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게임의 미학

우현
2023-05-25 17:11
345

 

 

게임의 미학

 

 

0. 인트로 : 얘가 웬종일 게임만 하더니..

 미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회화나 조각을 비롯한 고전 미술에 관해서는 관심과 조예가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원래 읽기로 했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는 매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다보니 미학사와 철학사가 맞닿는 지점들은 재밌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지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반대로 미디어 세미나에서 읽은 『20세기 매체철학』 과 개인적으로 읽은 『게임 : 행위성의 미학』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는 내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예술들을 훨씬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미디어 예술이라고 해서 꼭 백남준이 떠오르는 ‘미디어 아트’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유투브 영상, 인터넷 방송, 영화, 게임 등 온갖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접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게임은 역시나 내 ‘최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전 예술에 비해 ‘미학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메타버스’니 ‘증강현실’이니 ‘대 유투브 시대’니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게임과 디지털 매체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좋지 않다 (물론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 나와 동은, 정군이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선생님들, 과연 고흐의 작품이나 고전 예술을 다룬 전시에 대한 이야기였어도 같은 반응일까? 나마저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게임을 하고 나면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은 고전 미술과 무엇이 다른가? 왜 우리는 게임과 영상들을 ‘시간 낭비’라며 평가 절하하는가? 그래서 나는 『20세기 매체 철학』과 『게임 : 행위성의 예술』 두 책을 통해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 그중에서도 게임이 가진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간략하게나마 적어보려 한다.

 

  1. 게임 : 무정형적 이미지들의 다발

 우선 디지털 매체를 통한 비디오 게임이 어떤 것인지, 고전 예술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정리해야겠다. 이에 대해서는 산업혁명과 디지털혁명을 거쳐 매체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한 노르베르트 볼츠(1953~)의 논지를 가져오는 게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볼츠는 디지털 미학과 전통 미학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다. 산업혁명 이후로 예술은 특권화된 계급과 그들이 향유하던 고급문화가 아니게 됐다. 디지털혁명을 거치면서는 기계들의 디지털화, 전문 기술들의 대중화를 통해 더욱더 다양한 형태의 예술이 탄생하게 되었고, 우리는 누구나 쉽게 무언가를 만들거나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지금까지 미학 내에서 예술을 둘러싼 담론이었던 ‘존재', ‘진리', ‘정신’, ‘아름다움’ 등의 개념들을 그대로 디지털 매체 예술에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예술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시점에 놓였다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가진 복합성에 따라 우린 시각, 청각, 촉각 등 다양한 지각 체험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볼츠는 ‘미학’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 또는 예술작품에 대한 분석 등에 머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중요한 건 작품 분석이 아니라 각각의 수용자의 체험과 지각방식이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중요한 것은 해석과 관조를 기반으로 한 예술 이해 또는 미적 체험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과 이미지의 스펙터클 그리고 몰입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과 수용자 사이에 있는 매체가 더욱더 중요해진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수용자와의 관계라는 점에서, 지금의 디지털 매체를 통한 예술과 그 수용방식은 어떠한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볼츠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이 언급한 ‘아우라의 몰락’과 같은 맥락을 짚는다. 사진의 등장으로 원본성이 없어진 이미지들, 무한정 복제가 가능해진 이미지들. 여기에 더해 디지털혁명에서 추가된 특징은 “일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속성”이다. 이는 기술과 예술의 결합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며, 반드시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만 나타나는 속성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재현된 대상이 아니라, 무정형적이며 무대상적인 이미지의 다발들이다. 디지털 스크린의 광원을 통해 전달되는 대상은 이미지적 재현과 전달이 아니라 이미지 그 자체인 것이다. 회화가 재현하던 대상은 해체되었고, 실제 대상보다 더 실제 같은 이미지들만이 남았다. 여기서 우린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체험의 차원에서, 새로운 유희 공간이라는 예술의 새로운 움직임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물질적 미학의 배경이 된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비디오 게임은 볼츠가 설명하고 있는 맥락과 매우 맞닿아 있다. 게임은 실체가 없는 무정형적 이미지의 다발들이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게임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특정 요소를 지칭하지 않는다. 나는 캡콤사의 격투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이는 ’게임의 스토리가 좋다’, ‘게임 캐릭터의 디자인이 좋다’는 차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나는 이 게임이 가진 규칙, 게임을 통한 경험, 게임이 가진 그래픽 이미지, 스토리 등등 전반 모두를 가리켜서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회화처럼 특정 작품이 재현하는 고정적인 대상이 없다. 그런 맥락에서 게임은 무정형적 이미지 다발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계를 뒤집었다고 평가받는 게임들. 여러분은 몇개나 알고 계신지?

 

2. 게임 : 디지털 환경을 통한 ‘총체적인 주의 집중’ 활동

 하지만 게임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집중과 침잠을 통해 게임에 몰입함으로써 단순한 수용자를 넘어선 그 게임의 ‘플레이어’가 된다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된 주체는 직접 자신만의 게임플레이를 만들어 가며 각자의 행위성을 경험한다.

 볼츠는 벤야민이 언급한 ‘시각적 촉각성’을 가져오는데, 벤야민은 캔버스의 그림을 보며 ‘침잠적 지각'을, 반대로 영화관을 보며 '정신오락적/분산적 지각'을 얘기했다.

 

전통 회화에 있어 자발적 수용자는 이미지를 해석하고 수용하기 위해서 이미지 앞에서 서서 관조적 침잠과 몰입을 통해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반면에 움직이는 이미지인 영화는 미처 그럴 여유 없이 이미지의 전환, 즉 장면의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 과정 속에서 수용자는 관조적 침잠과 몰입 대신에 분산적 지각과 촉각적 지각을 체험하게 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허나 볼츠는 디지털 세대에서는 다시 영상 속으로 함몰하는 집중과 침잠이 요구되고 있다고 말한다. 일종의 환각 체험처럼 영상에 몰두하는 우리들. 밤을 새워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고, 새벽까지 게임에 빠져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연예인 컨텐츠에 개입한다. 수용자는 단지 수동적으로 관찰자의 입장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작품의 플레이어가 되고, 실시간 채팅으로 방송 주체와 소통하고, 댓글을 다는 등 ‘총체적인 주의 집중’을 통해 영상과 컨텐츠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문제 지점이다. 우리가 ‘총체적인 주의 집중’을 통해 새벽까지 게임을 붙드는 모습은 얼마나 이상해 보이는가? 심하게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까지 게임을 붙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집중력으로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에 갔을 거라는 어머니의 말은 과연 사실인가(?)

 

3. 게임은 왜이렇게 재밌는가? : 게임이 가진 미학적 가능성

 ‘왜 게임을 하는가?’ 에 대한 대답은 사실 게임을 직접 해보지 않는 이상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총체적인 주의 집중을 통해 무정형적 이미지들을 보며 다양한 지각 체험을 경험하는” 게임은 확실히 전통 예술과 구분된다는 걸 알겠지만, 그것이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나,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게임 : 행위성의 예술』 을 통해 게이머들은 어떤 경험을 하는지, 그 경험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3-1. 행위성의 미학

『게임 : 행위성의 예술』의 저자 C. 티 응우옌은 게임만이 가지는 ‘행위성의 미학’을 분석한다. 일부 미학자들은 게임을 전통 예술에 포섭시키는 방식으로 게임의 가치를 강조한다. 게임을 픽션의 일종이라고 보며 해석과 관조를 통해 분석하는 것이다. 이 역시 게임이 가진 가능성임이 틀림없지만, 티 응우옌은 그런 분석은 게임이 가진 진정한 가치-행위성의 미학-를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게임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거나, 심지어는 논변을 제시함으로써 좀 더 친숙한 종류의 미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게임은 그와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즉, 게임은 우리가 가진 행위성의 경험을 디자인하여 제공한다. 그리고 행위적 매체는 우리의 실천적 참여가 가진 성격을 형성하는 데 특히 적절하다. <체스>는 논리적 가능성의 연쇄를 따라 다음 수를 내다보는 일에 집중한다. <테트리스>는 매우 빠른 공간적 추론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렇게 디자인된 행위성의 경험은 미적일 수 있다.

『게임 : 행위성의 예술』 C. 티 응우옌, 워크룸 프레스

 

 플레이어가 직접 특정 행동을 수행하며 느낄 수 있는 미적 경험-행위성의 미학-. 이런 미적인 경험이 게임에만 있는 건 아니다. 며칠 동안 에세이를 쓰며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았을 때(사실 대부분 착각이다), 친구 손에서 미끄러진 접시를 완벽하게 잡아냈을 때, 처음 보는 이와 스텝을 척척 맞춰가며 춤을 출 때, 우리는 각각의 행위적 매체들을 통해서 일종의 미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게임은 그러한 쾌를 정제하고 농축하여 우리에게 그 참신한 면모를 제시한다. 게임 디자이너는 일상생활에서는 만나기 힘든 순간을 보다 쉽고 명쾌하게 경험할 수 있게끔 디자인하고, 플레이어는 그 디자인에 푹 빠져서, 때때로는 자신만의 방식-룰을 따르지 않거나 변경하는-으로 행위성을 경험하고 미적인 요소를 발견한다. 특히 디지털 매체를 통한 비디오 게임은 더 다양한 규칙과 방식의 지각체험을 기반으로 행위성의 미학을 경험할 수 있다. 내가 즐겨하는 <에이펙스 레전드>(이하 에이펙스)라는 게임은 3명이 한 팀이 되어 총 20팀 사이에서 살아남는 ‘배틀로얄’ 장르의 FPS게임이다. 캐릭터들이 가진 특수능력과 맵 곳곳에 배치된 무기와 지형을 이용하여 마지막 생존팀이 되어야만 한다. 이때 플레이어에게는 같은 팀원들과의 소통, 캐릭터의 능력과 맵 지형에 대한 이해, 조준 능력,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에 대한 판단 능력 등이 요구된다. 1등을 차지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그만큼 챔피언을 달성했을 때의 쾌감은 무척 크다. 이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1등을 차지하는 ‘주인공’을 보는 게 아니라, 고난과 역경을 직접 체험하고 그 ‘주인공’ 자체가 되는 경험이다.

『게임 : 행위성의 예술』 C. 티 응우옌 / 워크룸프레스

 

3-2. 분투형-플레이의 미학

 이때, 게임에서 제시하는 목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게임의 ‘목표’(goals)와 게임을 하는 ‘목적’(purpose)을 섬세히 구분해야한다. 에이펙스에서의 목표는 많은 처치 수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생존하는 것이다. 반면 목적은 스트레스를 풀거나, 재미를 느끼거나, 어려운 과제를 달성하거나, 상대나 자신의 능수능란한 플레이(행위)가 지닌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일 등이 있다. 이때 목표와 목적이 동일시되는 플레이어도 있는 반면, 꼭 목표와 목적이 구분되는 플레이어도 있다. 티 응우옌은 이를 ‘분투형-플레이어’라고 하는데, 게임의 목표보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여기서는 분투가 곧 목적이 된다- 자체를 즐기는 플레이어를 뜻한다. 게임을 즐기는 모든 이들이 분투형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티 응우옌은 많은 사람들이 분투형 플레이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꼭 승리만이 목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승리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그러한 이중 목적성을 가질 때 비로소 분투형 플레이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에이펙스에서는 챔피언을 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 랜덤으로 생성되어 점점 줄어드는 서클-이 서클 밖에 있으면 지속적인 데미지를 받는다-을 이용하여 전투를 최소화하며 ‘생존’에 집중하는 방식도 있고, 서클에 상관 없이 수많은 적들과의 ‘전투’에 집중하여 19팀을 전멸시키는 방식도 있다. 다 같은 분투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대체로 승리 자체가 목적이라면 싸움을 최소화하는 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다른 팀과의 격렬한 전투를 체험함으로써 겪는 분투와 그 과정 속에서 경험하는 플레이 경험, 승리 시에 느끼는 희열이 목적이라면 어디선가 들리는 전투의 소리와 흔적을 찾아다니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냉정하게 판단할 때 이는 1등을 할 수 있는 확률을 스스로 낮추는 행동이지만, 1등을 원하지 않는다면 열심히 전투에 임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운이 좋아서 쉽게 차지하게 된 1등보다는 신나게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여 차지한 6등이 더 값지게 느낄 가능성이 크다(내가 그렇다). 누구보다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목표를 아무것도 아니게 바라볼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더 쉬운 예시를 들자면 문탁에서 점심식사 후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진행하는 설거지 내기가 있다. 이 게임은 3분의 1 확률로 결정되는 단순하고도 유치해 보이는 게임이다. 하지만 가위바위보를 이겨 설거지를 피하겠다는 목표에 몰입할수록 재밌어진다. 이에 대해 친구를 위해서 설거지를 해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거지를 피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은 그 긴장감 속에서 재미와 승리의 기쁨-혹은 패배의 쓴맛-을 맛본다. 이들이 내기를 하는 목적은 설거지를 피하는 것이고 그에 몰입하지만, 분투형 플레이어에게 이 게임의 진정한 목적은 목표에 몰입하면서 느끼는 긴장감과 쾌감의 분투인 것이다.

 

읽고쓰기 1234 현장에서 동은과 <가위바위보>를 겨루고 있는 모습. 분투의 열기가 느껴지는가?

 

 이러한 분투형 플레이는 게임에서의 일이 ‘쓸데없다’거나 ‘비현실에 빠져있다’는 식의 말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게 한다. 게임에서 차지한 ‘1등’이라는 타이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1등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 속 분투는 분명 ‘현실’의 일이고 가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실재 세계에서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행위의 미학을 느끼는 일은 무척 드물다. 게임은 보다 단순하고 명확한 목표와 구조를 제시해 주면서 더 폭 넓은 지각체험을 전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린 미적 요소들의 경험을 보다 뚜렷하게 지각한다.

 지금까지 게임이 가진 미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위에서 언급한 지점 이외에도 게임은 이미 멀티플레이어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포섭시키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미학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게임은 명확히 (새로운 의미에서)미학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이다. 그를 소비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시점일 것이다.

댓글 6
  • 2023-05-28 15:29

    뭔가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게임을 잘 못하는 저에게는 어려운 세계인 듯 합니다.

  • 2023-05-29 09:26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재미없었는데, 이 책은 재미있었다!!
    음.. 그렇지만, 아마도 이 책의 저자는 철학공부 충실히 하고 쓴 책이지 않을까요?ㅎㅎㅎ

  • 2023-05-31 09:49

    볼츠로 비물질적 미학을 가져오고, 그것이 체험형이며 몰입형이라는 특성에서 게임을 연결하고 있는거지요?
    분투형 플레이는 목표지향적인 경쟁자의 논리보다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고요.
    게임은 예술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를 세우는 것 같군요.

    게임의 가치가 저평가된 것을 회복하기 위해 예술로 넣었다면 다음에는 이런 것도 해보는게 어때요?

    오늘날 예술은 윤리성의 고양이라는 차원에서 논의되기도 하잖아요?
    영성이 사라진 시대에 충만한 행복감의 경험과 그를 통한 윤리적 통찰 등을 예술에 부여하는 경우가 꽤 있는것 같아요.
    '게임에서의 일이 ‘쓸데없다’거나 ‘비현실에 빠져있다’는 식의 말'과
    살생을 주로 하는 게임때문에 폭력성이 커진다는 인식 등에서는
    게임은 스스로 고립된 존재자, 윤리성의 부재 등의 이미지가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해보실?
    이를테면 설겆이 가위바위보를 매번 할 필요가 있다던가하는...

  • 2023-06-06 11:38

    게임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게임을 하는 동안 왜 이리 시간은 빨리 지나갈까요?
    게임이 끝나면 밀려오는 멍한 상태는 무엇일까요?
    게임을 하는 동안 발생되는 엄청난 집중력은 무엇일까요?
    게임에서 이기고 싶은 승부욕은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요?
    왜 오프라인 게임보다 온라인 게임이 더 좋을까요?
    진짜로 축구를 하는 것보다 축구게임이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게임을 만들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게임을 안 하려는 건 왜 일까요?

    게임은 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에 여전히 유효한 매체인 듯합니다.

    게임 한 판?? ^^

  • 2023-06-15 16:42

    행위성의 미학이 어디까지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인지가 궁금해집니다. 본문에서는 체스와 테트리스가 언급되었는데, 가량 큰 돈을 걸고 포커를 칠 때 느끼는 극도의 긴장감이나 온라인 게임에서 가챠를 돌릴 때의 몰입과 흥분 같은 것들도 미학적 요소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인가요?

    • 2023-06-20 13:50

      행위성의 미학과 분투형 플레이의 미학을 구분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행위성의 미학은 어떤 예술에 대해 관찰자의 영역으로 남는 게 아니라 직접 예술의 행위자가 된다는 맥락이 포인트인 것 같고요
      분투형 플레이의 미학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걸 알고, 실제로는 유효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지정된 규칙과 역할에 몰입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주체적 가능성을 포인트로 짚고 있습니다.

      따라서 큰 돈을 걸고 포커를 칠 때의 긴장감을 미학적이라고 포착하기 보다는 포커를 치는 플레이어의 성향에 따라 분투적 플레이의 미학으로써 포착할 수도 있는 거라고 봅니다. 가챠든 포커든 행위성의 미학이 깃든 게임이라고 볼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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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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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스르륵 2023.11.21 |
조회 300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요요 2023.11.20 |
조회 212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조회 210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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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23.11.13 |
조회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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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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