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차 공지> 아주 편안한 죽음(보부아르) - 우리 모두 메모를!!

문탁
2023-04-24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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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면?

 

저는 엄마의 죽음과 관련된 책을 여러권 읽었습니다. 권혁란의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도 좋았고, 최현숙의 <작별일기>도 좋았지만, 음 보봐르의 이 책은, 뭐랄까, 좀 특별했습니다. 아마 그녀의 글에서 자꾸 나의 엄마가 겹쳐졌기 때문이었을까요?

 

 

 

 

"엄마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털어놓을 줄 몰랐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자신을 명확하게 직시하거나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탓이었다. 엄마는 권위 있는 사람들 뒤에 숨어서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나와는 달리 모든 사람과 견해를 같이하는 편을 택했다. 그러고 나서는 마지막에 말하는 사람의 말이 옳다고 여기곤 했다.....엄마는 우리에게 자신이 '바보'처럼 비춰질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머리속을 계속해서 모호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하면서 절대로 놀라는 법 없이 모든 말에 '응, 응'하고 대답하곤 했다. 엄마가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갖추게 된 것은 말년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희로애락 속에서 인생의 가장 거친 풍파를 겪어야 했던 시절의 엄마에게는 자기 삶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견도, 언어도 없는 상태였다. 엄마가 질겁하면서 불안해하는 증상을 보이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2. 애도란 무엇일까?

 

네, 이 책은 '애도'에 관한 책입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는 죽음, 상실, 애도에 대해, 사적 애도와 공적 애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제 희망은, 이런 읽기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엄마의 죽음이든, 형제의 죽음이든, 친구의 죽음이든, 혹은 세월호의 죽음이든, 이태원의 죽음이든, 애도에 대한 다른 개념과 형식을 발명해내는 것입니다.  애도의 글쓰기도 그 중 하나가 되겠죠^^

 

"나는 애도가 언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지,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애도가 언제 충분해지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이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기존 생각을 바꿨다. 그는 성공적 애도가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바꿀 수 있게 된다는 의미라고 의견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원래 멜랑꼴리와 관련되어 있는 합체가 애도라는 과제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애착이 대상으로부터 철회되고 새롭게 형성될 수 있으리라는 프로이트 초기의 희망사항은 희망의 기호로서 대상들 사이의 어떤 호환가능성을 암시했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대상의 완전한 대체가능성을 우리가 지향하기라도 하듯이 다른 사람을 잊는다거나 다른 무엇이 대상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 성공적인 애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아마도 애도는 미리 그 변화의 본격적인 결과를 알 길이 없는데도 그런 변화를 겪겠다고 (어쩌면 변화를 감수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동의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 뭔가를 잃는다는 경험이 있는가 하면 또 상실이 초래하는 변화라는 결과가 있다. 후자는 그려질 수도 계획될 수도 없다. 선택을 시도할 수는 있지만, 이 변화의 경험이 어떤 층위에서 선택 자체를 와해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슬픔이란 파도처럼 밀려오는 법이어서, 목표, 기획, 계획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한다 해도 실패하고 만다. 무너지게 되는 때가 있다. 지쳐 쓰러져도 왜 그런지 모른다. 우리의 의식적인 계획, 우리 나름의 기획, 우리 자신의 앎과 선택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슬픔은 우리를 사적 존재로 만든다고, 즉 슬픔이 우리를 고독한 상황으로 되돌려놓고 그런 점에서 탈정치화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슬픔은 복잡한 수준의 정치공동체에 대한 느낌을 제공해준다.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이론화할 수 있도록 함의를 갖는 유대관계를 전면에 부각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나의 운명이 애초에 또 종국에 너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다면, 우리가 쉽게 반박할 수 없는 관계성이 '우리'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48~50)

 

 

 

 

 

3. 위대한 여성 선배들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하하하

 

발끝의 끝이라도 좇아가 보도록 애써봅시다.  잘 읽고 많이 생각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실천하고!!

저도 돌봄노동의 고단함을 넘어 다시 엄마와의 윤리적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번엔 수진샘이 a4두 장 정도로 발제(내용요약은 아니겠죠?)를 해오시고

다른 분들은 함께 논의해보고 싶은 내용 혹은 주제를 두, 세개 정도 뽑아서 댓글로 달아주시면 되겠습니다.

댓글 9
  • 2023-04-26 16:47

    실수의 연속... 죄송합니당!
    다시 올립니다.

  • 2023-04-26 17:27

    책을 읽으며 ‘엄마와 나'의 모습이 겹쳐져 여러번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엄마를 간병하는 시간동안 보브아르는 엄마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인생에 걸쳐 만들어지고 견고해진 엄마에 대한 오해를 풀었습니다. 물론 보브아르 자신의 감정만 변한 것이 아니라, 엄마 또한 죽음으로 향해 가면서 비로소 자기자신만을 위하게 됐고, 이전과는 다르게 삶에 애착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보브아르의 시각에서요. 공지글에 ‘애도란 무엇일까?’라고 올라와서 연결하다보니, 대상을 ‘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나와의 관계에서 정해진 위치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 대상이 보이고, 그 삶에 연민이 느껴지고, 오해가 풀리고, 그럼으로써 화해와 관계의 복원(물론 자기 안에서의 화해와 복원이다)이 일어나는, 그 과정이 애도일까요? 애도의 과정을 잘 겪어야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명료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류의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도'에 대한 학문적 고찰이 이리 심오한지 잘 모르던 터라 초록창에 검색했습니다. 지식백과를 보니, ‘애도’는 엄청난 것이란 생각이….
    “상실한 대상이 사람이 아닌 경우에도 애도라는 용어를 사용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조국의 자유 혹은 이상에 대한 신념과 같은 추상적 실체에 대한 표상을 상실할 때도 슬픔과 애도가 발생할 수 있다. 사고나 외과 수술로 인해 신체 일부를 상실하거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신체적 능력을 상실할 때에도 애도는 필요하다. 그밖에도 마음을 쏟았던 무생물적 대상(예를 들면, 집), 안정감의 원천이었던 어떤 것(직업), 중요한 분리(이혼, 친구의 이사, 자녀의 독립, 분석의 종결)와 같은 상실들도 애도를 필요로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시 저는 기-승-전-갱년기. 저는 지금 저의 젊음(?), 그 시절을 쏟아부은 일(직업)의 상실(또는 이별)을 겪으며 애도 기간에 있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나의 전반부 인생을 잘 정리하고 후반부 인생을 살아갈 힘이 되기를 바라며 제가 해보는 모든 일들을 애도의 행위라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물어보았습니다. (대체로 뻘짓이지 싶은데...그런 줄 알았으면 좀 잘 할 걸 하는 대답이...). 모두 각자 어떤 상실을 경험하고 살텐데 그때마다 여러분들은 잘 애도하셨나요?

    예고된 나의 죽음을 나만 모른다면? 엄마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은 것. 그건 그 당시 그 사회의 일종의 관습일 수도 있어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사자에게 병명과 상황을 정확히 알리지 않은 것은 온당한가? 연명치료는 또 어떤가? 지금 나에게도 고스란히 통하는 질문이라 생각해볼 문제.

    사회적 애도. 공적인 애도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세월호가 제일 먼저 떠오르고, 저는 아직도 그 후유증이 있는지 이태원 참사는 웬만하면 관련 뉴스를 피했습니다. 다수는 아니지만, 죽음을 두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고, 정치세력들은 유불리를 따져 각자의 입장에 따라 차이나는 주장들을 하고... 우리 사회가 무참한 사고 앞에서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 2023-04-26 17:28

    수진샘 메모글 잘 보았습니다. 수진샘의 메모글 보고 '아주 편안한 죽음'이 더 가깝게 와닿았어요.
    저도 수진샘 글처럼, 애초에 병명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솔직하게 얘기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어머니도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매일 매일이 소중했으니까)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까 생각도 해보고, 당신의 지난 삶도 되돌아보고, 어머니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과 인사도 했다면, 그게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얘기하기를 꺼려하고 있죠.(죽는다는 말을 내뱉는 것 만으로도 부정타는 것인양 쉬쉬하는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이 건강할때 오히려 더 죽음에 대해서 많은 얘기가 오고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야 진정한 애도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기계적으로 일하는, 환자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 환자를 성과를 낼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의사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답답했습니다. 죽음이 무섭다기 보다, 병에 걸려서 이렇게 의사가 계속 나를 괴롭히게 될까봐, 전 그게 더 무섭더라고요. 환자 가족들의 죄책감을 앞세워서 연명치료를 계속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환자의 죽음이 연장된 기간이 곧 자기의 성과인양 강조하는....ㅠㅠ

    "우리는 엄마가 임종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또한 그걸 지켜보면서 모순적 감정을 느끼는 우리의 처지로 인해 특히나 힘들었다. 고통과 죽음 사이에 경주가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죽음이 이기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죽은 듯 잠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시계를 매달아 둔 검은색 리본이 미미하게나마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엄마가 입고 있는 하얀색 실내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심스레 관찰하곤 했다. 이게 마지막 경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106쪽)
    많이 공감되는 부분이었어요..ㅠ

    아프면서 어머니가 어머니 자신을 방어할 필요없이,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일에 전적으로 몰두하면서 원망의 감정에서 벗어나는 모습..(자신을 옭아맸던 끈에서 벗어난 듯, 죽음에 닿아서야 진정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아픈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동안 소원했었던 엄마와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엄마를 이해하게 되고 멀게 느껴졌던 모녀 사이의 거리가 좁혀져가는 모습이 인상깊었어요..

  • 2023-04-26 17:29

    보부아르에게 엄마의 죽음이 특별했던 것은,
    죽음을 앞에 둔 엄마를 '돌보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돌봄의 효과가
    동등한 입장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과는 다른
    상대를 감싸 안고 스며들어서 그의 방식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때,
    그동안 내가 구축해온 가치관과는 다를 지라도 그의 평안을 위해서 행동하고 판단하게 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있기를 끊임없이 바라는 엄마와 그녀가 의지하는 (그 당시의) 의료체계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혼란스러워하고 때론 숨기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모순된 사고와 행동을 하는 저자의 모습은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엄마에게) 돌봄의 대상이 되는 경험은 있으나
    누군가를 돌보는 경험은 없었던 저자에게 죽어가는 엄마를 돌보기 위해선
    그녀가 지금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것이 그녀의 삶과 어떤 관계와 의미가 있는지 끊임없이 되살리고 현재와 화해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이별하고, 그 이별을 애도하는 최고의 마음은 그를 돌보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저는 이 책을 읽었습니다.

  • 2023-04-26 17:56

    -이런 참고문헌이 있었네요. 모녀 서사이기도 하면서 엄마 간병과 죽음의 과정을 둘러싸고 생겨날 수 있는 많은 쟁점을 담고 있는 책이 1960,70년대에 쓰여졌다니...... 살만큼 살았으니 죽는 게 마땅하고 그건 별 충격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보봐르가 엄마가 죽어가는 과정, 결코 산뜻할 수 없는 이 과정을 30일 동안 직면하면서 엄마와 죽음을 새롭게 인식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과정이 인상 깊었어요. 죽음은 정말 기회구나, 산 자에게도 죽어가는 자에게도... 보봐르는 선물을 받았구나 싶었어요. (그게 30일 만에 끝났다는 게 더더욱 좋은 선물이라는 증거...아흑)

    “불안한 내색을 감추길, 가급적 의구심을 드러내지 않길 엄마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일평생 그래 왔듯, 여전히 엄마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느낌과 자신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94) 이 부분을 읽으며 아픈/죽어가는 사람에게 우리가 취하는 태도 혹은 아픈/죽어가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취하는 태도와 닮아있다고 느꼈습니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것, 계속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하지만 그게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라면? 옆에서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지...

    한편으로는 아픈/죽어가는 사람과 소통한다는 건 정말 세심한, 훈련이 필요한 일일 텐데 그걸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가(세대 차이, 문화적 차이 등) 심지어 ‘부모’인 사람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엄마가 아닌 아빠라면? 미워하고 짜증났던 감정을 걷어내고 죽어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연민을 갖고 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패혈증으로 생사를 오갔던 아빠를 간병했던 경험이 있고 또 아빠가 알츠하이머 초기인 상황이라서 읽으면서 내내 착잡했네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참고문헌이 절실합니다.

    -다른 하나는 공부 방법론에 관한 것인데요. 문탁 쌤이 “질문을 정식화하고 개념화하라”고 하셨는데 개념화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개념화가 필요한 이유는 개별의 것으로 흩어질 수 있는 경험/생각들을 개념화함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어서? 인가요? (저는 주로 경험을 통해서 통찰을 얻는 사람인데 ‘나이듦과 자기서사’를 하면서 제가 했던 경험들이 언어를 갖게 될 때 즐겁더라고요.)

  • 2023-04-26 18:09

    “나는 P박사에게는 호감이 있었다. 그는 잘난 척하지 않았고 엄마와 대화를 나눌 때면 엄마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으며 나의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답해 주었다. 반면 N박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세련되고 소란스럽고 활달하며 자기 솜씨에 도취된 그는 엄마를 회복시키는 일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그에게 엄마는 사람이 아니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일개 실험 대상에 불과했다. 우리는 그가 무서웠다. 엄마에게는 연로하신 친척이 한 분 계셨는데, 여섯 달 전부터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엄마는 “사람들이 내 생명을 그런 식으로 연장하려 하거든 허락해서는 안 된다. 끔찍하기도 하지!”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만약 N박사가 엄마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기록이라도 세울 작정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는 위험한 적이나 진배없었다.“ (71쪽)

    위 구절을 읽다가 영화 ‘아무르’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아내의 갑작스런 마비라는 사건 앞에서 평화로운 노부부의 삶은 변모하고, 실존적인 선택과 결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였다. 아내가 요양 보호를 받게 되는 상황에서 아내의 머리를 빗겨주는 요양보호사의 돌봄 태도는 다소 어린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요양보호사의 태도에 대해 남편은 아내를 위해 어떤 결정을 하고, 이후에도 중요한 결정을 아내의 존엄을 위해 했다고 생각한다. 늙어감을 바라보는 시선, 존엄함 삶과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였는데, N박사와 P박사가 엄마를 살피는 태도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늙어감과 존엄한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존재 그대로의 삶을 유지하도록 살피는 돌봄은 어디에서부터 어려워진걸까. 그에 대한 질문이 이어져서...

    “당신이 어머니에게서 몇 년 더 사실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셈입니다.” 라고. 내가 엄마를 죽게 내버려 두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였다.“(79)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누군가가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라며 헛되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때 기어코 그를 살려내려 하는 이유가 대체 무언지 나는 궁금해졌다. 심지어 죽음이 이기고 있을 때조차도 가증스러운 기만이 벌어지고 있었다!“....엄마가 아무도 없는 저편에서 홀로 애쓰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낫고자 하는 집념, 인내심, 용기,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엄마는 기만당하고 있었다. 엄마가 겪는 고통 중 그 무엇 하나도 보상받지 못할 테니 말이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80)

    푸코는 인구의 정상화라는 이름 아래 작동하는 생명권력이 우리의 삶과 늙어감, 죽음에 정치적으로 개입함을 설명하였다. 의사들이 엄마를 살리려고 하는 일에서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이자 존엄한 주체는 사라지고, 일종의 실험이자 연구 기록의 어떤 대상이 드러난다. 늙어감은 고통 그 자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리고 생명권력은 살리려는 권력으로서 작동한다는 점을 기억해본다. 생명권력 앞에서 고통 받는 얼굴은 소외되고 있었다. 의학 기술에 대한 굴복으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이 나 역시 보부아르가 자신의 잘못 ‘나한테 좋은 거니까’라는 말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그 대목에서, 자신을 속이는 그 기만 앞에서, 나는 말을 잃는다. 이 점에 어머니의 고통 앞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는 가해자가 된다. 나 역시 이 지점에서 확언할 수 없기에 잠재적 가해자라 생각한다.

    “나를 바보 같은 사람들에게 맡겨 놓지 마라” 이렇게 호소할 수 있는 이가 한 명도 없는 처지에 놓인 모든 사람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 여전히 끔찍한 고통속에서 죽어 가는 이들이 존재한다. 다인 병실에서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면 빈사 상태에 빠진 환자의 침대를 칸막이로 가린다. 그런데 그 환자는 본 적이 있다. 그다음 날로 비게 될 다른 침대들을 이 칸막이가 둘러싸고 있던 모습을. 그래서 그는 알게 된다. .... 엄마는 아주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운이 좋은 자의 죽음인 셈이었다. (138)

    나와 타자의 죽음의 연결점. 어떤 상실 혹은 어떤 죽음이 개인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을 때 혹은 누군가의 죽음을 사회적 죽음이 아닌 개인의 기질상의 정신상의 이유로만 치부할 때 개체의 죽음은 영원히 하나의 부당한 폭력, 사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대체 불가능한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고령 인구 가운데 어떤 사람의 죽음 혹은 수학여행 간 사람들의 죽음, 이태원에 간 사람들의 죽음, 학살당한 사람들의 죽음을 이제 그만 그들을 잊으라고 말할 때,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할 때,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할 때, 혹은 왜 애도의 자리, 애도의 시간을 보내냐고 거칠게 쏘아댈 때 죽음은 여전히 고유한 주체의 영역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집단의 죽음이 되어 버린다.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는, 잊힌 여인에 불과했던 엄마가 한 명의 주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146) 죽음에 대한 애도는 한 주체의 새로운 탄생을 이루는 일이다. 애도는 분명한 타자의 몫이다..

    존엄함과 돌봄, 신앙과 실존적 두려움, 내부와 외부의 가부장제, 사적애도와 공적애도... 여러 지점에서 머무르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근래에 4.16을 보낸 후였고,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버틀러의 글을 보고는 애도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애도는 변화를 감수하겠다는 의지이자 동의라는 글을 여려번 봤던 것 같습니다. 애도라는 윤리적 책임. 애도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점, 기억을 한다는 것은 생각함과 변화함을 멈추지 않는 일이라는 점. 그래서 습관적으로 의례적으로 할 수도 없는 일임을 부끄럽게 다시 다잡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 2023-04-26 18:22

    "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야.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무서운거지". P19
    자신이 어떻게 치료받고 어떻게 죽을지 정확하게 알려야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애도 할 시간이 필요한것 같다.

    위암수술을 하고 항암을 한적이 있다.
    죽음이 무서웠다. 어느날 내가 죽을까봐 불안해 하는 나를 자각하며 죽을까 불안한것보다는 이별이 두려워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몸의 기능이 점점떨어지는것을 보는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온전한 의식을 가지고 다른경계로 간다는것은
    ...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석달전 뇌출혈로 91세인 친정어머니의 응급수술을 기다리며 만감이 교차되었다.
    뇌출혈로 수술하지 않으면 돌아가신다는 의사의 말에 두번의 수술을 하고 두달을 고생하시다 간 아버지도 생각났다.
    어머니는 수술을 해야 하는거냐고 물었다.
    엄마의 표정은 당혹스러워 하셨고 돌아가실 준비가 안된 모습이었다. 수술을 결정하시고
    지금은 회복이 되었다.

    지금은,죽는것까지 사는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별은 자연스러운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노년으로 가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 2023-04-26 19:18

    보부아르가 병실에서 밤을 보내게 되는데 죽어가는 엄마의 병실에 불이 꺼지자 더 죽음에 가까워지는것 같다고 하는 장면,
    동생이 말하길 엄마 몸이 썪어가고 있다고 하는 장면,
    붕대를 다시 감을 때 보게되는 엄마의 몸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들,
    죽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이 무척이나 슬프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죽어가는게 진짜 이런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환자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돌봄하는 자식도 참 힘든일이구나.

    엄마에게 복막염이라고 말해 엄마가 죽음을 준비하기보다 회복될거라 희망을 가지게 되는 장면,
    엄마가 회복이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결국 죽어가게 되는 엄마를 보면서 사실대로 말했어야 하나, 수술을 하지 말았어야하나를 계속해서 고민하는 보부아르를 보며
    참 어렵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수술을 하지 않는 것도 어떤 선택도 후회가 있을 거 같다.
    어떤 면에서는 엄마가 수술을 하면서 30일을 더 고통을 겪었지만 살아있으면서
    보부아르와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보부아르가 자식으로서 도리를 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못한데 대한 죄책감을 덜 수도 있었다.

  • 2023-04-2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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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마지막 에세이 데이 후기 (7)
김혜근 | 2023.11.30 | 조회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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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나이듦과 자기서사> 2023년 마지막 에세이 데이 (11/26일)에 와주세요 (12)
문탁 | 2023.11.21 | 조회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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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시즌10주차 공지> - 에세이쓰기 3차 피드백 - 수정안- 1122 (12)
문탁 | 2023.11.16 | 조회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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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시즌 9주차 공지> - 에세이쓰기 2차 피드백 - 초안- 1115 (9)
문탁 | 2023.11.12 | 조회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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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시즌 8주차 공지> - 에세이쓰기 1차 피드백 - 초초안- 1108 (10)
문탁 | 2023.11.06 | 조회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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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7주차 후기] <‘나’의 죽음 이야기 > (2)
평강 | 2023.11.04 | 조회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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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6주차 후기] 대세는 SF! (6)
혜근 | 2023.10.30 | 조회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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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7주차 공지] <숨결이 바람될 때 > - 10월 마지막 날에 '죽음'을 생각합니다 (12)
문탁 | 2023.10.30 | 조회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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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6주차 공지]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2- 낯설고 또 고전적인 테드 창의 sf (4)
문탁 | 2023.10.24 | 조회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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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5주차 후기]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알 수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지? (4)
바람 | 2023.10.23 | 조회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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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 4회차 후기] 커다란 연관과 중심 질서에 대하여 (3)
김은영 | 2023.10.16 | 조회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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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5주차 공지]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1- 드디어 테드 창의 SF를 읽습니다 (6)
문탁 | 2023.10.15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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