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을 벗어난 관계
- 브래디 미카코, 『아이들의 계급투쟁』 리뷰
『아이들의 계급투쟁』. 나는 이 제목을 보고 아프리카 아이들이 직접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급 불평등에 분노하는 어른들, 그리고 그에 동화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했지만, 책에선 전혀 다른 내용들이 펼쳐졌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계 영국인 브래디 미카코로, 책은 미카코가 오랫동안 보육교사로 활동해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 2부는 그녀가 처음 보육 봉사를 시작했던 영국 저변에 위치한 탁아소의 이야기이다. 미카코는 저변 탁아소의 활동을 인정받아 정식 보육교사가 되었으며, 민간 어린이집 교사로 채용된다. 1부는 그녀가 일하던 민간 어린이집이 문을 닫으면서 과거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던 저변 탁아소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바뀌면서 민간 보육 기관으로 향하던 복지예산의 상당 부분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단순한 ‘보육일지’라기 보다는 보육 현장 최전선에서 기록한 ‘투쟁일지’에 가깝다. 그녀가 돌아간 탁아소는 영국 브라이턴에 소재한 하층계급 주민들을 돕는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 탁아소는 스스로를 영국 생활수준의 최하위권이라고 명시히고 있으며, 그렇기에 흔히들 ‘저변 탁아소’라고 부른다. 책에선 1부와 2부의 내용을 구분하기 위해 보육기관으로 향하는 예산이 긴축된 시점의 1부를 ‘긴축 탁아소’라 부르고,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기이자 미카코가 보육 봉사를 하던 시기의 2부를 ‘저변 탁아소’라고 부른다.
평소 슬프거나 감동적인 작품을 봐도 잘 울지 않는 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수시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저자는 저변의 이야기를 다루며 감정적인 호소를 하기 보다는, 보육과 가족, 인종, 복지, 국가에 대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보여주면서 그 어떤 것도 ‘정답’이나 ‘정의’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저자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감독 켄 로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켄 로치는 자신의 영화들에서 ‘희망’을 제거하고 적나라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하는데, 그러한 방식에서 오는 현실의 답답함이 나에겐 훨씬 감정적인 동요를 만들어 낸다. 미카코는 최하층 계급 아이들과 그들의 보호자들의 삶에 깃들어 있는 불안정성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어떤 것이 정의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결코 쉽게 판가름 할 수 없다.
브래디 미카코와 『아이들의 계급투쟁』
'좋은 환경'에서 자랄 권리?
내가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익숙하지 않았던 부분은 ‘아이는 사회가 키운다’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아동복지제도였다. 아이에게 폭력을 가한다던가(방치, 음식 미제공, 물리적 폭력 등), 부모의 생활상이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면 사회복지사가 아이를 데려가 다른 수양부모에게 연결하는 구조다. 이는 문제 가정에서 아이를 구출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영국 사회에서 살아갈 능력’이라는 ‘정상성’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부모가 명백하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면 당연히 아이를 구출해야 하겠지만, 아이를 방치하는 것인지 아이의 독립성을 기르는 과정인지 애매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에게 가하는 폭력의 범주는 어디까지이며, 사회적 삶이 불가능하다고, 부모에게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국가는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미카코는 튀니지에서 온 이민자와 그녀의 두 아이를 이야기한다. 튀니지 어머니는 두 아이를 아주 엄격하게 길렀다. 아이에게 체벌이나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기에, 큰아이는 반항심이 세고, 작은 아이는 정서 발달이 살짝 느리게 보였다. 하지만 미카코가 보기에는 꼭 학대받고 있다고 보이지도 않았다.
“작은 아이는 언어 발달은 좀 느리지만 손끝이 야무지고 표적이나 몸으로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어요. 학대받는 유아라면 그렇게 자라지 못해요. 지금 신세지고 있는 친척집이 경제적으로 힘든 모양이라 세끼 식사가 불가능할 수는 있는데…. 그런데 이 센터는 그런 가족을 돕는 곳이잖아요. 그리고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반항하는 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브레디 미카코, 노수경 역, 『아이들의 계급투쟁』, 사계절, 81쪽.
미카코는 ‘복지’에 신고해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대신 어머니가 잘 키워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과거의 탁아소와 탁아소가 속해있는 주민 센터 멤버들이었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센터 직원은 딱 잘라 답한다.
“그 엄격함에 체벌이 포함된다면 그건 학대입니다.” 같은 책, 81쪽.
‘이민 가정’이 가진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법이 규정하는 ‘정상성’에 따라 특정한 양육 방식을 규정하는 것만이 정당한 것일까? 모든 아동이 좋은 환경에서 자랄 권리를 갖는다는 것에는 백번 천번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좋은 환경’은 도대체 어떤 환경일까? 영국과 같은 서구 선진국의 법규에서 규정하고 있는 환경만이 ‘좋은 환경’일까? 튀니지의 이민자는 아직 서구화가 ‘덜’ 되었기 때문에 ‘좋은 환경’을 아이에게 제공할 수 없는 걸까? 서구 선진국과 그 외의 문화권 사이의 줄 세우기를 피하면서 공통의 기준을 생각해 내는 일은 어렵다. ‘정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저자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만, 실제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는 드물다. 튀니지 어머니와 아이들은 그 뒤로 센터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미카코의 역량으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것은 언어가 아니라 그 나라에서의 ‘정상성’이다. 같은 책, 76쪽
정상을 벗어라
현실이 아무리 어려운 문제들을 재기한다하더라도, 그녀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떠날 수도 없다. 미카코는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매일매일 속에서 그때그때 문제를 고민하고, 최선의 답을 내려 애쓴다. 그녀는 저변 탁아소를 회상하며 그 때의 아이들이 더 변칙적이고 폭력적이었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이건 단순히 과거여서, 그 당시 정권이 노동당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의 성향을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더 공동체적이었기 때문이다. 2부에 나오는 저변 탁아소에는 ‘정상’은 아니더라도 회생 가능성이 보이는 가정을 상대로 눈을 감아주는 사회복지사들, 아이뿐만 아니라 학부모들과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던 주민 센터와 탁아소 직원들이 존재했다. 그때에 비하면 긴축 탁아소는 칼같이 자르는 주민 센터 직원과 복지사들, 불안정한 삶 속에 고립되어 관계를 맺지 못하고 더욱 예민해진 부모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것은 아이들이 자라야할 ‘좋은 환경’이 비단 ‘법’을 정확하게 적용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저변 시절’과 ‘긴축 시절’의 차이가 거기서 드러난다. 저변 시절에는 ‘하층계급’으로써의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긴축 시기에는 그 안에서도 인종, 계급, 장애와 비장애 등으로 서로를 분리시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저변 탁아소가 가졌던 공동체성에 더 가치를 두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런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나 또한 공동육아 출신인데, 이를 통해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정상 가족
내가 나온 공동육아는 협동조합으로 학부모 조합원들이 운영에 참여하여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형태의 어린이집이었다. 내가 한창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 ADHD가 의심되는 한 아이에 대해 갑론을박이 터졌다.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겠냐며 그 아이를 내보내자고 주장하는 조합원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공동육아에서 쫓겨난 아이는 어디를 갈 수 있겠냐며 맞서다가 결국 둘 다 조합을 나오게 된다. 그 덕에 어린이집을 1년 조기 졸업한 나는 별일 없이 학교에 진학했고, 그 이후 내가 그 어린이집과 다시 얽히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갈 때쯤 ‘터전살이’라는 행사에 초대받는다. 터전살이는 어린이집을 졸업한 친구들이 모여 하룻밤을 지내는 연말 행사였다. 1기 졸업생이었던 내 또래 친구들부터 갓 졸업한 초등학생 1학년까지 모이는 이 행사가 나는 정말 인상 깊었다. 지금은 춘천에 남아있는 친구들도 적고, 각자 하는 일도 정말 다르지만 매년 같은 ‘터전’에서 추억을 나누다 보면 정말 가족 같은 느낌이 난다. 동기 친구들과는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되고, 잘 몰랐던 한두 살 터울의 동생들, 심지어 갓 졸업한 초등학생들과도 긴밀한 관계가 된다.
나들이 미션 중 하나였던 '조 별로 셀카 찍기'를 수행 중인 모습
연예인이 될 거라던 도영이(오른쪽 키 큰 친구)는 정말 단역 배우로 데뷔를 했다.
이런 관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친한 친구들? 고향 친구들? 아무래도 내가 느끼는 정서로는 ‘가족’만한 것이 없다. 만약 지금과 같은 제도로서의 가족, 정상성의 범주로서의 ‘가족’이 문제라면, 아예 이렇게 어떤 정서상태를 공유하는 집단을 이르는 말로 ‘가족’이라는 말을 마구 써보면 어떨까? 처음엔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관계에서, ‘터전살이’를 통해 학부모들 없이도 특이한 관계성이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공간이 없어진 올해는 또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전처럼 밥을 해 먹고, 나들이를 가고, 수건을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카코가 겪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그와 같이 어떤 공통성을 새롭게 만들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탁아소를 졸업할 시기에 부모가 교도소에 들어가 갈 곳이 없어진 로자리는 탁아소 원장과 함께 살면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되었다. 언더클래스의 전형인 10대 불량아 비키는 탁아소에서 자신의 동생을 돌봐주는 미카코의 모습에 감동해 탁아소에서 자원봉사를 신청했고,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렇게 놓고 생각해 보면 ‘공동체’의 ‘공동’을 막고 있는 것은 ‘가정된 정상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춘천의 공동육아도 없어졌고, 영국 저변의 탁아소도 결국 없어졌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언제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크게 보는 사회는 여전히 분열적이고 혼란스럽지만, 바닥까지 내려앉아서 본 저변 바닥에는 가능성들이 굴러다닐지도 모른다.
“분열된 영국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학자나 평론가, 저널리스트에게 맡기면 된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단절을 조금씩이라도, 단 1밀리미터씩이라도 좁히는 것이다.”
같은 책, 168쪽
이래저래 육아 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영국도 그렇구나.......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었던 대체리즘만이 그 원인이 아니겠지만, 그 열차 의 선로를 따라가고 있는 지금의 자본주의 열차에서는......ㅠ
단절을 좁히는 길은 우현처럼 질문을 던지는 것, 그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잘 읽었어요. 춘천에 며칠 다녀온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