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20회] 키노-아이(Kino-eye), 세상을 담는 눈/<마지막 웃음(1924)>

띠우
2022-11-0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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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흑백영화를 보러갔다! 3부작 중 1편


키노-아이(Kino-eye), 세상을 담는 눈

 

F.W 무르나우 <마지막 웃음Der Letzte Mann, The Last Laugh(1924)>

 

“나는 너희 인간들이 결코 믿지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자리 언저리에서 불타 침몰하던 전함, 탄호이저 게이트 부근의 어둠 속에서 빛나던 섬광도 보았지. 이 모든 순간들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겠지. 빗속에 흐르는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때가 온 거야.”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1982)에서 리플리컨트였던 로이(룻거 하우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읊조렸던 대사를 기억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 같았던 로이, 그는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과거를 주마등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인간에 따라 다를 순 있지만, 인체의 모든 감각 중 70% 이상이 눈에 의해서 세상을 인식한 결과라고 한다. 삶을 끝내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뭔가를 본다. ‘본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감각임과 동시에 인식의 순간이다. 러시아 출신의 지가 베르토프 감독은 ‘키노-아이(kino eye)’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었다. ‘키노-아이’란 ‘영화의 눈’이란 뜻으로, 즉 ‘카메라의 눈’을 의미한다. 베르토프는 카메라 렌즈를 불완전한 인간의 눈과 대비해, 대중들에게 세상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자는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카메라, 세상을 향한 눈이 되다

 

“나는 키노-아이다. 나는 기계의 눈이다. 기계인 나는 당신에게 나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나 자신을 인간의 부동성에서 해방시킨다. 나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물에 가까이 갔다가 다시 멀어진다. 나는 그 사물들 밑을 기어 다니고 그 위로 기어 올라간다. ······ 이제 나, 카메라는······ 1초에 16~17개의 프레임의 법칙에서 자유로워져,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촬영을 어디서 했든 상관없이, 나는 이 세상에 있는 어느 곳이라도 함께 연결한다. 나의 길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창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나는 당신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다.”   - 지가 베르토프 <키노-아이>

 

 

키노-아이는 시간과 공간, 신체의 부자유로 인한 인간의 지각 능력의 한계를 보완해준다. 카메라의 위치 이동이나 고속촬영, 현미경 사용, 역동작, 애니메이션, 역원근법 등은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달려오는 기차를 바닥에서 볼 수 없지만 레일 위에 장착된 카메라는 그것이 가능하다. 아마도 수많은 영화들이 머리를 스쳐갈 것이다. 그리고 이제 드론 위까지 올라간 카메라가 보고 있는 것들을 떠올려보라. 여기에 편집은 시공의 조합가능성을 확장하고 현실과는 다른 인식을 불러온다. 이미지의 연결, 느리거나 빠른 화면 혹은 정지 등의 편집은 이미지 사이에 간격을 발생시키고, 그 간격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차이에 따라 해석은 달라지기도 한다.

 

베르토프는 카메라를 통한 지각(카메라의 눈)은 단지 눈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기능을 넘어 진실의 눈이 된다고 주장했다. 쇼트와 쇼트 사이의 간격으로 구성되는 몽타주를 통해 물리적인 현실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을 비롯해 후대 영화감독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장 뤽 고다르는 몽타주를 “사물들 사이에 관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물을, 어떤 상황을 보게 하는 것”이라 말했다. 그 구성의 순간순간에 인지적 소외가 발생하고 사람들의 인식과정이 끼어든다.

 

표현주의, 그 한계 너머의 가능성을 발견하다

 

노스페라투 포스터

 

1920년대 표현주의 영화들은 대부분 빛의 명암을 활용해 비현실적이고 기괴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1922작 <노스페라투 Nosferatu>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1888~1931) 감독을 국제적으로 알린 작품이다. 흡혈귀 영화의 효시로 불리는 이 영화는 빛과 어둠, 그림자를 활용한 공포 분위기가 뛰어나게 표현되었다. 193,40년대의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할리우드의 공포영화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들은 이 표현주의 기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편 다시 돌아와 1924년, 무르나우 감독은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는 <마지막 웃음>을 발표한다. 여기서 무르나우는 공포물이나 비현실적인 내용이 아닌, 당대 독일 사회의 현실을 섬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이 영화는 대사뿐만 아니라 자막조차 거의 없이 오로지 배우의 연기와 카메라 기술, 그리고 편집을 통해 독일 사회의 내부를 응시한다.

 

                     

유니폼을 빼앗기기 전후

 

성실한 호텔 도어맨(에밀 야닝스)인 주인공은 고급호텔 유니폼을 입는 것에서 자긍심을 느끼며 주변의 인정도 받는다. 그러나 곧 늙었다는 이유로 화장실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호텔유니폼을 몰래 훔쳐 주변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지만 이내 들통나버린다. 그는 단지 하는 일이 바뀌었을 뿐인데 주위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는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절망에 빠진 주인공이 화장실 구석에 앉아 끝나는 영화였는데, 나중에 에필로그가 덧붙여졌다. 주인공은 화장실에서 죽은 백만장자의 유언(자기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에게 상속)에 따라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주인공은 일하던 호텔에서 성대한 파티를 즐기고 의기양양하게 호텔을 떠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독일어 제목은 <마지막 남자Der Letzte Mann>이다. 그런데 영어, 한국어 번역이 <마지막 웃음The Last Laugh>이 된 것은 이 에필로그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쓸쓸히 앉아있는 원래의 씁쓸한 엔딩 장면이 패전국이었던 독일의 사회분위기를 생각한 우파(UFA독일최대영화사)의 외압에 의해 해피엔딩이 되었다. 제목은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에게 씁쓸한 웃음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 웃음>의 자전거를 이용한 오프닝은 유명하다. 최초로 자전거에 카메라를 매달아 호텔의 엘리베이터와 회전문, 그리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화려한 로비 등을 자유롭게 다니다 회전문 밖을 비춘다. 돌아가는 문을 사이에 둔 호텔안과 거리의 풍경은 당시 혁명 실패,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인플레이션 등으로 경제적 혼란에 빠진 독일사회가 직면한 사회문제를 빛의 명암처럼 보여주었다. 화려한 호텔에서 벗어난 카메라는 도시노동자들이 살아가는 아파트로 눈을 돌린다. 도시 건축물의 직선과 곡선, 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효과와 기하학적인 선들이 기이하고 혼란스럽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아파트, 소리도 없이 시간이 흐르고 남자들이 출근하면 기계적으로 집안일을 하는 여자들의 일상이 이어진다. 이전까지 표현주의 작품들이 주제를 추상적으로 보여줬다면,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은 현실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응시하는 키노-아이

 

                     

 

시종일관 카메라는 주인공의 연기를 여러 각도로 따라간다. 이 영화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배우의 연기 덕분이다. 에밀 야닝스는 자막의 도움도 받지 않고 대사 한 마디 하지 않지만 우리를 그의 행동과 심리에 빠져들게 한다. 몸의 움직임과 표정변화, 뒷모습만으로도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또한 기존의 표현주의 기법의 예술적 장점은 그대로 살리고 있다. 회화적인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 조명으로 로우 키(low-key) 촬영은 이 시대의 유행이 되었다. 흑백화면에서 어둠과 밝음이 좀 더 분명해지고, 명멸하는 명암을 이용해 심리묘사나 전체적인 계급사회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당시 자본주의 미국영화가 대낮같이 밝은 화면을 선호했다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었다. 이는 훗날 할리우드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죄책감을 느끼는 주인공의 심리표현

 

영화의 주된 공간은 화려한 호텔과 서민아파트다. 유니폼을 훔친 주인공은 호텔이 자신을 덮칠 것 같은 장면을 본다. 이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주인공이 환상에 빠져 호텔사람들에게 자기가 힘이 세다는 것을 과시하는 장면과도 연결된다. 결혼식 파티 장면에서는 핸드 헬드를 이용해 관객들까지도 그 혼란스런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다. 주변은 멈춰있는 상태에서 인물의 행동만 속도를 빠르게 하는 편집은 술 취한 주인공의 몽롱한 상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또 화장실로 좌천된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과 만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심술궂게 비틀어진 동네사람들의 여러 시선들을 함께 보여준다. 그로 인해 주인공의 불안감이 증폭되어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뒤섞이고 있다. 카메라는 내적심리를 암시하는 수단으로 이중노출을 이용한다. 일종의 죄책감과 동시에 이루고 싶은 자기 욕망이 혼합된 것이다.

 

                     

꿈속, 주인공의 심리

 

                   

이웃들의 시선과 그것을 피해 계단을 올라가는 주인공

 

호텔에서 화장실이 위치한 곳은 문밖에 위치한 계단 아래다.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의 계단도 여러 번 보여진다. 이때 카메라 위치에 따라 관객의 느낌은 달라지는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면 주인공은 무언가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계단을 이용한 카메라 트래킹은 현대영화에서도 재생산되고 있다. <조커>에서 아서가 오르내리던 계단의 상징이나, <기생충>에서 기택의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났던 수많은 계단, 혹은 박사장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을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80여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이 대도시로 몰려드는 1920년대 독일의 대중들의 삶이 이중 노출되어 우리 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호텔을 중심으로 한 중산층과 노동자계급이 살아가는 아파트가 겹쳐져서 보이는 것이다. 계단이나 유니폼의 착용여부에 따라 주인공의 몸을 다르게 보여주는 카메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의 정체성이 어디에서 영향을 받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르나우 감독이 1920년대의 삶 속에서 노동자들의 소외를 이미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금 떨어져 진실을 보다

 

무르나우의 영향을 받았던 히치콕의 <이창>

 

당시 독일 사회에서 살던 대중들은 도어맨, 화장실도우미, 백만장자가 되어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자본주의의 밑바닥이 보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킬까. 주인공이 강하게 집착하는 호텔 유니폼은 계급에 따른 권력 사회를 연상하게 만든다. 결국 이 모든 소동 속에서도 호텔 안에 머무르던 사람들의 삶은 변화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백만장자가 된 주인공을 보며 뒤에서 비웃고 자기 사회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 나치즘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독일 역사를 보면, 당시 무르나우가 느꼈던 불안감은 예견에 가까운 것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무르나우는 독특하고 기발한 카메라 기법으로 소시민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독일 사회의 현재를 사실적으로 꼬집는다. 계급문제, 노인문제, 차별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카메라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무르나우는 영화를 통해 현실 사회의 혁명을 꿈꾸었고, 그것은 기존의 영화문법이 아닌 새로운 문법의 창조를 통해서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그 내면의 진실을 들여다보기를 원했다. 카메라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구성함으로써, 한 발 떨어져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것이다.

 

돼지(군다)의 시선으로 세상보기,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군다Gunda2020>

 

영화사를 보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은 분명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리고 이제 오감을 이용해 영화를 보는 시대다. 요즘은 소리를 따라가지 못해 한국영화에도 자막을 설정하기도 한다. 세상에 넘쳐나는 스펙터클 영화들을 보다보면, 간혹 소리도 없이 흑백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어쩌면 영화에 소리를 일찌감치 넣어 버림으로써 카메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성급하게 손을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키노-아이는 시간과 공간, 쇼트와 쇼트를 이용해 구성한 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더 많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물론 아직 늦지는 않았다.

 

댓글 4
  • 2022-11-06 10:55

    아, 키노-아이!!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를 처음 봤을때의, 음, 그 황당함과 신선함, 어지러움, 묘한 쾌감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지금 영화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아직도 영화- 키노 아이는, 유효할까요?

    우리는 왜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건지, 영화인문학과 필름이다는 우리에게 어떤 공부의 장이 되는지, 갑자기 한꺼번에 새삼 질문이 드네요^^

  • 2022-11-08 15:10

    ' 베르토프는
    카메라 렌즈를 불완전한 인간의 눈과 대비해,
    대중들에게 세상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자는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댓글을 달기 위해
    이번 글을 두번이나 읽었다.

    (글도 사진도 어려워서)

    아-- 다 흑백이어서 --
    나에게 어렵게 느껴졌나 보다

  • 2022-11-09 09:39

    흑백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스튜디오 개소리, 지음은 흑백으로 제작합니다.
    게다가 무성영화라니요.
    언어의 한계를 오히려 제약이 아닌 표현의 확장으로
    나아갔던 시대.
    영화인문학 역시 텍스트의 한계를 오히려 인식의 확장으로 나아가기 위해 영화로 시대를 사유합니다.

    다음 흑백영화도 기대할께요~

  • 2022-11-10 18:17

    영화인문학 덕분에 백년전 영화 <마지막 뭇음>도 보고...
    그래, 그랬군요.
    좋았던 기억이 많네요.
    영화인문학. 응원합니다!

('로봇이 아닙니다' 체크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