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뼘 양생 9회> 잠을 처방합니다 (호모 오티우무스 되기②)

문탁
2021-10-12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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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기혈이 약해요. 허약체질이에요. 비위가 약해서 잘 못 먹어서 그런 건데, 그러다 보니 에너지를 쓸 수가 없죠. 게다가 내성적이고 치밀해서 스트레스에 약하군요."

얼마 전 동네 한의원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피곤이 쌓이고 기력이 바닥을 쳐 거의 좀비처럼 며칠을 지낸 후 죽지 않으려면 산에라도 가야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맘을 바꿔 아무 데나 가장 가까운 한의원으로 간 날이었다. 그날 난 부황, 뜸, 침, 3종 세트의 치료를 받고 겨우 회생했다.

 

타고난 기혈이 약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도 오랫동안 꽤 많은 일을 감당하며 살아왔다. 아니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순간순간 에너지를 폭발시키고 그다음에 번아웃되는 식의 삶은 나에게는 이념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기운을 정미롭게 쓰는 방식을 터득해왔다. 인간관계는 단순하고 쇼핑, 관광 같은 번다한 일에도 힘을 쏟지 않는다. 지인의 생일 등 기념일을 챙기는 이벤트 따위는 거의 안 한다. 잘한 일도 잘못한 일도 바로바로 잊어버리는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불필요한 동선을 만들지 않는 것, 감정의 잉여를 남기지 않는 것, 이것이 저질 체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양껏 하면서 살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올해 ‘삑사리’가 났다. 부실하나마 수십 년간 잘 지탱해온 삼발이의 한쪽 다리가 부러진 느낌이다. 자주 열이 났고 두통이 왔으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의 알레르기가 심해졌고, 잇몸은 ‘맛이 갔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짜증이 났고, 생전 처음 공황장애 비슷한 불안증도 생겼다. 한마디로 면역력이 바닥을 친 것이다. 원인이 뭐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나? 10년 만에 공동체의 구조조정이 있었고, 밥벌이 때문에 강의도 좀 늘리긴 했다. 하지만 드라마틱하게 일이 많아진 것은 아니다. 그러면 늙었나? 너무 ‘퉁치는’ 느낌이다. 좀 더 정밀한 진단이 필요하다. 곰곰이 생각했고 결론을 냈다. 문제는 ‘잠’이었다. 올해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난 3대가 선업(善業)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혹은 상당한 수양을 해야 도달할 수 있다는 ‘자의식-없음’을 약간 타고났다. 덕분에 ‘이불 킥’ 없이 누우면 바로 잠이 든다. 낮에 빡세게 일하지만 밤 문화를 즐기지 않으니 자는 시간도 비교적 이르다. 심지어 갱년기도 순하게 와서 수면 트러블을 거의 겪지 않았다. 그런데 이 루틴에 균열이 온 것이다. 2년 전부터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는데 올해에는 강의 준비 때문에 더욱 잠이 부실해졌다. 까다로운 이론가의 책들을 읽어내야 하는 압박, 당대의 맥락 속에서 질문을 재구성해야 하는 부담, 제한된 시간 안에 강의안을 써내야 하는 초조감 때문에 강의 전날은 늘 밤을 새웠다.

 

잠은, 과학자들에 따르면 그 이유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21세기 최대의 미스터리라고 한다. 왜냐하면 잠자는 동안에는 먹을 수도 없고, 아이를 낳고 키울 수도 없으며, 무엇보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걸 해결하기 위한 진화론적 압력을 받아왔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으니 생물학적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잠을 자는 것일까? 어떤 과학자는 잠을 자는 동안 뇌의 시냅스가 줄어드는데 이것을 통해 뇌는 낮 동안의 기억을 정리, 청소하고 다음 날의 새로운 학습을 준비한다고 말한다. 다른 과학자는 아기들이 성인들보다 많이 자는 것을 근거로 잠은 뇌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잠을 잔다. 왼쪽은 낮에 잎을 펴고 있는 자귀나무, 우측은 밤에 잎을 접은 자귀나무 (이미지 -네이버검색)

 

 

잠을 자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명확히 설명하기 힘들다 하더라도 잠을 자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는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피부가 까칠해지고 한 발 떼는 것도 무거우며 정신이 멍하고 의욕이 저하된다. 집중력이 떨어져서 뭘 자꾸 흘리거나 픽 넘어지기도 한다. 불면증이 계속되면 영화 <인썸니아>의 알 파치오나 <택시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처럼 환각과 망상, 불안과 충동 사이에서 자신을 망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의 예도 잘 알고 있다. 감정이 복받치더라도 한숨 자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라앉고 어떤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끙끙댈 때도 한숨 자고 나면 뜻밖의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밤은 확실히 안식과 치유, 회복의 시간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잠을 자지 않는다. 세상은 온통 불야성(不夜城)이고 너나 할 것 없이 “조급한 불면의 밤”(아도르노)을 보낸다. 산만해진 시간, 분주해진 삶 속에 안식은 없다. 이에 대해 한병철은 “세계를 인간 의지에 따라 조작하고 지배하는 활동적 삶을 인간 존재의 유일무이한 가치로 보는 세계관”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안은? 지구인의 운명답게 낮과 밤의 시간, 깸과 잠의 리듬, 시작과 종결의 매듭을 회복하는 것일게다. “오직 종결의 시간적 형식들만이 나쁜 무한성에 맞서서 지속을, 즉 의미 있는 충만한 시간을 창출한다. 잠, 숙면 역시 결국은 종결의 형식일 것이다”(한병철, 『시간의 향기』, p30)

 

 

한병철, <시간의 향기>(문학과 지성사>

 

 

최근 난 나에게 잠을 처방했다. 가능한 10시엔 모든 일을 마감하고 제대로 씻고 공자님처럼 꼭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눕는다. 물론 마무리 못 한 일이 태반이지만 그냥 잔다. 나 역시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활동’이 이념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성실성을 관성과 헷갈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책임감이 욕심이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러면서 넌지시 생각한다. 혹시 알아? 밤에 우렁각시가 와서 나 대신 일을 해놓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잠자는 동안 봉인 해제된 나의 창조적 무의식이 다음 날 나를 훨씬 멋지게 부활시킬지, 라고. 밤, 내가 잠든 그 무위(無爲)의 시간이,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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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 양생 – 호모 오티우무스 되기

1차 – 여음(餘音), 그리고 휴가같은 삶

2잠을 처방합니다

3차 – 문즈가든(Moon’s garden) : 식물하는 마음

4차 – 21세기,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5차 – 피로사회와 산책

댓글 6
  • 2021-10-13 09:17

    우렁각시는 몰라도

    하여간 잠은 잘 자야됩니다 ㅎㅎㅎ

  • 2021-10-14 08:33

    밤 10시에는 이불 갈고 누워서 약간 엎치락뒤치락하다 11시에는 잠 들 수 있는데, 10시에 눕는 게 잘 안되네요. 뭔가 안까운 생각이 들어서. 어제도 tv예능 기웃거리다 11시에 누웠네요. 오늘 밤엔 꼭 10시에 자야지!!

  • 2021-10-14 22:27

    저도 한 동안 새벽에 깨는 바람에... 갱년기 때문인가.. 했는데  요 며칠 안 깨서.. 음.. 자전거를 타서 몸이 좀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있긴 한데... 어쨌든 잠이 보약이란 말은 맞나 봐요^^ 샘의 잠자리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 2021-10-14 22:29

    저는 잠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급진파입니다.^^

  • 2021-10-19 00:04

    급 파자마를 사고 싶어졌어요~

  • 2021-10-26 17:34

    공자님처럼 꼭 잠옷을 입고^^ (맘에 든 문장!)

    문탁샘처럼 10시 전에 자고 (푹 잘~자고)

    기린샘처럼 아침에 논어암송하고 책읽는 습관을 몸에 붙이는 일.  저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일찍 누워도 잠이 안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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