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훌륭한 문학 작품은 정의로 나가는 문이다’

스르륵
2023-05-24 11:39
324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질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사상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여기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조금은 낯선 정의를 하나 더 추가한다. 그러나 ‘시적 정의’라는 단어자체는 17세기 후반 영국의 문학비평가인 토머스 라이머가 쓴 말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속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사상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착한 일을 한 흥부가 복을 받고, 신데렐라와 언니들의 결말에 울고 웃음으로써 이미 시적 정의를 익숙하게 체화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시적 정의』는 너스바움이 1994년부터 미국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강의를 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밤낮없이 법전을 외우는 미래 법률가들의 모습에 더 익숙한 우리에게 ‘법’과 ‘문학’의 만남은 왠지 좀 낯설다. 더군다나 문학작품에서 옹호되는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들 사이에서 배제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법률가인 로스쿨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해야 하는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너스바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왜 합리적 영역들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1. 왜 문학적 상상력일까

오늘날 우리는 문학이란 것을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문학은 흥미롭고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어쩐지 정치, 경제, 법적인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경제적인 합리성이라는 것이 공적 영역을 넘어 사적인 일상을 좌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된 지금 오히려 문학적 사유나 상상력은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야할 위험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드그라인드 씨는 동굴처럼 움푹 들어간 두 눈을 난롯불에 고정하고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생각에 잠겨 말했다. “루이자나 토모스가 그런 유의 글을 읽은 걸까? 극도로 조심했지만 쓸데없는 이야기책이 집 안으로 들어 온 걸까? 어릴 때부터 규정대로 정확하게 실제적인 교육만 받은 아이가 이런 일에 관심을 갖다니,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중에서 -

 

                                                         

 

 

그래드그라인드 씨의 걱정은 옳다. 문학은 단순한 장식용이나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님을, 또 평소엔 관심없던 일에 뜬금없이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게 하는 위험한 것임을 그가 이미 알고 있기때문이다. ‘문학은 인간 삶의 복잡함을 도표로 나타내는 정치경제학 텍스트들의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표현하며, 어떤 면에서는 합리성이라는 과학적 기준을 전복시키는 욕망과 상상력에 기여하는(26)’ 불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문학과 대결하고 있는 과학적 합리성에 기초한 공리주의적인 경제적 모델은 생각보다 훨씬 막강한 상대다, ‘합리적 선택 모델들은 대체로 철학적 예리함을 내포하며, 아니 어쩌면 철학적 설명들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다.(58)’ 왜냐하면 우리에게 경제적 모델들은 측정하기 어려운 질적인 차이들을 편리하게 양적인 차이로 축소해주고, 복잡한 개별적인 삶의 정보를 집합화해주며, 무엇보다도 불확실한 미래 예측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기에 말이다.

 

 

이 세상은 사실만을 원하오. 여러분, 누가 뭐라 하건 자와 저울, 구구표를 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인간성의 어떤 쪼가리라도 무게를 달고 치수를 재고 그 결과를 여러분에게 정확히 알려줍니다. 그건 그저 숫자의 문제이고 간단한 산술의 문젭니다.’                                                                           - 같은 책 -

 

 

우리는 이렇게 합리적인 모델들에 근거하여 도출된 ‘사실’을 편애한다. 그러나 사실을 ‘진리’로서 받아들일 경우, 경제학적 접근법은 반드시 의심해 봐야 한다고 너스바움은 강조한다. 왜냐면 정치경제학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은 사실상 환원주의적인 완전하지 못한 인식이며, ‘이성’은 빈번히 신뢰를 배반하는 독단적 작동(72)’임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질적인 세계의 풍부함과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내면적 깊이, 사랑, 두려움, 희망, 이런 복잡함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문학적 언어들과 사유의 능력들이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폐기되어 버려선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너스바움은 어떤 소설이 이런 문학적 상상력을 재현하는지, 또 소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독자와의 생생한 소통 방식을 통해 생의 감각을 구현해내는 소설 ‘자체의 형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일어날 법한’ 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허구의 형식이지만 ‘일반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이를 오가며 ‘평범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장르로서의 소설에 주목한다.

 

즉, 소설이라는 형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장에 서는 ‘연습’을 하게 만들고, 각각의 경험들과 마주치게 함으로써 주인공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과 또 미래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상상과 성찰’ 을 하게 만든다. 하여 타인의 행복이라는 아주 복잡한 가치를 수치화 하거나, 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을 합리적으로 판단해내야 하는 여러 공적 판단의 영역에서 문학적 상상력은 그 합리성의 지평을 더욱더 넓고 선명하게 만들어 준다.

 

 

  1. 감정(感情)을 감정(鑑定)하다

한편, 문학은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 눈앞에 없는 다른 것을 보게 해주는 트레이닝으로서의 문학적 상상력이란, 실은 작품 속 인물들과 자신이 연루(연결)되어 있다는 특별한 경험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문학적 상상력의 공적 역할을 주장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는데 이는 바로 ‘감정 불신론’ 즉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는 수 백(?)가지 이유들’이다. 너스바움은 대표적인 네 가지 감정 불신론에 맞서 문학적 상상력의 핵심 주자 ‘감정’을 변호한다.

 

첫 번째는 ‘동물적 힘’으로서의 감정이다. 이는 감정이 이성적 사유와는 전혀 관련 없는 충동, 온전치 못한 맹목적인 힘이기에 비합리적 계열에 위치 시켜야 한다는 가장 ‘일반적인’ 감정 불신론이다. 그런데 이는 요즘은 이미 인정되기 어려운 주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충동’(욕구)과 ‘감정’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서양 철학 전통 내에서의 구분에 너스바움도 동의하며, 감정 변론은 두 번째 주장으로 넘어간다.

 

두 번째는 ‘공평하지 못한’ 감정, 즉 편향된 애착으로서의 감정이다. 쉽게 말해 이는 흔히 우리가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개인적인 유대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 ‘있는’ 사실도 공명정대하게 보지 못한다는 일상의 비판에서 쉽게 마주 칠 수 있다. 그러나 너스바움은 공평한 시각이 진정 무엇인지 묻는다. 빈곤률 3.4%로로 표기되는 수치적 공평함, 또는 그 포괄적인 시야가 진정 공평한 시각일까. 이러한 시각들은 사회적 관심 유발에 매우 불리하다. 모든 것에 공평한 자는 실은 그 어떤 구체적인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해결 방법을 말해주진 않지만, 감정은 관심을 유발한다.

 

세 번째, 감정은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에 봉사하는 ‘낭만적 도구’일 뿐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보다 큰 사회적 단위나 계급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감정을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여타 정치적 사상가들의 주장이다. 감정이 계급과 정치 같은 거대 문제에 무관심하고 개인의 자유에만 기여한다는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어보일 수도 있다고 너스바움은 말한다. 전통적으로 장르 속 개인들은 거대 제도들에게 자유를 침해 받는 개인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기에 말이다. 그러나 너스바움은 '개별 이야기가 빠진 계급 운동 이야기는 늘 개별적 삶의 개선을 추구하는 계급적 행동의 핵심과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다(157)' 말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서양 철학 전통 내에서 주장되어온, '사유로서의 감정'이다. 일명 스토아적인 이 감정은 배고픔이나 갈증같은 충동과는 구분되는, 판단이나 믿음이 수반되는 일종의 사유적인 지각 방식이다. 그런데 사유, 혹은 지각 방식로서의 이 감정은 우리를 오직 스스로에게서 근원하는 지혜가 아닌 외부 세계와 대상에 지나치게 끄달리게 하는 원인이다. 즉 이 감정은 우리에게서 내면의 안정적 평정심을 빼앗고, 오류적 판단을 반복케하여 우리를 불완전한 존재가 되게 하기에 제거되어져 할 것으로 호명된다.

 

그렇다면 이런 철학적 관점 안에서 연민 같은 동정심은 우리도 그런 처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오류적인’ 믿음에서 야기되는 불필요한 감정이 되어 버린다. 허나 너스바움은 이런 철학적 성찰이 연민의 동기를 남겨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인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며, 위험에도 불구하고 행해지는 사회 정의와 선행에 또 어떻게 연루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한다. 문학적 상상력과 연결되는 감정의 이입이라는 이 '복잡한 마음의 경로' 를 힘들게 왕복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합리적 공리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1. 시적 정의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 나라에서 시인은 한결 같은 인간이다

그는 다양성의 중재자이며, 열쇠다

그는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이다

그는 논쟁자가 아니다, 그는 심판이다

그는 재판관이 심판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한다

그는 남자들과 여자들 안에서 영원을 보며, 남자들과 여자들을 꿈이나 점으로 보지 않는다

                                                                             - 월트 휘트먼, 『나 자신의 노래』 중 -

 

플라톤은 좋은 나라를 위해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휘트먼은 좋은 나라를 위해서 시인이 꼭 필요하다고 노래한다. 휘트먼이 보기에 시적 정의를 갖춘 시인은 그 누구보다 정의를 심판하기에 적격인 자다. 그는 '다양성의 중재자' 이자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 . 그는 '(일반적인) 재판관이 판단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판단하는 자' 다. 그러나 햇빛과도 같은 시인 재판관의 시선은 세상의 다양한 존재들을 구석구석 살피고 감싸 안는 따스하고 친밀한 시선인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인식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지 않고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엄중한 시선이다.

 

다시 말해 시인 재판관은 어둠에 가려진 무기력한 자들의 상황을 따스하게 비추는 친밀함을 가지는 동시에, 모든 사물이나 특성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비율을 부여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적 지혜는 단순히 동일시의 감정 이입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역사성을 두루 두루 살필 줄 아는 분별 있는 관찰자적인 인식을 장착해야 하기 떄문이다.

 

적당한 비율을 부여하는 공평한 인식에 근거한 이런 시적 지혜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사법적 중립성과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시적 중립성은 규범적인 '일반성'이 아닌 '구체성' 즉 인간적 경험과 역사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는 일상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고 특정 형태의 사건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어떤 실천적 판단을 고민할 때, 초월적인 기준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 '안에서' 인간 공동체를 위한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래야 독서는 비로소 그저 자유로운 해석의 놀이, 낭만적인 공감과 공상의 놀이와는 다른 것이 되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을 것이다.                          

 

 

 

'한 권의 책이 당장 우리에게 정의를 가져다 줄 수는 없겠지만 공감과 용기와 희망을 마음 속에 남겨둔다면(261)' 정의로 나가는 문은 적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감정 반론자들이 제기한 저 이유들을 대며, 또 숙제할 시간도 없는데를 외치며 '문학적 상상력‘과 '감정 이입' 이라는 영혼의 동요를 기피 하며 살고 있던 나에게 『시적 정의』는 그 영혼의 동요가 불평등과 돌봄, 빈곤, 기후, 전쟁 등의 전 지구적 문제들과 '나'를 복잡하게 뒤섞으며, 지금과는 다른 ‘낯선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댓글 4
  • 2023-05-24 19:39

    상상과 성찰!! 감정을 통로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 2023-05-28 14:59

    요즘들어 문학책 읽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기는 합니다.

  • 2023-05-29 09:40

    시적 지혜를 기르려면 시를 읽어야 할까요?
    사실 우리는 법관도 아닌데도 재판관이 재판하듯 매사를 판단해버릴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재판관이 재판하듯 현실을 일도양단으로 재단하지 않고 '태양이 무기력한 것들 주변에 떨어지듯' 세상과 만날 수 있을까요?

  • 2023-06-06 11:49

    얼마 전에 단편 소설집을 몇몇이 같이 읽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학적 상상력이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과 연결이 된다,
    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됩니다. ^^

    스르르르르르륵님, 잘 읽었습니다!!!!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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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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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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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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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요요 2023.11.20 |
조회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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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조회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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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자작나무 2023.11.13 |
조회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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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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