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개월의 미래> 후기

둥글레
2022-07-11 12:33
278

6월 필름이다 상영작은 겸목과 둥글레가 선정한 <십개월의 미래>였다. 공식적인 영화 분류는 드라마였지만 코믹하게 풀어가는 부분 때문에 코미디 장르로 선정해도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십개월의 미래>는 원치않은 임신을 한 여자 주인공 ‘미래’가 10개월 동안 겪은 ‘혼란’을 그렸다. “〈십개월의 미래〉를 연출한 남궁선 감독은 임신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한국의 대중매체에 임신을 다룬 일반적인 성장 서사가 거의 없음을 깨달았다. 그때 느낀 의구심은 곧 모성 혹은 중절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순적이고 복잡다단한 보통 여성들의 경험을 다루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갈팡질팡속에는 여러 경험이 들어 있는데, 남자 친구가 갑자기 결혼을 하자고 한다거나, 스타트업 회사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음에도 임신 때문에 그만두게 되거나, 출산을 당연시 여기는 부모들, ceo인 선배언니가 출산 후 무력해지는 모습 등. 무엇보다 미래 자신이 낙태를 원하는지 출산을 원하는지 사이에서 혼란스럽다. 

 

문제는 이 혼란과 함께 시간은 지나간다는 것이고 뱃속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내내 미래는 ‘멍’한 표정을 일관한다. 코믹하게 풀어냈다면 미래의 표정 또는 태도에 닮긴 혼란이다. 실제라면 이 혼란은 희극이 아닌 비극적 모습일 것이다. 이미 제목에서 스포가 보이는데 미래는 결국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남자 친구와는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다. 

 

최근 <고딩엄빠>라는 예능을 봤다. 고등학생 때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었거나 아빠가 된 학생들의 사연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미래보다 훨씬 더 당황하고 혼란해 하다가 시간이 지나간다. 원해서 출산한 경우도 있고 갈팡질팡하다 어쩔 수 없이 출산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임신을 계기로 결혼한 경우도 있다. 이 예능을 처음 볼 땐 출산해서 미혼모가 된 학생들의 선택이 기특해보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출산을 옹호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흠칫 놀랐다. 하지만 혼자서 먹고살 방도도 어렵고 아이를 키우기는 너무나 스트레스인 학생들의 어려움은 현실이었다.

 

<십개월의 미래>도 <고딩엄빠>도 그렇고 제목에서부터 출산한 경우의 얘기였다. 그러다 지난 주 토요일 <레벤느망>이라는 프랑스영화를 봤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L'Événement)을 원작으로 했고 2021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에르노는 본인 이름의 문학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작가이다. 

 

 

주인공 안은 원작의 작가와 같이 1940년생이다. 배경은 1963년 프랑스. 스물셋의 안은 전도유망한 문학부 대학생이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에서는 낙태를 하면 감옥을 가야한다. 아이를 낳으면 미혼모가 되어 앞으로의 커리어가 다 무너지는 상황이다. 그녀는 여러 시도 끝에 12주째 낙태를 하게 된다. 12주 동안의 그녀가 겪은 공포와 혼란. 그리고 아이를 없애기 위한 시도를 보는 동안 내 온몸이 아픈 것 같았다. 

 

물론 시대가 다르다. 지금의 미혼모와 당시의 미혼모의 위치는 달라졌을지는 모르지만 미래가 겪은 일, 고딩 엄마들이 겪는 일을 보니 ‘임신’이라는 사건과 그로 인한 어려움은 ‘여자에게 닥치는 일’이란 건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낙태죄’는 존재한다. 우리는 2019년 낙태죄(낙태에 관한 형법)가 폐지되었지만 아직 모자보건법이 있고 낙태죄 폐지 이후 관련 법률이 정해지지 않고 있다. 미국은 올해 49년만에 낙태죄가 살아났다. 

 

미래가 남자 후배랑 키스를 하는데 후배는 미래의 불러진 배를 느끼고 흠칫 놀란다. 그리곤 도망친다. 이 장면에 대해 함께 영화를 본 남자분이 이해를 못하겠다고 했나? 아니면 이 장면을 왜 넣었는지 이해가 안간다고 했나? 아무튼 이 장면에 부정적 피드백을 했다. 나는 그 피드백이 못마땅했다. ‘임신’과 함께 여자들에게 요구되는 온갖 윤리들에 백퍼 동의하긴 힘들다. ‘임신’이 ‘결혼’과 쌍이 되는 것, 여자에게 ‘임신’의 의무가 요구되는 것도 못마땅하다. 제일 못마땅한 건 ‘출산’을 은근히 지지하는 내 마음속 뿌리깊은 편견이다. <레벤느망>을 보고 나서 이 편견을 버리고 싶어졌다. 강추!

댓글 2
  • 2022-07-11 16:06

    <십개월의 미래>가 코메디인지 아닌지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백현진(산부인과 전문의)의 연기를 보라 대답하고 싶다. 인생은 코메디라는데, 그런 인생연기를 백현진은 참 잘한다....인생의 맛을 알려면 유머가 있어야겠다^^

  • 2022-07-11 23:59

    이날 많은 분들이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필름이다 올해 제일 많이 모인 날인듯~

    둥글레님 후기 읽다보니 다시 그날이 떠오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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