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과 자기서사> 첫 만남 후기

호수
2022-03-17 11:13
299

5년 전쯤 동네서점 독서 모임에 참여하던 때 젖먹이 아기를 키우는 여성분이 같이 했어요. 사실 마구 재미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책 <총균쇠>를 같이 읽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모래밭에 떨어뜨린 반지 찾는 심정으로 가만가만 논지를 쫓아가지 않으면 그 한없이 재미없는 책을 그 애기엄마는 바쁜 와중에 겨우 읽어와서 땀을 흘리며 아기를 끌어안고 늘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화에 참여했어요. 아.. 저분은 어째서 저렇게까지 이걸 읽는 걸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 독서모임을 떠올리면 <총균쇠>보다도 그분과 관련된 기억이 늘 먼저 떠올라요. 그분의 동그랗던 눈, 어쩐지 돕고 싶은 마음에 가끔은 제가 아기를 안고 서점 이곳저곳을 돌며 보던 그곳의 책장, 장을 볼 때 아기에게 줄 수 있는 간식 같아서 집어 들었던 과자 봉지 같은 것들이요.

 

그런데, 저는 올해 야심차게도 열몇 명이 각자에게 할당된 작은 창에서 작은 얼굴로 입을 오물거리는 줌 세미나를 두 개씩이나 신청을 했어요. (한스샘도 저와 같은 처지이시더라고요.) 어제 세미나를 마치고 딱히 힘들 게 없는데 뭔가 힘들구나...라는 기분을 느끼며 아, 내일 어떻게 또 세미나를 하지? 생각하며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깨니 우리 세미나부터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이 언급했던 장회익의 ‘온생명’이 떠올랐고요.

 

생명이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함께해야 가능해지고 이들이 함께하지 못하면 성립하지 못하는 하나의 존재론적 단위를 이루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생명의 본질이라는 거죠. 저는 이것을 ‘온생명’이라고 불러요. 생명을 이루기 위해 깰 수 없는 단위가 나라는 개체인 ‘낱생명’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명체 그리고 바탕질서로 이루어진 온생명이라는 겁니다. /나이듦 수업, 158

 

우리 세미나는 문탁이 있는 용인시 수지구부터 분당, 화성, 인천, 의정부, 서울, 전주, 대구, 제주, 미국 애틀란타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가자가 접속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새로운 얼굴이에요. 사실 저도 문탁에서 공부한 지 벌써 4년차에 접어든다지만 주로 저녁시간 세미나에 참석한 탓에 문탁 걸음은 여전히 어색하고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다른 분들도 저처럼 설렘 반 걱정 반 하는 마음으로 접속하신 듯했는데 각자 주어진 자기소개 시간에 조근조근 이야기를 풀어내주셨어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혼자가 아닌 삶’이라는 성찰을 발전시키고 이것으로부터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들을 가장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낸 것은 ‘나이듦’이라는 화두였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문탁샘은 노인은 근대에 주체로 호명된 적이 별로 없다고 얘기하셨어요. 돌봄은 갑자기 닥쳐오는 경험이다, 정희진이 말하듯 ‘지식인이나 소위 좌파는 나이 들어도 노인으로 불리지 않고 자신을 노인으로 정체화하지도 않기 때문에 노인 담론은 풍요롭지도 못한 실정’이고 ‘“흑인”, “여성”,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종으로 간주’된다. 어쩌면 수동적으로 떠안은 그 무엇조차 없는 상태이기에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나 자신의 나이듦이나 죽음을 마치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사고처럼 준비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우리는 나이듦, 돌봄, 죽음.....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요?

 

문탁샘은 내가 부딪히는 고유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보자고 얘기하셨어요. 각자의 키워드를 찾아내보자고요. 그러면서 치매를 겪고 계신 어머니와의 시간을 통해 부모-자식 관계로서의 경험을 넘어서서 “늙음과 죽음을 함께 겪는 누군가의 벗이 된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라는 화두를 갖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셨고요. 몇몇 분은 자기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나이듦과 노년과 관련해 각자 품고 있는 문제의식들을 풀어내주셨어요. 저는 평소 무슨 주제든 몽글몽글하게 솟아나는 갖가지 에피소드만 잔뜩 떠올리고 말 뿐 그걸 하나의 키워드로 엮어내는 일은 항상 어려웠어요. 서둘러 꿰어내고 나면, 그건 아니야, 이건 내 생각과 다른데.. 싶은 찝찝함이 남았고요. 나이듦과 관련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탁샘은 길게는 일 년간 내 화두를 찾아내는 작업을 해보자고 하셨으니(맞지요? ㅎㅎ 저는 그렇게 들었어요 ㅎ) 찬찬히 가보자며 걱정되는 마음을 달래봅니다. 어제의 길었던 자기소개는 각자가 ‘지금의 나’를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주제로 지금의 나에서 과연 얼마나 더 멀리까지 나아가볼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촘촘한 실타래를 다시 풀어 다시 엮고, 누군가는 이리저리 흩어지고 뒤엉킨 실뭉치를 다시 풀어 정리하고... 아마도 아무튼 우리는 무언가로 달라져 있겠지요. 그렇게 ‘다른 주체성을 구성’하는 가능성을 한번 시험해보기로 합니다.

 

철없는 상태로 대부분을 보낸 삶은, 산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성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21

 

주체에 관한 가장 명백한 증거는 주체적 주장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라고 얘기한 것 외에는 주체를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162

 

비로소 세상에 뚜벅뚜벅 나온 거예요. 온전히 세상과 만나는 일만 남은 거죠. 43

 

문탁샘이 제시하신 구체적인 로드맵은 꼼꼼한 읽기와 거기서 꼬리를 물고 나올 각자의 생각을 모아 찬찬히 글로 정리해보는 것입니다. 이따금 순서가 돌아올 메모를 통한 글쓰기가 그 기회가 되겠고요. 앞으로 두 달간 이어질 첫 번째 시즌 동안 세 권의 책과 두 편의 영화로 함께합니다. 책은 ‘아파테이아’라는 ‘정념이 없는 상태’ 즉 평정심에 관해 이야기하는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뚜렷하지 않으며 생명을 ‘동적평형’으로 설명하는 분자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의 <동적평형>, 예술가의 말년을 살펴보며 통념과 달리 노년은 모순과 부조화와 충돌의 시기라고 말하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읽습니다.

 

다음 시간은 첫 번째 책인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를 절반(50쪽까지) 읽고 만납니다. 문탁샘이 초반에 스토아철학에 대한 미니 강의를 해주실 예정이고 잎사귀샘, 조은희샘, 김경희샘, 황재숙샘*(*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봐요. 황재숙샘은 다음주이시라고 합니다! :))의 메모를 보며 함께 이야기 나눕니다. 이제 <노년에 관하여>를 꼼꼼히 읽고 만나면 되겠네요. 후기를 쓰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며 다시 기대감이 차오릅니다. ㅎㅎ 다음주 반가운 얼굴로 다시 만나겠습니다!

 

댓글 12
  • 2022-03-17 13:43

    우리 열일곱이네요^^

  • 2022-03-17 14:02

    와 빠르고 알찬 후기 감사합니다.

    어제의 시간을 복기해 보았습니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 주는거 같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분들과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되니 고맙기도 하네요.

    일년, 일학기 즐겁게 공부해보아요.

    벌써 담주가 기다려지네요. ㅎㅎ

  • 2022-03-17 14:07

    알찬 후기 읽으며 어제의 기억이 몽글몽글.. 벌써 다음주가 기대됩니다.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잘 나이들고 싶습니다. 😉 

  • 2022-03-17 17:12

    자세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놓친 것도 다시 챙길수있어서 좋네요.  어제 세미나는 체력이 좀 딸리긴 했는데,  모두 진솔한 얘기를 나눠주셔서 저도 덩달아 마음가짐을 되돌아볼 수 있었어요. 담주 세미나 기다려집니다.ㅎ

  • 2022-03-17 20:31

    이렇게 긴 후기글은 처음 읽고 보는 것 같습니다. 온마음을 다해 정성껏 쓰신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군데군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제의 첫인사들이 참 따뜻하게 느껴져서 어제의 줌의 모습이 또 기억나네요. 앞으로의 수업이 참 기대가 됩니다^^

     

  • 2022-03-17 21:35

    정성스러운 후기가 닉네임처럼 잔잔한 호수를 연상하게 합니다. 벌써 후기 쓰는 것부터 두려워지네요. ^^;

    첫날부터 늦은 시간까지 하게 되어서 놀랐는데, (보통 오리엔테이션 하면 예상된 시간보다 더 빠르게 끝났던 것 같은데 말이죠 ㅎㅎ)

    어쩜 다들 말씀도 잘 하시는지, 저도 미리 준비 좀 하고 올 걸.. 생각했더랬습니다.

    각자 살고 있는 지역이 다른 것 만큼 상황이나 여건, 수업을 참여하게 된 동기까지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이듦'에 대한 각자의 생각들이 하나로 연결되고, 그렇게 해서 서로의 이야기를 공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수요일 저녁 양생글쓰기와 일요일 오전 법구경 세미나를 하면서 아마 당분간은 바로 앞에 닥친 숙제 해결하느라 정신없을 것 같습니다.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기대감이 더 큰 것 같아요. 한 발 한 발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길을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

  • 2022-03-17 23:20
    어제의 세미나가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잘 정리해 주셨네요. ㅎㅎ 역시..
     
    코로나가 확실히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어제 보니 전국에서 접속했더라구요. 제주도, 미국까지 장소와 국경을 초월해서 같이 실시간으로 세미나를 할 수 있다니요. '줌'은 이제 세미나의 필수 접속방법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무엇보다 '문탁의 힘'입니다.
    소통과 연결은 생각지 않은 변화를 낳으리라 생각됩니다. 인연맺음은 1+1이 아니라 화학적 변혁을 초래한다니 즐거운 기대로 시작해봅니다.

  • 2022-03-18 05:42

    첫만남이 길어지긴 했지만 여러 색깔의 스토리와 문제의식을 듣다보니 시간이 금방 가는 것 같았습니다. 나누었던 이야기를 핵심만 꼭 집어 잘 정리해 주신 호수님 고맙습니다. 해외에서 국내 세미나를 들을 수 있어 에 감사한 마음이고 또 남성 동지가 있어 든든했습니다. 지금 드는 생각은 많은 걸 배우고 성장하겠다는 것보가는  한스님 말씀대로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정진하겠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겠단 생각이 듭니다. 

  • 2022-03-18 08:57

    와 멋진 후기 감사해요^^
    지난 수업 정리도 되고 다른 샘들의 말씀도 떠오르네요.
    늦은 시간까지 이어져서 아이의 투정에 몸이 살짝 괴롭기도 했지만, 역시 잘 참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탁샘의 각자의 고유한 나이듦과 내 질문을 고민하라는 말씀에 쉬운 수업은 아니겠다는 느낌이 들지만, 함께 라면 할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기네요.

  • 2022-03-18 13:50

    정말 잔잔한 호수.같이 차분히 적어 내려가 주신 글 속에서 지난 첫 모임도, 가야할 길도, 당장 다음 주도ㅎ 또렷하게 다가오고, 기대가 되네요.  ^^ 감사해요!  

    '나이듦'이라는 묵직한 주제 앞에서 앞으로 무얼 발견할지 겁도 나고, 나도 모를 실타래를 풀어갈 것이 어렵게도 생각되지만, 저도 '함께'여서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2022-03-18 18:38

    후기로 수업을 복기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 생각보다 빡셀 듯한 글쓰기부담과 졸음에 멍해 있었거든요 ㅎ.

    이곳저곳 이야기들을 들을 기대에 설레네요. 네트워크로 연결된 작은 창 속의 큰 세상, 연결만으로도 기쁜 일이 많을거 같아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 2022-03-18 21:53

    후기 자체가 '좋은 글'이네요. 저의 독서를 돌아보고 세미나를 돌아보았어요. 

    코로나가 사람과의 벽을 만들고 있다 생각했는데 거리를 초월한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네요. 선물입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 나이에(?) 줌으로 세미나를 해볼 수 있었을까요? 

    '책 읽기'를 다시 배워야하겠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다시 배워야하겠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귀한 인연이 맺어졌어요. 감사와 기대, 그리고 살짝 겁도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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