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짠에세이2] 퇴직한 당신의 여행지
먼불빛
2022-08-22 09:40
249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 시즌2는 '여행'이 주제였습니다. 시즌2을 마치며 쓴 에세이 가운데 두 편을 북앤톡에 올립니다. 함께 읽어봤으면 합니다.
‘내 방’이 생겼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팡세』 단장 136,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년, 30쪽, 재인용)
나에게 고요히 머물 ‘내 방’이 생긴 건 약 1년 전쯤이다.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 ‘내 방’이 아니다. 나 이외 그 어떤 존재도 쉽게 나를 흔들 수 없는,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 내 의지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완전무결한 독립적 공간으로서 ‘내 방’ 말이다. 집에 대해 사랑한다는 감정을 가져보기는 처음이다. 이건 모두 독립해 나간 딸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덕분에 나는 더욱 '집순이'가 되었다.
내가 퇴직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제 뭐 할 거에요?’도 아닌 ‘어디로 여행갈 거예요?’였다. 사람들은 진정한 쉼이나, 자유로움은 집에서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자꾸 어딜 떠나라고 한다. 제주 1년살이도 좋고, 산티아고도 좋지만 나는 내 방에 머무는 것도 좋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여행의 기술』, 17쪽)고 한다. 어쩌면 내가 퇴직 이후 ‘여행’ 계획을 딱히 세우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결국 우리가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에 지쳐있는 혹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을 재창조할 자유’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면, 특히나 집순이인 나에게는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여행의 기술』, 318쪽)는 알랭드 보통의 권유가 더 솔깃하며 의미있게 다가온다.
내 방 여행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행의 심리를 우리 자신이 사는 곳에 적용할 수 있다면,......중략.......밀림만큼이나 흥미로운 곳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가 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여행의 기술』, 308~309쪽)
익숙한 곳인 내 방에서 어떤 새로움과 흥미를 발견하는 일들이 가능할까?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42일간의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수용적 태도’를 발휘함으로서 익숙한 것에 대한 새로운 관찰과 재발견을 해내었다. 그의 수용적 태도는 비싼 등산화나 바람막이 점퍼, 비행기나 휘발유 자동차가 아닌 고작 분홍색 가운과 의자 하나로도 종횡무진하며 방안의 가구와 물건들에 유쾌하면서도 낭만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내 방에는 이야기꺼리가 될만한 가구나 물건들이 없다. 2년 전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30년간 끌고 다녔던 거의 모든 세간살이들을 버리거나 새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대기업 브랜드만 홍보하다 만꼴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벽에도 그 흔한 고흐의 해바라기 한 점 걸려있지 않다. 사실 ‘내 방 여행’이란 제목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태도를 바꾸어 잠재된 흥미꺼리가 있는지 한번 둘러본다. 싱글 침대와 작은 책상, 그리고 책상서랍을 대신하고 있는 4칸짜리 공간 박스가 전부다. 이사오기 전에는 내가 결혼할 때 아버지가 장만해준 10자짜리 덩치 큰 장롱이 있었다. 이사올 때 그 장롱은 버려졌다. 라떼 이야기를 하자면..가장 중요하고 큰 혼수품은 장롱이었다. 안방에서 장롱은 곧 아버지였다. 단순하리만큼 심플해진 세간살이를 보면서 왜 나는 그 장롱을 생각하고 아버지를 생각할까? 시대와 맞지 않아 용도폐기된 장롱과 아버지는 닮아 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크게 자리잡고 있지만 언제나 버거워 홀가분히 벗어나고팠던 그런 존재. 결국 딸의 만류로 버리고 올 수밖에 없었지만 버릴 때까지 나는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애태웠는가. 이제 안방(내방)에서 그 정도의 존재감으로 나와 함께하는 가구는 없다. 벽에는 엄마가 활짝 웃는 사진이 책상 위쪽에 침핀으로 꽂혀 있고 그 밑에 외할머니가 연등아래 서있는 빛바랜 사진이 있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나는 막 아이를 낳은지 얼마 안된 때라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그렇지만 돌아가시는 그 날 낮에 내 꿈에 나타나셨다. 누워있는 내 옆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다리를 몇 번 쓰다듬으면서 나와 이별을 고했다. 이 사진은 세상에서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분명 있는데, 없다. 그리울 때 보는 사진이 아니라 사진을 보면 그리워진다.
내방에서는 서쪽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 있다. 창을 열고 내려다 본 밖은 주변이 온통 아파트 신축 공사장이다. 1년새 층고가 꽤 높이 올라왔다. 낮에는 창을 열어놓으면 공사장의 소음소리가 꽤 번잡하게 들리지만, 공사가 멈춰진 밤이면 텅빈 마을처럼 을씨년스럽다. 그래도 날이 맑은 저녁이면 점점 높이 올라가는 대형 타워 크레인들 사이로 붉은 해가 주변을 주홍색으로 물들이며 사라진다. 우리집의 가장 큰 자랑꺼리는 늘 아침 저녁으로 일몰과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특별한 정경을 보기 위해 굳이 애써 먼 여행지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 이 집이 좋았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였는데, 살면서 이 일몰을 볼 기회가 그리 자주 있지는 않았다. 희소성이 사라지면 그것이 주는 기대감이나 흥미도 같이 사라지나 보다.
동남향의 방3은 딸이 쓰던 방이다. 내 방에서 방3으로 가기 위해서는 거실과 부엌을 지나 좁은 복도를 따라 일곱 걸음 쯤 걸으면 오른쪽 편에 있다. 이 일곱 걸음은 딸과 나의 평화 유지를 위한 적절한 거리이다. 가끔 휴일 점심을 뭘 먹을까를 이야기 할 때도 우리는 이 거리를 유지하며 카톡을 하곤 했다. 화장대 옆에 침대가 나란히 있고 침대의 왼편으로 창이 넓게 있다. 침대만 보면 빙그레 웃게 된다. 우리 딸이 자고 일어날 때마다 수면의 질이 달라졌다고 거의 6개월 동안이나 나를 붙들고 매일 간증을 했었기 때문이다. 지난 1월1일에는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곤한 잠을 자던 딸을 깨워 창문을 열고 함께 오들오들 떨면서도 떠오르는 일출을 보았다. 물론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딸이 했던 말만은 정확히 기억한다. “엄마, 나 쫌 더 자도 되지?”, “......”
딸과의 추억이 정지된 화면처럼 맺힌다. 이건 그리움일까? 그렇지만 거기까지.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사이가 좋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동네를 어슬렁대다
짧지만 내 방 여행을 쓰면서 그동안 내가 사는 곳에 대한 관심이 협소했으며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창 밖 풍경으로만 보아왔던 거리와, 장소들에 직접 가 보기로 했다.
비가 잠시 소강 상태인 틈을 타 우산을 챙겨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런데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멈춰서고 있었다. 이건 뭐지? 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짐수레를 들고 서있는 택배 아저씨가 "미안합니다" 하며 소리친다. 화가 났던 마음이 미안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세지고 비는 완전히 그쳐 있다. 택배 물품을 실은 탑차들이 여러대 줄지어 서 있고, 택배기사들은 물건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끌며 아파트 동을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한다. 놀이터에는 어린 아이들이 뛰어 놀고 엄마 손을 잡고 보채는 아이도 보였다. 대낮의 활기가 느껴졌다. 아파트 정원의 무성한 꽃들과 나무들 그 사이로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소리가 생기를 더해준다.
조금 더 멀리 중심가 쪽으로 나가 본다. 동화리마을은 이곳의 행정타운이자 번화가가 위치한 곳이다. 읍사무소와 도서관 그리고 체육센터와 고용복지센터가 모두 500미터 안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아직은 건물들도 거리도 낯설다. 읍사무소와 체육센터 그 사이에는 작은 호수도 하나 있다. 이 호수에는 연꽃이 가득 피어있어 장관이다. 도서관에서 책이 지루해질 때쯤 호수공원을 한번 산책해본다. 연꽃의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본다. 호수공원에는 이곳의 환경을 관리하는 어르신들이 **시니어클럽이라는 파란 조끼를 입고 삼삼오오 짝지어 군데 군데 돌아다니신다. 시니어클럽은 우리집에서 300m 정도 거리에 있다. 나는 퇴직 전 늘 농반 진반으로 “퇴직하면 이제 시니어클럽에서 노인 일자리 참여할거야” 하면 나이 어린 직장 동료들이 “어머나, 받아주신대요?” 하며 까르르 웃어댔었다. 이 참에 용기를 내어 어르신께 말을 걸어본다.
“저.. 여기서 일할려면 나이가 어느 정도 되야하나요?” 그들은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재빨리
“아, 저도 일하고 싶어서요, 거기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어요?” 그제사 내 얘기를 알아듣는 한 어르신이
“65세부터 일 할 수 있어요. 기초연금 받는 사람들만 해당 돼~”
“에그 젊은 사람들은 까페에서 일해야지, 거긴 60세도 받아줘~ 시니어클럽에서 바리스타 교육도 하고, 까페가 많아, 이동까페도 있고.. 한번 알아봐요~” 하신다.
“아, 까페에서는 60세도 일할 수 있어요?”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여긴 다 칠십, 팔십 넘은 사람들이 일해~” 택도 없다는 듯 나를 보며 얘기했지만 친절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인사하면서 자리를 뜬다. 걸어가면서 생각한다. 나는 젊은 건가, 아니면 나이든 것일까? 이제 뭘 하면서 살아야 할까? 지금 나의 최대 관심사이자 빅 이슈다.
요즘 나는 이 곳의 주민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20대 후반부터 경기도에서 네 곳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아봤지만, 고향처럼 생각하며 살았던 성남과 결별 후 나는 어디에서도 정을 붙이며 살지 못했다. 집이 있는 지역은 잠 자는 것 이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다. 이웃에게 단 한번도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었으며, 문화 생활과 소비는 좀 더 번화한 타도시로 나가야 했다. 아직 장담하긴 이르지만, 어쩌면 이곳은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정착할 곳인지도 모른다. 추상적으로만 느껴졌던 이 도시의 실체들, 건물과 거리와 식물들,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조금은 흥미롭게 보아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이제 나는 이 거리를, 이 곳의 관공서, 식당, 편의시설들을 뻔질나게 들락거려 볼테다. 시답지 않게 보였던 간판의 글자들도 유심히 봐야지. 건물의 모양과 현관 입구들에서도 그것들만의 어떤 표정을 찾아보리라. 내가 속한 더 많은 곳들의 이름과 유래에 궁금해 하며 내가 어떤 역사성 위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서서히 쏟아 봐야겠다. 그리고 이웃을 만들어 보기 위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망설이지 말고 계면쩍은 인사 한번이라도 건너 보아야겠다.
떠나지 않아도 떠난 것처럼
동네를 걸어보면서 그동안 나는 늘 이곳에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습관에 젖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든 것들 안에 함께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에는 더 힘들고 서툴렀다.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도 그것 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웠다. 보고 있는 것에서 반드시 뭔가를 발견해야만 될 것 같았고, 본 것을 잊지 않으려고 디테일한 묘사에 치중하면서 감상적으로 빠지기도 했다(그래서 싹 다 지워버렸다..). 그러나 나는 아직 퇴직 후 동네 여행이든 먼 여행이든 진득히, 여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여행을 해야 정말 의미있는 시간의 점들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어쩌면 지금 바로 여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의미있는 시간의 점들을 만들어 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것들을 품고도 흔적없이 지나가버리는 그 시간을 기록함으로서 만들어 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동네 여행에 필요한 기술을 장착하고 떠나지 않아도 떠난 것처럼 관심을 깨워봐야 겠다. 잠재된 흥밋꺼리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라도 퇴직한 당신에겐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여행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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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어디라도 퇴직한 당신에겐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여행지가 될 것이다"
가슴설레는 문장입니다. 저도 퇴직하면 내 방과 동네 여행부터 시작해야겠어요. 퇴직 후 내 방에서 맞이하는, 평일 오전 10시의 소리, 오후 4시의 햇살이 너무 궁금하거든요. 에세이 잘 읽었습니다^^
저도 먼불빛 님 글 읽으며, 내 방 책상과 창문을 다시금 보고 싶어졌어요~ 이렇게 멋진 글 써주셔 감사합니다!! 오래 쭈욱 써봅시다^^
저도 제 방에, 제 집에 있는 걸 젤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8년전부터 그게 안되어서요. 나가서도 공유지 관리자, 들어와서도 공유지 관리자. 그거 탈출하는 게, 그러니까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방"(버지니아울프)에서 방콕하는게 저의 소원입니다. ㅋㅋㅋ
그러나 저러나 먼불빛님은 <나이듦>세미나에서 스카웃 하고 싶은디....ㅎㅎㅎ
글 잘 읽었어요! 퇴직 이후 어찌 사시나 궁금했는데 집과 동네에 스며들고 계셨군요. 퇴직한지 10년째… 그때 마음이 많이 바랬는데…저도 지금의 삶을 더 애정어린 시선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먼불빛님의 다음 글이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저 역시 떠나지 않고 떠난 것 같군요!
먼불빛님의 퇴직이 만들어내고 있는 일상의 변화들을 응원합니다.^^
먼불빛님이 이웃에게 말 걸어보는 노력과 변화가 있어서 글에서도 더욱 생기와 활력이 느껴졌어요!
방과 동네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 재미도 있었고요. 장롱과 사진에 얽힌 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감상도 인상적이구요.찡하기도 했음.ㅡㅜ
어제 발표하실 때 이 글과 자분자분 읽어가시는 차분한 먼불빛님의 목소리가 찰떡으로 잘 어울렸어요.
먼불빛님의 여행기는 이것으로 출발! 앞으로의 여행과 기록도 기대하고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또 뵈어요!
일년 360일을 집에만 머물러도 매순간이 새롭고 좋은 집순이인 저로써 무척 공감가는 글이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먼불빛님 퇴직했다는 만만 듣고 한번 뵙지도 못했네요. 끊어진 것만큼 이어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 들어 좋네요. 일상이 자주 여행이기를요~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께 감사~~🙏🏼🤞