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방울키친] 청년매니저의 7월 후기

서형준
2020-08-04 21:02
558

안녕하세요. 선집으로 이사했다는 글 이후에 오랜만에 글을 쓰는 거 같네요.

1. 결정

처음 은방울키친에 청년 매니저로 일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 받은 건 문탁쌤을 통해서였습니다. 월 20~30정도를 생각 중이시라고 말해주셔서 ,요즘 지출만 계속 하고 있는 저로서는 망설일 필요가 없는 좋은 제안이었어요. 집에서 틈틈이 요리를 하다가도, 조금 규칙적으로 많은 양의 음식을 조리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주방 일도 재미있을 거 같았습니다.

막상 은방울키친 매니저이신 도라지쌤과 기린쌤을 만나니까, 제가 제안받은 20~30만원은 문탁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제안이었으며(굉장히 많은 분들이 놀라셨다고..) 매니저님들이랑 상의되지 않은채(?) 문탁쌤이 자유롭게 제안하신 거였더라고요. 저는 사실 밥 당번제에 대해서도, 선물 시스템에 대해서도, 매니저의 역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있던 게 아니라서 이런 '임금협상문제(?)'를 당면하게 되어 , "주방에서 한달에 4번 정도 밥당번을 하는 걸로 활동비를 주는 게 아니다"는 것과 '청년 매니저의 역할과 실용성', 그리고 '청년 매니저들끼리 활동비를 균등하게 조율하는 것'와 같은 이야기들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본 거 같습니다.

제가 이곳 저곳에서 알바를 하면서 느낀 점들은 '남는 건 결국 돈 뿐이다', '내가 애써서 시킨 것보다 열심히 해봤자 사장 버릇만 나빠진다' 등인데, 이곳에는 이런 저만의 규칙들을 적용시킬 수가 없더라고요.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결국 결론을 내리며, 저는 알바가 아니라, 문탁에서의 활동 중 하나로서 <은방울키친 청년 매니저> 일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이해 못하는 일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건 아직 문탁의 기본 정서나 규칙들을 제대로 모른다는 거니까, 이대로 공부만 계속 해봤자 제대로 정착하지는 못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2. 첫 한달의 활동, 그리고 점심밥

저는 한달에 매니저 쌤들과 함께 밥당번 4번(매주 수요일), 그리고 이외 요일에 그릇/식기 소독 8번(매주 3번씩)을 하기로 했고, 최대한 자주 파지사유와 주방에 들락날락 거리며 주방의 생리를 파악하기로 했습니다. 밥당번은 기린썜과 2번, 도라지 쌤과 2번이었는데 쌤들이랑 어떤어떤 요리를 할지 얘기하고 저는 재료 손질하기나 전 굽기, 주방 청소하기 등만 하면 되어서 부담이 막 크진 않았던 거 같아요.

4번의 밥 당번 중 2번이 전 요리였는데, 부추전은 좀 아쉽게 됐지만 감자채전은 진짜 맛있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감자 열심히 껍질 벗겨서 채 썰어놓은 게 빛을 발했던 요리였습니다. 4번의 밥당번 중에 제일 망했던 요리는 김치볶음밥이었는데, 내놓기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김치에 양파도 약간 넣고, 참치까지 넣어서 윤기나게 잘 볶았는데 밥을 넣자마자 괜찮을 줄 알았던 탄내가 김치볶음을 집어삼켰습니다. 생각보다 밥에 배어있는 탄내를 없애는 게 어렵더라구요.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이라도 좀 새 밥이랑 섞어서 넣는건데..재료 상태도 제대로 생각 안하고 요리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어서 앞으로 더 주의 기울여서 요리해야 겠다고 속으로 많이 생각했습니다. 점심에 여러 분들이 그 밥을 드시는데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이번 8월 5일(내일이네요!)에는 저 혼자서 점심을 차리게 되는데, 열심히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린쌤과 함께 할 때, 도라지쌤과 함께 할 때 일하는 스타일이 다른 것도 꽤 많은 도움이 된 거 같아요. 기린 쌤은 요리할 때 '나는 별로 요리를 잘 하지 않아 그냥 있는 재료로 열심히 만드는거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는데, 제가 최대한 자율적으로 일을 해보기를 원하시고, 은방울키친의 여러 순리에 대해서 빠르게 알아가는 걸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도라지쌤은 정리정돈을 엄청 잘 해 놓으시고, 같이 점심을 준비할 때도, 일이 척척척 진행되고 끝나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편해요(ㅎㅎㅎ). 이번 8월달은 두 분이랑 함께 밥당번을 하지 않고, 다른 분들이랑 준비를 하게 되는데 그것도 새로울 거 같아서 기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청년매니저로서 저에게 주어진 다른 미션(?)은 '점심밥은 문탁에서 함께 해결하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빠르게 쌓기'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7월 내내 저는 문탁 주방에서 8일 정도밖에 밥을 먹지 않았어요. 학원 일정도 있었고, 몸 상태가 안좋았던 적도 있었지만, 근원적으로는 저에게 이곳 사람들과 관계를 쌓는 게 어려웠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여름 캠프 같은 곳에서 30명의 사람들이 모두 처음 만난다면 30명 모두가 조금씩 친해지는 과정을 가져야 하겠지만 29명이 있는 학급에 1명이 전학을 간다면, 그 친밀함을 위한 애너지는 1명이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과제 같은 것이 되는데, 지금의 저에게는 그런 에너지가 부족한 거 같아요. 그래서 여름 강좌도 듣고 하면서 사람들이랑 개인적으로 친해져보면 어떨까 하고 있습니다. 저번 달에 많이 실패한 만큼, 이번 달에는 조금씩 더 노력해서 문탁에서 편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보려고요.

이렇게 편해질 수 있도록..?

​이렇게 편해질 수 있도록..? 우현이의 허락을 받지 않고 게시했습니다. 저는 저기 아래에 있는 거 같네요.

3. 앞으로

7월 달의 제 활동이 막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기린 쌤이나 도라지 쌤도 마찬가지이실 거 같아요. 부족한 부분이 여실히 드러났던 거 같고, 요구하셨던 역할보다 훨씬 작은 역할을 해 낸거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무겁습니다. 그래도 그런 마음으론 부담감만 늘어날 테니, 할 수 있는 걸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활동들은 정말 재밌었어요. 중간에 된장을 가지러 고기리로 슉 하고 다녀온 것도 재밌었고, 밥당번이 있는 수요일을 기다린 주도 있었습니다. 점심에 소독을 하면서, 오고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도 대화가 부족한 제 삶에 보충제 같은 역할을 한 거 같습니다. 제가 앞으로 남은 기간동안 은방울키친 청년 매니저를 하면서, 제가 하는 음식이나, 제 활동들을 보면서 문탁에 들락날락 하시는 분들이 "아 형준이는 이런 성향의 사람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으시면 좋겠다는 게 제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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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이디어들

- 왜 2500원인가?

서울에서 일을 다닐 때 점심 부페라는 곳을 자주 갔었는데, 그 곳은 공장 김치에 질 낮은 재료들로 만든 반찬들, 양념에 절인 각종 육류로 상을 차려놓고 7000원씩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가성비가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들었죠. 어느 돈까스 전문점은 치즈까스 4피스에 13000원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았습니다. 동천동에도 정말 질 낮은 음식들을 7000~9000원에 파는 음식점이 많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밥을 든든히 먹는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데도, 자극적인 맛으로 입을 다 절여놓고 제 지갑을 털어갑니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있었던 저에게 문탁의 "2500원 밥"은 작년부터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2500원으로 주방이 유지가 되는지, 매니저가 되어서 매출액 정리도 해보고 쌤들이랑 대화도 해 보면서 알게 된 핵심은 결국 [선물]이더라고요. 쌀이나 쌈채소, 장류는 대부분 선물로 유지가 되는 게 컸고, 저번 달에 한 오이장아찌 같은 [단품]활동도 은방울키친의 적자 탈출에 큰 도움을 주는 거 같습니다.(다음 달은 꼭 단품..!)

하지만 그래도 수익이 나기는 힘든 구조였고, 원재료비와 매출액이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500원이라도 올리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매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다양하고 좋은 재료들로 식탁을 구성하기 위해서라도! 내일 점심에 차릴 장을 봐 오면서, 모시조개 300g에 5500원 하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그리고 [선물]하기가 어려운 청년들이나, 그냥 강좌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단품]활동에 참여하게 해서 규모를 좀 키울수도 있겠다는 생각..? 뭔가 생각은 많이 했네요. 그런 식으로 주방 관련된 활동들을 만들어 나가도 재밌을 거 같아요.

- 왜 청년들이 밥 당번을 하기 부담스러워할까?

저도 부담스러워요. 내일 어떻게 요리할지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 장을 봐 오면서 제가 자신있는 요리에 맞춰서 재료들을 다 샀더니, 장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 편해진 거 같지만 그래도 부담스럽긴 해요. 일단 10~15인분이 코로나 이후 줄어든 규모라고는 해도 조리 기술이 많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많기도 하고, 주방 상태에 대해 잘 알 수도 없고, 메뉴 선정도 부담이 되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린쌤이나 도라지쌤이 옆에서 붙어주신다고 하더라고요. 인원을 줄일 수는 없으니, 청년들이 밥 당번을 할 때는 미리 상의를 통해 메뉴를 정해놓고 장을 봐다 준다거나, 레시피 같은 걸 미리 찾아온다거나, 청년 매니저랑 함께 밥당번을 할 수 있는 날을 정해놓는다던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밥당번 한번 하는 거에 대한 부담을 줄여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 밥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

문탁 내의 다른 활동들에 비해 훨씬 일상적이고 직접적이지만, 또 다른 문탁 활동들과 동떨어져 있는 활동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음식과 식사만큼 삶의 철학을 많이 담은 것도 없고 내 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도 없는데, 식사를 준비하면서나 다른 쌤들이 차린 음식을 먹을 때나 그냥 '밥 먹고 설거지하고 잘 치우고 끝'인 느낌이 들어서 조금씩 아쉬웠습니다. 오늘 누가 어떤 음식을 차려서 어떤 사람들과 먹었는지, 냉장고의 재료들은 어떤 균형을 맞추면서 사야할지, 식탁에서 나온 재밌는 얘기들은 뭐가 있는지, 이런 것들이 그냥 사라져버리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다음 달에는 조금씩 기록/저장을 해볼까 합니다. '7월달에 이런이런 메뉴들이 식탁에 올라왔고, 어떤 메뉴가 인기가 좋았던 거 같다!'는 식으로라도 올리고, 그런 것들이 쌓여가면 되게 일상적인 문탁의 기록이 되지 않을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3
  • 2020-08-05 07:52

    이렇게 길게 쓰다니~~~ 정말 놀랍군.
    그래, 잘해보자^^

  • 2020-08-05 09:23

    형준 매니저와 주방은 이제 서로 사이를 잘 튼 것 같아요. ^^
    형준에게 문탁이 더더더 편해지길 같이 노력해 봅시다!
    우현이도 저 후라이팬으로 문탁에서 신나게 놀기까지 시간이 쫌 걸렸을 거예요! ㅎㅎㅎ

  • 2020-08-05 22:06

    부담갖고 마음 졸이며 준비한 오늘 점심, 맛있게 먹었습니다!
    혼자서 거뜬히 밥상 차려내는 걸 보니 든든했어요.
    형준이가 차린 밥한끼 먹고 이 글을 읽어서 그런지 형준이와 더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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