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영화인문학 시즌1> 마허샬라 알리의 <문라이트>(2016)

청량리
2021-07-04 16:35
396

우연의 결과(제너럴), 우연한 선택(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우연적 만남 | 영화 <문라이트>(2017) 111분

 

 

 

 

 

 

 

 샤이론은 아이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 하지만 그곳은 마약거래상인 후안의 비밀창고였다. 1970~80년대 미국 마이애미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문라이트>(2017)는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는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샤이론과 후안,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으로 1막은 시작한다. 2막에서 리틀은 샤이론으로 성장하지만 여전히 폭력에 시달린다. 그에게 케빈은 어릴 적 친구이자 유일하게 서로의 몸을 안아줬던 사이다. 어느 날 식사 중인 케빈에게 교내양아치 테렐이 다가온다. 별일 아닌 듯 대하지만 사실 케빈도 테렐이 두려워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의도치 않게 케빈의 주먹이 샤이론의 얼굴로 날아간다. 다음 날, 분노에 찬 샤이론은 테렐의 등짝에 의자를 내리꽂는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후안처럼 마약거래상이 된 샤이론의 이야기가 3막으로 이어진다.

 

후안역의 마허샬라 알리(오른쪽)

 

 후안을 연기했던 배우 마허샬라 알리(Mahershala Ali)는 이 영화를 통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는다. 1막에 잠깐 등장했던 것에 비해 상이 과한 걸까? 2막에서 스치듯 언급된 후안의 죽음을 난 믿을 수 없었다. 만일 내가 <문라이트>의 속편이나 스핀오프를 기대한다면 그건 분명 후안의 이야기이리라. 순수한 리틀의 눈빛을 가진 근육질의 블랙을 연기한 트리반테이 로즈(Trevante Rhodes)의 캐스팅도 물론 대체불가라 하겠다.

 영화의 후반부, 거의 10년 만에 케빈이 일하는 식당으로 찾아온 샤이론은 자신에게 뜬금없이 전화를 건 이유를 케빈에게 묻는다. 다소 길게 느껴질 수 있는 샤이론과 케빈의 식당씬은, 후안에게 수영을 배우는 해변씬 다음으로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이다. 어정쩡 자리 잡은 샤이론과 분주하게 서빙을 하는 케빈의 엇갈림을 롱테이크로 길게 잡는다. 이후 샤이론을 발견하고 놀란 케빈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데, ‘샤이론’의 이름은 일부러 싱크가 어긋나 있다. 식당을 넘어 두 사람만의 시공간으로 나아가는 장면이다.

 

결국 블랙(왼쪽)이 찾아간 건 케빈의 전화 때문이 아니었다.

 

 왜 전화했어? / 뭐? / 나한테 왜 전화했냐고. / 말했잖아. 어떤 손님이... 이 노래를 틀었어. ‘계속 마음속에 있던 상대를 오랜만에 재회하니 기쁘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바바라 루이스의 노래 ‘Hello Stranger’가 두 사람 사이로 흐른다. 그런데 이때 샤이론의 질문은 뭔가 잘못된 듯하다. 왜 전화했어? 찾아온 건 본인인데 정작 케빈에게 그 이유를 묻고 있다. 케빈, 왜 전화한거야? 하지만 자신의 인생(선택)을 남의 손에 맡기지 말라는 오래 전 후안의 말대로라면, 여기에 왜 왔는지는 샤이론 스스로 묻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후안이 15번가의 길을 건널 때 지나쳤을 수많은 아이들, 홀어머니에 왕따인 샤이론에게 호의를 베푼 많은 어른들. 후안, 엄마, 마약, 해변, 달빛, 케빈, 입맞춤, 테렐, 교도소, 어쩌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리틀이 블랙으로 자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걸까? 그러나 15번가의 모든 ‘샤이론’들이 ‘블랙’으로 되는 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후안과 샤이론의 만남만이 바다 위에서 아름답게 공명한다.

하지만 나는 10년 만에 케빈을 다시 만나러 가는 길이 어쩌면 영화 속의 결정적인 장면이라 생각한다. 후안이 샤이론에게 했던 말, 선택은 너가 스스로 하는 거라는, 그러나 그때까지 샤이론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적어도 케빈의 식당문을 열기 전까지는. 식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샤이론을 둘러싼 수많은 우연들이 비로소 하나의 필연으로 이어진다. 우연과 필연은 ‘발생’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스티브 잡스는 ‘connecting the dots’를 말한다. 서로 떨어져 있는 점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인데, 그러나 그게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지 못한다. 지나고 나서 되돌아봤을 때 비로소 연결되는 우연의 연결고리들이다. 우연이란 마치 시(詩)와 같아서, 달빛 속에서 어스름히 다가오는 사물들의 마주침과 같다. 어둠 속에서 달빛이 반짝이듯이 우연과 필연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니라, 우연은 필연의 한 과정이다. 오히려 우연의 반대말은, 이미 주어졌거나 아무런 상관없는, 계시나 예언 혹은 행운이나 해프닝이 아닐까?

 

매일 똑같은 출근길에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스쳐지나간다. 삶의 대부분은 그렇게 스쳐 흘러가지만 어느 시간, 어떤 만남은 김칫국물이 베이듯 우연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늘 과거의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아 볼 뿐이다. 

 

리틀, 샤이론 그리고 블랙. 모든 리틀이 블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환경(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러나 후안의 말처럼 그 속에서 우리는 늘 자신의 선택의 순간 앞에 놓인다. 알면서도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듯, 그래서 겨우 우연히 오케이 컷을 하나 얻게 되는, 그래서 우연의 점들이 하나의 필연으로 이어지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기쁨의 정서가 온몸을 감싸면서,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변곡점이 생성된다. 청씨네, 인큐베이터, 공구리못, 매둘목, 우연히 시작했던 문탁의 영화감상시간들, 함께 봤던 사람들은 영화인문학이라는 지금 이 자리에서 띠우샘과 '블루리본'의 활동으로 이어진다. 블루리본은 뭐가 될 수 있을까? 영화인도 아니고 인문학도도 아닌 내게 영화인문학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영화로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감사할 따름이다.

 

 

 

댓글 1
  • 2021-07-06 09:51

    혼자서, 영화관에 가서, 큰 스크린으로 짙은 블루로 가득찬 이 영화를 봤었지요.

    저에게는 스토리보다 '색'으로 기억되는 영화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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