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정군
2023-05-30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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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

- 정군

노동이 사라진다, 그리고 소비자도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가장 가까운 예는 코로나 펜데믹 이후 갑작스러운 고금리, 통화량 긴축을 견디지 못한 은행들의 연쇄 파산일 것이다. 그 뿐인가? 이른바 ‘영끌족’들은 매수한 자산 가격 하락으로 영혼을 지불 중이다. 생물학적 전염병의 유행이 일시적으로 멈춤과 동시에 사회적 전염병으로서 빈곤은 쉼 없이 감염자 수를 늘려나가는 중이다. 이렇게 세계가 얼어붙을수록 이른바 선진국의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떨어진다. 이 와중에 지구를 덮친 때 이른 더위와 태풍은 이 세계의 끝이 결코 멀지 않았음을 예감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갑자기 나빠진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마치 사람들의 ‘돈 걱정’을 연료 삼아 작동하는 기관인 듯하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돈 때문에 힘들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이 체제의 ‘위기’는 워낙 만성적이어서 오늘날 닥쳐온 것과 같은, 세상이 끝장나버릴 것 같은 위기가 와도 걱정은 되지만 생생하게 위기감을 느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체감이 그런 것과 실제 상황은 조금 다르다. 이 위기는 이전에 자본주의가 겪었던 몇몇 위기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를테면, 선진국 제조업의 이윤율 저하로 케인즈주의가 박살났을 때, 자본은 선진국의 산업을 기술, 금융, 서비스 중심으로 재편하고 임금이 싼 개발도상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공간적 대응으로 위기를 돌파했다1). 기술, 금융, 서비스와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나의 부모님을 생각해 보면 90년대, 2000년대 내내 우리 집이 왜 그렇게나 힘들었던 것인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요컨대 해당 시기 선진국 경제의 막차를 탄 한국은 비싼 노동과 값싼 노동의 분화, 자본 소득과 임금 소득의 양극화가 막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스타니는 이제 그와 같은 공간적 대응으로는 자본주의의 파열을 회복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고 분석한다. 먼저 질적으로 다른 이 위기는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기후 변화와 지구온난화의 결과다. 둘째, 자원 부족이다. 특히 에너지와 광물, 신선한 물 부족이 큰 문제다. 셋째, 사회의 고령화다. 수명이 느는 데 출생률은 떨어진다. 넷째, 세계적으로 넘쳐나고 갈수록 늘어나는 빈곤층이다. 이들은 어느 때보다 많은 ‘잉여 계층unnecessariat’을 형성한다. 다섯째, 새로운 기계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위기일지 모른다. 새로운 기계의 시대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기술적 실업의 시대를 예고한다.”2)

 

어느 것 하나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제가 없다는 게 이 위기들의 공통점이다. 물론 이 위기들을 크게 두 범주로 나눠 볼 수는 있다. 앞의 세 가지, 기후, 자원, 생명의 위기는 말하자면 ‘조건의 위기’다. 그에 비해 뒤의 두 가지, 잉여 계층의 증가와 ‘기계 시대의 도래’는 서로 맞물려 있는데, 요컨대 이것은 ‘노동의 위기’라고 부를 수 있다. 바스타니는 그 중에서도 특히 다섯 번째 문제를 핵심이라고 본다. 이는 물론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다섯 번째 ‘기계 시대의 도래’가 핵심적인 문제인 것은 맞다. 왜냐하면, ‘대규모 기술적 실업’이 의미하는 바는 ‘자본 증식의 한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경우 종업원이 자신의 노동으로 만든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이는 자본주의가 생산성 향상을 기반으로 한 계급 간 타협과 부자를 위한 이윤, 다른 모든 사람의 생활수준을 점진적으로 향상하기 위한 토대임을 입증했다.”3)

 

‘기계 시대의 도래’는 바로 이 모델을 결정적으로 파괴한다. 어떻게? ‘기술적 대량 실업’으로 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아니, 자본의 대리인들은 이와 같은 기술 발달이 자신들을 파괴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기술적 혁신이 자본의 운동법칙과 구조적으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자본주의는 증기기관과 함께 시작했고, 석유에너지와 함께 세계를 재패했으며, 반도체와 함께 절정에 이른 것이다. 이 모든 기술 발달을 추동한 것은 단 한 가지 원리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 명제, 바로 ‘경쟁력의 확보’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똑같다. 테슬라와 같은 자동차 회사부터 아디다스 같은 소비재 기업까지 모든 제조업의 핵심과제는 ‘노동자 없는 공장’의 가동에 있다. 임금을 주지 않으면 비용을 극적으로 낮출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시장에서 가격을 유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렇게 경쟁자를 따돌릴 수 있다. 경쟁자를 따돌리는 자에게 시장은 최대 이윤을 약속한다. ‘노동자 없는 공장’의 화룡점정은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스스로 생산량을 조절하고, 공정의 속도를 제어하며, 전체 생산 공정을 일관되게 통제하는 ‘인공지능 공장’은 자본가의 꿈이다. 자, 여기에 문제가 있다.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거대한 소비자 대중을 이루는 임금 노동자가 사라지면 누가 모델3를, 아이폰을, 슈퍼스타4)를 구입할 것인가?


1)“‘공간적 해결’은 세계적 분배와 생산의 재배치가 특징인 현대의 세계화를 뒷받침한다”,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아론 바스타니, 김민수·윤종은 옮김, 57-58쪽, 황소걸음.

2) 같은 책, 39-40쪽.

3) 같은 책, 104쪽.

4) 아디다스가 1969년 출시한 농구화. 80년대 힙합 뮤지션들이 신으면서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어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디다스가 독일에 설립한 전자동 운동화 생산공장 ‘스피드 팩토리’의 자동화 공정으로는 ‘슈퍼스타’ 같은 천연가죽과 고무 아웃솔로 이루어진 고전적인 운동화를 생산할 수 없었다고 한다. 2019년 스피드 팩토리의 폐쇄는 아디다스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러한 고전적 운동화의 생산 차질과 관련이 있다.

 

청정하게, 무한하게, 화려하게
이른바 ‘가속주의자들'5)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논지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자본주의가 기술적 해결책을 찾는 것을 반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기술 발달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이 과정에서 과잉 공급되는 일련의 기초 자원들의 평등한 분배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스타니가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바도 그와 같다. 앞서 열거한 다섯 가지 위기, ① 기후 위기, ② 자원 위기, ③ 인구 위기, ④ 빈곤 위기, ⑤ 노동 위기는 각각 그에 상응하는 기술적 해결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노동의 무한 공급
고전 경제학에서 ‘노동’은 무한히 공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가 노동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에 값을 매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노동의 가격이 한없이 낮을 수는 있어도 그것인 유한한 것인 한, 따라서 개념적으로 희소한 것인 한 노동은 임금-노동이어야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조건이 변화하고 있다. 일례로 강남에서 운영 중인 한 식당에서는 사장 1인과 조리용 로봇 1대로 구성된 우동가게가 성업 중이다. 소매업뿐이 아니다. 대공장에서는 이미 이와 같은 자동화가 상당히 진척된 사례가 흔히 발견된다. 애플의 생산공장인 폭스콘의 공장도 노동자를 공장에서 제거하고 있고, 테슬라 역시 마찬가지다. 아디다스의 독일 공장에서도 로봇들이 최상급 선수용 러닝화를 제작하고 있다. 요컨대 생산과정에서 인간 노동이 차지하고 있던 불가결한 지위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한계 비용 0’를 꿈꾸는 자본의 꿈이 실현 직전에 와있다는 의미다.

 

② 에너지의 무한 공급
현재 인류가 봉착한 최대 문제는 탄소 에너지로 인해 야기된 ‘기후 위기’다. 당장은 탄소 기반 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려는 흐름도 뚜렷하게 관찰된다. 사실 ‘에너지’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태양에서부터 지구로 공급되는 태양에너지를 손실 없이 90분 동안만 저장할 수 있다면 인류는 100년 동안 에너지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현재 핵심적인 노력이 투여되고 있는 분야는 에너지 채집 저장 기술이다. 이 기술은 현재로서는 탄소기반 에너지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지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이 관계는 역전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0년 간 꾸준히 하락한 태양 전지 패널의 가격이 이를 방증한다. 요컨대 어느 시점에선가 자본은 ‘비싼’ 탄소 에너지 대신 ‘싼’ 재생 에너지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매우 낮은 에너지 가격, 결코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원이 의미하는 것은 에너지 희소성의 종말이다.

 

③ 자원의 무한 공급
일론 머스크, 제프 베조스의 공통점은 부자라는 점만이 아니다. 이 둘은 모두 우주 기업을 가지고 있다6). 이 둘이 목표로 하는 것은 우주로 나가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데 있고 이미 이전과 비교해 보면 10%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다. 이들은 왜 우주로 나가려고 할까? ‘꿈’ 때문에? 그럴리가! 지구 근처의 소행성, 근지구소행성의 수가 1만 6천개쯤 된다고 한다. 이 소행성들의 크기는 제각각이다. 어쨌든, 소행성들 전체는 아니겠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소행성들 중 몇몇에서 지구에 매장된 모든 광물의 총량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의 광물 자원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우주자원 채굴 기술을 누가 먼저 확보하느냐에 따라 자본들 간의 희비가 엇갈릴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겠는가? 머스크도 베조스도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있다.
캘리포니아 공대의 연구 결과 근지구대의 소행성을 채굴의 용이성을 위해 지구 궤도로 끌어오는 데 드는 비용이 대략 26억 달러, 한국 돈 3조4천억원 쯤 된다고 한다7). 미국 정부의 1년 국가 예산 9100조에서 3조원쯤은 줌왈트급 구축함 하나 안 만들면 되는 정도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로 대용량 화물 우주선을 보내는 기술, 저중력 상태에서 자원을 채굴하는 기술, 채굴한 자원을 다시 가지고 돌아오는 기술과 같은 제반 기술이 확보되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다투어 우주로 떠날 게 뻔하다. 그리고, 온 세계의 관련 연구 기관, 기업에서 이미 이 전쟁에 뛰어든 상태다. 이야기 속에 총이 등장하면 발사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좋든 싫든 ‘우주개발’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일단 시작되면, 더는 휴대폰 베터리 수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8).

 

④ 식량의 무한 공급
‘생명의 무한 공급’이라는 말은 조금 무리가 따르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무한’에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태양열 집열판의 꾸준한 가격 하락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2008년 세포 배양육의 가능성이 실증되었을 때, 배양육 한 조각의 가격은 무려 32만5000달러였다. 그러던 것이 2011년에는 1000달러로 하락하고, 2015년에는 80달러까지 떨어진다. 그리고 여전히 떨어지는 중이다9). 동물 세포를 배양하는 것뿐이 아니다. 식물의 단백질을 변형하는 경우까지 고려하면 앞으로 인류가 먹을 고기의 대부분은 동물 없는 고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 또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 고기의 생산비용이 동물 사육비용보다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이 농경에서도 벌어진다. 흔하디 흔한 스마트팜 이야기가 그것인데, 워낙 자주 많이 이야기 된 바 있으니 간단하게, 스마트팜의 소출량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 스마트팜 기술의 발달상황에 따라 아예 재배지를 우주로 옮겨버릴 수 있다는 점만 집고 넘어가자.

언급한 네 가지 기초 자원 이외에도 필요량 이상으로 공급될 가능성이 높은 것들은 많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자본주의의 운동에, 순방향으로 맞물려 있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는 제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기술’을 확보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이쯤에서 이에 대한 맑스의 언급을 볼 필요가 있다.

 

“자본은 기계를 사용한다. 다만 노동자가 자기 시간을 상당 부분 자본을 위해 일하게 하고, 상당 부분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시간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더 오래 일하도록 만드는 데 기계를 사용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특정한 물건 하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은 최소화된다. 그러나 그 물건을 최대한 많이 만들 때는 노동의 양이 최대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첫 번째 측면이 중요한 까닭은, 이 경우 자본이 인간의 노동을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노동이 해방됨으로써 얻는 혜택에 기여할 것이며, 노동 해방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10)

 

 

지금까지의 기술 발달은 인용문의 언급대로 오히려 노동자의 노동을 초과 투입시키는 근거가 되어왔다. 그런데 기술발달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어떻게 될까? 한 사이클 당 필요한 노동량을 꾸준히 낮춰오다가 결국엔 노동이 불필요해지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말이다. 그 순간 앞서 언급한 ‘대량의 기술적 실업’이 도래하게 된다. 그렇게 ‘노동 해방’의 조건이 무르익는다.


5) 알렉스 윌리엄스, 닉 셔니섹, 「가속주의선언」

6) 머스크의 스페이스X, 베조스의 블루오리진.

7) 같은 책, 189쪽.

8) 포스코경영연구소 2023년 발표, “전기차 41년 간 생산하면 ‘리튬’ 고갈”, 디지털 데일리 3월15일자.

9) 같은 책, 237-240쪽.

10) 칼 맑스, 『정치 경제학 비판 요강』. 같은 책에서 재인용.

 

완전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그리고 기술이라는 ‘자연’
자본주의가 자신의 내적 동학에 따라 결국에는 파멸하리라 예상했던 맑스는 그 예언의 섬뜩함 때문에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사유 전반에 흐르는 낙천성이다. 파멸하는 것은 자본주의지 인간들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오늘날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를 역사적인 것으로 상대화한다. 그리고 도래할 것은, 낮엔 낚시하고, 밤에는 시를 쓰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공동체, 공산주의다. 맑스의 사상 자체에 관한 다른 이론적 검토들이 필요하겠지만, 바스타니가 주장하는 바는 단순하다. 맑스가 말한 바 있는 극대화된 생산력이 실현되는 시점은 20세기 초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고, 앞서 열거한 기초 자원들의 초과 공급 가능성은 그러한 생산력을 수용하는 생산관계의 변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생산관계는 ‘공산주의’다. 어떤 공산주의? 완전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다. 그렇다면 생산관계에 대한 이 ‘변혁’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텍스트에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여느 텍스트들이 제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들이 제시된다. 사회 각 분야에서 전 사회적인 수평적 연대를 통해 무상으로 ‘몫’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 무한하게 공급되는 자원을 통제함으로써 시대를 뒤로 돌리려는 자본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 외에 중앙은행의 역할을 ‘정치적’으로 확대하여 생산관계 변혁에 중요한 역할을 맞도록 해야 한다는 점 등이 눈에 띈다. 어쨌든 이쯤에 이르면 그 희망차고, 대단한 분석에 비해 어쩐지 허무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치자. 차라리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가속주의선언」의 몇몇 항목의 언급이 훨씬 더 유효성 있게 다가온다(「가속주의선언」 참고 링크). 어쨌든 완전히 자동화된 세계만이 공산주의를 실현한다. 그 공산주의는 화려하다.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비견되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인류의 삶을 훨씬 더 크게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이 격변의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는 절제보다 낭비를 훨씬 더 좋아한다. 이미 보통의 경우보다 전기를 훨씬 더 많이 쓰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걸 그다지 아끼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다. 나는 취미도 아주 많다. 자전거를 타고, 책과 만년필을 모으고, 게임기로 게임을 하고, 음향기기를 이렇게 저렇게 만진다. 컴퓨터로 코딩이나 해킹을 하지는 않지만, 컴퓨터와 그 주변 기기들이 현대의 산업적 미美를 최대치로 구현해낸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내가 아끼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게다가 여기엔 그냥 방종이나 무절제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존재 역량, 어떤 수용력을 끊임없이 확대시켜 준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탄소섬유로 만든 자전거는 도로와 나를 훨씬 긴밀하게 조응시킨다. 언리얼 엔진5로 제작한 게임은 평면적이고 정태적인 회화나 텍스트로만 구성된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미적 지각을 열어준다.

 

 

문제는 이것들은 공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내가 뭘 할 때마다 자원은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뀐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비 오는 날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자전거를 탈 때, 그때도 나는 전기를 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일상적 모습이 석유문명이 낳은 현대인의 병리적 상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게 병적인 것이라면 ‘정상적 상태’가 있어야 할 텐데 이 경우 ‘정상’이란 이른바 ‘자연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경우가 많다. 요컨대 우리는 ‘자연’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병리적 상태’라고 불리는 그 상태가 인간의 자연성인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지구를 이렇게 뜨겁게 만드는 중에도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분리’되기에는 자연이 너무 크고, 인간이 너무 작다. 우리는 자연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과제가 간단해 진다. 모든 자연물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애를 쓰는 것처럼, 인간 역시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 애를 쓴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다가는 ‘인간’은 사라져간 여러 종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것이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다시 인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적게 쓰는 자발적 빈곤을 택할 것인가? 검약과 절제로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그건 그 행위 자체로 그 존재를 더 강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물질적 희소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어서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기술’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불러올 세상,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이 지금 겪는 모든 문제를 공짜로 해결해 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 문제들을 해결할 충분한 잠재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기술’은 환경의 적도, 인간의 친구도, 동식물의 학살자도 아니다. 기술은 다만, 어떤 자연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적응할 수밖에 없다. 

댓글 3
  • 2023-05-31 08:30

    쌤의 말씀처럼 기술이 인간과 떨어진 적이 없으며 그 기술에 대한 논의가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기술은 인간의 자연성인 것도 같구요. 그러려면 자연도 어떤 자연, 기술도 어떤 기술이라고 해야겠네요.
    자연의 일부로서의 자연을 말할 때는 그 반대편에 '추출적 자연'에 대한 경계가 있을테고,
    기술이 어디로 갈지를 말할 때는 그 반대편에 '못가게 하는 기술'도 있을 것 같아요.
    자연이나 기술 등에 대해 좀 더 다양한 속성으로 구별할 때가 온 것 같네요. ㅎㅎ

  • 2023-06-02 21:01

    기후위기가 백년쯤 뒤의 일이었다면 완전히자동화된 화려한 코뮤니즘이 장미빛 미래로 상상해볼만도 한데..
    그러기엔 너무 긴급한 상황이 많은 것 같아요..

  • 2023-06-03 06:58

    마치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듯이 기술 속에서 살고 있건만,
    공기같은 기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응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얼마전 누리호 발사에 열광하는 언론과 사회분위기를 보면서도 속이 꽉막힌 듯 답답증을 느꼈는데 말이에요.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정군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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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스르륵 202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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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요요 2023.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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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조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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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자작나무 2023.11.13 |
조회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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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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