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공동체 속 인간의 행복한 삶

토용
2023-06-01 22:15
268

공동체 속 인간의 행복한 삶

 

 

뜬금없는 행복

얼마 전 문탁 점심에 연잎밥과 장아찌를 비롯한 여러 반찬들, 디저트로 사과정과, 오디정과가 차려졌다. 동은이가 주방에 들어와 차려진 상을 보더니 “행복해!”라고 외쳤다. 순간 ‘별게 다 행복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행복이라는 단어는 꽤 무거운데, 동은이에게는 한없이 경쾌하고 가볍게 쓸 수 있는 말이라는게 신기했다. 동은이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연이어 나와 좀 의아했다. 윤리학 책에 갑자기 웬 행복론?

 

행복은 보통 처한 현실에 비추어 결여된 것이 충족되었을 때 특별하게 느끼는 감정인 것 같다. 병이 들었을 때는 건강을 행복이라 여기고, 가난한데 로또라도 맞으면 최상의 행복을 느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명예를 얻었을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뭔가 얻기 힘들고 어려운 것을 해냈을 때 느끼는 최고조의 감정 상태가 행복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소확행’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 행복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소소한 만족, 기쁨과 같은 감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뭐가됐든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단순히 감정에 국한된 것이 아닌 인간의 삶에서 최종적인 목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삶이 좋은 삶이고 행복한 삶인가를 묻는다. 인간에게 좋음은 무엇인가?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선택 속에서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좋음이다. 좋음에는 그 자체로 좋은 것과 좋음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좋은 것이 있다. 부, 권력, 명예, 쾌락 등은 수단으로서의 좋음이지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 즉 최고선은 바로 행복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소유한 상태에서가 아니라 정신의 활동성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행복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지속적인 활동이다. 지혜로써 사리를 비춰보고 고요한 마음으로 삶을 음미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관조의 활동이 가장 즐겁고 자족적이며 완전한 행복이다.

관조적 활동은 인간의 모든 활동들 중에서 신의 활동을 가장 많이 닮은 것으로 가장 행복한 활동이다. 그리고 행복은 신이 내린 최선의 선물이다. 행복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eudaimonia인데, eu는 잘, daimon은 신적 존재를 뜻한다. 행복은 신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에우다이모니아에 그 의미가 그대로 들어있다.

 

행복은 미덕을 타고 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알면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식물, 동물과 공통적인 부분을 빼면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이 남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고유의 기능을 이성적인 원리를 따르거나 이성적인 원리를 내포하는 혼의 활동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인간은 자신이 가진 미덕으로 행위를 잘 수행한다. 인간의 좋음은 미덕에 걸맞은 혼의 활동이며, 이러한 혼의 활동은 평생토록 지속되어야 한다.

 

행복이 미덕에 걸맞은 혼의 활동이기 때문에 미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행복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미덕은 아레테(arete)로 탁월함을 뜻한다. 이정우 선생은 미덕의 일차적 의미가 영혼의 힘이라고 했는데, 행복을 영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영혼의 활동 즉 이성의 활동이라고 할 때 아레테의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미덕은 “그것을 지닌 것이 좋은 상태에 있게 해주고 제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미덕에는 지적인 미덕과 도덕적인 미덕이 있다. 지적인 미덕은 교육을 통해서 또는 성장함에 따라 생기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덕적인 미덕이다. 도덕적인 미덕은 습관의 산물이다. 용기, 절제, 정의, 우애, 자제력, 자부심, 온유함, 진실성, 재치 등의 도덕적 미덕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본성적으로 받아들여 습관화해야 한다. 미덕들은 부단한 노력과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좋은 습관을 형성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기술자, 연주자가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기술과 연주력을 연마하듯이 도덕적인 올바른 행동도 자꾸 하다보면 습관이 될 수 있다. (실천을 통해 습관화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동양의 쇄소응대와 굉장히 비슷한 것 같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아침에 또는 단기간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미덕의 원리, 중용

행복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활동이며 미덕에 걸맞은 고상하고 훌륭한 활동이다. 그런데 이 미덕들은 모자람과 지나침에 의해 손상이 된다. 음식을 먹을 때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적게 먹으면 탈이 나듯이 절제와 용기 등과 같은 미덕도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손상이 된다. 한마디로 과유불급.

 

이 미덕이 모자라거나 지나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은 인간이 자신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음 상태이다. 중용은 적정량, 적당함을 뜻한다. 지나침과 모자람이라는 두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 예를 들면 두려움과 자신감에서 중용은 용기이다. 자신감에 지나치면 무모하고, 두려움이 지나치고 자신감이 모자라면 겁쟁이가 된다. 즉 무모함과 겁쟁이 사이의 중용은 용기가 된다. 재밌는 것은 돈에 있어서이다. 돈 거래에서 중용은 후함이고, 지나침은 방탕, 모자람은 인색이다. 그런데 돈에 관련된 미덕이 두 가지이다. 후함이 재물에 관련된 모든 행위라면 통 큼은 지출을 포함하는 행위들에만 적용된다. 비교적 규모가 큰 지출이다. 이런 미덕의 모자람은 좀스러움이고, 지나침은 속물근성・몰취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결코 재밌는 책은 아닌데 읽다보면 예상치 못한 웃음 포인트가 있다. 특히 여러 미덕들의 중용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다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세미나를 하면 굉장히 재밌을 것 같다.)

 

미덕은 중간을 목표로 삼지만 중간이라고 해서 양쪽의 정 가운데가 아니다. 지나침과 모자람을 피하며 중간을 찾아야 한다. 중용을 알고 지키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 어려우면 두 악덕 중 덜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때로는 지나침 쪽으로 때로는 모자람 쪽으로 치우쳐봐야 중용을 지키고 좋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일단 뭐가됐든 미덕을 실천해라, 좌충우돌 고민하고 행동하면서 균형을 찾아라, 습관화 해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 어려운 중용을 도와주는 미덕이 실천적 지혜이다. “건장한 사람도 시력을 잃으면 볼 수가 없어 돌아다니다가 크게 넘어지는데, 미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행위자가 지성을 갖게 되면 그의 행위는 아주 달라질 것이고, 진정한 미덕이 될 것이다” 지성이 바로 실천적인 지혜이며,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이다.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아닌 중간을 선택할 때, 이 중간은 올바른 이성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기능은 실천적인 지혜와 도덕적인 미덕이 결합될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미덕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실천적 지혜는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을 올바르게 해주기 때문이다.”

 

행복은 공동체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폴리스라는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를 중심에 둔다. 그가 말하는 개인도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일원으로서의 개인이다. 행복이 궁극적 목적이자 자족적이라고 할 때, 자족은 혼자 만족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자족은 “그 자체로 삶을 바람직하게 만들며 아무것도 모자람이 없는 상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족은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에게 해당한다. 공동체 속의 개인이 미덕을 습관화하는 자기배려, 자기수양을 통해 공동체를 좋음의 상태로 만들고, 다시 개인의 좋음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어떤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문탁샘 글을 보니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꼴찌라고 한다. 만약 소확행 같은 행복이라면 행복지수가 이렇게 낮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개인중심 사회 속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따라서 행복은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많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행복지수가 꼴찌라는 것은 공동체 속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 중 하나가 우애이다. 그가 말하는 우애는 “인격체들 간의 상호적 태도”이다.(『서양철학사』 p.169) 우애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우정이라는 좁은 의미부터 부모 자식 관계, 부부 사이의 관계도 우애로 특징짓고 있다. 사실 우애뿐만이 아니라 정의 등 다른 미덕들도 마찬가지이다. 미덕은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기반이 된다. 그러고 보니 동은이의 “행복해!”라는 외침은 우애의 미덕에 걸맞은 영혼의 활동이었다.

 

댓글 2
  • 2023-06-03 06:51

    내년에는 그리스 고전 읽기 세미나를 만들고 싶다는 토용샘, 그 바램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고대중국과 고대그리스를 교차시키는 읽기와 쓰기도 기대해봅니다~~

  • 2023-06-03 11:55

    저도 토용샘의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를 쿄차시키는 글을 기대합니다~^^ 토용샘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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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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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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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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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조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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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자작나무 2023.11.13 |
조회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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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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