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글쓰기-리뷰] 2 - <새벽세시의 몸들에게> /양해성
문탁
2022-08-30 08:03
372
*양생글쓰기 <나이듦과 자기서사> 시즌2에서는 리뷰글쓰기를 해봤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학인들의 리뷰 중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돌봄 초보의 ‘시민’ 되기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옥희살롱, 봄날의 책, 2021)
양해성
가족 또는 시설밖에 없을까?
나는 돌봄 초보이다. 우선 돌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장기간 누군가를 돌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85세의 파트너 어머니가 우리가 사는 집으로 들어 오게 되면서 쇠약해진 몸으로 일상을 겪는 것,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20년 후반, 가깝게 지내던 싱글 게이 친구가 기본적인 케어와 식사가 제공되는 노인돌봄 시설로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70대 중반을 넘어선 그는 몇 년 전부터 파킨슨병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경증의 치매 증상도 나타났다. 그 친구는 은퇴 후 낮엔 집수리와 조경, 요가와 산책, 저녁엔 친구들과 밥먹고 와인을 마시는 본인이 원하는 노년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을 포기하고 자기 생활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더 두려운 것은 시설 내에 동성애 혐오나 차별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거주자, 스태프, 혹은 의료진이 혹시라도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이라도 있다면 위축되어 조용히 죽어 지내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생활이 될 게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그는 지금도 옛 집과 활동적이었던 시간들,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이 과정을 지켜 본 내 마음은 편치 않다. 가족이 없거나 혼자 사는 성소수자들은 돌봄 시설에 들어가는 게 정해진 수순인가?
그렇다면 법적가족이나 파트너가 있는 성소수자들은 돌봄 문제에서 보다 자유로울까? 나는 2014년 미국 내에서 동성간 결혼이 합법화 된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알아 오던 파트너와 법적 가족이 되었다. 한국을 떠날 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한국에서 성소수자로 살기 쉽지 않아 홀로 이민을 오긴 했지만 내 생전에 결혼이란 제도 안으로 들어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결혼을 하니 친구들, 지인들, 직장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법적 커플로 존중해 주었다. 주위의 게이 친구들은 우리를 개별적인 친구가 아닌 하나의 가족으로 여기고 대했다. 둘이서 문제들을 해결한다고 전제하고, 둘만의 세계, 둘만의 공간을 존중해 주는 듯했다. 존중이기도 했지만 뭔가 선이 그어지는 느낌도 있었다. 앞으로 둘 중에 누가 돌봄이 필요하게 되면 둘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상황이 닥치게 될 여부와 상관없이 돌봄을 법적 가족 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환원하는 건 무척 찜찜하다.
대안으로서의 시민적 돌봄
성소수사 중 싱글이든 법적 가족의 테두리 내에 있든 돌봄에 대한 현실에 대해 만족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든 아프고, 나이 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을 존엄하게 겪고 싶어 한다. 그 존엄함의 기반에는 친구들과 공동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은 데 무엇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나 요양시설의 확충 이외의 사회적 담론 말고 돌봄을 인권이나 존재론적 문제로 접근하는 정책과 담론은 접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돌봄은 왜 존재론적 문제로 사회적인 담론으로 다뤄지지 못하는가? 가족 내 독박 돌봄이나 제도에 의한 물질적, 의료적 지원을 넘어서 돌보는 이와 돌봄 받는 이 모두의 인권과 존엄을 지켜줄 수 있는 돌봄의 관계와 형태는 무엇일까? 이런 돌봄 현실에 대한 나의 질문들을 다루고 있는 책을 만났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이다. 저자들은 돌봄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세심하게 진단하고 인간적이고 공평하며 존엄한 돌봄을 제안한다. 그들은 돌봄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우리가 질병 가운데 사는 것, 그 시간들을 견디는 것, 돌봄을 받고 제공한다는 것, 돌봄 상태에 있을 때의 존엄성, 돌봄 받을 때의 인간 관계와 연결 등에 대한 질문을 생략한 데 있다고 지적한다. 독박 돌봄이 문제가 있으니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그럴듯 해 보이는 이 담론에는 사람, 관계, 공동체, 감정, 우정, 인권, 의무, 존엄 등이 쏙 빠져 있다고 말한다.
전희경은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라는 챕터에서 구체적 제안을 한다. 우리가 돌봄 문제를 내 삶의 문제로 자각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서로를 보살피는 “시민적 돌봄”에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서로를 돌볼 수 있는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질병과 장애가 없는 젊고 교육받은 “어엿한” 사람으로 규정되는 시민의 정의를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기완결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아니라 언제나/이미 타인에 의해, 타인과 함께, 타인에 대해 비로소 개인인 존재, 타인에게 반드시 의존하고 끊임없이 연루되는 존재”로 시민을 규정한다면 시민들 간의 관계 안에 돌봄이 들어올 여지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도 시민이고 친구도 이웃도 시민이다. 돌봄의 상황에서 우리는 “가족”으로서만 그리고 “가족과 같은” 서비스로만 돌봄을 축소하여 이해함으로써 가족 내의 독박 돌봄과 제도에 의한 돌봄 이상을 사유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는 돌봄이 가족만의 세계로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적당한 타인으로서의 거리를 두고 그 적당한 거리를 조절하면서 신뢰와 우정에 기반한 고유한 돌봄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시민적 돌봄”이란 개념은 한국의 돌봄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제안된 것이지만 성소수자 공동체에서도 새겨들을만 하다.
시민적 돌봄의 사례들
법적 가족을 구성할 권리조차 가지지 못했던 역사를 감안하면 우정과 연대에 기초한 이른 바 시민적 돌봄에 유사한 선례가 성소수자 공동체에 있을 것 같아 이를 찾아 보았다. 현재 북미에선 고립되어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성소수자 노인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과 더불어 아직 미미하지만 자발적 돌봄 네트워크의 실험도 시작되고 있다. 캐나다 오타와에서 탄생한 오타와 시니어 프라이드 네트워크 (Ottawa Senior Pride Network or OSPN) 모임이 대표적이다. 성소수자 시니어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 네트워크는 흩어져 있는 성소수자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질병과 고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다. 성소수자들이 처한 현실에 맞는 의료와 사회 복지 서비스 등 공공 영역의 지원을 확보하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자원 봉사 그룹을 조직하여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졌고 정기적으로 돌봄 교육을 받았다. 우정과 신뢰가 쌓이게 되자 OSPN의 시니어 구성원들은 스스럼 없이 돌봄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고립 되어 있는 성소수자 노인들을 공동체로 연결시키는 일과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AIDS 위기 당시 사투를 벌이는 친구들을 위한 크고 작은 자발적 돌봄 네트워크들도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당시 최초의 조직적인 대규모 돌봄 네트워크였던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샨티 프로젝트 (the Shanti Project)이다. 이 프로젝트의 설립 및 운영 철학에 자발적인 시민적 돌봄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 잘 나타나 있다. 이 프로젝트 운영의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은 상호 부조 (mutual aid)와 연대 (solidarity)였다. 공동체 내에 어려움이 있을 때 공공의 영역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마땅한 권리를 요구하기 이전에 구성원들 간에 부조와 증여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봄을 자선 (charity)이 아닌 연대를 강화하는 일로 여겼다. 돌봄 제공은 시혜를 베푸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공동의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어려울 때 나서서 돕는 일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결국은 우정과 소속감을 강화하는 일이며 나에게도 커뮤니티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샨티 프로젝트의 또 다른 성공원인은 전문성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에이즈를 앓는 이들을 상담하게 된 정신과 의사와 에이즈에 걸린 남성 간호사, 그리고 말기 암환자를 돌본 경험이 풍부한 사회복지 전문가 이 세 남성 동성애자의 제안과 협업으로 시작되었다. 각자의 전문성으로 환자들에게 전인적 보살핌(holistic care)을 제공할 수 있는 모델을 구상하고 자원봉사자들을 훈련시켰다. 이는 “시민”에 의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돌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돌봄 사례들은 성공적인 돌봄 네트워크는 서로 공감하고 지켜갈 수 있는 원칙과 서로를 알아가는 충분한 시간, 전문성, 정기적인 훈련 등 많은 요소들이 결합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자발적 돌봄 운동은 전희경이 시민적 돌봄을 관계 맺기로 바라본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는 돌봄은 인간관계 그 자체이며, 가족을 넘어선 돌봄이 보편화 되기 위해선 시민으로서 연습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돌보고 돌봄 받는 시민이 될 수 있을까
OSPN과 샨티 프로젝트는 우리가 가족의 경계를 넘어 시민으로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시간을 내고 다양한 전문성이 발휘되면 시민에 의한 돌봄 공동체를 조직하여 운영하는 게 가능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잠재력과 현실의 간격은 매우 크다. 나의 경우 가까운 친구들 간에도 늙어감과 돌봄에 대한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다. 주위에서 참고할 만한 대안이나 모델은 부족하고 사유와 경험도 빈곤하다. 친구들과 친교 모임을 떠올려 보면 내가 우정과 연대에 기초한 시민적인 관계망 안에 있다고 얘기하기 어렵다. 이렇게 돌봄에 있어 초보인 나는 어디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Shanti-support-Group-1985
우선 내가 속한 네트워크 안에서 이 문제를 솔직하게 꺼내어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파트너에게 우리가 속한 친교 모임에서 우선 노후 돌봄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작은 행사를 먼저 마련해 보자고 제안했다. 성소수자 노인 문제를 잘 이해하는 활동가나 돌봄운동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아니면 우리 모임 내에1980년대 AIDS 위기 당시 친구나 지인들을 돌본 경험이 있는 시니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수도 있다. 이런 계기로 인해 생각해보지 못했던,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두렵고 막막한 늙어감과 죽음, 그리고 돌봄에 대한 이야기가 전보다는 편안하게 공동체 내에서 조금씩이라도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는 돌봄의 초보이다. 초보가 돌보고 돌봄 받는 시민이 될 수 있을까? 초보이니 부딪히며 돌보고 돌봄 받는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하나씩 배우는 수밖에 없다. 길이 멀고 힘들 것 같지만 그 배움의 여정이 기대된다.
연재코너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정군
2023.11.26 |
조회
340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스르륵
2023.11.21 |
조회
30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요요
2023.11.20 |
조회
216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봄날
2023.11.20 |
조회
214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자작나무
2023.11.13 |
조회
244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달래
2023.11.13 |
조회
244
양해성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돌봄 초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 슬슬 어찌 나를 돌보고 주변을 돌보고, 노년을 돌봐야하는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저는 몇년 전부터 문탁 친구들에게 노후를 생각하는 2년후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 2년이 지나고 또 2년이 지나도록 한 게 없네요.^^ 방향성이 분명하지 않으니 긴급한 일들에 밀려온 거겠지요. 그런데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니 뭔가 해야할 것만 같군요. 가족과 시설이 아닌 대안을 찾는 일, 미룰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양해성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돌보고 돌봄 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45미리 단렌즈 화각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되었어요. 해성샘의 글을 읽고 나 후 화각이 넓어지는것을 느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