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차 후기> 아주 편안한 죽음

수진
2023-04-27 21:27
272

                                                                                                      후기

 

『아주 편안한 죽음』세미나는 애도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세미나 직전 두 선생님이 문상을 가느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죽음이라는 주제를 더 생생하게 떠올리게 해 주었다. 나는 날 것이라는 개념으로 발제 글을 썼는데 쓰다 만 날 문장들이 있는 파일이 올라가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애도가 뭘까… 애매한 채로 수업을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내 느낌에는 봇물 터지듯 나왔다. 그동안 애도를 하지 못해서 라기보다는 죽음과 애도가 우리 구성원들에게 지속적으로 중요한 화두였던 것 같다. 퀴어 운동가의 죽음, 파트너 여동생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동생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아직은 말로 하기 어려운 죽음, 앞으로 닥쳐올 누군가의 죽음. 그러고보니 애도에 초점을 두어서인지 우리 자신의 죽음은 미처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다음의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너로부터 내가 있는데 너가 없어지면 나는 뭐지? 이제 너는 누구였고,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과 함께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전에, 아프다. 날 고통이 우선이다. 토론을 하며, 듣는 사람에게도 슬픔과 괴로움이 산통처럼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죄책감, 무서움, 말로 하기 어려운 무거움, 안타까움, 위로, 그리고 때로는 붙잡아 두고 싶어 떼를 쓰는 것 같기도 했고 감사와 연결감까지 매우 다양했다. 애도의 우선은 감정이었다. 어려운 것은 이러한 감정 대부분이 의식적인 계획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오간다는 것이다. 어떤 선생님의 말처럼 슬픔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여러 이유로 천진하게 울 수도 없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떠나가라 우는 것을 볼 때 갑자기 큰 치유를 느끼기도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무리 고통스럽고 슬프더라도 새롭게 떠오른 질문을 잊어서는 안된다. 떠나간 너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섣불리 답을 내려서도 안될 것이다. 삶에서 저절로 떠오를 때까지는.

 

보봐르가 자신의 어머니를 객관적으로 서술한 『아주 편안한 죽음』의 2장은 글을 쓰면서 올라오는 많은 감정적 고통들을 소화하지 않고서는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너는 ‘나의 너’로만 한정되지 않는 ‘새로운 너’로 내 마음 안에서 재탄생 한다. 동시에 이 작업은 ′어머니의 나’로부터 보봐르를 어느정도 해방할 것이다.

 

그럼 ‘너의 나‘ 였는데 너가 떠나버린 빈 자리를 바라보는 나는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나는 이전의 나일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을 충분히 다루지는 못했던 것 같다. 잠깐 다룬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에너지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성공적인 애도로 보았다. 아마도 떠나간 대상에  대한 슬픔, 그리움, 죄책감 등에 덜 휘둘리고 자신의 삶을 살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어쨌든 애도를 거치면서 개인에게는 크게 두가지 변화가 나타나는 것 같다. 첫째는 자신의 내면과 감정에 주의를 돌리게 되고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상실을 겪은 취약한 자로서 역시 취약한 타인에 대한 연대감이 생긴다.

 

애도에 대한 후기를 쓰면서 잃은 이, 잃은 것, 잃은 시간들을 생각하니 슬프다. 어떻게 보면 삶은 애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무수한 불완전한 애도를 받아 들이고 견뎌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 그 산통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와지고 철드는 것 같다. 그리고 나와 같은 남을 발견한다.  

 

 고통스런 애도과정을 마주하고 견디는 애도의 형식은 다양했다. 형식적인 것이 되어버린 장례식이 흔하지만, 한 두 달 뒤 고인이 좋아하던 식당에서 고인에 대한 기억을 나누며 celebration of life를 하는 방식도 있었다. 시신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도록 뒷문으로 몰래 옮기는 경우도 있으며, 잘 가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점점 더 개인 맞춤의 다양한 형식이 나올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다음 몇몇 주제들은 이야기는 나왔으나 더 다루지 못한 것들이다.

  • 애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의 애도
  • 딸의 엄마에 대한 애도
  •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애도
  • 돌본 자의 애도
  • 폭력적으로 다가온 죽음의 애도
  • 사회적 애도

추신.  같이 한 선생님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댓글 6
  • 2023-04-29 14:52

    이번 세미나는 마치 ‘애도’라는 묵직한 화두를 받아들게 된 것 같은 그런 시간이었어요.

    공적 애도를 금지 당하는 자들의 사례를 생각해 보니 참 많더라구요. 멀게는 유신정권으로부터 애도를 금지 당해서 추모제조차 가두 투쟁으로 벌여야만 했던 YH 김경숙 열사의 죽음이 생각났고, 가깝게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임보라 목사님(엘라이이면서 퀴어 운동에 앞장서셨던)의 출신대학인 한신대에서 추모제 공간 대관을 불허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공간을 뺏으려고 했던 서울시… 문탁 쌤이 알려주신 책 제목처럼 애도가 투쟁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보봐르가 ‘엄마 새롭게 쓰기’를 했다는 걸 문탁쌤이 강조하셨어요. 수진쌤은 위 후기에서 “이렇게 너는 ‘나의 너’로만 한정되지 않는 ‘새로운 너’로 내 마음 안에서 재탄생 한다. 동시에 이 작업은 ′어머니의 나’로부터 보봐르를 어느정도 해방할 것이다.”- 라고 적으셨네요. ‘엄마 새롭게 쓰기’는 ‘엄마’라는, 나랑 무척 복잡하게 얽혀있는 한 존재를 나로부터 분리시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 위치짓는 작업이고, 수진쌤 말처럼 그 작업으로 엄마와 나는 서로로부터 해방될 수 있겠네요. 그래서 이게 애도의 글쓰기인가봐요. 나로부터 분리시키고 객관화하고 제 위치를 찾아주어 결국 내 안에서 잘 떠나보내는 작업… 작년에 읽은 <천일의 순이>라는 책은 저자(딸)가 치매 엄마를 간병한 3년의 시간을 기록한 책인데요, 그 책에서도 엄마의 인생을 객관화해서 보려는 시도를 하는데 그 또한 애도의 글쓰기였네요.

    수진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무수한 불완전한 애도를 받아 들이고 견뎌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고 하셨는데 저는 지금이라도 못다한 애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친구들과 만나서 얘길하든, 나 혼자 글을 쓰든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도의 리츄얼을 해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세미나 때 말씀드린 그 활동가 파트너가 종종 제주에 놀러오는데 만날 때 왠만하면 돌아가신 그 분 얘기를 안 꺼내려고 했거든요. 이제는 자주 꺼내고 함께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도 고맙습니다.

  • 2023-04-29 23:51

    후기 감사합니다, 수진샘. 짧은 시간으로 인해 다루지 못한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해 주셔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떠나간 너는 누구이고 남겨진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얘기가 와닿습니다. 보내는 과정에서 그리고 보내고 난 후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게 되고 나의 일상과 관계도 달라지는 등 나도 어느 정도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애착과 애증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가족이나 가족에 준하는 중요한 사람일 경우 보브아르가 했던 것처럼 삶의 서사를 새롭게 구성하고 새로운 주체로 탄생시키는 그런 작업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쉽지 않은 작업이겠지만요.

    저는 “각자도사”의 사회에서 제대로된 돌봄을 받지 못하거나 긴밀한 관계망 속에 들어가 있지 않는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이들은 누구의 애도를 받게 되고 이들에 대한 어떤 애도가 가능할까. 성소수자들의 경우 혼자 사는 경우가 많고 나이들수록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도 위기상황에서는 도와줄 수 있지만 이들의 마지막에 어떻게 같이해주고 또 어떻게 애도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친구들이 요양원에 들어가거나 죽게 될 경우 친구들은 무척이나 슬퍼하고 또 본인들도 비슷한 죽음의 경로를 거치게 될까 무기력함과 두려움을 느끼게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애도는 잠깐의 슬픔에서 그치고 나중엔 뭔가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 느낌이 남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나와야 하는데 그냥 뭉개고 살아가게 됩니다. 애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돌봄과 애도는 연관되어 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봄의 과정에 참여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상대와 연결이 이뤄진다면 애도의 내용도 형식도 보다 풍성해지고 아쉬움도 덜 남을 것 같습니다. 보브와르처럼 삶의 서사를 재구성해서 새로운 주체로 탄생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서사를 어느 정도 구성할 수 있어야, 상대에 대해 알고 있어야 의미있는 애도가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 2023-04-30 12:14

    엄마의 이름이 불려지고, 예고된 이별을 직면하면서 엄마와의 관계가 재 정립되고, 죽음에 이르러 엄마를 한 명의 주체로 볼 수 있는 것은 슬픈 일 이다.
    자신은 교육 받은 존재로 보며, 엄마의 헌신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 등...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전쟁 후 베이 붐 세대에 태어난 나도, 엄마의 고난과, 헌신이 죄책감이 들었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다.
    재개발에 밀려, 4년 반 동안 옆 아파트로 이사 오시며 엄마와의 서사를 다시 썼다.
    나의 질병, 엄마의 질병으로 인해 함께 할 시간이 서로에게 많이 남지 않음을 인식하며 서로에게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와의 관계는 회복이 되었다.
    엄마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변하기 시작했다. 키우기 힘든, 까다로운 딸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마음을 잘 알아주는 딸로, 나 역시 가족에게 헌신한 엄마의 삶을 존중하는 마음이 들며..
    나는 살아 계신 동안 애도를 했다고 생각했다. 막상 돌아가시면 다르겠지만~~
    엄마는 재 개발된 아파트로 돌아가셨고 , 혼자 사시다가 뇌출혈이 되어 ,수술 후 회복되었지만 언니가 전담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친구들도 부모 돌봄을 하러 다닌다. 은퇴하고 쉴 나이가 되었고 그들도 여기저기 아플 나이가 되었지만 노노 돌봄을 하고 있다.
    그럼 우리는 각자도생 하며 각자도사 하는(돌봄도 돈과 무조건 연결되어 있는) 지금의 형태가 아니라 품앗이가 가능했던 도시화 이전의 사회를 도시에서 꿈을 꿔야 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내가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국내외의 죽음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무기력해진다.
    면죄부를 얻기 위해 소액의 기부를 통해 편치 않음을 넘어가곤 한다.

    글을 해체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 어떤것을 토론꺼리로 만들어 쓰는것이 발제다라는것을하는지 알겠습니다.
    글로 완성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개념은 들어왔습니다.

  • 2023-05-01 20:25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수진샘의 후기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애도'란 사전적 의미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라고 단순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왜 상실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을 가져 보는 것이지요. 세월호, 이태원 참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비정규직원의 죽음에 대한 은폐는 정치적 사회적 맥락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분이 있는 혹은 가족의 죽음조차 심리적 은폐 같은 정서로 반응하는 건 있는 그대로 존중 받아 본 기억이 없는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존재를 존중하지 못했던 나의 봄 앓이는 쉰의 나이가 되며 봄을 그럭저럭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덜 아팠고 꽃이 무슨 죄가 있냐며 꽃놀이도 했습니다. 화사함, 꽃의 향연들, 가벼움, 시작의 들뜸, 활기참 등 봄으로 기대하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있었습니다.
    내 삶에 느닷없는 충격적 이별은 나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던 오빠 같았던 외삼촌의 죽음입니다. 42살로 사인은 심장마비였는데 외삼촌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외로운 죽음이었습니다. 74살의 나이로 급성 혈액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의사는 항암치료를 안 하면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수혈로 혈액을 공급해 주는 일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수혈도 처음엔 2~3달에 한 번 하다가 그 텀이 자꾸 빨라질 것이고 나중에는 그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길면 2년 빠르면 2개월이라는 진단을 무색하게 아버지는 입원 7일 만에 먼 길을 가셨습니다. 52살에 간암으로 세상을 등진 남편은 술은 독약이니 먹지 말라는 의사의 협박에도 몸만 조금 괜찮으면 술을 먹더니 결국 과부하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각자의 사연으로 세상과 결별할 때 나는 그들을 위해 울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는데 나는 그저 멍하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는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장례라는 과정에 충실하며 절망도 슬픔도 분노도 쏟아내지 못했습니다.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나는 진짜 울어야 할 때는 물론이고 기뻐해야 할 일들 앞에서도 어색했습니다.
    그들과 ‘애도’의 시간을 다시 갖게 된 건 사계절 피정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가을.겨울. 봄 .여름의 흐름으로 사계절을 지나며 2박 3일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비로서 그들과의 관계를 다시 연결하고 그들에게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봄 피정, 화려한 꽃 그늘 아래 그들에게 편지를 쓰며 울음이 나왔습니다. 그들에 대한 나의 ‘애도’는 2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한 가닥 매듭을 묶고 있었습니다.

    아주 아주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 그것이 애도의 시작이었습니다.

  • 2023-05-02 12:17

    누군가를 돌보는 입장이 될 때는 그 상대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판단할 때이다. 그를 돌보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택했을 때 우리는 그의 마음과 상황을 고려해서 배려하고 행동한다.
    보부아르는 누구보다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여성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자신의 가치관대로 말하고 쓰고 행동하려고 노력했을 사람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다가온 엄마의 죽음 앞에서는 평소 자신이 생각한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엄마의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고, 그녀의 평안을 위해서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죽음을 늦추기 위한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죽음 앞에서 무력한 엄마의 육체를 함께 견뎌내야 했고, 회복될 거라는 거짓말을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엄마의 삶을, 지금 이 모습으로 오기까지 지나왔던 그녀의 시간을 반추하며 이해하는 작업을 글로 풀어낸다.
    이 책의 2장에 나오는 엄마의 젊은 시절, 남편과의 관계, 자녀에게 투영되는 그녀의 욕망과 상실 등에 관한 글들은 엄마와 함께 보낸 그 한 달의 시간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풀어낼 수 있었을까. 한 인간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듯 하면서도 그녀의 삶 전체를 통과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한 개인이 돌파하기엔 너무 많은 사적, 공적인 함정(지뢰들)에 관한 것들, 그래서 느껴지는 어떤 회환들 등등.
    이제는 죽음을 앞두고 있어, 무엇을 바꿀 수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없는 순간에, 그 글들은 묘한 연결감과 끈끈함이 느껴진다. 너무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한 인간의 삶에 있고, 이젠 그가 노쇠하고 무력해진 육체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의 편에 서 있고 싶어하며,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기를 원한다. 그가, 그의 죽음이 다른 많은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이, 오히려 그로부터 확장된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삶과 죽음과 나의 삶이 '거대한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하게 한다.
    이 마음은 무엇인가. 기꺼이 연결되려는 마음, 자세, 태도, 결심이 아닐까. 나는 이것이 돌봄의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돌보는 마음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서로의 존재가 주는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호소할 수 있는 이가 한 명도 없는 처지에 놓인 모든 사람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보부아르가 엄마의 죽음 이후에 쓴 문장이었는데, 여러 글 중 마음에 남아있었다. 이 문장을 여러 번 되뇌이면서 존엄한 죽음과 애도가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존엄한 죽음이란, 죽음을 담담하게 혹은 깔끔하게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속에서 서로의 존재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애도의 과정과 시간이 허락된 죽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2023-05-03 00:07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주로 개인적인 감상들에 젖어 있었습니다. '엄마(혹은 아빠)도 이제 늙었구나'라고 느끼며, 고단한 인생을 살아온 한 인간으로 당신들을 보게 된 어떤 시간들이 떠오르면서요. 언젠가(어쩌면 조만간) 이별하는 순간이 오겠지 하는 생각에 슬펐지만, 당신들의 부재가 가져올 커다란 슬픔은 상상할 수 없어 생각을 멈춘 그런 상태들이요. 그러다 '애도 문학' '애도의 정치학' 등의 개념화된 단어들이 보이면서부터 뇌회로가 꼬였는지 '멍' 한 상태가 됐습니다. 세미나 시간에 여러 개인사들을 들으며 내 인생은 아직 큰 상실을 겪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단단히 쌓은 제 마음의 담장을 확인했습니다. 아주 협소하더라고요....
    '각자도사사회'를 읽으며 보브아르를 좀더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샘들의 후기에서도 많이 배웁니다. 후기를 읽다 보니 '각자도사사회'에서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이 조금 더 이해가 됩니다. 고맙습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19
2023년 마지막 에세이 데이 후기 (7)
김혜근 | 2023.11.30 | 조회 359
김혜근 2023.11.30 359
118
[초대] <나이듦과 자기서사> 2023년 마지막 에세이 데이 (11/26일)에 와주세요 (12)
문탁 | 2023.11.21 | 조회 417
문탁 2023.11.21 417
117
<가을시즌10주차 공지> - 에세이쓰기 3차 피드백 - 수정안- 1122 (12)
문탁 | 2023.11.16 | 조회 298
문탁 2023.11.16 298
116
<가을시즌 9주차 공지> - 에세이쓰기 2차 피드백 - 초안- 1115 (9)
문탁 | 2023.11.12 | 조회 235
문탁 2023.11.12 235
115
<가을시즌 8주차 공지> - 에세이쓰기 1차 피드백 - 초초안- 1108 (10)
문탁 | 2023.11.06 | 조회 250
문탁 2023.11.06 250
114
[s3-7주차 후기] <‘나’의 죽음 이야기 > (2)
평강 | 2023.11.04 | 조회 217
평강 2023.11.04 217
113
[s3-6주차 후기] 대세는 SF! (6)
혜근 | 2023.10.30 | 조회 263
혜근 2023.10.30 263
112
[s3-7주차 공지] <숨결이 바람될 때 > - 10월 마지막 날에 '죽음'을 생각합니다 (12)
문탁 | 2023.10.30 | 조회 335
문탁 2023.10.30 335
111
[s3-6주차 공지]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2- 낯설고 또 고전적인 테드 창의 sf (4)
문탁 | 2023.10.24 | 조회 295
문탁 2023.10.24 295
110
[s3-5주차 후기]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알 수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지? (4)
바람 | 2023.10.23 | 조회 261
바람 2023.10.23 261
109
[S3- 4회차 후기] 커다란 연관과 중심 질서에 대하여 (3)
김은영 | 2023.10.16 | 조회 189
김은영 2023.10.16 189
108
[s3-5주차 공지]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1- 드디어 테드 창의 SF를 읽습니다 (6)
문탁 | 2023.10.15 | 조회 222
문탁 2023.10.15 222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