네의 모든 가능한 내용을 포기했고, 이를 통해 에로스가 그 내용을 끌어들이던 원환(므네모시네와 에로스의 종합)을 깨뜨려버렸다. 이 시간, 빗장이 풀린 텅 빈 시간은 철저히 형식적이고 정태적인 순서, 압도적인 총체(집합), 비가역적 계열을 이루고 있다. 이 시간이 죽음본능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죽음본능; 죽음본능은 에로스와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죽음본능은 전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종합을 증언한다. 이 종합에서 에로스와 므네모시네의 상관관계(두번째 종합)는 나르키소스적 자아와 죽음본능의 상관관계로 대체된다. 이 때의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기억(므네모시네)을 갖지 않는 건망증 환자이다. 반면 죽음본능은 에로스와 무관한, 탈성화(脫性化)된 상태에 있다. 나르키소스적 자아가 소유하는 것은 죽은 신체뿐이다.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대상(잠재적 대상과 현실적 대상?)을 잃어버리는 순간 동시에 신체도 잃어버렸다.

    프로이트는 나르키소스적 자아와 죽음본능의 관계를 깊이 통찰했지만, 리비도가 탈성화되어 중성적 에너지로 탈바꿈 될 때만 자아로 집중된다고 보았다.(<자아와 이드>) 프로이트의 분석에 대해 들뢰즈는 의문을 제기한다. 왜 프로이트는 죽음본능이 이 중성적 에너지보다 먼저 존재하고, 죽음본능이 중성적 에너지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으로 설정한 것일까?

    죽음본능과 탈성화된 에너지를 다른 것으로 구분한 이유는 프로이트적 발상법이 갖고 있는 견고한 전제 때문이다. 하나의 전제는 프로이트의 이원론적 갈등모델(성적 충동vs죽음 충동) 이다. 또 하나의 전제는 반복이론을 주재하는 물질적 모델(원초적 항의 설정+무생물로의 복귀)이다. 하여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본성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 둘의 관계는 대립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둘 사이의 차이가 리듬이나 진폭의 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타나토스는 무기물로의 회귀라는 의미에서 헐벗은 반복의 역량과 동일시되고, 이 역량은 에로스에 의해 방해받고 있을 뿐이라고 가정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프로이트가 일관되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을 무생물로 돌아가는 것으로, 단지 과학적이고 외생적인 것으로만 정의하는 것이다. 그는 무의식 안에 있을 수 있는 죽음의 전형이나 죽음의 현시를 모두 거부한다. 죽음에 대한, 그리고 죽음본능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런 생각을 들뢰즈는 편견이라고 본다. 그 편견 때문에 프로이트는 반복의 궁극적 원리를 전치와 위장들 저편에서, 어떤 물질적 모델에서 찾아내려 한다.[프로이트적 유물론 비판!]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들뢰즈에게 무의식은 갈등적 구조도, 대립적이거나 모순적인 구조도 아니다. 무의식의 구조는 다만 물음과 문제를 이루는 구조일 뿐이다. 게다가 반복은 어떤 물질적 반복이 아니다. 오히려 전치와 위장이 반복의 요소들이다. 반복은 전치와 위장이라는 요소들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물질적 모델이 아니라 생명체 안에 현전하고, 어떤 전형을 갖춘 주관적이고 분화된 경험으로 현전한다. 죽음은 물질적 상태가 아니라 물질적 상태를 전적으로 포기한 어떤 순수한 형식에 상응한다. 죽음은 어떤 부정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죽음의 전형은 불멸의 생명과 물질의 대립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차라리 문제틀의 마지막 형식이고, 문제와 물음들의 원천이며, 모든 대답 위에서 문제와 물음들이 항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표지이다. 죽음은 (비)-존재를 지칭하는 ‘언제 그리고 어디서?’이다. 모든 긍정은 그렇게 지칭되는 (비)-존재에서 자양분을 얻고 있다.(들뢰즈의 죽음본능 보충은 다음 챕터로 이어집니다.)

    (저는 그림은 못그리고.. ㅎ 뭔 소리인지 하도 헷갈리는지라.. 요약을 도표로 정리해보았습니다.^^)

    항목

    프로이트

    들뢰즈

    첫 번째 종합

    리비도 집중(에로스)과 쾌락원칙(이드)

    묶인 흥분, 이드의 조직화(현재의 종합, 칸트의 감성론)/ 하비투스에 의한 수동적 종합/쾌락원칙을 넘어서1(쾌락원칙의 정초)

    두 번째 종합

    므네모시네와 현실원칙(자아)

    잠재적 계열과 현실적 계열의 두 원환으로의 분화된 형식, 수동적 종합의 원리는 대상=x/대상=x의 전치와 위장으로 반복을 설명/에로스-므네모시네의 종합(과거의 종합, 칸트의 분석론)/쾌락원칙을 넘어서2 (쾌락원칙의 근거)

    세 번째 종합

    성적 본능과 죽음 본능의 대립(초자아)

    나르키소스적 자아와 죽음본능의 상관관계, 탈성화된 에너지가 곧 죽음본능

    나르키소스적 자아

    리비도가 탈성화, 중성적 에너지로 탈바꿈 되었을 때 자아로의 역류와 귀환이 일어남

    전치를 감당하고 위장을 책임진다. 기억이 없는 건망증환자(첫번째 종합에서의 환각적 만족감, 두 번째 종합에서의 잠재적 초점을 응시하며 나르키소스적 이미지로 가득찬 수동적 자아와는 다르다)

    죽음본능

    무기적 무생물로의 회귀/ 에로스와 대립/ 물질적 모델/ 생명과 대립 항/ 부정과 제한

    빗장 풀린 시간, 펼쳐진 미로/모든 물질을 전적으로 포기한 시간의 텅빈 형식/물음의 원천이자 긍정

    무의식

    성충동과 죽음충동의 대립적 구조

    물음과 문제를 이루는 구조

    반복

    원초적이고 궁극적 항의 반복, 물질적 모델로의 회귀

    잠재적 대상의 전치와 현실적 대상의 위장 안에서 짜여진다

  • 2022-07-13 19:34

    들뢰즈는 '죽음'을 '문제틀의 마지막 형식', '문제와 물음들의 원천', '문제와 물음들의 항구적 존속'을 말해주는 표지라고 말한다.(256쪽) 더불어 그것은 모든 '긍정들'의 '자양분'이다. 도대체 '죽음'의 어떤 점이 그렇다는 것일까?
    여기서 들뢰즈는 블랑쇼에 의지해 '죽음'의 '두 측면'을 지적하는데, 이 분할은 프로이트의 '죽음충동' 해석을 협소한 규정으로 비판하는데 사용된다. 죽음의 첫번째 측면인 '인격적 죽음'은 나-자이 사이의 차이의 폐기, 모든 것이 무화된 무기물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프로이트가 해석한 '죽음충동'과 같다. 이때 '차이'는 (차이의) 무화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 존재했다는 점에서 극복해야할 것, 부정적인 것이 된다. 말하자면 들뢰즈가 보기에 프로이트는 이른바 '과학성'에 대한 강박 때문에 '죽음'을 그렇게 외면적인 수준에서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떻게 외면적인 파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죽음의 두번째 측면은 '비인격적-도래하고 있는 죽음'이다. 블랑쇼가 말하길 이 죽음은 '급진적 전복을 끌어안고 있'고, 이 전복 속에서 그것은 '내 능력의 바깥으로 나를 내던'진다. 결정적으로 '죽음'은 '모든 실재성을 결여한 무한정자'가 된다고 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기관' 이전의 상태, 모든 실재성을 결여한 어떤 개체 이전의 상태를 지시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본능'이 모든 긴장이 사라진 강도=0의 상태하는 점에서 쾌락원칙의 극한에 다름 아니라면, 따라서 거기에 실질적인 '죽음본능'이라는 게 없다면, 그 이유는 프로이트가 이러한 '죽음'의 두 번째 측면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그 둘을 구별한다면, 그것은 그저 명시적일 뿐이다.
    죽음의 두번째 측면은 '쾌락-에로스적 종합'과 '죽음-타나토스적 종합'으로 실질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때 '죽음-타나토스적 종합'은 '에로스'의 탈성화, 다시 말해 대상을 갖지 않는 욕망으로 정의된다. 그렇게 '기억내용'(대상)을 잃은 '리비도'에 상응하여 '시간'이 탈구된다. 다시 말해 '시간'이 과거(잃어버린 잠재적 대상), 현재(위장된 현실적 대상), 그것들의 반복이라는 '원환적 형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은 무차별적인 직선이 되고 그것은 시간의 순수형식, 텅빈 시간의 형식이다. 그러한 시간의 순수형식이 출현하는 것과 동시에 죽음본능이 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슬쩍 '사유의 문제'를 언급한다. '사유과정일반'은 어째서 '탈성화된 에너지'와 관련되는 것일까? 나아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들뢰즈는 '사유'의 선천성/후천성을 묻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사유'가 이 국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나르키소스적 자아가 더는 자기 안에서 만족을 취하지 못하는 국면에서 발생하는 역류, 어떤 대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넘어서려는 극복 속에서 사유는 분만된다. 말하자면, 여기에도 '이전'의 소멸로서 '죽음'이 있는 것이다.

    무의식은 세 가지를 모른다. 그것은 부정 없는 긍정(문제와 물음)이기 때문에 '아니오'를 모른다. 그것은 인칭적 죽음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것들은 시간의 원환 안에 묶여있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모른다. 들뢰즈는 무의식이 '비-존재를 살기 때문'에 '아니오'를 모르고, '죽음의 이면을 포착'하기 때문에 '죽음'을 모르며, '지나가는 현재의 경험적 내용'에 종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운동에 종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고서는 로브그리에의 예를 통해 끈, 얼룩, 지우개 각각에 상응하는 '반복'을 무의식을 구성하는 종합으로 정리한다. '끈-묶기'는 '아니오'에 상응하는, 긍정만 있는 '현재 위에 시간을 정초'하는 종합이다. 두번째 종합은 '얼룩-죽음-순수과거'로 '시간'의 '근거'에 해당한다. 마지막 세번째 종합은 '지우개-죽음-무바탕'이다. 여기서 정초되고 근거지워진 '시간'은 추락한다. 이 세번째 종합은 '미래'에만 관계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현재와 과거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이 '파괴'가 말하는 것은 어떤 변형이다. 그렇게 시간은 깨끗한 원환에서 굴곡진 원환으로 변형된다. 여기서 밝혀지는 바 '죽음'은 '영원회귀'의 얼굴이다.

  • 2022-07-14 06:41

    세 번째 종합 혹은 세 번째의 ‘넘어서’ : 나르키소스적 자아, 죽음본능, 시간의 텅 빈 형식

    251-253

     

    세 번째 종합은 타나토스의 종합이다. 잃어버린 대상인 잠재적 대상과 변장한 대상인 현실적 대상은 둘 다 나르시시즘을 끌고 가는 강력한 동기가 되고, 리비도가 자아로 역류하거나 회귀할 때, 자아는 두 노선 사이의 차이를 내면화하고 있다. 한 노선 안에서는 전치된 것으로, 다른 한 노선 안에서는 위장된 것으로. 이 두 계열은 직물처럼 얽혀, 자아의 양태변화를 초래한다. 이 양태변화는 나르키소스적 자아가 수동적으로 체험하는 양태변화이고 이런 체험 과정에서 자아의 배후에는 다시 자신에게 타자로 다가오는 어떤 나가 있다.

    나의 균열은 단지 시간, 순수하고 텅 빈 형식으로서의 시간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시간 속에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전혀 시간적인 내용을 구성하지 못한다. 나 안에서 시간의 형식은 시간의 순서, 집합, 계열을 이루고 있는데, 텅 빈 시간의 형식적이고 정태적인 순서는 나르키소스적 자아의 분할 혹은 응시의 조건들을 나타낸다.

    나르키소스적 자아는 한 편으로는 어떤 결핍의 양태, 이드의 양태를 통해 반복하지만(이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적 자아에 고유한 양태, 동등하게-되기의 양태(사이)를 통해 반복하고, 또 초자아의 양태를 통해 반복한다(이후).

     

  • 2022-07-14 09:02

    4절 마지막부분

    만약 영원회귀와 죽음에 어떤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회귀가 일자의 죽음을 부추기거나 암시하기 때문이다.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개념에 동등하게 -되기가 유사하게-되기를 배제한다. 동시에 그런 되기와 생성 배후에 있는 결핍에 의한 조건을 배제한다. 오히려 그것은 허상, 시뮬라크르같은 과도한 체계들에 관계되어 있다. 차이와 우연을 매순간 긍정하고 전개시키고 주름을 편다고 해야만 영원회귀와 미래가 본질적인 관계에 놓일 것이다. 이것은 미리 존재하는 규칙이 없고, 자기 스스로 만드는 법칙들 속에 있으므로 매번 이기는 놀이이다. 복권이 강렬한 우연이고 코스모스 안으로 주기적으로 침투하는 카오스라고 할 때, 사람들은 무한하게 추첨하려면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보르헤스처럼) 시간이 무한히 쪼개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묶기의 과정은 언제나 던져진 물음이나 취해진 결정들과 똑같은 외연을 갖는 어떤 긍정의 총체 안에서 이루어진다.--->요것은 무슨 뜻일까요?

     

  • 2022-07-14 10:58

    요약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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