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여성들은 정말 불행했을까] ‘척’ 하는 남편을 대하는 법

고은
2022-12-24 10:32
344

1. Hey Listen Mr. Big

 

   요즘 음원 차트를 살피느라 분주하다. 4세대 여자 아이돌들의 전성기라고 떠들썩한 만큼, 나의 혼을 쏙 빼놓는 멋진 노래와 무대가 쉬지 않고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라고 화려하게 꾸민 여성 아이돌이나 여성 솔로 댄스 가수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의 페미니스트 친구들은 여성 댄스 가수에 환장한다. 여성들의 지지를 받는 여성 댄스 가수의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꽤 윗자리에 이효리가 있다. 이효리는 ‘10 minutes’과 같은 섹스어필을 주 코드로 삼았는데, 3집부터 다른 색깔을 보이기 시작했다. 3집의 타이틀 곡으로는 능동적인 여성성을 주장하는 ‘U-Go-Girl’을, 후속 활동 곡으로는 남성성에 대해 질문하는 ‘Hey Mr. Big’이라는 노래를 들고나왔다.

 


'Hey Mr. Big' 뮤직비디오 장면
 

“자랑만 가득한 말마다 따분한 미래가 아득한 소년들이여
가슴이 따뜻한 생각이 반듯한 조금은 차분한 남자가 돼줘 (…)
남자의 싸움은 힘 아닌 희망이 커질 때 언제나 승리가 보여 (…)
Hey Listen Mr. Big (…)” (-'Hey Mr. Big')

 

   이효리는 이 노래를 통해 ‘척'하는 남성들에게 질문하는 당찬 여성 가수가 되었다. '훌쩍 넓어진 어깨로 죽어도 지켜줄 여자를 안길'과 같은 가사가 있다는 건 아쉽지만, 이 노래가 대중가요에 페미니즘 문화가 접목되기 이전인 2008년에 발매되었음을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노래의 주요한 흐름 속에서 화자는 마초가 되기를 자처하고 허세 부리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비판하고 그런 문화에 동조하는 남성에게 자기 말을 ‘잘 들으라’고 조언한다. 남성이 ‘자랑'에 매몰되는 대신 ‘따뜻하고 반듯한 생각'을 ‘차분히' 갖기를 바란다고, 싸움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힘’을 겨루는 일이 아니라 ‘희망'에 가까이 가는 투쟁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2. 안영의 마부와 그의 부인

 

   춘추시대에도 한 남성의 ‘척'을 강하게 비판했던 여성이 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나라 재상 안영의 마부와 그의 부인이다. 안영은 제나라의 재상, 즉 국무총리로 영공, 장공, 경공 3대에 걸쳐 제나라를 잘 이끌어간 현신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마부의 부인이 문틈 사이로 남편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영이 나갈 준비를 할 때 남편인 마부 역시 수레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부는 수레에 차양을 꽂고, 네 마리 말을 몰며 의기양양한 것이 자만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자신이 대단히 높은 사람의 수레를 끈다는 사실에 심취하여 뭐라도 된 것 같이 굴었나 보다. 아내는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 일침을 가한다.

 

   “그럴만하네요! 당신이 낮고 천한 게 말이에요.”

   “당신은 키가 팔 척이나 되는 사람이 안자[안영]를 위해 말을 모는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오히려 의기양양하여 스스로 만족해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이 때문에 당신으로부터 떠나려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팩폭을 날리며, 이대로 같이 못 살겠다는 강수를 둔다. 안영은 키가 6척으로, 당시의 단위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략 150cm 정도 된다고 알려져있다. 반면 그녀의 남편은 키가 8척으로, 대략 180cm 정도 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 키만 두고 본다면 분명 마부인 남편이 안영보다 크다. 그러나 부인이 보기에 남편은 마부의 자리에서 자만하며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만, 안영은 재상의 자리에서도 겸손하고 공손하게 스스로를 낮추고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역사책인 <사기열전>에서도 안영은 오랫동안 최고의 관직 자리에 있으면서 소탈하고 바른 생활을 한 인물로 그려진다. 재상이 된 후에도 식탁에 한 가지 이상의 육류가 올라오지 않게 했고, 부인에게는 비단을 입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주1)

 

   마부는 자신의 큰 키와 안영의 마부라는 자리에 만족하며 어깨를 곧추세웠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의 자만하는 모습이 도저히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남편은 결국 아내의 말에 수긍하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했고, 고쳐보겠다며 자신이 어떻게 해야겠냐고 질문한다. 아내는 차라리 의로움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천하게 지낼지언정, 허세와 교만을 부려 귀한 자리에 올라서는 안 된다며 겸손하게 행동할 것을 재차 강조한다. 안영의 마부는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깊이 반성하여 도를 배워 겸손하게 행동했고 부족한 듯이 굴었다. 갑작스러운 마부의 변화를 눈치챈 안영은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들은 뒤 마부를 대부로 진급시키고, 그 부인에게 ‘명부命婦’라는 호를 붙여주었다.

 

   (주1) 중국의 황희정승이랄까? ‘황희 정승네 치마 하나 가지고 세 어이딸이 입듯’이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세종이 불시에 황희정승 집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황희정승의 부인과 두 딸이 법도에 맞지 않게 번갈아 가며 인사를 올렸다. 깨끗한 치마저고리가 하나밖에 없어서 서로 옷을 번갈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황희정승 본인도 단벌 신사로 지냈기에, 급작스러운 왕의 호출에 미처 옷을 다 빨지 못해 솜을 입고 입궁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3. 혼내는 아내, 말 잘 듣는 남편

 

   일일드라마나 아침드라마에서 현명한 부인은 잘 웃고, 순종적이고, 내조를 잘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는 비단 노장년에게만 통용되는 사고가 아니다. 결혼 적령기인 내 또래 사이에서도 ‘연애할 여성과 결혼할 여성이 다르다’는 말이 레퍼토리처럼 사용된다. 결혼은 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니 순종적이고 내조를 잘해주는 여성이 ‘현명한 부인’이라는 것이다. 'Hey Mr. Big' 노래 속 화자나 안영 마부의 부인은 어떨까? 오늘날의 ‘현명한 부인’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까? <열녀전>의 저자 유향은 이 이야기의 끝에 주를 달아 마부 부인의 행동을 이렇게 해석했다.

 

   “제나라 재상의 마부 처는 남편을 도(道)로 바로잡아(匡) 주었네.”

   바로잡는다는 뜻의 ‘匡(광)’은 본래 버들이나 대로 만든 상자를 의미했다. 상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 멋대로 뻗어 있는 버들이나 대를 구부리거나 곧게 피는 작업이 필요하다. 즉, 匡의 ‘바로잡는다’는 뜻에는 제멋대로인 것을 바르게(正)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천자문>에서 匡은 최초의 패자인 제나라 환공이 혼란스러운 춘추시대 제후들을 바로잡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桓公匡合) <열녀전>의 저자 유향은 패자가 중국 땅의 정세를 바로잡을 때 사용했던 단어를 마부의 아내에게 사용했다. 유향의 말마따나 마부의 아내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혼을 요구하며 남편의 잘못을 콕 집어 나무랐으니, 순종적이고 내조를 잘하는 오늘날 ‘현명한 아내’ 기준에 미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마부의 아내가 오늘날 ‘현명한 아내'에 들지 못한다고 해서 정말 현명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패자가 정세를 바로잡은 것이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었듯이, 아내가 남편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단지 남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남성의 지위나 직급은 남성 개인의 것이라기보단 한 집안에 할당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부가 대부로 진급했을 때 그의 아내 또한 내명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즉 아내의 꾸지람은 비단 남편 개인을 움직인 것뿐만 아니라, 집안을 움직인 것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마부의 아내는 남편에게 투정을 부린 것도 아니고, 이혼을 빌미로 삼아 협박한 것도 아니었다. 마부의 아내는 남편의 ‘척’을 바로잡아 집안을 일으켰다.

 

   헛바람만 가득 들어 허세를 부리는 남편을 혼내고 정신 차리게 하는 아내의 모습은 마치 이효리가 ‘척'하는 남성을 비판한 것과 비슷하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만에 매몰되지 말고 겸손하게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고, 좋은 자리에 올라 알맹이 없이 잘난척하기보단 차라리 낮은 자리에서 의로움을 영예롭게 여기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진짜 현명한 여성들은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거나 내조하지 않는다. 2500년도 더 전에 ‘척'하는 남편을 비판한 마부의 아내, 10년도 더 전에 ‘척'하는 남자들을 비판하는 'Hey Mr. Big' 속의 화자, 그리고 오늘날 또다른 현명한 여성들이 집안을 일으키고 사회를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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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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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4.14 |
조회 118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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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4.09 |
조회 18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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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3.31 |
조회 164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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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3.26 |
조회 170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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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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