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23회] 우연의 만남 / 영화 <문라이트>(2017)

청량리
2022-12-18 10:53
309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우연의 만남

문라이트 Moonlight (2017) | 감독 베리 젠킨스 | 111분 |

 

 

지난 글 보기 :(1) 우연이라는 결과 / (2)우연한 선택 

 

 

우연이라는 결과(제너럴), 우연한 선택(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우연의 만남

 

변곡(變曲)점

 엄마와 단둘이 사는 샤이론은 조용한 성격과 작은 체구로 리틀(알렉스 R. 히버트)이라 불린다. 리틀은 아이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 하지만 그곳은 마약거래상인 후안(마허샬라 알리)의 비밀창고였다. 쿵쿵. 창문 합판을 뜯어낸 후안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리틀과 마주한다.

 

    후안 : 여기서 뭐 하니, 꼬마야? 모르는 사람이랑 얘기 안 해?

    리틀 : ...

    후안 : 저기...뭐 좀 먹으러 갈 건데, 가고 싶으면 같이 가고.

    리틀 : ...

    후안 : ...가자. 여기보다 나쁘겠어?

 

밥 먹으러 가자. 여기보다 더 나쁘기야 하겠어?

 

 엄마는 마약에 취해 리틀의 삶과 일상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후안이 리틀에게 주는 용돈까지 갈취해서 다시 후안에게 마약을 구매하는 대책 없는 엄마다. 1970~80년대 미국 마이애미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문라이트 Moonlight>(2017)는 터렐 앨빈 매크레이니의 미발표 희곡, 제목이 무척이나 시적(詩的)인,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를 원작으로 한다. 연극보다는 영화적인 요소가 많았던 터라 무대에 올리진 못하고, 시간이 흘러 베리 젠킨스 감독과 원작자인 터렐이 만나면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를 구성하는 3막의 각 부분은 어떠한 '만남'으로 이뤄져 있다. 1막은 리틀과 후안, 두 사람이 창고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5번가 뒷골목의 흔한 마약거래상 후안. 그러나 리틀에게는 집과 학교의 틀을 벗어난 변곡점이다. "때가 되면 너 스스로 뭐가 될지 정해야 할 순간이 올 거야. 그 결정을 누구도 너 대신 해 줄 수는 없어." 어느 날 후안이 리틀에게 전해주는 말이다.

 

이제 수영해도 되겠는걸? 어때? 넌 세상의 중심에 있는 거야.

 

 후안에게 조금씩 문을 여는 리틀. 바다 위 리틀을 안고 수영을 가르쳐주는 후안. 누가 보면 따뜻한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보이는 두 사람. 그러나 끊임없이 출렁이는 수면 위를 따라가는 카메라와 음악(작곡 니콜라스 브리텔)은 그들의 관계가 오래가지 못할 것처럼 불안한 듯 흔들거린다.

     리틀 : 아저씨 마약 팔아요?

     후안 : ...

     리틀 : 우리엄마...마약 하죠?

     후안 : ...

엄마가 마약을 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약을 후안이 팔았다는 사실에 리틀은 말없이 집을 나간다.

 

붕괴(崩壞)점

 키가 훌쩍 커졌으나 샤이론(애쉬튼 샌더스)은 여전히 교내 왕따이며 비인간적인 폭력에 시달린다. 케빈(자럴 제롬)은 샤이론의 어릴 적 친구이자 유일하게 서로 정서적, 신체적 교감을 나눈 사이다. 푸른 달빛이 비치는 바닷가에서 샤이론과 케빈은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안아준다. 샤이론이 그때처럼 행복한 적이 있었을까. 그러나 2막에서 샤이론과 케빈의 만남은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오랜 친구사이인 샤이론과 케빈. 우연히 마리화나를 나눠피고 서로를 들여다 보게 된다.

 

 어느 날 식사 중인 케빈에게 교내 양아치 터렐이 다가온다. 사고뭉치에 놀기 좋아하지만 케빈도 터렐이 두려워 그가 제안하는 게임을 거절 할 수 없었다. 기억나지? 내가 한 놈을 지목하면 네가 때리는 거야. 못 때리면 지는 거고. 이유 없이 샤이론을 지목하고, 케빈에게 폭력을 강요하는 터렐. 왜 하필 너냐. 케빈의 눈빛이 흔들리지만, 옆에서 터렐은 계속 윽박지른다. 뭘 꾸물대? 저 호모새끼 갈겨버려! 결국 케빈의 주먹이 샤이론의 얼굴로 날아가고 만다. 그냥 누워 있으라고! 피를 흘리며 샤이론은 케빈을 노려보지만 터렐 패거리들에 휩싸여 발길질 당한다. 터렐의 시킨 짓이라는 걸 알지만 케빈의 태도 역시 참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샤이론은 터렐의 등짝에 의자를 내리꽂는다.

 

     샤이론 : 왜 맨날 그렇게 불러?

     케빈 : 뭐, 블랙?

     샤이론 : 그래, 블랙.

     케빈 : 나만 부르는 별명이야. 맘에 안 들어?

     샤이론 : 아니, 그냥...

 

 지금까지 온갖 모욕과 폭력을 견뎌왔는데, 무엇이 샤이론의 내면을 붕괴시켰을까? 샤이론의 폭력은 무엇을 향한 분노였을까? 그 주먹이 만일 터렐의 것이라면, 바닷가에서 케빈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샤이론 곁에 후안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모든 일은 인과관계 속에서 발생하지만,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수 있을) 뿐이며, 그것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알 수도, 개입할 수도 없다. 때문에 우연이란, 나를 둘러싼 무수한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나의 선택이며 또한 그것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연은 어떠한 ‘의미’로 작동하진 못한 채 그저 지나가 버린다.

 경찰에게 끌려가는 샤이론은 교문 앞에서 케빈과 눈이 마주친다. 케빈은 수갑을 찬 샤이론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경찰차 안에서 샤이론의 시선은 케빈을 붙잡고 있다. 그에게도 화가 났지만, 그를 놓아버린다면 샤이론은 다시 혼자가 될 것이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후안처럼 마약거래상이 된 샤이론, 즉 블랙(트레반트 로즈)의 이야기가 3막으로 이어진다.  

 

시작(詩作)점

 시()는 분명 알고 있는 익숙한 단어들의 나열임에도 그것들의 만남은 전혀 다른, 낯선 의미로 다가온다. 시인이 고민했을 선택들, 단어 하나, 하나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여 얻게 되는 그 결과로써 시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일어났다 사라지는, 선택이자 또한 그것의 결과가 ‘우연’이라면, 그건 마치 시()와 같아서 달빛 속에서 어스름히 다가오는 사물들의 마주침일 것이다.

 

     케빈 : 바람이 진짜 기분 좋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 세상이 잠깐 멈춘 기분이야.

               그저 바람을 느끼고 싶어지거든. 세상이 다 고요해져.

     샤이론 : 그러면 내 심장소리가 귀에 들리지. 그치?

     케빈 : 허...그래, 기분 진짜 좋지. 울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다니까.

     샤이론 : ...너도 울어?

 

 우연의 만남, 즉 관계는 삶의 전제조건이지만, 선택이라는 변수로 인해 달라지며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어떤 결과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우연과 필연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니라 우연은 필연의 한 과정이다. 그 모든 과정, 만남-선택-결과 속에 녹아들어 있는 우연은, 삶의 원리인 셈이다.

 나는 지금 어쩌자고 이 영화에 대한 글을 문탁에서 쓰고 있는 것일까? 아내는 우연히 사주명리를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의 소개로 10년 전 첫째를 안고 2층 공부방에 우연히 니체를 공부하러 왔다. 그렇다고 영화인문학에서 이 영화를 상영될 줄 알았을까? 우연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것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비슷한 일상을 반복한다. 그 속에서 우연히 얻게 되는 오케이 컷 하나. 한 편의 에세이, 한 끼의 밥상, 한 번의 시즌. 이를 통해 지나온 우연의 점들이 하나의 필연으로 이어지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기쁨의 정서가 온몸을 감싸면서,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변곡점이 생성된다.

 

 

연결(連結)점

 어린 리틀은 어찌할 수 없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후안의 죽음 이후 케빈과의 만남도 샤이론의 폭력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 했다. "선택은 너 스스로가 하는 거야" 후안이 했던 이 말의 의미를 리틀-샤이론은 깨닫지 못 했다. 그러나 케빈의 식당으로 들어서면서, 자신을 관통해 왔던 즉 리틀-샤이론-블랙을 둘러싼 수많은 삶의 지점들이 서로 연결되는 시간을 블랙은 경험한다.

 10년 만에 블랙은 케빈이 요리사로 일하는 식당을 찾아간다. 어정쩡 자리 잡은 블랙과 분주하게 서빙을 하는 케빈의 엇갈림을 롱테이크로 길게 잡는다. 이후 블랙, 즉 샤이론을 발견하고 놀란 케빈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데, 그가 '샤이론’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은 화면과 목소리의 싱크가 일부러 어긋나며 울린다. 약간의 환상, 두 사람을 위한 공간. 중요한 건 블랙이 케빈을 '다시' 만나러 왔다는 사실이다.

 

왜 전화했어? 하지만 블랙은 케빈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블랙은 자신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케빈에게 묻는다. 왜 전화했어? / 뭐? / 나한테 왜 전화했냐고. / 말했잖아. 어떤 손님이... 이 노래를 틀었다고. ‘다시 보니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이게 얼마만인가요? 무지 오래된 것 같아요. 당신이 마침내 여기 왔군요.’ 계속 마음속에 있던 상대를 오랜만에 재회하니 기쁘다는 내용의 노래, 바바라 루이스의 ‘Hello Stranger’가 두 사람 사이로 흐른다. 하지만 왜 전화했냐는 블랙의 질문은 잘못됐다. 케빈이 전화해서 블랙이 온 건 아니니까. 찾아온 건 본인인데 정작 케빈에게 그 이유를 묻고 있는 셈이다.

 후안이 말했던 ‘나의 선택’, 그 안에는 알 수도 없고, 개입할 수도 없는 어떤 결과까지 받아들이는 것 또한 포함한다. 엄마, 후안, 케빈, 터렐, 그리고 다시 케빈. 수많은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우연이 스며들어있다. 그러나 우연은 스쳐지나가고, 그 의미는 휘발되어 사라지며, 선택의 순간은 잊히기 쉽다. 하지만 다가오는, 알 수 없는 결과들에 대해서는? 우연은 순간이고 삶의 시간은 무한해서 그 의미는 우연의 만남 이후의 시간을 통해 드러난다. 때문에 우연은 ‘발생’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10년 전 해변에서 케빈과의 만남 이후 자신을 안아준 사람은 없었다며, 마초 같은 근육질의 마약거래상 블랙은 숨겨 온 속내를 털어놓는다. 샤이론, 넌 누구니? 전혀 다른 사람 같잖아? 케빈이 묻는다. 나? 난, 나야. 몸은 바뀌었지만 네가 날 만진 이후 난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어. 블랙의 대답에 케빈은 돌아서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달빛이 비치는 바닷가의 마지막 장면, 푸르게 빛나는 어린 리틀이 다시 우리 앞에 서 있다.

 

 

 

 

댓글 1
  • 2022-12-19 22:00

    영화 인문학에 발을 들인 우연이 어떤 필연으로 이어질까 급 궁금해지네요 ㅎㅎ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14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265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4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띠우 2023.05.28 |
조회 29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짝코>(1983) | 감독 : 임권택 , 주연 : 김희라, 최윤석 | 103분            어느 날, 노숙자 한 명이 '갱생원'으로 들어온다. 갱생원이란 “오고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는” 곳이지만, 실상은 ‘사회복지’보단 “속세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자들의 ‘사회적 청소’개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란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살고 싶었으나 망실공비(사망, 실종 또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공비)로 떠도는 빨치산 ‘백공산, 일명 짝코(김희라)’와 한평생 그를 잡기 위해 뒤를 쫓는 토벌대 경사 ‘송기열(최윤석)’은 30년 만에 서울의 ‘갱생원’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송기열은 단번에 짝코, 백공산을 알아본다. 아닌 척하지만 백공산 역시 그를 알아보고 식은땀을 흘린다.     영화 <짝코>(1983)는 지리산을 시작으로, 갱생원까지 오게 된 두 사람의 시간을 ‘플래시백 기법(회상장면으로 넘어간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기법)’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전개에선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왜 그토록 송기열이 백공산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백공산과 송기열은 이미 사회에서 잊힌,...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겨우 잡았는데, 이토록 허망하다니 <짝코>(1983) | 감독 : 임권택 , 주연 : 김희라, 최윤석 | 103분            어느 날, 노숙자 한 명이 '갱생원'으로 들어온다. 갱생원이란 “오고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밥도 주고 잠도 재워 주는” 곳이지만, 실상은 ‘사회복지’보단 “속세에서 버림받고 소외당한”자들의 ‘사회적 청소’개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보고 깜짝 놀란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살고 싶었으나 망실공비(사망, 실종 또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공비)로 떠도는 빨치산 ‘백공산, 일명 짝코(김희라)’와 한평생 그를 잡기 위해 뒤를 쫓는 토벌대 경사 ‘송기열(최윤석)’은 30년 만에 서울의 ‘갱생원’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송기열은 단번에 짝코, 백공산을 알아본다. 아닌 척하지만 백공산 역시 그를 알아보고 식은땀을 흘린다.     영화 <짝코>(1983)는 지리산을 시작으로, 갱생원까지 오게 된 두 사람의 시간을 ‘플래시백 기법(회상장면으로 넘어간 시점에서 과거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기법)’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전개에선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왜 그토록 송기열이 백공산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백공산과 송기열은 이미 사회에서 잊힌,...
청량리 2023.05.02 |
조회 34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불온함의 불온함     -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37년 만에 발견된 미개봉작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난 뭐라고 했었지? 우선은 학교에 가고 상태가 계속 안 좋으면 다시 집으로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은 가라고. 그런데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는 이만희 감독, 그는 나에게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로 먼저 기억되는 사람이다. 도회적이고 자유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반항적이고 불온하게 보였던 이혜영을 통해 알게 된 이만희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데뷔작 <주마등(1961)>을 시작으로 1975년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총 52편의 영화를 남겼다. 이만희 감독은 1931년생으로 한국전쟁과 해방을 거쳐 4·19 혁명의 환희 속에서 30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그의 영화세계는 그 시대 어느 감독보다 폭넓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60년대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중문화예술이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했고 차츰 예술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갔다.   1968년은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 제작된 해다. 기록에 따르면 <휴일>은 “주체성과 예술성이 없다”, “주체성은 있는데 예술성이 없다”, “이런 작품은 되도록 안 만드는 것이 좋다”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차례차례 반려되었다. 심의 당국으로부터 시나리오의 결말을 고치면 개봉을...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불온함의 불온함     -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37년 만에 발견된 미개봉작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난 뭐라고 했었지? 우선은 학교에 가고 상태가 계속 안 좋으면 다시 집으로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은 가라고. 그런데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는 이만희 감독, 그는 나에게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로 먼저 기억되는 사람이다. 도회적이고 자유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반항적이고 불온하게 보였던 이혜영을 통해 알게 된 이만희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데뷔작 <주마등(1961)>을 시작으로 1975년 간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총 52편의 영화를 남겼다. 이만희 감독은 1931년생으로 한국전쟁과 해방을 거쳐 4·19 혁명의 환희 속에서 30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던 그의 영화세계는 그 시대 어느 감독보다 폭넓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60년대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중문화예술이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했고 차츰 예술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갔다.   1968년은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 제작된 해다. 기록에 따르면 <휴일>은 “주체성과 예술성이 없다”, “주체성은 있는데 예술성이 없다”, “이런 작품은 되도록 안 만드는 것이 좋다”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차례차례 반려되었다. 심의 당국으로부터 시나리오의 결말을 고치면 개봉을...
띠우 2023.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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