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전 하전 끝나는 날 후기

누룽지
2022-06-14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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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에서 계사전을 다 읽었다. 팀의 진도가 계사전을 마쳤다는 것과 내 개인의 앎의 정도는 전혀 일치하지 않지만 아무튼 마쳤다.

繫辭라니...

책을 매어 만들던 시절에 말을 이어 맨다는 것은 어떤 뉘앙스였을까?

상전에 12장, 하전에 12장이 있으니 이어 매고 싶은 말도 적지 않으셨나 보다.

공자님이 지으셨다고도 하고 여러 학자들의 글이라고도 하던데 이런 것이 감히 생각거리가 될만한 처지는 아니다. 다만 각 장의 글들을 보며 주역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며 사람의 생각 구경을 하고 온 길이다.

주역에 대한 생각 구경길은 때론 호젓한 오솔길이기도 했고 할머니들 말씀대로 멋대가리는 없지만 시원하고 빤빤한 신작로이기도 했다. 길 없는 숲에 들어서 나무 목대만 더듬으며 겨우 빠져나온 몽롱한 길이기도 했고, 가을 강가 갈대밭을 산책하듯 불어오는 갈바람에 가슴 에이는 듯 하기도 했다.

블록버스터 영화(특히 재난이나 영웅을 다룬) 한편을 보고 나오면 일단 정신이 하나도 없다. 乾 과 坤에 집중해서 말씀하시는 글들을 보면 꼭 이랬다. 어떤 영화가 이 앞에서 댓거리 하자고 나설까?

그나마 내가 주역에 대한 생각구경 길을 걷고 있다고 알아챈 것도 세미나 중반부터이다.

계사전은 계사에 관한 해설로 주역의 사유방식에 대해 체계적이고 철학적으로 서술되었다 하여 64괘를 공부할 때의 몽롱함을 정리해 줄 구명줄 같은 것일 것일까 기대하며 첫 장을 살폈다. 첫 장이 블록버스터 영화를 들며 궁시렁거렸던 乾과 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웅장함에 있던 정신줄도 놓칠 판인데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에 맥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한 인물을 사방에서 보고 동시다발로 내게 감탄사를 섞어가며 소리 높여 전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뭘 놓치고 읽고 있는 거지? 이 이야기는 갑자기 나오는 것 같은데 앞장 읽으며 딴 생각했나?

읽다 포기할 것 같은 답답함에 싸여 있는 내게 우리팀의 리더들은 억지로 꿰지 말란 조언을 해주셨다. 책 첫 장의 차례를 적어나가듯 장들을 항목과 번호를 맞춰 엮으려 했던 내 억지가 눈에 보이셨나보다. 곰곰 생각해보니 끊임없이 변화를 이야기하는 주역에 대해 틀을 들이밀려는 내가 어이없었다. 그 이후로 사람의 생각구경 길에 나섰다는 걸 알았다. 강유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한 듯 해 사실 이것만으로도 세미나에 참석하길 잘했다 생각한다.

다행히 ‘주역계사강의’란 책을 읽기로 했으니 설렁대며 걷던 구경 길에서 나서 본문에 대해 좀 더 이해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 번 열렸다.

계사상전 11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子曰 夫易은 何爲者也오 夫易은 開物成務야 冒天下之道니 如斯而已者也ㅣ라 是故로 聖人이 以通天下之志며 以定天下之業며 以斷天下之疑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역은 어찌하여 만든 것인가?(무엇을 하는 것인가?) 역은 사물을 열고 일을 이루어 천하의 도를 덮으니(포괄하니) 이와 같을 뿐이다. 이러므로 성인이 이로써 천하의 뜻을 통하며 천하의 업을 정하며 천하의 의심을 결단한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이런 삶을 사신다고 한다.

聖人이 以此로 洗心야 退藏於密며 吉凶에 與民同患야 神以知來코 知以藏往니 其孰能與於此哉리오 古之聰明叡知神武而不殺者夫뎌

성인이 이로써 마음을 깨끗이 씻어 은밀함에 물러가 감추며 길흉에 백성과 더불어 근심을 함께하여 신으로써(신묘함으로) 미래를 알고 지혜로써 지나간 것을 간직하니 그 누가 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총명하고 지혜롭고 무력이 신묘하고도 죽이지 않는 자일 것이다

 

미래를 알고 지혜로서 지나간 것을 간직하지만 함부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길흉에 백성과 더불어 근심하는 따듯한 사람, 힘이 있어도 살생의 무거움을 알고 있는 인간스러운 사람이란다. 세상을 살아보니 이렇게 사는게 때론 얼마나 버거운 것인지 알 것도 같은데...

주역의 도를 따르는 자의 삶, 혹은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놓은 계사전의 사람 구경길은 그래서 가슴 에이는 갈바람 부는 길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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