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버린 젠더 후기

자누리
2020-11-04 21:04
527

여사서와 함께 읽는 <젠더> 첫시간이었다.

요즘 주역의 음양이나 중국사유의 배치논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중이라 이 텍스트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여씨춘추를 읽으면서 중국사유를 어렴풋하게, 전보다는 더, 알게된 것 같았고

그만큼 그 낯섦에 호기심 만땅이었는데, 묘하게도 동양고전이 아닌 <젠더>가 도움이 되었다.

 

<젠더>는 1982년에 쓴 책으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은 문제적 텍스트이다. 일리치도 각오하고 쓴 듯 신중하게 말을 풀어가는 인상이 든다. 1970년대에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고 그에 따른 공헌도 컸지만 일리치가 보기에 핵심적인 요소들을 간과했다고 느낀 듯하다. 감사의 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이 시대는 과거와 단절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 단절은 과거의 생산양식이 자본주의로 이행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에서 나는 젠더가 다스리는 시대에서 섹스가 지배하는 시대로 이행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초반에는 무얼 얘기하고 싶은지 방향을 정하기 위해 주변을 뱅뱅 돌면서 중심으로 들어가는 인상이라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어떤 키워드들이 연결되는 것은 알겠다. 

먼저 성sex은 단절 이후 사회의 키워드이다. 그것은 정치경제학과 연결되고 보통 말하는 남성, 여성은 엄밀히 말해 경제적 용어이다.

그것은 먼저 경제적으로 중성인 사람들을 그린 뒤 그 위에 세워둔 가건물같은 것이다. 

용도는 단지 차별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성은 차별과 처음부터 한 묶음이다. 

단절 이 전의 사회는 지금과 다른 성적분업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여성들에게) 위로를 위해서도, (남성들에게)비판을 위해서도, 그런 식의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은 경제적으로 중성인 '개인'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제학에서는, 시장에서 교환에 임하는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여성 남성이 아니다. 교환관계 설명에 어디에 성이 들어가는가.  

오히려 여자,또는 남자의 구별은 이전 사회에서 더 적나라했다. 그렇다고 중성적 개인이 아닌 그 여자, 남자들의 세계를 '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래서 일리치가 채택한 용어는 '젠더'이다. 젠더의 핵심은 토착성이다. 이 토착성은 지역민을 말할 때 쓰는 그 토착성과 같으면서도 더 광범위하다. 음양같은 개념에도 쓸 수 있는 말이다. 실제로 음양을 예로 들기도 한다. 토착성이라고 번역된 '

vernacular'는 아마 '부착성'이라고 하는게 더 나을 것 같다. 중성적이면서 이 세상 어디에나 붕떠있는 '개인', '개체'들이 아니라 어디에서 어떤 때에 어떤 일을 하며 어떤 누구와 살고 있다는 식으로, 아주 많은 것들에 부착되어서, 다른 누구와도 선명하게 구별되는, 정말 차이있는 현실적인 사람을 뜻한다.  이 젠더들의 세계가 남자/여자 구분과 연결되는 것은 사회조직의 원리가 이원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젠더의 원리는 이원성의 원리이다. 일리치가 보기에 사회생물학자들의 DNA, 사회학자들의 연극의 원리보다 더 실제적인 호모사피엔스의 본성은 이원적 조직의 능력에 있다. 여기까지 오면 현대사회는 이미 농촌, 지역이 붕괴되어서 토착성이 사라졌으므로 일리치의 통찰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하면 안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주 많은 것들을 부착시키는 유용한 방법으로서의 이원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성의 언저리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젠더의 세계를 이해하려 애써야 한다. 다음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만날수 있을 것이다.

 

여사서는 아내의 도리인 <傳心>장과 시부모에 대한 도리인 <曲從>장을 읽었다. 전심은 꼭 아내에게 해당되는 말만 아닐 것이다. 전심, 마음을 다하는 것은 동양사유의 단골 메뉴이다. 다만 전심에서 흥미로운 것은 전심을 펼치는 장소가 집안이라는 것이다. 나갈때만 외모와 자세를 신경쓰고 집안에서 아무렇게나 하고 사는 것은 좋은 자세가 아니라고 한다. 그만큼 집안, 즉 일상을 살아가는 마음에 신경을 쓰라는 것인데, 생각을 달리하면 집이 요즘의 집이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집이라 하면 바깥의 풍파를 막아주고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주는 개인의 마지막 보루, 보금자리(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의 은유를 갖는데, 여사서의 집은 오히려 지금의 바깥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집은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서로 신경을 써야하는 장소였는지도 모르겠다. 친족, 결혼관계가 개인들의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일정한 무리들의 결합관계라면 정말 오늘날의 회사내 관계 같을지도 모르겠다.

시부모에 대한 태도는 부모에 대한 것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부모란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다. 분별을 다투는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분별을 다툰다면 그 마음을 잃게된다. 다시말해 부모-자식간은 마음을 잃어버리는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마음이 멀어져도 끊어낼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관계는 또한 가장 마음이 잘 비춰지는 사이이기도 하다. 숨기기가 어려운 그 밀착성이 좋은 사이 만들기를 더 어렵게 한다. 그러니 거기에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부모-자식간의 세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차피 어려운 세계인 것 같으니 그냥 그림자와 산울림처럼 구는게 낫다는 말이 설득력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사서를 읽으면서 여성차별 이런 것보다는 그냥 이 시대의 모든 관계들에 건투를 빌고 싶어졌다. 

 

 

댓글 2
  • 2020-11-06 12:21

    분별을 다투면 마음을 잃어 버린다는 말은 특히 가족 관계에서 제가 살아 온 만큼 경험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동양고전을 공부 하면서 도대체 義가 뭔지, 四端에서 시비지심을 빼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었죠.^^

    암튼... 저도... 이 시대의 모든 관계들에게 건투를 !!!

    • 2020-11-07 00:22

      ㅎㅎ 사단에서 시비지심을 빼는 것을 상상해보니 괜찮네요^^ 역시 봉옥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7
[2023년 고전세미나] 올 어바웃 한(漢)나라 : 시즌 2 - 제의화된 정치
진달래 | 2023.04.24 | 조회 503
진달래 2023.04.24 503
16
올어바웃 한나라 2회 - 흉노정벌
진달래 | 2023.03.24 | 조회 129
진달래 2023.03.24 129
15
올어바웃 한나라 1회 - 제국의 시작 (4)
진달래 | 2023.03.13 | 조회 132
진달래 2023.03.13 132
14
[2023년 고전세미나] 올 어바웃 한(漢)나라 : 시즌 1 - 제국의 지식인 (1)
관리자 | 2023.03.04 | 조회 732
관리자 2023.03.04 732
13
<여사서> 세미나 S2 : 전근대와 근대의 가사노동 (1/13 개강) (2)
고은 | 2020.12.22 | 조회 959
고은 2020.12.22 959
12
<여논어> 관련
진달래 | 2020.12.08 | 조회 421
진달래 2020.12.08 421
11
<혼인의 문화사> 와 더불어 후기
진달래 | 2020.12.01 | 조회 413
진달래 2020.12.01 413
10
젠더 발제 (3) 및 세미나 후기
제경 | 2020.11.17 | 조회 556
제경 2020.11.17 556
9
늦어버린 젠더 후기 (2)
자누리 | 2020.11.04 | 조회 527
자누리 2020.11.04 527
8
<젠더>(2) 발제
고은 | 2020.11.04 | 조회 353
고은 2020.11.04 353
7
<젠더> 첫 발제문
자누리 | 2020.10.28 | 조회 382
자누리 2020.10.28 382
6
여사서 3회차 후기
진달래 | 2020.10.26 | 조회 396
진달래 2020.10.26 396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